시, 시, 시, 희망 혹은 절망
가을입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에, 이 멀리, 가을이 무르익는 아름다운 토감 도예원으로 저를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이 현대시의 흐름을 이야기 해주었으면 했는데 불행한 시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재미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제 나름대로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잠시 짬이 나면 요즘 우리 시들을 잠깐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 중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도 드물다고 합니다. 채근담이라는 옛 책에 보면 모든 생명들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 날씨라고 합니다. 계절에 따라 우리의 의식주뿐만 아니라 행동방식이나 사고방식까지도 영향을 받지요. 가을은 왠지 쓸쓸한 기운들이 느껴지는 때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야 할 곳을 생각하고, 우리의 삶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철학자가 되는 것이지요.
계절의 순환에 따라 우리의 사고도 순환을 합니다. 봄이면 우리의 기운은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새싹들처럼 바깥으로 뛰쳐나갑니다. 만화방창 꽃놀이를 하고 양기의 영향으로 사랑의 감정이 풍성한 때이기도 합니다. 여름은 긴장이 풀리는 때입니다. 녹음처럼 생활이 무성하지만 실속이 없기 쉽습니다. 화려함을 쫓는 눈을 비롯한 모든 기운들은 바깥으로 뻗어나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다가 가을이 오면 바깥으로 떠돌던 기운들이 내면을 향하게 됩니다. 철학적이어 지는 것이지요. 낙엽을 보며 햄릿이 되기도 하고, 방황하는 나그네가 되기도 하지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반쯤은 죽어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부처 말씀에 살아있는 것은 아픈 것이라고 했는데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입니다. 겨울이 오면 땅에서 나온 것들은 땅으로 돌아갑니다. 골방과 같은 고요한 내면으로의 여행이 시작됩니다. 외적인 움직임은 적어지지만 내면의 움직임은 활발해집니다. 자신과의 진지한 대면이 이루어지는 시간이지요.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충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사람도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노동을 통해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저는 현실적으로 굉장히 무능한 사람인 까닭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현실부적응자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히는 현실 거부자가 맞을 것 같습니다. 요즘 EBS에서 하는 명동백작을 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김수영처럼 세상의 더러움을 등지고 닭이나 토끼를 키우지도 못했고, 애써 노력하여 늙은 부모를 봉양하지도 못했습니다. 따라서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레바퀴 회원들은 비록 뒤늦은 문학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문학에 있어서는 늦깍이란 없습니다. 박경리 선생이나 최명희 선생 같은 사람은 각각 사십과 오십을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누구보다 열심히 글을 썼습니다.
저는 오늘 영화 두 편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한편은 파블로 네루다라고하는 시인을 다룬 영화인 [일 포스티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시인의 사회]입니다. 이미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일 포스티노]는 네루다의 영향으로 우편배달부가 시인이 되고 사회현실에 눈뜨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 속에서 우편 배달부가 시인이 되려고 하는 까닭은 사랑하는 여자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그런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멋진 시를 써서 킹카가 되어 수많은 여자들이 줄줄이 따라오는 그런 환상을 말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죽은 시인의 사회에도 나옵니다. 키팅 교수가 언어가 왜 생겼느냐고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연애를 위해 시작된 우편배달부의 시쓰기는 사회적 의미로 바뀌어 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건 지나가는 이야기이고요. [일 포스티노]에서 우리가 꼭 잡아야 할 것은 시가 무엇이냐는 우편배달부의 질문에 네루다가 하는 대답입니다. 네루다는 "poet is metaphor" (시는 은유다) 이렇게 간단히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해"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장미꽃 한 송이를 내미는 것 그것이 시라는 것이지요. (결국은 장미처럼 사랑도 시들고 말겠지만) 이 이야기는 시는 간접적인 표현방식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랑노래는 간접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우리 짝짓기 하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지요. 사랑의 고백을 통해 서로를 공감하고 난 뒤에야 짝짓기를 하는 것이지요. 결국 짝짓기를 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간접 또 간접의 방식으로 하지요. 당구를 칠 때 쓰리 쿠션을 치듯이 말입니다. 시가 바로 그런 쓰리 쿠션 같은 것입니다.
