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회 화요음악회는 한바탕 흥겨운 잔치였습니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작년에 벌써 열릴 수 있었을 300회 화요음악회가 오늘 2021년 4월27일에 열렸습니다. 매주 열리는 화요음악회가 작년 한 해 동안 겨우 15번밖에 열릴 수 없었으니 코로나가 우리 생활 전반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 많은 사람이 코로나로 힘들어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사는 뉴질랜드는 다행히 코로나가 잠잠하여 이렇게 300회 화요음악회를 자축하는 모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오늘따라 온종일 바람이 불고 비가 오락가락하여 날씨가 화요음악회를 시샘하나 좀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서 비도 바람도 잔잔해지더니 약속 시각인 저녁 6시가 되자 하늘이 평온을 되찾고 옅은 어둠과 구름 사이로 보름달이 언뜻언뜻 얼굴을 내밀며 수줍게 축하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아름다운 손길
작든 크든 행사가 있을 때 도와주고 배려해주는 아름다운 손길이 있어 그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사람 사는 기쁨을 느낍니다. 마침 오늘 아침 아내에게 치과 약속이 잡혀있어 마음은 바쁘지만 다녀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차에서 내려 발길을 옮기는 순간 우리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현관 앞에 단정하게 놓인 꽃과 케이크였습니다. 누군가 오늘 저녁에 시간을 낼 수 없어 참석은 못 하지만 축하하고 싶은 마음을 표하고 싶어 일부러 찾아왔다가 우리가 없자 그냥 문 앞에 놓고 간 모양입니다. 혹시라도 비에 젖을까 정원의 의자를 처마 밑 현관 앞에 옮겨 그 위에 예쁘게 놓고 갔습니다. 이름도 안 밝히고 가셨지만, Music, Congratulations라고 쓴 케이크는 글자로, 분홍색 포장지에 싸인 꽃은 향기로, 놓고 간 분의 마음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꽃과 케이크를 안으로 들이면서 우리 부부는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정경
청소하랴 음식 준비하랴 한참 정신이 없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가 벌써 오셨나? 아직 시간이 안 됐는데,’하며 문을 열었더니 꽃을 한 아름 안고 서 있는 모녀가 있었습니다. ‘아니 금이가 어떻게,’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나에게 ‘선생님 축하 드려요,’하며 모녀는 내게 꽃을 안겼습니다. 금이는 까마득한 대학 후배입니다. 남편 사업 때문에 멀리 기스본에 내려가 있는데 며칠 전에 잠깐 일 보러 오클랜드에 왔다가 화요음악회 소식을 들었답니다. 저녁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어 딸과 함께 들렸다고 했습니다. 같이 자리를 못 해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하면서 뒤돌아서는 모녀의 모습은 내게 안겨준 꽃보다 몇 배나 아름다운 정경이었습니다.
잔치가 시작되고
저녁 6시가 가까워지자 회원들이 오시기 시작했습니다. 포트럭(potluck)으로 식사를 하기로 했기에 오시는 분마다 갖고 오신 한 접시씩의 요리가 어느덧 탁자 위에 그득하게 차려졌습니다. 아마도 세계에서 제일 먹는 인심이 좋은 민족이 우리 민족일 것입니다. 육해공군의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들이 저마다 맛과 색깔을 뽐내는데 어느 분이 직접 담가서 가져왔다 는 감주까지 곁들여지자 멋지고 풍요로운 뷔페 잔칫상이 그럴듯하게 벌어졌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기에 우선 여성분부터 시작해서 뷔페 상을 향했고 잠시 뒤 남자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마음껏 먹고 마시고 이야기의 꽃을 피우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 준비된 행사를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음악은 영혼의 양식이다
7시 반이 되자 가장 연장자이신 한 박사님의 축사로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팔십 연세가 무색할 정도로 건강하고 바쁜 삶을 살아가시는 한 박사님은 고희가 넘어 배우시기 시작한 피아노 솜씨가 어느덧 상당한 수준에 오르셨습니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달빛 아래서 멋지게 연주할 날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한 박사님은 축사와 더불어 직접 쓰신 ‘어느 눈먼 소녀를 위한 소나타’라는 제목의 수필을 낭랑한 목소리로 낭독해주셔서 모두의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어서 친필 붓글씨로 직접 제작하신 ‘음악은 영혼의 양식이다’라는 족자를 저희 부부에게 선물로 증정해 주셨습니다. 오클랜드의 2대 명필의 한 분이신 한 박사님은 ‘묵향회’라는 서예 모임을 통해 교민들에게 서예를 지도해 주시기도 합니다. 족자를 받자 너무 감사해 즉시로 벽에 걸었습니다.
