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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城李氏 불천위 스크랩 진성이씨 가창재사
고향생각(元甲,20세,九老洞派,49年) 추천 0 조회 158 11.10.10 20:3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진성이씨 가창재사(글/윤천근 - 안동대 교수)

개들의 송곳니, 낚시꾼의 좌대, 그리고 소나무산  가창재사는 북후에 있다. 이천동에서 옹천을 향해 가다 국도를 버리고 오른편 샛길로 들어서면, 반도의 어디에서나 그러하듯이 구불구불 돌아가는 작은 길이 우리를 좁직한 분지와 분지가 포개져 이어지는 세상 속으로 인도해 간다. 산과 골짜기의 세상, 그 속의 한 깊숙한 골짜기 속에 가창재사는 있다. 숨겨져 있는 세상. 작은 길조차 버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면, 거기 작은 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위에는 좁직한 또 하나의 세상이 슬몃 모습을 드러낸다. 저수지는 길쭉한 타원형의 분지를 둘로 가른다. 저수지 아래는 밖의 세상이고 저수지 위는 안의 세상이다. 가창재사는 저수지 위의 세상에 속한다. 저수지 위의 세상은 슬몃 돌아서서 숨기고 있는 세상이고, 저수지 밖의 세상은 은근슬쩍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세상이다. 저수지는 그 두 세상을 가르는 관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저수지 안은 속기를 걷어낸 은자의 공간이어야 할 일이다. 전통시대에는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만큼 힘센 장사가 또 어디 있을 것인가? 가창재사의 숨겨진 세상 구석구석에 지천으로 똬리를 틀고 있었을 그 탈속한 기운은 세월의 힘센 장사가 어딘가로 업어 가 버리고, 이제는 오히려 저수지 안의 숨겨진 세상이 저수지 밖으로 얼굴을 내민 세상보다 더 속기로 가득하다. 저수지는 그것이 담아낼 수 있는 물의 5분지 1도 안 되는 물을 담고 있고, 그 조차도 탁하기만 하다. 저수지 위로는 버섯 재배사가 그득히 자리 잡았고, 그 비닐하우스의 여기저기를 지키고 있는 것은 개들이다. 무수한 종류의 개들이 무수한 종류의 개소리로 짖어댄다. 이방인의 침입을 경계하는 개들의 희게 드러난 송곳니 사이에서 찢겨 나가는 것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 숨겨진 영역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던 탈속한 기운의 조각들이다. 물론 이 영역에 오랜 세월을 두고 넘치게 자리 잡았을 탈속한 기운이, 세월이 실어내가고, 버섯재배사와 그곳을 지키고 있는 무수한 개들의 송곳니가 무한정으로 적의를 보인다고 하여서, 완벽하게 제거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오래된 부자의 쌀독에는 거미줄 사이에 붙은 좁쌀 톨이라도 남겨져 있게 마련인 것이 아니던가. 여기서도 그만큼의 흔적은 남겨져 있으니, 바닥으로만 깔린 저수지의 한쪽에 주인이 비워둔 좌대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암시하는 조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길은 저수지 서쪽을 돌아 버섯 재배사 사이로 파고들고, 버섯 재배사 너머에서 산 위를 향하여 솟구쳐 오르듯  뻗어있다. 그리고 바로 거기, 버섯 재배사 위쪽을 차지하고 있는 소나무의 군집과, 솟구쳐 오르는 길이 양팔로 싸안고 있는 좁직한 분지를 모자처럼 삼면으로 압박하며 잘 가꾸어진 소나무 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재목이 될 만큼 곧게 뻗어 오른 소나무들은 아니지만, 조금씩 굽어지면서도 훤칠하게 솟구쳐 오른 소나무들이 캉캉 춤으로 단련된 불란서 물랑루즈의 무희들처럼 미끈한 다리의 각선미를 자랑하며 산천 여기저기에 빈틈없이 들어서 있다. 버섯 재배사 위쪽을 일선으로 장악하고 있는 소나무의 군집 속에는 병들어 죽어가는 두어 그루가 보이는 것이 눈을 아프게 하지만, 굽이진 산의 구석구석에 빼꼭히 자리잡고 있는 소나무의 식생은 놀라울 정도의 건강미를 자랑하고 있다. 살성이 붉은 홍송이다. 붉으레한 다리의 살성은 바닥을 덮은 솔잎 낙엽으로부터 스멀거리며 기어오른 것처럼 보이고, 가지 위를 점령한 푸르름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앉은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 소나무 숲의  여기저기에는 딱 알맞을  정도로 세월의 친구가 되어 버린 바위들이 버티고 앉아 소나무 산의 풍경을 한 폭의 산수화로 완성시켜 준다.