다른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보시면 좋습니다. 수업 시간에 키팅 교수가 아이들을 책상 위에 올라서게 합니다. 그리고는 이야기하지요. 위치에 따라서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 말이지요. 이것은 관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다보아야 합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존의 관점으로, 타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타인의 언어와 타인의 사고를 통해 존재합니다. 이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소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순수하다는 말을 들을지 몰라도 먹이를 던졌을 때 덥석 무는 물고기나 개처럼 다루기가 쉽습니다. 자신의 관점과 소신을 가진 사람들을 세상은 싫어하지요 그들은 어떤 힘 앞에, 권력 앞에, 금전 앞에 굴복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언제나 그들은 박해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시인들 중 근래의 김지하나 김남주, 도종환, 신동엽, 김수영 같은 이들이 그랬고, 분단 시대와 일제시대의 이육사나 윤동주와 같은 이들이 그랬지요 진실로 새로운 관점을 가진다는 것은 시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필생의 숙제가 아닐런지요
또 한 가지는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키팅 교수는 아이들에게 운동장을 걸어보라고 합니다. 규범적으로 딱딱하게 걷는 아이들에게 마음대로 걸어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해 하던 아이들이 서서히 제 멋대로 걷기를 합니다. 삐뚤 뻬뚤, 여기에서 우리는 일탈의 의미를 깨우쳐야 합니다. 진정한 창조적 행위는 자유로움에서 나옵니다. 교수는 일탈적 사고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지요. 일탈적 사고는 기존의 통념을 거부하는 사고입니다. 그래서 조금 위험하기도 하고 조금 어설프기도 합니다. 그것은 혁명적인 사고이며 낭만적인 사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에 있어서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실험적이며 도전적인 정신이 이 일탈적 사고에서 나오는 까닭입니다. 시와 사랑은 유치합니다. 유치하기 때문에 혁명적이고 낭만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 두 편이면 시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다 했다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시를 쓰려고 하는 지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는 왜 쓰려고 하는가
이 질문은 사실 너무나 어려운 질문입니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 하는 시처럼 그냥 웃는 것이 가장 좋은 답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물물이 차면 넘치듯이 우리의 감정들도 그러한 것인데 그래서 시는 감정의 자연스런 발로라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흥이 나거나 놀라거나 감탄하거나 슬프거나 할 때 아! 하고 감탄사를 흘리다가 그것으로 부족하면 몸을 움직여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우리는 시의 시작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왜 쓰려고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또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왜 쓰려고 하는가에 관한 질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굳이 이야기를 해보자면 우리가 무언가를 쓰려고 하는 것은 진지하고 치열한 삶에 관한 모색이 아닐런지요. 시인은 인생의 탐구자입니다. 삶의 광부인 것이지요. 캄캄한 갱저로 내려가 그가 건져 올리는 것이 빛나는 시가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시는 철학적이지요. 과학이 있어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발전시켰다면 시나 철학이 있어 인간의 정신이 고양되는 것은 아닐런지요.
글을 쓴다는 행위는 스스로를 고통 속에 몰아넣는 일이기도 합니다. 말라르메의 백지의 공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쓴다는 일은 그리 행복한 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시를 쓰는 일이 고통스럽기 이전에 우리들의 삶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지요. 녹이 쇠에서 나오듯이 시는 삶에서 나오는 것인 까닭입니다. 시는 고통스런 삶의 녹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삶을 바라다보면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무수한 누추와 치욕과 욕망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지만 시인은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존재입니다. 시의 고통의 출발점은 그곳이지요. 시가 고통스런 또 하나의 이유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애쓰는 데에 있습니다. 시의 질료는 언어인데요, 언어는 결핍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라캉 같은 사람은 말합니다.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이 세상에 없는 그림을 그리려는 존재인데, 다시 말하자면 관념을 구체화시키는 존재인데 그것은 이미 한계를 가진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지요.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들뢰즈라는 철학자가 그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투신 자살을 했습니다. 그의 화두는 인간의 욕망이었는데요. 자신과 타인들의 욕망을 오랫동안 바라다보았던 노철학자가 죽음을 찾아간 것은 밑빠진 독과 같은 끝없는 인간의 욕망에서 오는 절망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세상의 많은 시인들이 시를 위해 순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시는 종교가 될 필요는 없지요. 