정이정 처마 품에서 귀를 씻다
축사에 뒤이어 오늘을 축하해주시기 위해 오신 뉴질랜드 스콜라문학회 문우들을 대표해서 여심은(필명) 시인께서 자작하신 축시(祝詩) ‘정이정 처마 품에서 귀를 씻다’를 직접 낭독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농부 시인이 되신 여시인은 한국에서는 공군사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셨던 철학 교수시기도 합니다. 같은 시기에 저는 그곳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그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삶의 구비구비는 신비롭기만 합니다. 낭독해 주신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정이정(淨耳亭)은 고 박용구 선생님의 세이정(洗耳亭)을 본떠 지은 화요음악회의 음악감상실 이름입니다.
‘사랑해’로 시작한 추억의 가요와 ‘울어라 열풍’의 색소폰 연주
이어서 이종인 회원께서 그동안 숨겨놓았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 선보이셨습니다. 멋진 통기타 연주와 찬양대에서 베이스로 다져진 그윽한 목소리로 아득한 그 옛날 7080의 가요 보따리를 듬뿍 풀어놓아 우리 모두를 향수에 젖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해, 토요일 밤, 아침 이슬로 이어지는 정다운 가요들은 곧 참석자 모두의 손뼉과 합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어서 바톤을 받은 요산(별명)님의 색소폰 연주는 또한 일품이었습니다. 팔순을 눈앞에 두신 요산님이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불과 이삼 년 전입니다. 그 나이에 시작하신 것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열정과 실력입니다. 교민들을 위해 한글학교 교장으로 열심히 봉사하셨기에 여왕페하의 메달(QSM)까지 받으신 요산님은 요즘은 산악회 회장으로 활약하시는 대단한 노익장이십니다. 오늘 울어라 열풍을 비롯한 세 곡의 트럼펫 연주로 여성 회원 분들의 집중적인 박수를 받으셨습니다. 요산님은 제 대학 선배이십니다. 60년대 말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학창 선후배의 인연도 귀하고 고맙기만 합니다.
Hey, Hey, My Rock.
오늘은 클래식을 내려놓고 음악의 다른 세계를 마음껏 휘젓기로 한 날입니다. 그런 의미로 특별 손님을 모셨는데 바로 최근에 Hey, Hey, My Rock이란 제목의 책을 출판하신 최영무 작가입니다.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40년 동안 Rock 음악에 빠져 살다가 드디어 책까지 내셨다는 최작가의 음악 이야기는 저같이 Rock에 무지한 사람에게는 경이로울 따름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유익한 이야기 끝에 퀴즈를 세 문제 내셨습니다. 맞춘 사람에게 책을 드리겠다고 했지만 참뜻은 그냥 주기보다는 재미있게 증정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Rock 가수 중에 노벨 문학상을 탄 사람이 누구냐는 것과 같은 쉬운 질문이었기에 회원분들이 세 문제 모두 답을 맞혔고 상으로 책을 받고 즐거워했습니다. 끝으로 혹시라도 Rock을 시끄러운 음악으로 알고 계신 분께 결코 그렇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며 준비해온 CD에 수록된 ‘The Love’라는 노래를 들려주셨습니다. 아름답고 평온한 노래였습니다. 저도 앞으로 Rock 음악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300회 축하 케이크 자르기
뉴질랜드 스콜라 문학회 문우들이 오셔서 300회 화요음악회를 축하해주셨기에 오늘이 한결 뜻깊어졌습니다. 문학회 카페의 온라인 상에서 자주 만나고 2주에 한 번은 같이 모여 직접 문학을 논하고 작품을 발표하기를 10년이 넘게 하다 보니 이국에서의 삶이 덜 외롭고 또 풍요로워졌습니다. 오늘 맛있는 닭 요리도 듬뿍 가져오시고 축시도 낭송해주셔 감사했는데 회원 중 ‘따뜻한 얼음(필명)’님이 300회 기념 특별 케이크를 마련해 오셔 우리 부부가 같이 자르고 촛불을 끄는 순서를 가졌습니다. 300이라는 숫자가 앙증스러운 케이크가 너무 예뻐 자르기가 아까울 정도였지만 용기를 내서 잘랐고 우리 부부가 어린애같이 기쁜 마음으로 두 볼에 공기를 가득 넣은 뒤 후하니 내 불어 촛불을 껐습니다. 촛불이 꺼지는 순간 와 하고 박수를 보내시는 모든 분들의 환호에 이렇게 사랑을 받아도 되나 하는 송구스런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노래와 시(詩)가 어우러진 시간