 




가창재사 영역
길은 서쪽 산의 기슭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그 동편 경사면에 좁직한 분지를 풀어 놓는다. 저수지 안쪽 세상 속에 숨겨져 있는 분지이다. 분지는 종으로 2단 구획이 되어 있다. 중간에 키 큰 몇 그루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버티고 서 있는 부분을 경계로 하여 위와 아래로 나뉘는 것이다.
분지의 아래쪽, 경사가 완만한 곳에는 밭이 마련되어 있다. 도라지 밭인데, 도라지는 아직 흙 속에 숨어 있고, 땅 위에는 작년의 줄기와 잎들이 사선으로 줄을 서서 말라붙어 있다. 길은 바로 이 도라지 밭의 서쪽 끝, 서쪽 산의 발치를 타고 호를 그리며 돌고, 몇 그루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어울려 서 있는 지점에서 잘록하게 맺혀졌다가 두 갈래로 갈라진다.
몇 그루 참나무의 그늘 속에는 자잘한 갈잎들이 지면을 덮고 있는 것이 보인다. 길에서는 치워져 있지만, 길 밖의 경사면에는 갈잎이 동글동글하게 똑같은 모습, 그러나 서로 다른 자세로 분열을 하고 있다. 그 단일성과 다수성은 충분히 하나의 수준 높은 미학이 될 만 하였다.
느티나무의 매끈한 둥치와 참나무 중 하나의 거친 몸체 사이에는 작은 플랜카드 하나가 매여 있다. ‘수렵금지 (산불조심) 안동시.’ 세 단어. 세 문장. 단도직입적인 단어들이 붉은 색의 글씨로 직립한 나무 둥치를 압박한다. 나무의 크기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작은 직사각형 플래카드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자연 속에 인간이 들어갈 때에는 모름지기 작고 표 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범을 이 플랜카드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플랜카드가 매어져 있는 곳에서 길은 둘로 갈라진다. 동쪽으로는 작산 구강당과 주사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서쪽으로는 작산정사와 사당을 거쳐 가창재사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곳은 소나무 산의 흘러내리는 경사면이 마련하여주는 좁직한 재사영역의 윗부분이다. 이 윗부분은 도라지 밭으로 쓰이고 있는 아랫부분에 비해서 경사면이 조금 더 급하고, 재사영역은 그 경사면을 단층면으로 이용하여 좌 우로, 또 상하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좌우로 이 영역은 3분된다. 동쪽 편으로는 강당이 있고, 서쪽 편으로는 정사가 있으며, 중앙에는 재사가 있는 것이다. 상하로 이 영역은 2분된다. 아래쪽으로는 강당과 정사가 양편으로 자리잡고, 위로는 재사가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다.



강당과 주사
우선 동쪽의 두 건물을 살펴 보기로 하자. 
“이 건물들은 송안군 이자수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성종 11년(1480년)에 지었다. 구성은 후학들의 학문연구를 위한 강당과 시제 및 묘사를 준비하는 주사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은 축담을 2단으로 높이 쌓아올려 그 위에 지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 대청을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두었다. 주사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ㅁ자 형이다. 전면에 대문을 두고 그 왼편에 마구간과 2칸의 창고를 두었다. 주사의 뒤쪽에 3칸 대청을 두었는데, 이 공간은 행사가 있을 때 여러 사람의 모임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작산 구강당과 주사」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안내판의 기록이다. 안내판에 의하면 이 건물들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22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 건물들은 1480년에 지어졌다고 하고, 송안군 이자수의 묘사를 위해 쓰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조금 생각을 더 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여겨진다. 이자수의 묘는 현재 서후에 있다.               
“이자수 묘( 부 서쪽 20리, 도솔원 북쪽 사리곡 감좌리향).
안동시내에서 예천으로 약 8키로 가다가 서후면 명리에서 북으로 꺾어 2키로 지점에 송안군 묘소가 있다. 도로변에 새로 세운 송안군 유허비도 있다. 공은 명서업明書業에 급제, 그 후 홍건적 토벌에 공을 세우고 송안군에 봉군되어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오르니, 이때부터 진성이씨 가문의 기틀이 다져지게 된다. 묘지는(묘지의 비석은) 처음 만력 28년(선조 33년 1600) 2월, 7대손 동암 영도詠道와 8대손 송간 정회庭檜가 건립하였으나, 오랜 세월에 마모되어 314년 후인 계축(1913년) 10월에 20대손 승걸 근서謹書로 개립하였다.”