저도 한 때 시가 구원의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시는 생의 탐구이지 생의 구원이 되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시인의 시를 보면 그가 왜 시를 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언어미를 추구하는가 하면 생명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거나 극도의 정신주의를 표방하는 시인들이 있기도 하고 현실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는 시인들이 있고, 함께 사는 세상의 구체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리얼리즘 계열의 시와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시인들도 있습니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 시는 달라지지만 모든 시들은 그것이 풍자나 야유나 독설이나 해학이나를 막론하고 세상에 대한, 삶에 대한 애정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모든 시의 출발점입니다. 시인은 사랑하기 때문에 아프고, 사랑하기 때문에 슬프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과 생명을 사랑하는 존재이며 그 사랑이 클수록 그의 시세계도 넓고 깊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사실은 '부처가 중생 속에 있고 중생이 부처 속에 있다'는 말처럼 시는 아름다움을 지향하지만 시를 쓰게 만드는 요소들은 그 반대인 경우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외로움이 사랑노래를 낳고, 치욕이 고귀함을 지향케 하며, 번뇌가 해탈을 낳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나누는 선과 악, 미와 추, 정과 동, 강과 약, 번뇌와 해탈, 기쁨과 슬픔 등 이 모든 것들이 뿌리가 같은 나무에서 자라나는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서양의 이분법적 논리에 대응하여 원융적 세계관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관념적인 이야기를 하다보면 시가 무슨 철학 같아집니다. 그러나 시는 철학일 필요도 없지요. 아니 철학이어서는 안되지요. 시는 그저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국정원의 모토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음을 다루는 음악가들은 음의 반복을 통해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소리는 가장 원초적인 컴뮤니케이션의 수단인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이 음악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음은 말과 결합할 때 보다 구체성을 띕니다. 그림은 색을 질료로 합니다. 색은 음보다는 더 구체적이고 자극적이며 강렬하지요. 그래서 화가들은 기질적으로 강렬한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음악가의 삶보다 화가의 삶은 강렬하고 파괴적입니다. 고흐나 고갱, 이중섭 등을 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지요. 언어를 질료로 하는 시인들은 조금 더 사회적입니다. 음과 색보다는 언어가 더 사회적이라는 말도 되겠지요. 시인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해 타협하지 못하고 순응하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부정과 회의와 모색과 사고의 반란을 통해 언어의 영역을 확장하고 상상력의 폭을 넓혀 가는 존재가 시인은 아닐까요. 음악이 동일한 음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면 시는 동일한 이미지의 반복으로 이루어집니다. 음악을 들어보세요 바이올린이 음을 연주하면 똑같은 음을 피아노가, 섹스폰이, 트럼펫이 연주합니다. 시는 하나의 주제를 향해 여러 개의 소재들이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하나의 의미와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2.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음을 다루는 음악가들은 음의 반복을 통해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소리는 가장 원초적인 컴뮤니케이션의 수단인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이 음악을 만들어 낸다고 다는 더 구체적이고 자극적이며 강렬하지요. 그래서 화가들은 기질적으로 강렬한 성격을 드합니다. 음은 말과 결합할 때 보다 구체성을 띕니다. 그림은 색을 질료로 합니다. 색은 음보러내는 것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음악가의 삶보다 화가의 삶은 강렬하고 파괴적입니다. 고흐나 고갱, 이중섭 등을 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지요. 언어를 질료로 하는 시인들은 조금 더 사회적입니다. 음과 색보다는 언어가 더 사회적이라는 말도 되겠지요. 시인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해 타협하지 못하고 순응하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부정과 회의와 모색과 사고의 반란을 통해 언어의 영역을 확장하고 상상력의 폭을 넓혀 가는 존재가 시인은 아닐까요. 음악이 동일한 음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면 시는 동일한 이미지의 반복으로 이루어집니다. 음악을 들어보세요 바이올린이 음을 연주하면 똑같은 음을 피아노가, 섹스폰이, 트럼펫이 연주합니다. 시는 하나의 주제를 향해 여러 개의 소재들이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하나의 의미와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러한 언어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에 대해 쓸 수 있을까요? 좀 전에 이야기했듯이 시는 삶에서 나오는 녹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시적 대상으로 삼는 것은 삶의 전반이지요 희노애락애악욕의 형이하학적 감정이나 인의예지신선덕의 형이상학적 관념들이 모두가 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의 것은 개인 서정이라면 뒤의 것은 집단 서정이지요 개인 서정에 치우치면 감정의 배설이나 신파가 되기 쉽고 집단 서정에 치우치면 카프 계열의 시처럼 구호가 되기 쉽습니다. 개인 감정의 사치를 절제할 줄 아는 것을 염결성이라고 합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개인 서정이 우세할 때도, 집단 서정이 우세할 때도 있는데 이상적인 것은 개인 서정과 집단서정의 조화로운 결합입니다. 그 둘을 아우르는 때에 진정 좋은 시가 탄생합니다.
