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야산 조항산 청화산
《 버리미기재(450m), 675봉 》
버리미기재에서 대야산 정상까지는 비탐방지역이다.
특히 대야산 근처의 암릉은 높은 경사도의 밧줄코스 위험하기에 출입을 허가할 수 있는 지역은 아니라 본다.
하지만 국토 지형 상 백두대간의 코스가 된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니 진행할 수 밖에 없다.
속리산 문장대로 올라가는 늘재와는 달리 대야산방향으로는 출입금지 팻말뿐만 아니라 팬스가 설치되어 있어서 팬스 동쪽으로 둘러서 접근하였다.
정상코스가 아닌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시작하기에 진행방향의 좌측에 작은 봉우리가 있어 밤에 길을 혼동하여 약간의 알바가 있었다.
버리미기재에서 약 500m(고도 90m정도) 올라오면 헬기장이 있다.
대야산 자체가 큰 암벽바위로 구성되어서 그런지, 대야산으로 접근하는 산길이 그리 편하지는 않은 길이다.
버리미기재 :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군 청전면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아홉 번 시집을 가서 낳은 자식들을 '벌어먹이던' 팔자 센 주막집 과부의 전설이 전해한다.
버리(보리) 미기(먹이)의 합성어로 보리나 지어먹던 궁핍한 곳이라는 설과 버리미기(벌어먹이다의 경상도 사투리)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위 지도는 버리미기재에서 헬기장 쉼터 위치이다.
윗 사진. 675봉 직전 진행길 앞에 막아선 큰 바위.
윗 사진. 큰 바위를 지나 수분간 진행하면 675봉이 있다. 사진에 보이는 바위가 675봉으로 근처를 지나간다.
《 곰넘이봉(동봉/서봉, 해발 약733m), 미륵바위(약 610m) 》
675봉에서 약 300m 진행하면 곰넘이봉에 도착한다. 곰넘이봉 동봉 정상에 오면 큰 바위 주위로 산행로가 있다.
산행로에 시그널이 있어 정상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며 시그널 있는 쪽의 좌측 편에 여러개의 큰 바위들이 뭉쳐져 있다.
좌측 가운데 바위로 올라가면 과거에는 정상석이 있었으나, 현재는 철거되어 없는 상태이지만 대신 나무에 시그널이 많이 있어 정상임을 알 수 있다.
윗 사진. 곰넘이봉 바위위의 사진. 정상석은 사라지고 없다.
곰넘이봉(약 733m) :
출발지점인 도로가 버리미기재이라면, 곰넘이봉은 곰들이 넘어 다녔다는 봉우리라 하여 그렇게 명칭되었다고 한다.
정상석이 바위 위에 위치하여 바위를 올라가면 있다고 하는데 2019년 10월경에는 정상석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윗 사진. 곰넘이봉 서봉. 시그널이 있어 정상임을 알 수 있다.
곰넘이봉 동봉에서 서봉까지는 약 300m 정도의 거리이다.
서봉을 지나서는 경사도가 있는 암릉의 내리막 코스이며, 주위에 크고 작은 바위들을 많이 지나쳐 가게 된다.
서봉에서 약 300m 정도 내려가면 내려가는 곳 정면에 머리 윗부분에 방울이 달린 묘한 바위가 나타나게 된다. 미륵바위라고 한다.
여기서 200m정도 진행하면 579봉 헬기장 공터가 나타나며, 헬기장에서 400m 정도 진행하면 블란치재 사거리에 도착한다.
윗 사진 : 미륵바위. 약 6m 정도 높이의 바위이다..
윗 사진은 2009년 비탐방이 아니었을 때 산행한 사진이다. (바위 크기를 파악하기 위해 올립니다)
윗 사진 . 미륵바위 위치(해발 610m정도).
윗 사진. 579봉 헬기장.