서주석씨가 <<안동의 분묘>> 이자수 부분에서 적고 있는 구절이다.
"송안군 이자수 묘.
부 서 도솔원 북, 사리곡 리향, 퇴도退陶선생 5대조 갈음碣陰. 공의 휘자는 자수子脩, 진보 현인. 부친은 석碩인데, 현의 이서로 생원시에 붙었다. 밀직사를 증직으로 받았으니 이씨의 시조이다. 이자수 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 말, 홍건적을 토벌할 때 공을 세워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하여졌다. 벼슬이 통헌대부 판전의시사에 이르렀다. 처음 안동으로 왔을 때 2남이 있었으니, 장자는 운구云具로 공조참의 이고, 차자는 운후云侯로 서운부정 書雲副正이며 사복 정正의 증직을 받았다. 참의는 3남을 두었는데, 장자는 양공養恭이고, 차자는 양검 養儉인데 군수이고, 셋째는 양호養浩이다. 양공은 2남을 두었는데, 사담思聃과 희담希聃이다. 양검은 3남을 두었으니, 장자는 기담基聃, 차자는 여담如聃, 셋째는 종담從聃이다. 여담은 3남을 두었는데, 윤원允元, 윤형允亨, 윤정允貞이고, 종담은 2남을 두었는데, 장자는 윤지允智, 차자는 윤강允綱이다. 부정은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이 정禎이고, 중직대부로 선산부사를 지냈으며, 가선의 증직을 받았다. 3남을 두었으니, 장자는 우양遇陽으로 무과 출신하여 인동현감을 지냈고, 차자는 흥양興陽으로 훈련참군을 지냈으며, 셋째는 계양繼陽인데 성균진사로 자헌을 증직으로 받았다. 현감은 1남을 두었으니, 이름은 철손, 승의부위承義副尉이다. (철손은) 2남을 두었는데, 장자는 훈壎으로 돈용교위敦勇校尉이고, 차자는 감堪으로 분순부위奮順副尉이다. 참군은 3남을 두었으니, 장자는 은垠, 차자는 호壕, 삼자는 해垓이다. 은은 1남을 두었는데, 희동希?이다. 호는 2남을 두었는데, 장자는 희청希淸으로 충순위이고, 차자는 희명希明인데, 역시 충순위이다. 진사는 2남을 두었다. 장자는 식埴으로 성균진사이며, 숭정으로 증직되었으며, 차자는 우?인데 문과 출신하여 호조참판을 지냈다. 진사는 6남을 낳았다. 장자는 잠潛으로 충순위이고, 둘째는 하河인데 훈도이고, 셋째는 의?이며, 넷째는 해瀣인데 문과 출신하여 대사헌을 역임하였고, 다섯째는 징澄인데 찰방이고, 여섯째는 황인데 문과 출신하여 판중추부사를 역임하였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참판은 1남을 두었으니, 수령壽?이라고 하며, 찰방이다. 이 이후로 세대가 멀어질수록 자손이 번성하여 무려 백여인에 이르므로 다 기록할 수 없다. 공의 묘는 안동부의 서쪽, 도솔원 뒷 골짜기에 있는데, 갈석이 없는 까닭에 위 아래 중 어느 것이 아버지 쪽이고, 어느 것이 어머니 쪽인지 조차 구분하지 못하였다. 7대손인 정랑 영도詠道, 8대손인 현감 정회庭檜가 여러 문중 사람들과 상의하고 세계를 간략하게 기록하여 2묘의 사이에 세운다."


 




송안군 이자수 묘비문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황의 손자 이영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송안군 묘에는 비석조차 없었다. 묘지를 수호하고자 하는 의식이 확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송안군의 묘는 가창재사가 있는 북후와는 다른 서후에 있다. 송안군을 위한 분암, 또는 재사를 짓고자 한다면 묘지가 있는 곳 주 변을 찾아 들어가고, 또 송안군 묘소의 기물들이 먼저 갖추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1480년에 지어졌다는 작산 구 강당과 주사는 송안군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선산부사 이정을 위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일이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현재 가창재사에 걸려있는 현판 중 하나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창재사창건과 중수 사적(가창可倉은 작산鵲山의 옛 이름).
선산부사 이공 분암.
성종 11년(명 성화 16년) 경자년, 장자인 전 인동현감 우양愚陽, 차자인 훈련참군 흥양興陽, 차자인 진사 계양繼陽이 창건하였다. 봄에 역사를 시작하여 가을에 끝마쳤다.
명종 16년(가정 40년) 신유년 봄, 사현손嗣玄孫인 훈도 연演, 증손인 전 찰방 징澄, 공조참판 황滉, 현손인 진사 재宰, 5대 손인 희안希顔이 중수하였다.
효종 7년(청 순치) 병신년, 8대 사손嗣孫 증효曾孝가 중수. 간사는 7대손 극준克遵, 도관(앞은 임금왕에 목숨 수, 뒤는 임금왕에 관직 관)은 8대 손 생원 조영. 증효의 기사가 있다.
숙종 41년(강희 54년) 을미년, 중수. 규모를 조금 키워서 앞쪽을 옆으로 7량으로 하고, 누각을 새로 얽었다. 봄의 한가운데에서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 7월에 끝마쳤다. 총 간사는 10대 손 흥진興眞, 8대손 성익成翼이 담당하였고, 도장과 기와 일을 감독한 사람은 9대손 후재厚栽, 10대손 시진始眞, 중요 공사를 분정한 것은 9대손 달현 達玄, 10대손 장겸 長兼(겸은 앞에 향자를 붙임)이다. 8대손 진사 조명朝鳴의 기사가 있다.
정조 원년(건륭 42년) 정유년 중수. 총간사와 제사 일을 주관한 사람은 13대손 국량國樑, 간사는 10대손 세원世元, 11대손 효채孝彩, 11대손 효석孝錫의 기사가 있다.
철종 13년(동치 원년) 임술년 봄, 14대 사손 우주宇周가 동 서의 날개를 이룬 재사 건물과 누각을 중수. 계해년 가을에 공사를 끝마침. 간사는 후손 인숙寅夙, 만백晩白, 동역?役, 인극寅克, 약수若水, 진룡震龍. 후손 국교國僑의 기사가 있다. (이상은 봉선록奉先錄 중에서 가려뽑은 것이다.)
고종 16년 기묘년, 17대 사손 긍연兢淵이 중수. 간사는 후손 형근亨根, 의룡宜龍, 의동宜東, 재영在榮. 40년 계묘년, 긍연이 중수. 간사는 후손 의찬宜燦, 재근在根, 긍연의 기사가 있다. 계묘년 후 44년째 되던 병술년, 19대 사손 용순容純이 중수. 늦은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늦가을에 끝마쳤다. 간사는 후손 용걸鏞杰, 진걸晉杰, 태희泰熙, 원용源容, 정걸廷杰, 흥걸興杰, 병걸秉杰. 이듬해 정해년 봄, 4간 부속건물을 동쪽 날개건물 밖에 지었다. 용걸의 기사가 있다. 후손 중수中洙가 기문을 짓고, 한걸漢杰이 전후의 사적을 엮었다.
단기 4215년 병자년 2월 하순, 후손 수걸秀杰 씀.”


