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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관서정원답사 자료 11. 東大寺大佛殿
토우다이지(東大寺)는 나라켄(奈良県) 나라시 조우시쵸우(雑司町)에 있는 화엄종의 대본산이고, 킨코우묘우시텐노우고코쿠노데라(金光明四天王護国之寺)라고도 한다. 나라시대인 8세기에 쇼우무일왕(聖武天皇,701-756)이 국력을 기울여 창건한 사찰로 전한다. 흔히 '나라 대불'로 알려져 있는 노사나불을 본존으로 하고, 개산조는 로우벤(良弁,689-774)이다. 나라시대 당시에는 중심불전인 다이부츠덴(大仏殿, 콘도우,金堂)이외에도 동서에 2기의 칠층목탑 (높이 70미터 이상 추정)이 있었던 대가람으로 추정되지만, 중세이후에는 두번의 병화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어 현존하는 대불은 대좌 등 일부만 당시 유물이 남아 있고, 또한 현존하는 다이부츠덴(大仏殿)은 에도시대인 18세기 초기인 元禄時代에 중창된 것으로 창건당시와 비교하여 정면이 2/3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고대-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사찰로 쇼우무일왕(聖武天皇) 창건 당시, 전국 60여개 지역에 각각 세웠던 코쿠분지(国分寺)를 아우르는 소우코쿠분지(総国分寺)의 지위를 누렸었다. 199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8세기 초에 다이부츠덴(大仏殿) 동쪽인 와카쿠사야마(若草山) 기슭에 이미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토우다이지(東大寺) 사찰기록인 '토우다이지요우로쿠(東大寺要録)'에 의하면, 天平5年(733年)、와카쿠사야마(若草山) 기슭에 창건되었던 콘슈지(金鐘寺)가 토우다이지(東大寺)의 시초라고 한다. 한편, '続日本紀'의 기록에 따르면, 神亀5年(728年)、쇼우무일왕(聖武天皇)과 코우묘우왕후(光明皇后,701-760)가 요절한 아들의 보시를 위해 와카쿠사야마(若草山) 기슭에 산방을 열고, 아홉명의 중을 머물도록 했다고 적혀 있는데, 이것이 콘슈지(金鐘寺)의 전신이었다고 한다. 콘슈지(金鐘寺)에는 8세기 중반에는 켄쟈쿠도우(羂索堂)、센쥬도우(千手堂) 등의 당우가 더 있었다고 하는데, 켄쟈쿠도우(羂索堂)는 현재의 홋케도우(法華堂,또는 산가츠도우(三月堂)、본존은 부공견색관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天平13年(741年)에는 코쿠분지(国分寺)를 건립하도록 명이 내려져, 다음해인 天平14年(742年)、콘슈지(金鐘寺)가 야마토노쿠니(大和国) 지역의 코쿠분지(国分寺)로 지명되어 사찰명이 콘코우묘우지(金光明寺)로 바뀌었다. 대불의 주조가 완료되었던 天平19年(747年)무렵부터, '토우다이지(東大寺)'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토우다이지(東大寺) 건설을 위한 임시관청인 조우토우다이지시(造東大寺司)이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때가 天平20年(748年)이기도 하다.
쇼우무일왕(聖武天皇)이 대불 주조의 명을 내렸던 것이 天平15年(743年)이다. 당시, 서울은 쿠니쿄우(恭仁京,현재의 교토후 남부 카즈가와시)로 옮겼으나 쇼우무일왕(聖武天皇)은 쿠니쿄우(恭仁京)의 북동쪽에 있는 현재의 시가켄(滋賀県) 코우카시(甲賀市) 시가라키쵸우(信楽町)에 있는 시가라키노미야(紫香楽宮)에 있었고, 대불의 주조와 조립도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쇼우무일왕(聖武天皇)은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천도를 감행하여, 2년 후인 天平17年(745年)、서울은 헤이죠우쿄우(平城京)로 다시 옮겨가면서 대불의 주조도 현재의 토우다이지(東大寺) 자리로 옮겨졌다. 이 정도의 큰 불사를 백성의 폭넓은 지지없이는 진행하기는 불가능했으므로, 조정에서는 배척했었던 교우키(行基,668-749)를 다이소우죠우(大僧正)로 다시 맞아들이면서까지 불사를 강행했다.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天平勝宝4年(752年)에 이르러서는 대불 주조가 완료되고 인도 출신의 중인 보다이센나(菩提僊那,704-760)를 도우시(導師)로 모시고 다이부츠카이겐에(大仏開眼会)를 열었다.