《 블란치재(해발 510m), 촛대봉(해발 668m) 》
블란치재 사거리는 공터처럼 되어 있으며 진행방향의 왼쪽(동쪽)계곡을 블란치골이라 한다. 네이버지도에서는 ‘블란티재’로 표시되어 있다.
블란치재에서 600m 진행하면 촛대봉이 나온다. 촛대봉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약 150m의 오르막길이 그리 험난하지는 않다.
촛대봉에서 하산길로 200m 정도 가면 촛대재가 나오고 그 곳에서 대야산까지는 약 1㎞ 오르막 코스가 시작된다.
윗 사진 . 블란티재 사거리.
윗 그림 . 대동여지도의 불한령(不寒嶺). 블란티재로 추정된다.
윗 사진 . 촛대봉. 정상석에는 661m 고도표식이 있다.
블란치재(510m) :
촛대봉과 곰넘이봉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충북 괴산군 청전면 관평리와 경북 문경군 가은읍 완장리를 동서로 연결하고 있다.
불란티재 옛길은 오로지 완장리에 속해 있지만, 남한강과 낙동강의 분수계 역할을 한다.
즉 불란치재 정상 서쪽 계곡은 괴산 선유동과 화양동 계곡을 거쳐 남한강에 합류하고, 동쪽 계곡은 문경 선유동을 지나 낙동강에 합류한다.
주민들은 이 고개를 불란치재 혹은 불란티재라 부른다.
아마도 과거 불이 난 고개라는 뜻으로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백두대간의 뼈재가 수령(秀嶺)으로 한자(漢字)화되듯이, 불란치(불이 난 고개)도 不寒嶺(불한령) 또는 弗寒嶺(불한령)의 명칭으로 한자(漢字)화되었으리라 보인다.
그리고 한자(漢字)의 뜻에 맞추어 ‘춥지 않은 고개’라는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라 추정된다.
과거 블란치재의 표지석은 弗寒嶺(불한령)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산행금지 표식만 남아 있을 뿐이다.
블란치재의 동쪽을 블란치골이라고 하기에, 블란치재 동쪽에서 화재가 난 듯 싶다.
불란치재는 옛날에는 사람들의 통행량이 제법 많았다고 한다.
2008년 4월 28일 버리미기재에 922번 국도가 2차선 포장도로로 확장건설되면서 불란티재는 쓰지지 않는 옛길이 되어 버렸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서 블란티재를 대야산 북쪽지맥에 불한령(不寒嶺)으로 표시하고 있다.
역전앞(驛前앞)이라는 단어처럼 ‘블란티재·블란치재’도 고개라는 의미를 ‘티’, ‘치’, ‘재’라는 같은 뜻을 가진 단어의 중복으로 ‘블란치’로 수정해보는 것도 어떻까 생각해 본다.
《 대야산(해발 930.7m) 》
대야산의 정상근처의 암릉절벽에 다다를 때까지 오르막 코스는 그리 힘들지 않다.
‘전방 80m 암릉구간은 90도직벽으로 매우 위험하다’는 표지판이 나오면 그때부터 밧줄코스가 시작된다.
밧줄코스 중간이상 올라가다보면 바위바닥에 좌측으로 페인트로 화살표가 있다.
여기서 화살표방향대로 좌측으로 가면 높은 직벽에 밧줄이 있으며, 암벽핀이 박혀있어 핀을 밟으면서 올라갈 수 있다.
화살표를 놓치고 직진하게 되면 경사도는 조금 덜하지만 암벽핀이 없는 과거의 밧줄코스구간이라고 한다.
위험한 직벽구간이 끝나면 100m정도의 능선구간을 거쳐 대야산 정상에 도착한다.
윗 사진. 사진의 보가와는 달리 거의 직벽이다.
윗 사진. 대야산 정상석.