 




이 현판 글씨는 단기 4215년, 그러니까 1882년에 쓰여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송안군 이자수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재사의 이름조차도 ‘선산부사 이공 분암’이다. 따라서 작산 구강당과 주사는 우양, 흥양, 계양 등 3형제가 부친인 선산부사 이정의 묘사를 위하여 건립하였고, 특히 강당은 묘사에 들었을 때 일족의 젊은이들도 여기 모아 교육하고자 하는 목표를 지니는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터이다. 
구 강당과 주사는 옆으로 벌려 서 있다. 동편의 낮은 자리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주사이다. 그 옆, 서편의 조금 높은 좌대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은 구 강당이다.
주사는 아주 약한 기울기를 갖는 지표면을 그대로 이용하여 세워졌다. 앞은 3단의 석축을 쌓아 올려 세웠고, 옆은 3단에서 2단, 2단에서 일단으로 석축의 층수가 달라지는 길쭉한 삼각형의 석축면으로 처리하여 그 위에 대지를 마련하였다. 정면 5간, 측면 5간 규모이다. 벽은 황토 흙과 세월의 빛깔이 스며든 나무판으로 되어 있다. 전면의 동쪽으로 3간은 아래 3분의 2정도를 나무판을 세워 붙이고, 그 위는 흙벽으로 처리를 하였다. 그 중 세 번째 간의 나무판 벽 서쪽 끝에는 그 나무판 벽과 같은 키를 가진 나무판 문이 마련되어 있다. 이 세간은 바깥벽의 모습만으로도 그 용도가 헛간, 또는 창고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주사는 규모가 큰 입구자 건물이다. 안의 입구자 마당은 비좁아 보일 정도이지만, 전면,  측면 각 5간씩의 건물이므로 밖의 입구자 모양 집채는 큰 규모 일 수밖에 없다. 전면의 지붕은 옆으로 쭉 뻗은 전면의 건물 기왓골 위로 양편 끝에 납작한 팔작지붕이 올라붙어 있는 형상이다. 측면에서 보면 뒤편 건물의 팔작지붕 하나만이 옆면 건물 지붕 끝에 올라붙어 있는 모습이다.
주사 서쪽 측면의 벽은 전면의 벽을 처리했던 것과는 다른 미학의 적용을 받고 있다. 전면의 벽은 불균형의 미학이 적용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좌우의 대칭도, 상하의 균형도 고려되어 있지 않다. 이 불균형의 미학은 서쪽 벽면의 처리방식에도 일정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서쪽 벽면에서는 불균형의 요소는 약하고 균형의 요소는 강화되어 있다.
서쪽 벽면 맨 위편 간은 위아래에 넓게 벌려 횡목을 가로지르고, 그 사이 벽의 아래편 기둥에 붙여서 격자무늬 방문을 달았다. 서쪽 벽면의 중앙 3간에서는 균형과 대칭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으나, 아래 위의 한간에서는 그 균형과 대칭이 조금 무너진다. 두 간 다 벽면을 횡으로 3분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으나 횡단의 높이와 넓이, 문의 크기와 문을 달아맨 지점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이 사소한 어긋남은 무신경함의 소산 같이 여겨지기도 하나, 묘하게 벽면 전체에 생동하는 화음을 제공한다. 사실은 정밀하게 계산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사 동쪽 벽면에 이르면 균형은 사라지고 불균형의 미학이 국면을 지배한다. 동쪽은 바닥 자체를 3단으로 조금씩 층지게 만들어, 아래 두 간은 맨 아래 기단 위에, 그 위의 두간은 중간 높이의 기단 위에, 맨 위의 한 간은 제일 높은 기단 위에 배치하였다. 이것 자체가 불균형의 미학을 적극적으로 조장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제일 아래 간은 3단으로 횡단하고, 아래쪽 1단은 넓은 판재를 세워 붙였다. 두 번째 간은 중앙에 횡목을 두어 둘로 벽면을 나누고, 아래쪽은 판자벽 사이에 두 쪽 판자문을 달았다. 위의 3간은 가운데 두 개의 횡목을 벌려서 가로지르게 하여 벽면을 3등 분할하였는데, 그 횡단의 높낮이와 분할된 벽면의 넓이는 서로 다르다. 또 각 간의 분할된 중앙 벽면에는 각각 다른 모양의 창문을 조금씩 다른 벽면 위치에 가설하였다. 
주사 뒤쪽의 벽면은 중앙 3간이 나무판 문이고, 그 좌우 간은 동일한 모양의 벽면이다.
주사의 동쪽 면은 기울기가 주사 쪽보다는 심한 곳이다. 강당은 그 기울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우선 아래쪽 길에서 주사 쪽으로 나아가는 사이에 높은 언덕이 위로 붙어 있고, 강당은 그 위에 높다랗게 올라앉아 있다. 주사의 서편 벽 쪽으로 길을 따라 오르면 높은 언덕 위를 밀고 들어선 좁직한 마당이다. 강당은 마당 북쪽 부분에 높은 단을 쌓고 그 위에 또 올라앉아 있다. 기슭면의 급한 기울기를 잡아야 하였으므로, 강당을 앉힌 대좌의 석축은 자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단 앞쪽의 석축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제 1단은 3단 또는 4단의 석축을 쌓았고, 중앙에는 하나의 넓은 섬돌을 두었다. 기단의 위쪽은 폭이 좁은 뜨락이다. 뜨락 안으로 조금 들여서 이번에는 4단 또는 5단의 석축을 쌓아 제 2단을 만들었다. 제 2단은 제 1단보다 2배는 더 높다. 제 1단의 섬돌이 있던 자리 위쪽으로는 3개의 계단을 만들어 제 2단 위 뜨락으로 오르는 길을 만들었다.
제 2단의 높은 석축면 중 강당의 양쪽 끝 간 중앙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칼로 잘라내듯 기단 면이 차단되어 안쪽으로 들어가서 아궁이와 연결된다. 2단의 기단 면을 형성하고 있는 돌들은 크기가 각각 다른 돌들이다. 큰 돌과 작은 돌이 뒤섞여 있으므로 석축의 면은 층수가 각각 다르다. 자연석 바위를 표면만 조금 다듬어 서로 빈틈없이 짜 맞춰 석축을 만든 것이다.




