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5일! 일주일 만에 월드디제이페스티벌의 꽃! 월디페 RPM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설 연휴 동안 푹 쉬다온 친구들도 있고, 전국투어를 하느라 평소보다 더 많은 피로를 느낀 친구들도 있었죠!ㅎㅎ
일주일 만의 이번 모임은 바로 '알피엠 영상스터디!' 시간이었어요! 이번 영상 스터디에서는
세계적인 축제! 영국의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Glastonbury Festivals)에 대해 영상을 보고
서로 이야기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월드DJ페스티벌이 지역의 문화와 융합되기 위한 그 본보기인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최근 들어 계속된 적자로 중단 위기에 처한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이지만 그만한 축제가 없죠!
RPM 화이팅! 상상공장 화이팅! 월디페 화이팅! 월드DJ페스티벌 화이팅! 월드디제이페스티벌 화팅! :D///
월디페의 춤짱으로 거듭나게 될 이동원참치군!ㅋㅋㅋㅋ 저에게 동원참치를 선물로 받은 현아 동원이ㅋㅋ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영상 상영 시작!ㅎㅎㅎ
집중력 돋는 월디페의 꽃들 입니다 :D ㅎㅎㅎㅎ
사이좋은 상준이와 다현이 ㅋㅋ 보라는 영상은 안보고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포즈를 취하더라구요ㅋㅋ
스트로브가 없어 어두운곳에서 ISO를 높일 수가 없었긔에, 화질이 안좋은 점 양해!
평소와 다른 모습의 기완이와 동현이 ㅋㅋ
다들 진지한데 혼자만 신난 프링글스 ㅋㅋ
영상이 끝나고 글로벌 박태훈군의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에 대한 발표가 있었습니다!
01 Glastonbury Festivals : Glastonbury Festivals of Contemporary Performing Arts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의 정확한 명칭은 "Glastonbury Festivals of Contemporary Performing Arts"이다.
02 Modern History
세계 2차 대전(1939~1945) 이후 냉전체제가 이어져왔다. (1940~1990)
1939년 9월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중략) 1945년 8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결국 무조건 항복을 한다.
1940년 대 중반부터 1990년도 초까지 미국과 소련연방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으나 군사동맹, 재래식 군대의
전략적 배치, 핵무기, 군비경쟁, 첩보전, 우주진출, 베트남 등 갈등이 이어졌다.
03 British History
20세기 초반 영국은 영국연방 내에서 독립국과 자치국이 늘어나 수많은 이권을 상실했으며,
영국병이라는 만성적 노동쟁의와 높은 실업률, 정부의 높은 복지 비용 부담으로 경제가 침체되었다.
04 V for Vendetta
1980년 알란무어와 데이비드로드가 원작자인 영국 만화이다. 초보수주의적 정부였던 마가렛 대처가 수상이던 시절의 작품으로
당시의 사회상, 시대상을 반영하고 그 시대를 풍자하는 작품이다. 2005년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영화의 배경은 2040년
제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영국 소수의 정치적 패권자들이 국가를 쥐락펴락한다. 국민들에게 대부분 정보는 비공개이며,
언론은 거짓말만 하고, 국민들은 통금이 있어 야간에 돌아다닐 수 없고, 국가는 국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도청하여 감시한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사진들을 위주로!ㅎㅎ 더 많은 사진은
글래스톤베리 공식 홈페이지 (http://www.glastonburyfestivals.co.uk/)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05 Hippy
히피는 대표적인 반문화 운동이다. 1967년경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들은 긴 머리에 맨발이나 샌들을 신고 다녔으며,
다양한 색깔의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또 마리화나나 LSD, 그 밖의 약물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상징이나 사상을
구체화시켰다. 특히 유명한 록 그룹 비틀즈는 노래로써 히피 운동의 확산을 도왔다.