케이크를 잘라 돌리고 모두가 따뜻한 차와 더불어 케이크를 즐기는 동안 화요음악회 회원들의 장기 자랑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무대의 중앙에 나타나신 분은 이강산(별명)님이었습니다. 언제나 너그럽고 유머있는 인품으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시는 강산님은 Amazing Grace를 영어로 은혜롭게 부르시더니 이어서 Besame Mucho를 원어로 멋지게 부르셨습니다. 그러더니 별안간 자세와 목소리를 바꾸어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을 암송하시더니 이어서 조지훈의 ‘승무’를 암송하고 다시 박목월의 시를 암송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암기력에 모두가 경탄하고 있을 때에 ‘이제 마지막으로 한 곡만 더 부르고 끝내겠습니다,’라고 하시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어 ‘Ave Maria’를 엄숙하고 경건하게 부르고 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강산님은 다재다능하신 분이지만 무엇보다도 소설을 쓰시는 작가이십니다. 오래전에 문단에 등단하셨고 고희를 훨씬 넘긴 지금도 계속해서 글을 쓰시는 모습이 참 보기에 좋습니다.
이어서 Sunny(영어 이름)님이 용기를 내서 일어나셔서 아주 은혜로운 복음성가를 불러주셨습니다. 목사님의 부인답게 차분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불러 주신 노래에 모두가 잠깐 숙연해질 정도였습니다. 이어서 영미님이 좋아하는 애송시를 예쁜 목소리로 낭송해 주셔 이번엔 모두가 다시 젊은 날 문학소녀의 세계로 돌아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방금 들은 시의 감성에 잠겨있을 때 청준(별명)님이 나오셔서 그윽한 목소리로 가을 노래를 불러주셨습니다. 조용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을 울려주는 노랫가락에 모두가 자세를 바로잡도록 만드는 좋은 노래였습니다. 오늘 행사의 피날레를 장식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노래였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전진을 약속하며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쉽지만 끝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10년 전 화요음악회를 시작할 때 저희 부부가 오클랜드에 있는 한 화요일 저녁 저희 집은 열려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300회가 있는 것은 저희 부부의 노력보다는 오히려 끊임없이 이 자리를 찾아주신 여러분의 덕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 모임을 사랑해주시고 성원해주셔서 화요음악회가 계속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제가 앞에 나가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정말 많은 분이 오셔서 성황을 이루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들이지만 오늘 모여서 가슴을 털어놓고 노래를 하고 시를 낭송하고 음악을 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 너무 기쁩니다. 우리 교민 사회에 이런 시간이 더 있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 이 장소가 화요음악회 이외에도 더욱 쓰임을 받는 장소가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보잘것없는 장소지만 저는 이 장소를 언제나 여러분을 위해 활짝 열어놓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300회 화요음악회가 끝났습니다. 아무런 격식 없이 진행된 화요음악회는 우리끼리의 흥겨운 잔치였습니다. 도와주신 모든 분께 다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21. 4. 27. 정이정(淨耳亭) 청지기 석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