앞마당에서 보았을 때, 석축은 높이 올라서 있고, 그 위에 강당이 높다랗게 자리 잡고 있다. 자연스럽게 위엄을 강조하는 미학이라고 하겠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평지에 석단을 올려 세운 것이 아니라 경사면에 그 기울기를 극복하기 위한 석단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석단의 높이가 위압감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엄을 강조한다는 것은, 이유야 어떠하든 강당이 자리 잡은 지점이 조금 오뚝한 언덕 위이고, 또 그 위의 오뚝한 석단 위에 강당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일종의 장중한 느낌을 가져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강당은 정명 5간 측면 2간의 규모이다. 완벽하게 대칭이 고려된 구조이다. 벽면은 모두 백회를 칠하였다. 기둥과 마루, 석가래와 방문 등의 목재를 재외하고는 백회의 벽면인 것이다.
전면 5간 중 가운데 3간은 마루이다. 마루 앞 부분의 양쪽 끝은 양쪽 방의 한 모서리를 이루는 각재의 기둥이고, 중앙에 벌려 세운 두 기둥은 배가 부른 원형의 기둥이다. 기둥의 초석은 조금은 단단해 보이는 사암을 다듬어서 썼다. 상당이 넓고 큰 초석이다. 마루의 횡면 각재는 기둥 사이에 끼워져 있다. 정면 3간, 측면 2간 규모의 마루는 들보와 횡보, 석가래로 이루어진 목구조가 수선, 횡선, 사선으로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환상적이다. 그 목구조 위쪽 삼각형 면에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동쪽 방의 벽면 쪽으로 걸려 있는 것은 ‘비해재’匪懈齋, ‘게으름을 없애는 집’이라는 뜻이다. 서쪽 방의 벽면 쪽으로 걸려 있는 것은 ‘무첨재’無?齋, ‘더럽힘이 없게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마루 앞 쪽 배흘림 기둥 사이에는 뜨락 위에 넓은 섬돌이 하나 놓여있다. 앞의 마당에서 볼 때, 마당 위의 섬돌까지는, 뜨락 면까지를 포함해서 7단의 계단이 놓여져 있는 셈이다. 마루 뒤쪽 벽면은 3간이 똑같이 처리되어 있다. 아래쪽 3분의 2까지는 나무판과 두 쪽 나무판문으로 되어 있고, 위쪽 3분의 1 부분은 백회로 바른 벽이다. 위쪽의 처마 밑으로는 두 횡목이 좁은 틈을 두고 배치되고, 그 사이를 각세개 씩의 역 사다리꼴 나무 부재를 끼워 처리하였다.  
양쪽의 방은 각각, 정면 1간 측면 2간의 규모이다. 통방이다. 방의 마루 쪽 벽면은 두 간이 조금 층지는 높이에서 횡목으로 각각 분할되어 있다. 아래쪽 간은 중간쯤에서 분할되어, 아래편에 키가 낮은 두쪽 방문을 달았다. 위쪽 간은 3분의 2쯤 되는 높이에서 분할되어, 조금 키가 높은 외쪽 방문을 달았다. 
강당의 뒤울은 밋밋한 기울기를 이루며 위로 오르다가 곧 높은 둔덕으로 이어진다. 강당과 주사는 재사 영역의 동쪽 편 날개를 구성하고 있다. 서쪽 날개 쪽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작산정사와 사당 건물이다.