히피문화의 상징은 꽃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고, 부드럽고 비폭력적인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것은
대치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의 꽃은 '꽃의 아이들(flower children)'로 불리는 히피(hippie)에서
비롯한다. 샌프란시스코는 1966년 자유와 사랑을 찾고, 비둘기의 힘과 꽃의 힘(평화)을 믿는 히피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진보적인
예술가와 지식인, 게이 등 성적 소수자, 차이나타운의 중국인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 등이 이곳에서 자유를 구가했고,
지금도 그 역사는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가죽과 직접 만들어 입는 옷등을 착용하여 자연과 하나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파격적인 외관은 흔히 히피라는 용어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남자의 경우 장발과 멋대로 기른 수염에다 커다란 펜던트를
착용하는 것이 관례이고, 여자들은 미니스커트에 샌들을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러한 모습은 생활양식에 배어 있는
보수적인 가치를 적대시하는 이들의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히피 빌리지'를 조성하여
자신들끼리의 공동체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열정과 히피의 문화로는 사이키델릭 음악을 예로 들수 있는데, 이는 전율이나
환각상태를 느끼게 하고 유도하는 음악으로 알려져있다. 이것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사이키 델릭은 어떤 기분 장르처럼
뚜렷한 구분점들 보다는 히피분화의 특성 그대로 자유분방한 형식을 추가한다.
사이키델릭 밴드들이 가장 많이 모이고 히피문화의 중심지는 샌프란시스코였다. 60년대 후반과 70년 초엽의 샌프란시스코는
사이키델릭의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좁은의미로는 샌프란시스코 락을 사이키델릭락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히피문화의 대표적인 상징으로는 우드스탁을 예로 들수 있는데, 이것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락페스티발의 시초였으며,
그 시대를 대표하는 모든 뮤지션들의 대거 출연과 40만명이 넘은 관객들로 당시 락 음악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당시 젊은 세대들이 가지고 있던 물질주의적이고 실리주의적인 기존체계에 대한 저항의식은
이 페스티발 기간동안 마리화나와 혼숙등의 문제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2박3일동안 진행되었던 공연에서는
당시 락음악을 이끌던 짐 모리슨, 지미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산타나, 핑크 플로이드 등의 스타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8월 15일 부터 17일까지 3일동안 지속된 이 페스티발은 록뮤직 역사에서 하나의 전설이자
60년대 젊은이들의 저항의식의 표현이었다.
06 Glastonbury Festivals' History
1970_ 첫 축제 티켓가격 1달러 관격 1500명
1971_ 처칠의 손자 후원 티켓 무료, 스테이지 건설
1980_ Campaign for Nuclear Disarmement (CND, 핵무제 해장 캠페인 후원)
- 첫 손익분기점 돌파 / 대처수상에 대한 전체주의 파시즘 반대성격
1990_ 경비원들과 폭동 및 공연장 전소 등 사건사고
2000_ 울타리(펜스)가 무너지면서 수십명이 압사
2003_ 하루만에 15만표 매진
2005_ 첫 Silent Disco
2007_ 1시간 30분 13만 7천표 매진
2010_ 3시간만에 15만표 매진
07 Why Glastonbury Festivals
농장의 주인이자 페스티벌의 주최자인 마이클 이비스가 1970년 자신의 농장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밴드들의 공연을 열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무료 공연이 시작이었다. 60년대 히피 문화가 영국에도 득세를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수천 명의 히피들이
몰려든 첫번째 글래스톤베리는 마이클 이비스에게 청난 경제적 손해를 끼쳤다. 때문에 한 번으로 그칠 뻔 했던 페스티벌은 이듬해
윈스턴 처칠의 손녀가 공동 기획자로 참가하면서 한 번 더 열렸다. 그리고 몇 년 후, 반핵시민단체가 가세하면서 정례화됐다.
해를 거듭할 수록 관객이 늘어났고 출연진은 화려해졌으며 행사의 규모는 성장해왔다.
그 와중에 수없이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것은 영국의 정치/사회/문화의 단면이 함의된 사건이기도 했다.
히피 문화에서 시작된 탓에 정치적으로도 진보적 자세를 견지해온 글래스톤베리는 대처 정권 시절에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당국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이 페스티벌을 멈추려는 시도를 했다.
행사장 입구에서 경찰관들이 참가자들의 짐을 수색하기도 했고, 히피들에게 곤봉을 휘두르기도 했다.