이때부터 다이부츠덴(大仏殿) 건설이 시작되어 완공된 것은 天平宝字2年(758年)이었다. 사실, 이정도의 큰 규모의 건설공사는 국력을 낭비하고 재정상황을 악화시켰고, 이는 처음 쇼우무일왕(聖武天皇)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야기시켰다. 실제로, 귀족, 사찰이 점점 부유해지는 반면, 농민층의 부담이 가증되면서 헤이죠우쿄우(平城京) 안에서는 부랑자가 늘고, 굶어죽는 이가 끊이지 않아, 조용조(租庸調)로 통칭되는 세금제도 운영이 붕괴직전까지 이르는 지역도 나타나는 등, 율령체제 상의 모순점이 크게 부각되었다. 실제로 天平勝宝8年(756年)5月2日、쇼우무상왕(聖武太上天皇)이 죽자마자, 7월에 타치바나노나라마로(橘奈良麻呂,721-757)의 난이 일어나고, 7月4日에 붙잡힌 타치바나노나라마로(橘奈良麻呂)는 심문에서 '토우다이지(東大寺) 따위를 짓느라고 백성들이 고생하고 있다. 정치가 도리를 벗어나니, 반란을 모의했다.'고 자복했다. 여기서 심문을 지휘했던 후지와라노나가테(藤原永手,714-771)가 '원래 토우다이지(東大寺)를 짓기 시작한 것은 그대들의 아비 세대였다. 그 입에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자격이 없다. 게다가 그 이전에 그대들과는 하등 관계도 없는 일이다.'라고 반박하자 나라마로(奈良麻呂)는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라시대 토우다이지(東大寺)의 가람배치는, 난다이몬(南大門)、츄우몬(中門)、콘도우(金堂, 다이부츠덴(大仏殿))、코우도우(講堂) 등이 남북으로 일직선에 놓여 있어, 코우도우(講堂) 동쪽, 북쪽, 서쪽으로 승방이 둘러싸고 있고, 그 동쪽에는 지키도우(食堂)가 있었고, 난다이몬(南大門) - 츄우몬(中門) 사이의 좌우에는 동서로 2기의 칠층목탑이 있었고, 각각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天平17年(745年)에 건설이 시작된 후로 40년가까이 걸려서 가람이 일단 완성되었다.
나라시대의 이른바 난토로쿠슈우(南都六宗,화엄종,법상종,율종,삼론종,성실종, 구사종)라고 할때, 종파라기 보다 학파라고 보는 견해가 다수인데, 일본불교에서 종파 개념은 중세이후에서나 확립되었다고 보고 있고, 당시 사찰에서 여러개의 종파를 겸하는 게 보통이었다고 한다. 토우다이지(東大寺)의 경우에도, 근대이후에 어느 소속종파인지 명시할 필요가 생기면서 화엄종으로 이름이 올라갔지만, 나라시대에는 이른바 로쿠슈우켄가쿠(六宗兼学)를 했던 사찰이라하여, 다이부츠덴(大仏殿) 안에 각종파의 경론서적이 봉납되었던 로쿠슈우즈시(六宗厨子)가 있었을 정도였다.
헤이안시대에는 쿠우카이(空海,774-835)에 의해 사찰 내에 신곤인(真言院)까지 생겨, 쿠우카이(空海)가 전한 진언종、사이쵸우(最澄,766-822)가 전한 천태종까지 합하면 핫슈우켄가쿠(八宗兼学)를 아울렀던 사찰이 되었다. 또한, 헤이안시대에 접어들면서 조우토우다이지쇼(造東大寺所)가 폐지되는 등 남도불교를 억압했던 칸무일왕(桓武天皇,737-806)이 일련의 정책을 펴면서, 코우도우(講堂)과 소우보우(僧房)가 소실되었고, 사이토우(西塔)도 낙뢰로 소실되었으며, 폭풍우로 난다이몬(南大門)、쇼우로우(鐘楼)가 무너지는 등 사고가 있달았지만, 후에 왕족, 귀족의 후원을 받아 쿠로다쇼우(黒田庄)로 대표되는 다수의 장원(荘園)을 기증받으면서 발전했다. 나라지방의 유력세력으로 성장하면서 다수의 승병을 동원하여, 코우후쿠지(興福寺) 등과 더불어 종종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토우다이지(東大寺)는 인근 코우후쿠지(興福寺)와 같이 治承4年12月28日(1181年1月15日)에 벌어진 타이라노시게히라(平重衡,1157-1185)의 남도토벌 와중에 병화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다이부츠덴(大仏殿)을 비롯한 대다수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이 때 대불을 비롯한 당우의 중창의 막중한 일을 맡았던 이가 당시 61세였던 슌죠우보우(俊乗房) 쵸우겐(重源)이었다. 그의 의욕적인 활동에 힘입어, 文治元年(1185年)에는 고시라카와법왕(後白河法皇,1127-1192) 등이 참석한 다이부츠카이겐호우요우(大仏開眼法要)가 거행되었고, 建久元年(1190年)에는 다이부츠덴(大仏殿)이 중창되어,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頼朝,1147-1199)등이 참석하여 랏케이호우요우(落慶法要)가 행해졌다.