작산정사와 송안군 묘
“이 건물은 송안군 이자수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성종 11년(1480년)에 퇴계 이황의 조부 삼형제가 처음 건립한 정사로 숙종 41년(1715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정사 앞면에 강당이 있고, 뒷면에는 송안군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 있다. 정사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재사는 동쪽에 따로 세워져 있는데 묘제를 위하여 마련한 건물이다. ㅁ자 형으로 전면에 6칸 누마루가 있고, 그 뒤로는 재실이 있는 전형적인 재사건축 양식을 보인다. 9칸 규모의 큰 방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작산정사 및 가창재사’ 안내판의 글이다.  정사와 재사는 경상북도 민속자료 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쪽 날개 부분은 정사영역이라 할 수 있다. 서쪽 건물들은 경사면을 이용하여 위 아래로 늘어서 있다.
정사는 정면 4간, 측면 1간 반 규모이다. 2단의 석축을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건물을 앉혔다. 앞쪽으로 나와 서 있는 4개의 기둥은 원형이다. 이 원형 기둥들 뒤로 반간 넓이의 마루를 마련하고, 건물의 앞쪽 벽면은 그 뒤로 물러 앉았다. 벽면을 이루고 있는 기둥은 각재이다. 건물은 서쪽 3간이 마루방이고, 동쪽 1간은 방이다. 서쪽 3간의 벽면은 각 4쪽의 긴 격자무늬 방문으로 메워져 있다. 방 쪽의 벽면은 위로 3분의 2 정도 높이에 횡목을 가로지르고 그 아래 중앙에 중간 규모의 방문을 달았다. 이 벽면은 방문과 목재를 제외하고는 호항토로 되어 있다. 3간 마루방 중간 간의 맨 앞쪽 처마 아래에는 ‘작산정사’ 현판이 걸려 있고, 그 좌 우 간의 뜨락 위에는 각각 널찍한 섬돌이 놓여져 있다. 정사의 서쪽 측면 벽은 마루 높이만큼 마루방도 위로 떠 있고, 벽면의 4분의 3정도 높이까지는 나무판 벽으로 되어 있고, 위쪽 4분의 1 높이는 흙벽이다.
정사의 뒤는 가파른 경사면이다. 서쪽 끝 부분으로 화강석 계단이 뒤의 사당 영역에 이르기 까지 높다랗게 가설되어 있다. 사당의 정문은 3간 규모이다. 동쪽 1간 쪽에 문이 열려 있다.
사당은 정면 3간 측면 1간 반 규모이다. 화강석으로 석단을 쌓고 기단을 마련하여 건물을 앉혔다. 앞에는 반간 넓이의 뜨락이 있다. 뜨락 앞으로 나서 있는 것은 원형기둥이다. 가운데 간의 처마 밑으로는 ‘송안군묘’松安君廟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사당의 동쪽 측문 밖에는 또 작은 2간 규모의 건물이 있다.


 




가창재사
이 좁직한 분지 속 세상의 몸체 역할을 하는 것은 가창재사이다. 가창재사는 동쪽으로 구강당 영역, 서쪽으로 정사 영역을 날개로 하여 그 중앙에 위쪽으로 올라서 있다. 재사는 커다란 바위면 을 석단으로 하여 그 위에 마련된 기단 위에 자리잡고 있다. 아래 쪽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바위 위에 높다랗게 올라서 있는 목재의 성채와도 같다.
바위 평지에는 다시 화강석 석단을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건물은 그 위에 자리잡았다. 정면 6간, 측면 6간 규모이다. 정면에는 2층의 누각을 두었다.
누각 1층은 대문영역을 제외하고는 회벽 처리가 되어 있다. 회벽의 위쪽 부분은 기와를 사선으로 넣었다. 전면 서쪽으로부터 3번째 간은 대문이다. 동쪽 끝 간의 아래쪽으로는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다. 대문간은 완전히 나무로 채워져 있다. 양쪽으로 폭 좁은 나무판을 두고, 아래에는 중앙부분이 아래 쪽으로 휘어지는 문지방을 대었다. 누각 2층은 동쪽 1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무판 벽과 나무판 문으로 되어 있다. 대문 위 2층 누각의 처마 밑에는 ‘화수루’華樹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화수루의 밑에 마련된 정문을 통해 들어가면, 2단의 낮은 석단 위에 사각의 안마당이 펼쳐져 있고, 그 뒤편으로 4단의 석축 위에 위쪽 건물이 올라앉아 있다.        
재사의 위쪽 건물은 정면 5간 측면 2간 규모이다. 서쪽 1간은 서쪽 건물의 벽 속으로 들어가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은 정면 4간이다. 이 네 간의 안마당 쪽 벽은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으나 조금씩 모습이 다르다. 똑 같이 두 쪽의 격자무늬 방문을 달고 문 허리 양쪽 벽을 횡목으로 가르고 있으며, 문의 위쪽에 문틀 겸 횡목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은 같다. 그러나 문의 크기는 다 조금씩 차이가 나고, 따라서 허리 횡목은 다 같은 높이이지만 위편 문틀 횡목은 높이가 다 달라지는 것이다. 이 4간의 앞쪽으로는 반간 규모의 마루이다. 이 네 간의 서쪽 제 1간 처마 밑에는 ‘가창재사’可倉齋舍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의 동쪽 옆구리 부분은 부엌이다. 3개의 아궁이가 서쪽을 향하여 자리잡고 있고, 서북쪽 모서리 부분에는 따로 간이 아궁이가 또 마련되어 있다.
재사의 동쪽 건물은 부엌 영역 아래 쪽으로 2간이 늘어서 있으며, 그 중 두 번째 간의 안마당 쪽 벽에는 폭좁은 계단이 붙어 있어 누마루에 이르는 길로 쓰여진다. 동쪽 건물의 나머지 부분은 누마루의 동쪽 면으로 기능한다.
재사의 서쪽 건물은 위 두 간은 윗 건물의 일부가 되고, 그 아래로 2간의 방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 아래쪽 부분은 누마루로 이어진다. 2간의 방 부분은 각 간마다 작은 두 쪽문이 붙어 있다.



