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추억 / 이상록
기억의 성채도 언젠간 무너지지만 내 인생극장은
막을 내릴 수 없다네
삼팔장은 파장 흐느끼는 뽕짝 무대래야 장터 마당
우리는 들뜨지 학교에선 기죽던 강둑아래 녀석도 나방
처럼 설치지 노란 등 꺼지고 영사기 소리 밤하늘 긁으면
어김없이 죽죽 장대비 내리지 매가리 없는 삶 눈물처럼
때도 없이 내리지 사랑해선 안될 사람 통통배는 서울로
가는데 소나무에 기대 바라만 보는 여인 아, 문희,
눈물도 예쁜 저런 여자라면 삶이 한두 번 속여야지
그래도 지금 여자 갸름한 목덜미는 꼭 닮았다네
촌구석에 극장이라니 거무죽죽 지붕 사이 우뚝한 국제극장
김일 박치기를 단체로 볼 줄이야 허장강도 도금봉도 막걸리
안주 희갑이는 애들도 만만하게 보는 데 장돌뱅이로 돌고
돈 필름은 짐꾼들 셈처럼 자꾸만 끊어져 하필 두 입술이
닿을 찰나에 건달들 '도끼' 고함에 다시 이어져도
꼴도 보기 싫은 놈 자르고픈 컷, 컷, 정말 도끼로 뭉툭
도려내고 사는 맛도 있어야지 '한 떨기 장미 꽃잎이
젖을 때'라나 아직도 콩닥거린다네
범일동 시궁창 강구 군단도 촌놈 부산구경 못 막았지
가무잡잡 삼화고무 앳된 처자들 삼일극장이 비좁네
뽕도 딸 겸 들어서면 분내 땀내 찐득거려 삼성극장으로
건너가면 지린내가 폴폴 따라붙지 헛헛하지 액션으로
한 방 멜로로 또 한 방 동시에 달래주곤 남진까지 불러다
구장집 봉순이 봉긋한 가슴에 바람 넣더니 바람과 함께
사라진 봉순인 태화고무 고무신처럼 어디서 질기게 살아갈테지
그 보림극장도 문을 닫았다네
<2023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연착 / 노수옥
오전에 내린다는 비는
오후가 되어서야 쏟아졌다
아마도 우산들의 모의가 있었지 싶다
몇몇 우산의 후예는 지구 밖으로 날아갔다. 활짝 펴졌다.
그리고 다시 우기를 살피고 비의 입자를 감지했다.
가끔은 지구 밖에서도 비가 내린다고 빗소리 같은 잡음을
전송해 왔다
비는 늘 시시각각을 벗어난 적이 없다 어느 곳에서든
정시를 고집하지 않고 습도의 비율을 찾아다녔다.
연착이 없는 태양과 달,
단호한 날짜마다 태양과 달의 봉인 도장이 찍혀 있다
비가 내리는 동안 지상의 나무는 그늘을 따돌리고 잠깐
자란다. 타살된 오전에서 오후의 빗방울 화석이 발견
되었지만 그건 인류의 역사를 밟고 지나간 거인의 발
자국과 같은 과정일 것이다.
느닷없이 쏟아진 소나기는 저 아랫마을에 가서 깊어
졌다
끊긴 오전에서 오후를 넘어온 시내버스 운전사는 연착을
설명하느라 바쁘고 왼손쯤에서 사라졌던 태양이 오른손에서
발견되었다.