대야산(大野山, 大冶山, 931m) 상대봉(上臺峰) :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대야산(大耶山)의 유래는 물을 담아서 쓰는 둥글넓적한 그릇을 말하는 순수한 우리말인 대야를 말하는 것으로 정상이 대야를 엎어놓은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 대야’지명은 『여지도서』(문경에“대야산大耶山)은 가은현 서쪽20리에 있는데 희양산으로부터 나온다.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있다”라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해동지도』에는 청화산 오른쪽에 한자 표기가 다른 대야산(大也山)이 있는데 그 바로 아래에선 선유동(仙遊洞)이 표시되어 있다.
국토지리정보원/국토정보플랫폼(map.ngii.go.kr)/지명유래집에서는 대야산의 한자(漢字)를 우선 한자명으로 大野山으로 적고 있으나 대야산大耶山, 대지산大也山, 대야산大冶山, 대하산大河山 등의 다른 명칭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대야산의 표기는 大冶山으로 되어 있으며 다음(daum) 및 네이버(네이버)의 백과사전에서는 大耶山으로 명기하고 있어 즉 순수 우리말인 대야의 명칭을 붙인 대야산을 음을 빌려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다양한 이름의 한자표기를 볼 수 있다.
선유동 유래 : 정상 주변의 기묘한 암봉은 늘재와 이화령 사이에선 으뜸으로 금강산에 비길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 해서 소금강이라고도 불렸다.
신라말기에 고운 최치원이 머물렀다 해서 선유동(仙遊洞)이라 했다.
백두대간 분수령 서쪽은 괴산 선유동, 동쪽은 문경 선유동이라 구분해서 부르는데, <대동여지도>에는 내·외 선유동으로 구분하여 적고 있다.
서쪽 충북쪽 괴산 선유동을 외선유동(外仙遊洞) 경상북도 문경쪽을 외선유동(外仙遊洞)고 부른다.
괴산 선유동도 과거에는 경상북도의 행정구역이었다고 한다.
선유동은『여지도서』(문경)에 “선유동은 대야산 동쪽6, 7리에 있다.
온 골짜기 모두가 흰바위와 맑은 시내로 어우러져 그 안에 훌륭한 경치의 구곡이 있다(중략 서쪽에 외선유동(外仙遊洞)이 있는 데 역시 뛰어난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다”라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대동여지도』에『청구도』의 대야산大耶山)과 다른 한자표기의 대야산大冶山) 바로 밑에 내선유동(內仙遊洞)이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문경의 선유동을 내선유동으로, 북서쪽에 있는 괴산의 선유동계곡을 외선유동으로 구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동안 대하산(大河山)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에서 손꼽이는 예학자였던 우복 정경세(鄭經世, 1563~1633)는 선유동 산수의 기묘함과 수려함에 감탄하여 이르기를 ‘가이 완장운(可以 浣腸云)’이라 했다. ‘골짜기가 탁 트여 창자가 시원하다’는 뜻이다.
또 전해오는 말로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지사(地師)로 종군했던 풍수가 두사충(杜;士沖)이 백두대간을 넘어 이곳으로 들어서다 선유동 경관을 보고는 창자가 시원하다며 완장(浣腸)이라 했다고도 한다.
버리미기재-블란재 능선의 동쪽마을이 문경군 가은읍 완장리이다. 이 마을이름이 완장리(完章里)는 한자(漢字)는 다르지만 아마도 여기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인다.
《 밀재(밀치), 둔덕산 삼거리(889봉) 》
대야산 정상에서 내려가면 월영계곡과 밀재로 나뉘는 갈림길이 나오며, 밀재로 향한다.
기묘한 바위들 사이를 지나 400m 정도 내려가면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나오는데, 길은 두 바위사이를 통과해야 한다. 소위 대문바위이다.
윗 사진. 대문바위.
대문바위를 거쳐 삼거리를 지나 밀재(밀치)까지는 600m 정도 내려간다. 밀재(密재)는 나무가 우거져 밀림이어서 붙인 고개라고 한다.
윗 사진. 밀재(밀치)
밀재에서 남쪽으로 고도 40m정도의 작은 봉우리를 넘어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막이 시작된다.