재사의 누마루는 동쪽 1간은 동쪽 건물의 벽 속으로 들어가 있으므로 나머지 5간을 정면으로 하여 측면 1간 반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안마당 쪽으로 마루가 나가서 그 끝에 난간을 세워 두었으므로, 전체 측면 2간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난간은 서쪽 건물의 방 안쪽을 타고 나가 위 건물의 뜨락으로까지 이어진다. 누마루의 한 끝이 위쪽 건물 뜨락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누마루의 남쪽 벽 지붕 아래로는 세 개의 현판이 내걸려 있다. 중앙의 현판은 먹물을 뒤집어 쓰고 있어서 글자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탁본을 하러 온 사람이 그렇게 하였다는 관리인의 말은 나를 씁쓸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양편으로는 가창재사 창건과 중수 기록을 적은 현판, 문중이 지킬 조목을 적은 현판이 나붙어 있었다. 앞의 현판은 앞에서 내용을 적었으므로 여기에는 뒤의 현판 내용을 옮겨 본다.     


<문중이 지켜야 할 것들>
1. 별묘의 제사는 매양 한식과 추석 당일에 행하면 집사가 고르게 하지 못하는 폐가 있어서 군색하고 미안한 일이다. 지금부터는 5일 전에 제사를 지내고, 먼 곳에 사는 자손이라면 비록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근처에 사는 자손들은 늙어 병든 사람 외에는 아무 이유없이 불참하는 경우에는 벌을 내리도록 할 것이다. 한 번 불참하면 벌로 곡식 한 말, 두 번 불참하면 노비에게 30대 태장, 3번 불참하면 중한 문벌門罰(가문의 벌)을 내린다.
1. 매년 정월 3일 근처에 사는 자손들은 다 모여 제사에서 알묘를 한다.
1. 재사를 수호하고 제사를 힘써 행하는 일은 유사가 차례로 봉행하는 일은 유사가 차례로 알아서 행하는 것이니 관계되는 모든 것들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정해진 예에 따라서 돌아가며 하고, 바꿀 때에는 일을 잘 아는 사람이 특별히 택해서 정한다.
1. 이전에는 4 명의 제사에 쓰는 일꾼은 종가에서 내는 것으로 부렸으나, 지금부터는 한식과 추석의 일꾼 비용은 유사가 부담한다.
1. 재사의 모든 일은 종가에서 알아서 해온 지가 이미 오래이지만, 요즈음에 이르러서는 옛날과 같지 않고, 수호하기가 아주 어려워져서 폐허가 될 지경이 되었다. 그러므로 모임을 열어 문중의 의논으로 유사 2인을 정하는 것을 영원한 법식으로 삼으니, 재사의 모든 일은 유사가 걱정하고 생각해서 알아서 행하도록 한다.
1. 유사의 직임은 여러 번 바뀌어서 오래 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전례여서 유람삼아 오고가는 일이 되어 버렸다. 여러 일을 담당한 직임이 유명무실하게 된 것은 바로 이것으로 부터이다. 이 후로는 매년 문중회의에서 기한을 정하여 직임을 고르도록 한다.
1. 우리 문중에서 재사를 지은 것은 본래 별묘를 수호하고 선산을 지키고자 한 것이고, 그 수호하는 일은 직임을 담당한 사람들이 각자 걱정하고 생각을 많이 해서 행하여 온 것인데, 일이 여의치 못하여 재사가 폐허가 되어 버렸다. 뼈아프게 반성하는 마음으로 몇 명의 이름없는 중을 모으나, 이후 재사 보존의 방책을 삼가는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종이를 뜬다거나, 허드레 물건을 만든다거나, 신을 짓는다거나, 장을 담그는 일 등에 끌어다 써서 이들이 소임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문중 사람이 혹시라도 이런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다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고 문벌로 다스릴 것이다.
1. 승군을 뽑아갈 때 재사의 중이 혹시라도 침탈을 당한다면 유사는 힘을 다하여 보호하여야 한다. 관에 진정할 일이 있으면 문중에 알려 연명으로 진정서를 올린다. 기일을 정하여 두루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데 문중 사람으로 만약 같은 목소리로 호응하지 않으면 각파의 문장이 노비에게 40대 태장을 가하고, 나중에 문중에서 논죄한다.
1. 재사는 이미 제사를 받드는 곳이니, 이곳은 그 중요성이 막중한 곳이다. 전염병 같은 것을 피하여 다급한 사람이 혹 와서 머물려 할 경우, 유사가 먼저 ?아낸 후에 나중에 문중에서 논죄한다.
1. 사당과 재사의 담장에 무너진 곳이 있으면 바로 수리한다. 일을 맡은 사람이 혹 그릇된 사람이어서 천연세월로 직임이 다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경우에는 일의 규모가 점점 커져 폐해가 막심할 것이므로, 그런 일을 발견하였을 때 유사가 독단으로 수리하는 일을 추진하여 기일을 정해 완공한 후에 문장에게 고하여 그 앞에서 중하게 문벌을 가한다.