어떻게든 담장을 넘어 공짜로 페스티벌에 참가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안전사고가 나기도 했다. 그런 역사를 거치면서, 글래스톤베리는 올해로 40년의 나이를 먹어왔다. 그렇게 세계 최고의 축제가 됐다.
08 Green Glastonbury
대중교통 이용하기! 차 하나에 여러명타기! 쓰레기 최소화 하기 위해 재활용하고 집에가져가기!
텐트을 싸구려 말고 좋은걸 사서 집에 가져가기!
축제가 환경 다양성을 보존하자! 2007년부터 비닐봉지를 100% 순면가방 바꿈! 티셔츠는 화학염료가 아닌
물에 안녹는 천연염료를 사용해 염색!
쓰이는 나무를,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나무 사용! 매년 축제에서 재활용팀을 뽑음!
개인이나 팀, 단체로 자원봉사지원을 받고 이들로 인해 자원봉사가 잘 된다.
'한 여름의 축제일 뿐이지만 축제를 즐기면서 우리는 환경과 자원에 대한 밸런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취지로 기획!
공연장 지붕에 2톤의 배터리를 축적할 수 이TSms 시설을 가지고 있으며, 태양열 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한, LED시설의 무대에는 100W짜리 가정용 전구 2개로 설치해서 사용한다.
매의 날카로운 시각과 뱀의 엄청난 후각과 개의 개예민한 청각으로 발표를 듣고 있는 상근, 인턴, 감동님, 조장ㅋㅋ
감동님의 옆라인과 함께 ♡ (사진제공 : 상상공장 미디어팀 임나래)
지금부터 류감동님의 귀한 말씀이 시작됩니다! (밑에 글 다 읽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RPM!!)
역사적으로 보았을때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은 만들어 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까지
영역이 확대되었다. 이 전쟁은 1945년에 끝이 났는데, 끝나고 보니 돈을 가진 사람들은 죽질 않았으며, 돌이켜보니 목적이 없는,
독재자들의 욕심에 의한 전쟁이었다. 그들의 욕심으로 인해 사람들은 도구화 된 것이고, 그러한 자각들이 '히피'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히피들은 정신적으로나 학문적인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다. 히피들은 '공유'하는 삶을 산다. 프리섹스는
그들의 일상이며, 아기를 낳아도 내 아기, 네 아기 이런 개념 없이 다 같이 키운다고 한다. 그럴 정도의 정신적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어느 순간, 이 사회가 싫어지게 되고 이상향을 찾아 나선다. 그 이상향을 찾아 동양 쪽으로 가게 되었고,
인도의 빠하르간지라는, 배낭여행객의 천국이라 불리는 곳이 만들어지고, 더 동쪽으로 가서, 태국의 카오산로드,
중국의 윈남성까지 왔다.
결국 20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큰 이슈는 이러한 것들이 공통의 인류의 목표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기득권자의
이권이라는 것에 모든 인류가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히피운동들이 월남전으로 인해 미국에서 벌어졌고,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 정식명 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1969)이라는 것이 1969년에 터졌다.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을 얘기하면서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는 것이, 월드DJ페스티벌을 보고나서
울트라뮤직페스티벌이 생겨나려고 하고, 글로벌개더링, 넥스트플로어가 생겨났듯이,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전 세계인의
마음 속에 '아! 나도 이런 거 저질러야지'라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실제로 우드스탁 페스티벌 이후 비슷한 축제가 전 세계에
수십 개가 만들어졌고, 이후 살아남은 것이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이다.
어떤 것이 사회에 영향을 주어 그 부분을 통해 또 다른 문화가 잉태된다는 것이 포인트이다.
그렇다면 70년대에 그런 페스티벌을 누가 만들 수 있었을 것인가? 공교롭게도 땅을 가진 사람들이다.
마이클 이비스는 농장이, 즉 땅이 있고 자신의 인맥이 있으니까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1회, 1,500명 정도가 왔나? 그렇게 망하고 또 망하고 망하다가 근근히 버텨갔는데, 재밌는 것은 70년대 후반,
영국의 정치인 마거릿 대처를 싫어한 젊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었고, 그들이 꽂힌 것이 마이클 이비스의 집에 가자는 것!