그 후, 전국시대인 永禄10年10月10日(1567年11月10日)에는 미요시마츠나가(三好・松永)의 전투의 여파로 다시금, 다이부츠덴(大仏殿)을 포함한 토우다이지(東大寺)의 주요 당우가 또다시 소실되었다. 임시로 지어졌던 카린도우(仮堂)마저도 慶長15年(1610年)에 폭풍피해를 입어 무너지면서 다이부츠(大仏)가 야외에 방치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公慶(1648 - 1705年)의 노력과 에도막부의 쇼군 토쿠가와츠나요시(徳川綱吉,1646-1709)와 케이쇼우인(桂昌院,1627-1705)을 비롯한 후원에 힘입어 元禄4年(1691年)에 이르러서는 다이부츠(大仏)가 수리되었고 宝永6年(1709年)에는 다이부츠덴(大仏殿)이 완공되었다. 다만 높이와 측면은 창건 당시인 天平時代의 규모로 지어졌지만, 정면은 창건 당시의 11칸보다 2/3으로 축소된 7칸이 되었다. 또한 코우도우(講堂)、지키도우(食堂)、동서에 각각 있었던 칠층석탑은 중창되지 못하고 지금은 각 위치에 흔적만 남아 있다.
토우다이지(東大寺) 경내는 헤이죠우쿄우(平城京) 중에서도 게쿄우(外京)의 동쪽 구획이었던 히가시시치보우오오지(東七坊大路,현재의 국도169호선)을 서쪽 경계로 하였고, 서남부에는 코우후쿠지(興福寺)와 경계가 맞닿아 있었다. 난다이몬(南大門)을 거쳐 경내에 들어서면, 정면에 츄우몬(中門,南中門)、그리고 다이부츠덴(大仏殿,정식명칭은 콘도우(金堂))이 있다. 다이부츠덴(大仏殿) 앞에는 창건 당시에 만들어졌던 팔각등롱이 아직도 서있다. 츄우몬(中門) 동서로는 회랑이 이어져 다이부츠덴(大仏殿)의 좌우로 연결되어있다. 현재의 회랑은, 단선으로 다이부츠덴(大仏殿)의 남동쪽과 남서쪽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지만, 원래는 다이부츠덴(大仏殿) 북쪽으로도 연결되어 있어 그 중앙에는 호쿠츄우몬(北中門)이 있었다. 난다이몬(南大門)과 츄우몬(中門) 사이의 동쪽에는 혼보우(本坊)가, 서쪽에는 토우다이지후쿠시료우이쿠뵤우인(東大寺福祉療育病院) 등이 들어서있다. 다이부츠덴(大仏殿) 동쪽에는 각각 슌죠우도우(俊乗堂)、교우키도우(行基堂)、넨부츠도우(念仏堂)、쇼우로우(鐘楼) 등이 있고, 그 동쪽 산기슭으로 올라가면 이른바, 죠우인(上院)이라 하여, 카이산도우(開山堂)、산마이도우(三昧堂,시가츠도우,四月堂)、니가츠도우(二月堂)、홋케도우(法華堂,산가츠도우(三月堂))등이 들어서 있고, 그 남쪽에는 친쥬(鎮守)를 맡고 있는 타무케야마하치만구우(手向山八幡宮,토우다이지(東大寺)와는 별개)가 있다.