이유 불문, 태어나는 일에는 연착이 없지만 태몽은 연착이
있다
약속은 대부분 내려야 할 곳을 놓친 사람의 입장이 아니다
중간에 교차로가 있고
속도의 결렬이 있고
아직 분실이
바닥에 닿지 못하는 이유다
<2023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장 낮은 곳의 말 言 / 함종대
발톱은 발의 말이다
발은 한순간도 표현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나는 낮은 곳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짓눌리거나 압박받는 곳에서 나오는 언어는 어감이
딱딱하다
그렇다고 낮은 곳 아우성이 다 각질이 아니어서
옥죈 것을 벗겨 어루만지면 이내 호응한다
늦은 퇴근 후 양말을 벗으면
탈진하여 서로 부등켜안고 있는
발가락들이 하는 말을 더럽다고 외면한 날이 많았다
안으로 삼킨 말이 발등으로 퉁퉁 부어오른 날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에게 내미는 말을
나는 야멸차게 살아내며 살았구나
오늘은 발을 개울에 데려간다
물은 지금 머무는 곳이 가장 높은 곳이라
말하지 않아도 속내를 아는 양
같은 족을 만난 듯 온몸으로 감싸 안는다
발이 내어놓는 울음인지 물의 손길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이 봄나무에 물오르듯 올라온다
머리를 낮게 숙여 두 손으로 발을 잡아본다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는지 볼까지 흠뻑 젖었다
개울이 발의 울음소리까지 보듬는 걸 보면
오래전부터 신의 발등이나
나무들의 발가락을 어루만져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개울도 울컥거릴 때가 있어 강에 발을 담근다
바다는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 하구를 보듬는다
장사가 어려워 가게를 폐업하던 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물의 등을 철썩철썩 쓸어내린다
<2023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 최주식
부산아파트 앞 버스정류소는 7번 국도의 시작 또는 종점
우리집은 종점이었어 산7번지 처음 보는 마이크로버스가
똑같이 생긴 집에서 똑같이 생긴 아이들을 실어 날랐어
똑같은 책가방을 메고 똑같은 학교에서 똑같이 생기지
않은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던 어느 날 내가 전학 온 것처럼
그 아이도 전학을 가버리고 나는 인생이 무언가 오면
가는 것이라고 비정한 것이라고 잡을 구 없는 것이라
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하루는 종점에서 시작
되었어
아침이면 늘 신발이 젖었어 밤새 파도가 다녀간 거야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온다고 그래서 종점에 내려
처음에 이상했던 일이 계속 일어나면 아무도 의심하
지 않아
아무도 도망치지 못한 하루가 말라비틀어진 화분 사
이로 걸어가면
아저씨 제발 화분에 물 좀 주세요 글쎄 파도가 화분만
적시지 않는구나 공허한 대답처럼 버스가 다시 오면
젖었다 마른 행주처럼
종점에서 시작되는 아침 젖은 신발을 신고 다니면
세상이 질척거려
자꾸 달아나고만 싶어 7번 국도를 달리면 바다를 볼
수 있을거야
파도를 만나면 내 젖은 신발을 두고 올거야 다시는
젖은 신발을 신지 않을 것이라고 똑같이 생기지 않은
여자아이를 닮은 다 큰 여자가 국수를 마는 집을 나
선 날
종점에 버스는 한 대도 없었어
<2023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다락벌레의 소(沼)로 간 소 / 안시표
섬 노을이 바다를 펼치면 다락벌레 벼랑 속으로
거친 숨결 하나, 하늘로 간 沼에 소가 있었지
도시의 아파트 한 채처럼 송아지를 분양받은
큰어머니
차양 넓은 햇살이 작은 어깨에 내려앉아
들판의 하루가 감투로 숨 차오를 때
다락벌레 한 가운데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에
잠시 쉬어가고는 했지
하양 떠밀려 오는 벼랑 파도 소리가
무성한 파동을 이끌고 수초의 혼을 빼놓을 때
개구리 숨죽이며 알 낳은 소리, 공기 방울로 터져
나오고
진흙 물뱀 꼬리는 바람의 온기를 감추며 저물어 갔지
어디선가 장수풍뎅이 물가에 지문 찍듯 沼지천을 쿵쿵
울리며
소의 발굽 소리 다가올 적, 겁 없이 손에 쥐어진 버들
막대 하나
물가에 비친 늙은 호박 같은 엉덩짝을 찰싹 내리치고는
했어
목을 축이는 소의 울음 곁, 하얀 목덜미를 씻는
큰어머니의 환한 하루가
이렇듯 흘러가는 어진 눈매에
느려도 천 리를 가는 황소의 콧김으로
점점 沼와 뜨겁게 맞닿았던 어느 여름이었어
꿈결 沼에 비친 낮달을 사각사각 베어 물다
생이가래 속으로 툭 떨어진 이빨을 찾으러 손을 집어
넣던 딸에
간질대는 물뱀에 울면서 깨어난 다락벌레엔
종일 비가 내렸고
웃자란 풀을 쫓다 벼랑 아래로 큰어머니의 황소는
별안간 떨어졌지
바다는 굵어지는 빗소리에 큰어머니 상혼(喪魂)의
궁핍을 남기고
그 해, 무른 콜타르 감정이 다락벌레 沼를 자르니
쭈욱 뻗어나간 신작로에 소금 핀 마른 눈물만 번져
갔어
서쪽 돌 염전 따라 벌레의 명치끝을 밟으면 다락쉼터
표지석을 만날 수 있어
바람 부는 날 이곳에 서면 수평선 너머로 간 큰어머니
의 황소가
아직도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를 밟으며
바다로 터져나간 신음을 삼키는 것 같아 먹먹해지고
는 해
<2023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