의외로 그러한 젊은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이 빵빵~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월드DJ페스티벌은 이제 5년이 지나 6년차이다. 마이클 이비스의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은
10년이 넘어서야 잘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첫 회부터, 첫 시작부터 성공을 바라는 것인가?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이 40년을 이끌어 온 것이 중요한 것이지 첫 회를 성공하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첫 회부터 성패에 목숨걸면 일찍 망한다. 진득하게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가 스톤헨지 근처에 살던 히피들이 정부에 의해 쫓겨났고 갈 곳이 없던 이들을 받아준 사람이 바로 마이클 이비스였다.
그렇게 되다보니 히피들의 기본인 문화와 예술이 페스티벌과 접목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적인 시선으로 욕을 먹게 되었다.
축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개인이 혼자서 기획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안전과 청결같은 서비스를 높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스폰서(?)를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걸 보고 마이클 이비스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느니,
돈독에 올랐다는 욕을 먹게 되었다.
상업적인 운영이되면 '공공'이라는 걸 생각하게 된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의 운영이다.
옥스팜(Oxfam), 그린피스(Greenpeace), 워터레이드(WaterAid) 등의 자선단체에서, 한 단체마다 500명 씩 약 1500명이 운영을
한다. 그리고 축제의 수익의 절반을 후원 단체에 기부를 한다.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수가 없다. 사실 월디페라는 것이
21cRPM이라는 젊은 친구들의 노동력 착취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시간이 지났을 때, 월디페가 일정 수준의 이익을 가진다면
자선단체 등에 기부를 하면서 그들의 운영 구조를 꼭 체크했으면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월디페를 양평의 지역 발전이라는 경제적 창출 효과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래서 오늘도 양평군수님도
뵙고 어떻게 지역 주민들에게 환원을 할 지를 얘기했다. 보통 작년 월디페 기간 중 왔던 방문객들, 양평역의 통계로 2만여명,
그러니까 1일 열차 운행이 20번 있는데 열차 한 대가 올 때 마다 거의 1000명 씩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양평에서 돈을 쓰고
간 것이 어마어마했다. 앞으로는 그런 것들을 수치화하여 하나의 민간 축제로 인해 지역이 어떻게 변화는지 개인적으로도
지켜보고 싶고, 논문의 주제로 이용되었으면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현재의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이다. 2012년에는 열리지 않는다. 5년에 한번씩 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동안 문제점이 있는지, 점검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돈 있는 사람들만 축제에 온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오는 사람들을 위한 티켓의 일정량을 열었다. 그래서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집계된 것이 17만 5천여장인데,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하나의 도시라고 생각해도 좋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한다, 숲을 보되 나무를 보지 못한다는 것처럼 70년도부터 음악이
시작되어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일렉트로닉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일렉트로닉 아티스트가 헤드라이너이다.
올해 코첼라 페스티벌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음악축제의 흐름을 볼 수 있다. 또 하나 볼 수 있는 것이, 월디페는 DJ페스티벌인데
왠 락 밴드? 라는 얘기가 있는데,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은 결혼식도 하고, 서커스도 있고, 기타 모든 퍼포먼스들이 존재한다.
성공한 축제는 성공한 10개의 콘텐츠가 하나가 되어 하나의 축제를 이룬다. 대형 야외공연과 축제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은 백화점이다. 모든 문화와 예술이 하나의 백화점, 종합선물세트가 되는 것이 축제라고 생각한다.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에서는 정말 많은 문화와 예술, 삶이 하나가 되어 축제가 만들어지는데, 대한민국엔 그게 없다는 말이다.
"모든 문화와 예술이 하나의 백화점이 되는 것이 축제이다."
RPM도 마찬가지이다. RPM을 통해 월디페를 경험하고 축제의 기획, 문화 기획이 꿈이라면 그 부분을 놓치면 안된다.