다이부츠덴(大仏殿)의 서쪽에는 사시즈도우(指図堂)、칸진쇼(勧進所)、카이단인(戒壇院) 등이 있다. 다이부츠덴(大仏殿)의 북서쪽에는 쇼우소우인(正倉院), 히가시호우코(東宝庫)・니시호우코(西宝庫) 등이 있다. 또한, 쇼우소우인(正倉院) 건물 자체와 수납된 유물은 국유재산으로 궁내청 정창원사무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경내 서북단에는 나라시대의 유구이기도 한 테가이몬(転害門)이 아직도 남아있다. 원래는 이외에도 수많은 건물이 들어차 있었는데, 이를테면, 다이부츠덴(大仏殿) 북쪽에는 코우도우(講堂), 소우보우(僧坊), 그 동쪽에는 지키도우(食堂), 다이부츠덴(大仏殿) 앞 동서로는 각각 칠층목탑 2기가 있었다. 또 각각의 목탑도 회랑이 둘러싸고 있어 다른 사찰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거찰이었다. 원래, 서쪽의 히가시시치보우오오지(東七坊大路)에는 3개의 문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키타노몬(北の門)만 (테가이몬,転害門)만 현존하고 있다.
난다이몬(南大門)은 국보로 헤이안시대인 応和2年(962年)8月에 태풍으로 무너지고, 카마쿠라시대인 正治元年(1199年)에 중창되었다. 토우다이지(東大寺)을 중창했던 슌죠우보우(俊乗房) 쵸우겐(重源)이 중국으로부터 전해왔다고 하는 다이부츠요우(大仏様、텐지쿠요우,天竺様이라고 함.)이라고 하는 건축양식을 채택하여 유명하다. 다이부츠요우(大仏様)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기둥을 구조적으로 견고하게 하기 위해 기둥을 관통하여 다수의 수평부재를 사용하는 점, 천정을 막지 않고 노출시킨 점을 꼽을 수 있다. 문 안쪽 좌우에는 금강역사(인왕)상 2기와 석사자 1쌍이 안치되어 있다. 정면 중앙 위쪽에는 다이케곤지(大華厳寺)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옛 기록에 근거하여 2006년 법요에 새로 만든 것이다. 목조금강역사입상은 국보로, 높이 8.4미터의 규모를 자랑한다. 1203년에 장장 69일에 걸쳐 제작되었다. 문 오른쪽에는 흠형、왼쪽에 아형 금강역사를 안치했다. 이는 일반적인 배치와 반대이다. 1988-1993年의 해체수리때 많은 복장유물과 묵서가 발견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아형 금강역사상은 다이붓시(大仏師) 운케이(運慶,?-1224)와 카이케이(快慶)가 코붓시(小仏師) 13명을 이끌고 제작하였고, 흠형 금강역사상은 다이붓시(大仏師) 죠우카쿠(定覚)와 탄케이(湛慶,1173-1256)이 코붓시(小仏師) 12명과 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아형 목상은 카이케이(快慶)、흠형 목상은 운케이(運慶)가 무리를 이끌어 완성했다'는 통설과 약간 차이가 나지만, 대체로 운케이(運慶)가 제작을 총괄했다는 것으로 보여지는 기록이다.
츄우몬(中門)은 팔작지붕의 2층문으로 享保元年(1716年)경 재건되었다.
콘도우(金堂,다이부츠덴(大仏殿))역시 국보로 처음에는 쇼우무일왕(聖武天皇의 발원으로 8세기에 세워졌었지만, 그 후, 2번의 소실로 현존하는 건물은 에도시대에 재건된 것이다. 다이부츠(大仏)는 대좌, 소매, 다리 등 일부분은 창건당시 유물이 남아 있고, 그 외 대부분은 중세, 머리부분은 에도시대의 작품이다. 쇼우무일왕(聖武天皇)은 天平15年(743年)에 대불 조성을 발원했고, 원래, 시가라키노미야(紫香楽宮) 근처에 있던 코우가지(甲賀寺)에서 주조가 시작되었다가, 현재의 나라에서 계속되었다. 天平勝宝4年(752年)에 카이겐쿠요우(開眼供養)이 거행되었다. 治承4年(1180年)에 타이라노시게히라(平重衡)의 병화로 다이부츠덴(大仏殿)이 소실되면서, 다이부츠(大仏)도 대좌와 하반신 일부를 제외하고는 소실되었다. 그 후, 다이부츠(大仏)와 다이부츠덴(大仏殿) 모두 쵸우겐(重源)의 노력으로 중창되어 文治元年(1185年)에 다이부츠(大仏)의 카이겐쿠요우(開眼供養)、建久6年(1195年)에는 다이부츠덴(大仏殿)의 上棟供養이 거행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후, 永禄10年(1567年)에 벌어진 미요시마츠나가(三好・松永) 전투로 다이부츠(大仏)이 다시 불타, 다이부츠덴(大仏殿)는 재건에 손도 못대고, 다이부츠(大仏)만 임시로 수리만 된 채로 야외에 수십년 방치되었다가, 에도시대에 접어들어 다이부츠덴(大仏殿)과 같이 복원되었다. 현존하는 다이부츠(大仏)의 머리부분은 元禄3年(1690年)에 주조된 것으로, 元禄5年(1692年)에 카이겐쿠요우(開眼供養)이 행해졌다. 다이부츠덴(大仏殿)은 宝永6年(1709年)에 랏케이(落慶)했다.
