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해진 마음
김 혜 정
지금!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어서 나가보자. 온몸으로 봄 마중을 나가야겠다. 하루를 부지런하게 움직여야겠다. 계절의 변화가 올 때쯤이면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이 문경새재다.
여기는 옛날 과거를 보러 가는 영남인과 길손들이 걸어간 옛길이 있다. 흙길을 계곡의 물소리와 걷노라면 나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온다. 생명의 소리로 내 내면의 소리를 듣기에 더없이 좋은 길이다.
집 안을 정리한 후 트래킹 준비를 하여 남편과 차에 올랐다. 남편은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두 귀가 쫑긋하니 어~~!!! 내 입가에 웃음이 실실 걸린다. 우격다짐의 행동 계명을 세워서일까? 어디를 가자고 장소를 정하고 예약을 하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무얼 먹고 싶은데’라고 하면 ‘뭘 먹어, 아무거나 먹으면 되지’라는 아주 무례한 말솜씨를 내뱉는다. 그런가 하면 ‘먹고 싶으면 가 보자.’라는 말에 감동해 뒤통수에 강한 펀치를 날리고 싶다. 다정다감한 말과 은근한 신사의 매력을 느낄 수 없음은 내 맘 탓일까?
지난해 결혼기념일을 맞아 제주도 해안과 숲길을 걸으며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보다 남편과 내 손으로 세 아이를 양육하며 온 것이 가장 감사하다 했다. 서로의 눈을 자주 마주 보며 첫 마음을 기억하며 칭찬하고 배려해 주는 예의를 갖추자는,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부부만의 계명을 약속하며 돌아왔다. 30년의 세월을 부부의 연으로 살면서 그래도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이 불편하여지면 열두 번이라도 통화하며 서로에게 무슨 일이 어떤 상황인지 서로를 곡해할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가 노력했다. 물론 남편 맘속에 들어 가 보지 않아 그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으나 가까운 선후배들로부터 ‘너희 부부는 항상 잘 지내더라.’라고 하면 ‘속내를 어떻게 아느냐?’고 응대하기는 하지만, 결혼할 때의 약속을 지키려는 나와 똑같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격다짐의 추상적인 계명은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여러모로 어색하고 힘들어 보인다.
‘12시에 두 사람’이라는 말로 보아 내 입맛을 돋우어 주려 하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은 남편의 목소리가 콘트라베이스처럼 들린다. 실실 웃는 내 입가로부터 봄의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듯하다. 발사믹 소스의 새곰한 맛과 리코타 치즈의 부드러움이 혀끝에 전해진다. 흑미 필라프의 톡톡 터지는 해물의 식감에 팔뚝이 불끈해진다. 치아바타 곡물빵을 파스타 소스에 찍어 남편의 입안에 넣어준다. 넙죽넙죽 맛있다며 두꺼비처럼 잘도 받아먹는다.
문경새재 하푸실 마을 파스타 핫플레이스를 나와 마을 길을 따라 우측으로 조금 올라가 사과 길을 돌아 합격기원숲을 걷는다. 옛길박물관 앞에서는 젊은 부부가 갓난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지나간다. 아기의 상기된 두 뺨이 상기된 사과 같다. 저마다 봄날의 추억을 쌓으며 호기심을 풀어내는 모습들이 즐겁고 생기 넘친다. 전동차를 타고 드라마 오픈세트장까지 달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봄의 생기로 번져간다. 남편은 맨발의 청춘으로 걷겠노라 한다. 흙 기운이 올라와 건강한 느낌이 기분이 좋다고 한다. 계곡의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맑은 물과 풍경은 옛 선조들의 숨결인 듯 고고하고 아름답다. 온통 봄빛으로 찬연하게 푸르다.
조곡관을 지나 빠르게 약수를 마신 후 평상에 누웠다. 나이가 들어 편안한 쉼을 누릴 수 있어 좋다. 어우렁더우렁 구분 없이 쭉쭉 뻗은 소나무와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하늘빛이 쏟아진다. 잠시의 감흥을 뒤로하고 서둘러 내려왔다. 자주 오간 길이었지만 ‘산불됴심’이라고 세로로 쓰인 순 한글 표석을 처음으로 보았다. 순간 조선 시대의 아낙으로 돌아가 “산불됴심을 해야 할 때이옵니다. 서방님”이라고 아뢰어 본다. 남편은 발을 물에 담가서인지 발바닥이 닿을 때마다 조금 불편하다고 한다. 다음번에는 배낭을 가져와 신발을 챙겨야겠다.
웅성웅성한 소리에 이끌려 드라마 촬영장을 돌아보게 되었다. ‘도적’ 촬영을 마친 스텝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분장하고 의상을 입은 채로 걸어 내려가는 연기자들과 함께 주차장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촬영장에서 스텝들과 연기자들이 호흡이 좋으면 드라마가 대박 난다는 말이 귓가에 걸려 떠나지 않는다. 저 배우들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배역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새삼스럽게 다짐해 본다.
진남휴게소를 지나 어둑어둑해져 가는 하늘 아래 불빛으로 인하여 벚꽃은 더욱 눈이 부시도록 자태를 내뿜었다. 바람에 춤사위가 더하여 눈물이 나도록 시리고 아름답다. 잠깐 숨을 돌리면 사라져 버리는 아름다움에 취해 포토존에서 추억을 남긴다. 순간의 행복한 꽃잎들과 삶의 지속된 노력들이 젖고 배어들어 우리의 심장이 쉼 없이 뛰고 있어 오늘도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말랑말랑해져 가는 마음의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