시는 우리들의 삶을 다룹니다. 삶에서도 명징성을 가진 구체적인 것들을 다루지요. 어차피 우리의 시상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관념적이고, 시는 그 관념적인 시상을 구체적인 언어로 형상화하는 것입니다. 시에 있어 구체화라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형상화의 한 방법이며 공감대의 기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쓰여진다는 것은 읽힌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타인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는 글은 의미가 적어질 수밖에 없지요. 좋은 시는 닫힌 사람들의 가슴빗장을 열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지요. 서로가 공명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먼저 울려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성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시는 쉽게 쓸 필요가 있습니다. 쉬운 말로 고민하지 않고 쓰라는 것이 아니라 시상을 속에서 곰삭인 뒤에 쉽고 구체적으로 풀어내라는 것입니다. 좋은 시들은 어렵지 않습니다. 어렵다는 것은 너무 개인적이거나 형상화에 실패한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형상화를 하는데 있어서는 자신의 감각 중에 예민하고 깨어있는 감각을 이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색, 성, 향, 미, 촉, 이 다섯 가지 감각 중에 누구에게나 민감하게 작용하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 감각을 중심으로 다른 감각들을 활용하세요.
3. 요즘의 시적 경향
근래에 나온 시집(좀 오래 된 것들도 있음)을 중심으로 잠시 현대시를 살펴보겠습니다. 최근에 나온 시들은 우리 현대시 100년의 집약입니다. 10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들어 있지요. 시대와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여 시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에서 존재합니다. 구체적인 삶에 접근하려는 경향이 리얼리즘이고, 실험적이며 지적 경향의 시들이 모더니즘에 가까울 것입니다. 우리의 시단은 아직도 창비의 리얼리즘과 문지의 모더니즘이라는 두 세력이 그 중심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편의상 현대 과학이 이룩한 물질문명의 폐해와 비인간화를 고발하는 시들과 버려지고 소외되고 작은 것들의 생명력에 천착하는 시들, 촌철살인의 기지를 가진 정신주의 시들과 실험적이고 초현실적인 경향의 시들 그리고 낭만적이고 탐미주의적 경향의 시들 몇 편을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들을 하루 종일 뽑아댄다. --공장지대 / 최승호
모든 시인들은 환경론자라는 말이 있지만 위 시는 환경시의 한 전형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는 현대문명의 섬뜩함을 무뇌아를 낳은 산모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그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 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이 시는 이번에 2004년 미당 문학상을 받은 시인의 시입니다. 풀벌레와 나 사이의 소통의 단절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는데요 그 까닭은 바로 텔레비전이라는 문명의 이기입니다. 문명을 얻고 자연을 잃은 자본주의적 인간의 실상을 시인은 노래하며 간접적으로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있지요. 자본주의가 몰고 오는 불행은 단지 이것뿐이 아닙니다.