현재의 건물은 우진각 지붕에 외관상 이층건물로 되어 있으나, 구조적으로는 1층지붕은 모코시(裳階)를 붙인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5칸의 건물 주위에 1칸씩 덧대어 모코시(裳階)를 두른 형태의 단층건물이다. 높이 46.8미터, 전면 57미터, 측면 50.5미터로 높이, 측면은 창건당시의 규모와 거의 같지만, 정면의 폭은 약 2/3으로 축소된 규모이다. 카마쿠라시대에 재건될 때, 다이부츠요우(大仏様)라 하여 당시 도입되었던 宋의 건축양식에 기반을 둔 건축양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평방향으로 다수의 부재가 기둥을 관통하고 있는 형태가 특징적이다. 에도시대에는 굵은 목재를 조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쇼우세이자이(集成材)라 하여 목재 기둥 몇개를 묶어 사용되고 있다. 종종 '세계최대의 목조건축물'로 언급되긴 하지만, 20세기 이후, 현대공법으로 지어진 더 큰 큐모의 목조건축물이 있다.
다이부츠(大仏)의 좌우에는 협시로 목조의 여의륜관음좌상과 허공장보살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건물 내 북서와 북동쪽에는 사천왕 중 광목천, 다문천이 안치되어 있는데 모두 에도시대 중창 당시 제작되었다. 사천왕 중 지국천과 증장천상은 미완성으로 머리부분만 다이부츠덴(大仏殿) 안에 안치되어 있다. 한편, 明治42年(1909年)에 있었던 일영박람회(日英博覧会)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되었던 토우다이지(東大寺) 옛가람의 모형이 건물 내에 전시되어 있다.
다이부츠(大仏)의 공식명칭은 '동조노사나불좌상'으로 높이는 14.7미터이다. 화엄경에서 설하는 노사나불의 명칭에서 따온 것으로, 노사나불은 연화장세계의 중심에 위치하여 대우주의 존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이다.
목조여의륜관음좌상・허공장보살좌상은 다이부츠(大仏)의 좌우에 협시로 안치되어 있는데, 교토의 붓시(仏師) 山本順慶一門, 오오사카의 붓시(仏師) 椿井賢慶一門에 의해 30여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에도시대의 대표적인 불교조각이다. 여의륜관음상은 元文3年(1738年)경, 허공장보살상은 조금 늦게 宝暦2年(1752年)에 완성되었다.
금동팔각등롱은 국보로 다이부츠덴(大仏殿)의 정면 앞에 세워져 있다. 총 높이는 464센티미터이고, 수리된 부분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나라시대 창건 당시의 유물이다. 측면 4면에는 주악천인이 묘사되어 있고, 그 중 서북쪽, 서남쪽면이 원래 작품 그대로이고, 동북, 동남면은 복제된 것이다. 동남면 판은 일찌기 분실되었고, 동북면 판은 1962년 도난되었다가 바로 되찾았는데, 그 후 원본은 별도로 보관하고, 등롱에는 복제품을 조립해 전시하고 있다.