산행길의 좌측편으로 거대한 바위들이 줄지어 서 있다.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해발 약 840m정도)에 우측에 길다란 큰 바위가 있다.
굴바위이다.
산행로의 반대편에 암혈이 있어서 굴바위라고 한 듯 하다
윗 사진. 굴바위.
굴바위에서 약 20m 정도 진행하면 커다란 집채바위들이 나타난다.
윗 사진. 집채바위.
집채바위에서 100m정도 진행하면 서쪽으로 장관을 볼 수 있는 전망바위가 나온다.
200m 정도 더 가면 849봉이 있는데 봉우리의 동쪽능선으로 옆으로 지나간다.
849봉은 비록 정상부를 넘어가지는 않지만 밀재에서 849봉까지는 남진(南進)방향이고, 849봉부터 동진(東進)방향이다.
849봉에서 500m 정도 동진(東進)하면 854봉이 나오며, 854봉에서 남동진(南東進)으로 500m정도 진행하면 889봉 둔덕산삼거리가 나온다.
849봉에서 둔덕산 삼거리인 889봉까지 가는 길에 속리산을 비롯한 여러 산들이 운무에 잠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삼거리에서는 남쪽방향으로 우회전하여 고모치까지 내려간다. 동진할 경우에는 마귀할멈통시바위 및 둔덕산이 있는 방향이 된다.
윗 사진. 전망바위에서 남쪽방향으로.
윗 사진. 서쪽 방향 백악산(해발 845.5m).
윗 사진 . 속리산 능선.
윗 사진. 삼거리이다. 우측으로 진행한다. 직진시 마귀할멈통시바위, 둔덕산으로 가게 된다.
마귀할멈통시바위 :
889봉 둔덕산 삼거리에서 동쪽 둔덕산(976m)방향으로 500m 가면 마귀할멈통시바위(그 옆으로 손녀통시바위가 있다)가 있다. '통시'라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로 '변소' 즉 화장실을 뜻한다.
우리나라 전래 설화에 의하면 거인이 용변을 보면 그 물은 홍수를 일으키고 또한 강을 만든다
(대야산과 조항산이 대 홍수로 물에 잠겼을 때, 여기서 대홍수는 거인의 용변/대야을 엎어놓은 형상이고, 조항산은 물에 잠겼을 때 새의 머리와 부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마귀할미의 2세대 후손인 손녀는 밀재로 내려가면 만나는 용추계곡의 깊은 물에 대골 계곡을 만들었고 대야산에서 용추계곡으로 하산하는 길목의 떡바위는 통시바위에서 덜어져 나간 똥이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 고모치(해발 930.7m) 》
둔덕산 갈림길삼거리에서 900m 정도 하산길로 내려오면 엄청나게 많은 돌무더기가 쌓여있는 고개가 나온다.
고모치(姑母치)이다.
돌무더기는 진행방향의 우측에 쌓여 있으며, 좌측편으로 10m만 내려가면 고모샘이 있다.
윗 사진 . 고모치.
윗 사진. 고모치의 석간수(石間水)인 고모샘.
고모치(姑母峙), 고모(姑母)샘 :
고모와 부모가 없는 질녀가 오두막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다 질녀가 우연히 병사했다.
고모는 슬픔을 못 이겨 식음을 전폐하고 험준한 준령(궁기 뒷편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문경에서 충북을 연결하는 12km의 험준한 준령) 상봉에 올라 질녀의 이름을 부르며 수일을 지내다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 애처로운 넋을 달래기 위해 고모치(姑母峙)라 이름을 지었다 한다.
고모치에서 10m 지점에는 석간수(石間水)로 어린 조카의 한이 서려있는 고모샘이다.
《 조항산(鳥項山, 953.6m) 및 암릉구간 》
고모치에서 조항산까지는 약 1.2㎞의 거리라는 표식이 있지만 중간 이정표상의 거리로는 1.4㎞도이다. 오르막길로 300m 정도 진행하면 737봉 삼거리가 나온다.