아티스트에 의존하지 않고 더욱 더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지역과의 관계를 엮어나가는 것을 중심으로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만큼 축제라는 것은 또 하나의 예술적 사회를 구성하는 일이다. 좋은 아티스트를 싸게 불러오거나, 비싸게 불러오거나가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강남이나 워커힐의 굉장히 큰 파티에서 빅 아티스트를 섭외하는데 개런티를 1억 이상 준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빅 아티스트의 예매가 1,800장 이상이 되어 본적이 없다고 한다. 올해 축제가 많이 생기고 있는데,
앞으로도 빅 아티스트들의 방문은 줄을 이을 것이다. 하지만 수익을 내기엔 힘들 것이다. 울트라뮤직페스티벌 코리아의 경우
아티스트 개런티만 15억 이상을 잡았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티켓가격이 상당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축제에 30만원을 받으면
갈 사람이 있을 것인가? 20만원만 넘어도 안 간다. 그렇게 보면 월디페의 티켓가격은 전보다 올랐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적정한 것이다. 2~3달 일찍 예매를 하면 실제로 1일권이 44,000원이다. 양일권(66,000원)으로 따지면 1일 33,000원이다. 그런데도
감사하게도 실제로 현장에서 99,000원을 주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마케팅적인 정책이고,
이후 일정액수가 넘어가는 티켓에는 지역상품권이라는 것을 포함시켜 지역에 환원해주는 일을 하고자 한다.
양평 주민들에게 감사하기 때문에, 그래서 보답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어쨋든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은 40년 역사를 자랑하고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축제이다.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을 소재로 한
만화책도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영국의 축제와 미국의 축제는 정말 많이 다르다. 미국은 자본이 뛰어나다. 그래서 라인업이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따지면 영국을 쫓아갈 수 없다.
지금은 코첼라도 굉장히 훌륭한 일을 한다. 수익을 기부하는 자선 페스티벌이다. 월디페도 그렇게 하고자 한다.
월디페를 기획하면서 먹고 살 수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현재 목표는 양평군민들과 공유하는 축제를 만든다는 것이
꿈이다. 또한, 월디페를 통해 RPM들과 같이 대화를 하며 소통하며 많은 사람들이 문화 기획의 아름다운 면에서, 또 고통에
대해서 같이 논의하고 고민하고 체험하고 나누고 싶다. 축제는 정말 많다. 그리고 그 축제가 지닌 가치는 생각보다 굉장히 크다. 그런 가치들을 우리가 찾아내서 접목시키고 지향점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모임이 끝난 후, 책팀(상상에디터팀!)의 첫 회식이 있었죠! 아~ 끝내주게 달린 것 같습니다ㅎㅎ 즐거웠어요!
(사진제공 : 상상공장 미디어팀 임나래)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의 영상을 본 소감으로는 '자유'와 '일탈'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는 점? 또한 그런 페스티벌이
40여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는 점? 월디페도 진득하게 꾸준히 수십년간 전통 돋는 월드디제이페스티벌이 되었으면 한다는 점?ㅋ
이날, 양평군수님과의 만남을 위해 류감동님과 함께 양평을 갔다왔고, 감동님과 군수님의 대화를 직접 옆에서 들은 저로서는
일단 실무자들의 그런 심도있고 비중있는 대화를 눈 앞에서 직접 듣고 있다는 점에서 소름이 끼쳤고,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굉장히 무겁게 이어질 수 있던 대화의 주제를 이해하기 쉽고, 재밌게 이어나가는 감동님에게 닭살이 돋았고,
단 하나의 아이디어로 양평군수님과 공무원분들의 마음을 움직인 감동님의 재치와 설득력에 오금이 절였고,
뭘 계속 양평에 주고 주고 모자라서 퍼주려고 하시는 감동님을 보고, 감동님이 진짜 원하시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건
'돈', 그 이상의 SOMETHING이라는 사실을 알고나서 온몸에 전율이 일었던 하루였네요.
RPM 화이팅! 상상공장 화이팅! 월디페 화이팅! 월드DJ페스티벌 화이팅! 월드디제이페스티벌 화팅! :D///
첫댓글 오 강의 정리 참 잘하셨어요!!!! 깔끔한 정리! new order음악을 들으면서 읽으니 재밌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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