1. 사당과 재사의 수호를 전적으로 재사에 머무는 중에게 맡기더라도 보호하는데 전념하여 더 많아지게 하고 잃거나 빼앗기지는 않도록 애를 써야 하는데, 혹 잘 돌아보지 않아서 더 늘이기는 커녕 전에 머물던 중들조차 잃거나 빼앗기게 된다면 문중 회합에서 유사의 노비와 자식을 50대 태형을 가하고 영원히 단죄한다.
1. 도솔원, 감악산, 수리동 등 세 곳 선산은 자손들이 계속하여 묻힐 곳이니 힘을 다하여 수호하여야 한다. 경신년 기근 때에 산직이 등이 다 도망하여 지키는 사람이 없게 되니 산불과 도벌을 막지 못해 벌거숭이 산이 되었다. 지금부터는 재사의 유사와 연이어 묘지를 쓴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산직이 할 만한 사람을 구해 빈틈없이 수호되는 산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혹 이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문장에게 고하여 그 앞에서 중하게 문벌을 가한다.
1. 묘위에 딸린 전답에서 나온 소출은 위 아래의 제사 비용에 쓰고 비록 남은 곡식이 있더라도 절대로 사소한 일에 쓰지 않는다. 단지 수리를 할때 필요한 양곡으로 쓰고, 만약 수리할 일이 없다면 긴요한 기물을 구입하여 타작 하는 곳에서 쓸 수 있도록 돌린다. 혹 문중의 합의를 거치지 않고 부당하게 쓴 경우에는 하나하나 되물리게 한 후 중하게 문벌을 가한다.
1. 제기, 제사 자리, 재사의 각종 기물들은 절대적으로 잘 보존하여야 한다. 혹시 조심스럽게 점검하지 못하고 파괴되거나 잃었을 경우에는 유사가 스스로 갖추어 들여놓은 다음에야 직임에서 물러나는 것을 허용한다. 또한 산 안에 연이어 장지를 쓴 사람은 기물을 내어 일에 쓰고 일하는 사람들이 잘 수습하여 되돌리지 못해 분실하거나 파괴되었을 때 물어 놓아야 한다.
경신 정월 3일.
이하 여러 인사 서명.”




누마루의 천정에는 두 개의 북이 매달려 있다. 하나는 틀만 남고 가죽 부분은 없어진 북이고, 다른 하나는 채색까지 고운 북인데, 이 북의 한편에는 ‘작산서원’鵲山書院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이곳이 서원의 기능도 같이 수행하였음을 알려 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뒤울의 뚝향나무
 가창재사에는 관리인이 산다. 그러나 이 관리인은 다른 건물도 많이 있는데도 굳이 재사 안에서 살림을 사는 선택을 함으로써 재사 건물을 완전히 잡다한 살림살이로 채워 놓았다. 그리하여 재사는 속기 가득한 일상의 영역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의 가거하지 않으면 건물은 무너져 간다. 사람이 기거하면 건물이 향취를 잃어간다. 이 두가지 측면은 오래된 건물을 앞에 두고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부분이다.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인가? 어떻게 오래된 건물을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 주인이 떠나고 객이 들어서 있거나, 객 조차 없이 혼자만으로 버티고 있는 오래된 건물의 현상은 이런 두 가지 양상 사이에 우리를 세워두곤 하는 것이다.
여러 건물로 이루어진 소나무 산의 골짜기 속에 숨은 세상이 바로 가창재사 영역이다. 가창재사는 선산부사 이정의 분암으로 지어져서 강당과 재사의 영역을 수행하다가 점차적으로 송안군 묘제, 서원의 역할 등을 하는 것으로 확장되어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진성이씨 두루 종계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기능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는 뒤울의 뚝향나무를 손꼽아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선산부사 이 정이 평안도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뚝향나무는 오늘도 두루 종가의 바깥마당을 지키고 서 있다. 그 뚝향나무의 후대목인가? 가창재사의 뒤 울, 산기슭으로 올라앉은 부분에는 잘 생긴 뚝향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아직은 젊은 뚝향나무이다.<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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