거의 사라져가는 우측길은 왕송마을로 가는 길이며, 600m 정도 오르막으로 계속 직진하면 905봉 삼거리가 나온다.
윗 사진 . 왕송마을 삼거리 737봉.
윗 사진. 905봉 의상저수지 삼거리.
여기서 500m정도 진행하면 조항산이다. 오르막 경사도는 높지 않지만 길이 좋지 않다.
윗사진 . 조항산 정상 근처 바라본 북쪽방향의 풍경. 운무가 낮은 곳을 가리워져 있어 마치 홍수가 난 듯 하다.
조항산(鳥項山, 953.6m) :
조항산은 천재지변으로 일어난 홍수때 물에 잠겨 정상부분만 남아 있는 모습이 새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조항산(鳥項山)이라고 한다.
청화산에서 보면 새머리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조항산이 새의 부리처럼 보이는 지점은 마귀할멈통시바위에서 관찰하여야 한다고 한다.
마귀할멈통시바위에서 보면 조항산 정상부는 새의 머리, 조항산 남쪽의 갓바위봉은 새의 부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조항산에서 북쪽으로 4㎞지점에 위치한 대야산(大耶山)의 유래가 물에 잠긴 정상부위의 모습을 표현한 것처럼, 조항산의 유래도 홍수와 연관되어 있다.
이 지역이 홍수가 잦아서 그런 유래가 생겼다기 보다는, 이른 아침 운무가 산언저리에 깔릴 때의 표현을 그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다.
조항산 정상의 남동쪽 조항산 중턱에 궁기리(宮基里)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궁기리의 속명은 '옛터골'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후삼국 시대에 견훤이 많은 군사를 모집하여 훈련한 곳으로 견훤가의 본궁이 있었다고 하여 궁기(弓基)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윗 사진 . 조항산 정상석.
윗 사진 . 조항산 암릉에서 동쪽방향.
윗 사진 . 조항산 방향 암릉지역.
조항산에서 약100m 정도 내려가면 암릉구간이 나온다.
산행로는 암릉에서 갑자기 사라질 경우 암릉 위로 올라가서 암릉능선으로 진행하면 된다. 동서남북의 모든 방향으로 장활한 경치를 맘껏 즐길 수 있다.
《 갓바위재(769m), 전망바위(801m), 청화산(靑華山, 984m) 》
조항산 암릉지역에서 800m 정도 비교적 순탄한 내리막길로 오면 너른 공터가 나타나는데 갓바위재이다.
여기서 다시 가벼운 오르막코스가 시작된다.
윗사진 . 갓바위재.
800m 정도 진행하면 암릉봉우리가 나타나는데 801봉 전망바위이다.
조항산과 청화산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 지나온 조항산과 가야할 암릉구간 및 청화산을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다.
윗 사진. 801봉 전망바위에서 조항산 및 암릉지역, 둔덕산 방향.
윗 사진. 801봉 전망바위에서 남쪽, 청화산 방향.
801봉 전망바위에서 남서쪽으로 진행한다.
약간의 내리막후 다시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개의 암벽이 있으며 마지막 암릉은 886봉 봉우리 전에 위치한 밧줄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전망바위(약 860m)이다.
전망바위를 지나 곧 886봉이 나타나며, 858봉, 995봉을 거쳐 약 1.5㎞정도 진행하면 삼거리(976m)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좌측(동쪽)방향은 시루봉 가는 길이며, 우측(서쪽)으로 약 400m 진행하면 청화산 정상이 나온다.
청화산 정상석은 남쪽을 향해 있으며, 백두대간 남진방향의 경우 등산로가 청화산 정상석 뒤편에서 접근하기에 정상석인 줄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청화산에서 늘재까지는 약 2.6㎞정도이다.
윗 사진. 청화산 삼거리. 왼쪽은 조항산, 직진은 시루봉, 사진찍은 곳은 청화산 방향이다.