[봉천본동 개나리 누런 바람/그 해는 유난히 배가 고팠네/그 애도 쌀 한 봉지에 하초를 벌리던 그 애도/그 애 방에 자주 오던 아저씨들도/이제 막 간지럼을 피며 돋아들던 그 애 젖망울도/비릿한 초경, 붉은 달처럼/저물어가 카바이트 불 낮게 흔들리는/포장집 마다 흉흉한 소문이 돌고/여자들이 떼로 몰려와 그애 머리채를/휘어감던 봄밤도/배가 고팠네 떠날 때 그애를 거두어갔다던/하수도 치는 늙다리 총각 절룩이는 그의/황사같은 반쪽 다리도/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그 애의 하초도/눈에 가득 봄밤을 담고/저물어 저물어가던 봉천본동 개나리/누런 입술 위를 슬몃거리던/바람도 아흐 집집마다 슬레이트 지붕 위로/덮쳐오던 저무는 봄밤/시퍼런 내침의 봄밤] --저무는 봄밤/허 수 경
이 시는 가난이라는 현실이 어떻게 어린 여자아이의 성을 수탈하는가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차마 읽기가 겁나는 그런 시이지요 그런 반면에 생의 따뜻함과 생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는 시들도 있습니다.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밀어 보이고 있다/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 부르튼 맨발/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늘 맨발이었을 것이다/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아-, 하고 집이 울 때/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문태준/맨발
아비의 삶을 이렇게 정감 어린 시선으로 노래한 시도 드물 겁니다. 더구나 감정의 절제를 위해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일품이지요. 개인과 집단이, 성과 속이 하나가 되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 이 시입니다.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새도 죽을 때는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 //새들이 지저귐을 따라 /아무리 마음을 뻗어 보아도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새 한 마리//넓은 후박나무 잎으로/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주었다--그곳이 멀지 않다 / 나희덕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도 시의 한 몫일 겁니다. 성경에 많은 생명들을 만들어주고 난 하느님이 화육하고 번성케 하라 하고 말했지요 그걸 사람들은 지배하라는 말로 해석을 했는데 그 폐해가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환경의 재앙으로 말이지요
생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깊이를 가지고 있는 시들과 정신주의적 경향의 시들을 살펴볼까요
먼저 길상호의 시는 삶의 고단함을 구두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년 넘게 신어온 구두가/입을 벌렸다 소가죽으로 만든 /구두 한 마리 음메- 첫울음을 울었다 /나를 태우고 묵묵히 걷던 일생이 /무릎을 꺾고 나자 막혀버리는 길, /풀 한 줌 뜯을 수 없게 씌어놓은 /부리망을 풀어주니 구두가 /길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돌멩이처럼 굳어버린 기억이 /그 입에서 되새김질되고 /소화되지 않은 슬픔은 가끔 /바닥에 토해놓으면서 구두 한 마리 /이승의 삶 지우고 있었다 /바닥에서 달아나는 시간을 따라 /다시 걸어야 할 시린 발목, /내가 잡고 부리던 올가미를 놓자 /소 한 마리 커다란 눈을 감으며 /구두 속에서 살며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구두 한 마리 / 길상호
최창균은 숲에 들어 죽어가는 나무를 보며 숲의 묵언을 듣습니다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를 따라 죽은 나무의 장례가 이루어지는 풍경을 시인은 엄숙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아니면 보아내기 힘든 숲의 풍경이 아닐까요.
[죽은 나무에 깃들인 딱따구리 한마리/숲을 울리는 저 조종소리/푸른 귀를 열어 그늘 깊게 듣고 있는 /고개숙인 나무들과 생각을 밟고 돌아 //다음은 너/너 너 너 넛,//다시 한번 숲을 울리는 호명소리//한 나무가 죽음의 향기로운 뼈를 내려놓는다//따르렷다 따르렷다 /딱따구리 한마리가 숲를 뚫는다/마침내 그 길을 따라 /만장을 휘날리는 /나무들의 행렬들
--숲속의 장례식 / 최창균
박상순의 시는 이상의 시에서처럼 초현실적 경향을 띄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들은 관념적 경향이 강할 뿐만 아니라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연관성이 없는 것들에 연관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첫번째는 나/2는 자동차/3은 늑대, 4는 잠수함//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첫번째의 내가/열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2는 자동차, 3은 늑대//몸통이 불어날 때까지/8은 비행기, 9는 코뿔소,/마지막은 전화기//숫자놀이 장난감/아홉가지 배운 날/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첫번째는 나/열번째는 전화기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박상순
우리 시단에 이성복 류를 만들어 내기도 한 이성복의 시 역시도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시들입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 블럭에서/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그렇게 속삭이다가 / 이성복
첫댓글 정리 하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회장님 어깨라도 주물러 드려야 할것같아요... 토닥~ 토닥 ~ ㅎㅎ
잘보고 살짝 훔쳐갑니다.......ㅋㅋㅋ
메일 정리하다가 첨부파일을 보니 누락된 부분이 있어 다시 보충했습니다. 주용일 선생님과 여러님들께 너무 죄송해요. 이제라도 바로 잡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일목요연하니 보기가 참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