윗 사진. 청화산 정상석.
청화산(靑華山, 984m) :
동국여지승람 문경조와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문경조에 의하면 17세기까지는 화산(華山)으로 불렸으나,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 산수조에 청화산이라 하였고 대동지지 문경조에 화산의 일명으로서 청화산이라 기록된 것으로 보면 18세기부터 청화산으로 불려온 것으로 보인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청화산을 극찬하여 택리지에서 스스로의 호를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칭하고 청화산에 기거하였으며 청화산을 두고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 한다.
<청화산은 내선유동과 외선유동을 위에 두고, 앞에는 용유동을 가까이 두고 있는데, 수석의 기이함은 속리산보다 훌륭하다. 산의 높고 큼은 비록 속리산에 미치지 못하나 속리산 같은 험한 곳은 없다.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린 돌은 모두 밝고 깨끗하여 살기가 적다. 모양이 단정하고 좋으며, 빼어난 기운을 가린 곳이 없으니 거의 복지(福地)다.>
《 전망바위(710m),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 580m) 》
청화산 정상에서 1㎞ 하산하면 전망바위가 나온다.
전망바위에서 속리산의 능선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멋있는 사진 포인트 지점이 된다. 약 710m의 높이다.
전망바위에서 500m 더 진행하면 정면에 정국기원단이 나타난다. 정국기원단 너머 속리산의 능선이 보인다.
윗 사진. 정국기원단.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 :
나라를 평안하개 해달라는 기원단과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장군 공덕비이다.
이강년은 조선 말기 의병장이다.
1858년 완장리에서 태어난 운강 이강년(1858~1908)은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부사과로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문경의 동학군을 지휘했다.
1895년 명성황후 민씨(閔氏)의 시해로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이듬해 1월 가은 토대장터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이어 제천으로 유인석을 찾아가 사제의 의를 맺은 뒤 유인석 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일본의 침략정책이 더욱 노골화되자 영춘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때마침 원주 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 부대와 합세해 충주를 공격하였다.
그 후 가평·인제·강릉·양양 등지에서도 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청풍의 금수산에서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이강년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비문에는 좌측에 백의민족(민족중흥)성지 부실기조 삼파수[白衣民族 (民族中興)聖地 不失其祖 三巴水]라는 글과 우측에는 "백두대간 중원지(白頭大幹 中元地)"라고 하는 글귀를 적어 놓았다.
정국기원단에서 1㎞ 정도 진행하면 포장도로인 문장로길에 도착한다. 좌측 편에 엄청나게 큰 백두대간 표지석이 위치하고 있다. 백두대간 입석 바로 뒤의 텃밭에 밭농사를 하고 있으며, 그 뒤편에 오래된 성황당 기와집과 그 옆에 백두대간이라는 성황당 표지석이 있다.
윗 사진 . 늘고개의 백두대간 표지석.
윗 사진 . 성황당.
늘재 성황당(城隍堂, 서낭당) :
늘재에는 수령600년이 넘는 엄나무가 늘티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늠름하게 서 있다고 하나 보이지는 않는다(2019년10월기준).
성황당 서쪽 편에 "백두대간의 성황당"이라 내력을 적어 놓은 안내석이 있다..
첫댓글 바쁘신데도 시간내어 상세한 산행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열공했습니다
덕택에 저도 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
블란치재가 불한령에서 나온 말이라니 ㅋㅋㅋ 유추실패 조선의 우복정경세ᆞ 가이 완장운 !! 그래서 그렇게 감탄 감탄 감탄이 나왔나 보네요 산의 기상이 조선에서 현세까지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하여 훔쳐 매혹시켰나 봅니다 *.~ 다음님 수고로움 덕분에 행복한 추억소환 . 꺔~쌰 !!
저는 프랑스와 연관된줄 알았어요. ㅋㅋ ^.^
@다음 미투미투 ᆢ 왠지 선교사 어쩌고~ 그렇걱 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