홋케도우(法華堂,산가츠도우(三月堂))은 국보로 동쪽 와카쿠사야마(若草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경내에 남아 있는 몇 안되는 나라시대 건축물의 하나로 텐표우부츠(天平仏)의 보고로 불리운다. 창건 당시에는 켄쟈쿠도우(羂索堂)라는 명칭의 건물이었는데, 토우다이지(東大寺)의 전신인 콘슈지(金鐘寺)에 속한 당우로 처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시기는 대략 天平12年(740年) - 同20年(748年)사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향하고 있는 건물 내부의 북쪽(들어가서 왼쪽)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우진각 지붕의 부분이 쇼우도우(正堂)으로 나라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보고 있고、남쪽의 팔작지붕의 부분을 라이도우(礼堂)이라고 하여 원래 나라시대에 있었다가 카마시대인 正治元年(1199年)무렵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내에는 부공견삭관음입상을 본존으로 범천/제석천입상, 금강역사/밀적역사입상, 사천왕상 등 총 9구의 건칠상과, 집금강신상 등 소조상을 안치하고 있다. (모두 나라시대 조각) 그 외에도 일광/월광보살입상, 길상천/병재천입상 등 소조상은 최근까지 같이 안치되어 있다가 2011年부터는 토우다이지(東大寺)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안치된 10구의 불상도 모두 나라시대 작품으로 보고 있다. 홋케도우(法華堂)가 위치한 동쪽 구릉 일곽을 죠우인(上院)이라고 하는데, 홋케도우(法華堂) 말고도 오미즈토리(お水取り)로 잘 알려져 있는 니가츠도우(二月堂)、토우다이지(東大寺) 개산조인 로우벤(良弁)의 조상을 모시고 있는 카이산도우(開山堂) 등 다수의 건물이 모여 있다. 이 부근에는 다이부츠카이겐(大仏開眼,752年)이전부터, 토우다이지(東大寺)의 전신인 사찰이 있었던 장소로 추정되며, 홋케도우(法華堂)은 그 주요 건물 중 하나였다.
실제로 토우다이지(東大寺)는 治承4年(1180年)의 타이라노시게히라(平重衡)의 병화, 永禄10年(1567年)의 미요시마츠나가(三好・松永)의 난 등에 의해 창건 당시의 건물 중 다수가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나라시대의 건물로는 테가이몬(転害門)과 혼보우(本坊) 쿄우코(経庫) 등의 아제쿠라(校倉)가 있지만, 나라시대에 건립된 불당으로는 여기 홋케도우(法華堂) 뿐이다. 홋케도우(法華堂)는 불당건물로 뿐만 아니라, 안치되어 있는 불상군과 함께 텐표우(天平) 전성기의 문화를 전해주는 드문 예이다. 특히 본존인 부공견삭관음입상, 집금강신입상 등이 유명하다. '홋케도우(法華堂)' 혹은 '산가츠도우(三月堂)'이란 통칭의 유래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매년 3월 이 건물에서 홋케에(法華会)라고 하는 행사가 열리기 때문이다.'라고 설명되고 있지만, 실제로 홋케에(法華会) 행사는 헤이안시대후기인 11세기에는 홋케도우(法華堂)이 아니라 코우도우(講堂)에서 거행되었었다고 한다. 元和4年(1618年)부터는 다시 홋케도우(法華堂)에서 홋케에(法華会)가 열렸지만, 그 시기도 3월이 아니라 11월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홋케에(法華会)가 거행되고 있지도 않다.
홋케도우(法華堂)은 부공견삭관음을 본존으로 하고 있어 옛부터 '켄쟈쿠도우(羂索堂)'이라 불렀고, 주위 부속건물과 함께 '켄쟈쿠인(羂索院)'을 형성했었다. 토우다이지요우로쿠(東大寺要録)의 '諸院章'의 기록에는, '켄쟈쿠인(羂索院)'이 天平5年(733年)、로우벤(良弁가 부공견삭관음을 본존으로 창건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실제 창건시기에 관해서는 예전에는 天平年間 후반(740년대)로 알려졌었지만, 연대측정방식의 진전으로, 토우다이지요우로쿠(東大寺要録)에서 얘기하는 天平5年(733年)무렵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쇼우소우인(正倉院)에 토우다이지산카이시이시즈(東大寺山堺四至図)라고 하는 당시 토우다이지(東大寺)의 사역을 표시한 에즈(絵図)가 있는데, 여기에는 현재 홋케도우(法華堂)의 위치에 '켄쟈쿠도우(羂索堂)'라고 명시되어 있어, 실제로 에즈(絵図)의 작성연대인 天平勝宝8年(756年)의 시점에는 이 건물이 '켄쟈쿠도우(羂索堂)'이라 불렸고, 토우다이지(東大寺)의 주요 당우의 하나로 간주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홋케도우(法華堂,켄쟈쿠도우(羂索堂))의 정확한 창건연대에 관해서는 연구자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다이부츠카이겐(大仏開眼,天平勝宝4年・752年)에 약간 앞서는 8세기 중반이전의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토우다이지(東大寺)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는 콘슈지(金鐘寺)의 부속 불당으로, 본존상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점은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토우다이지(東大寺) 경내 동쪽 카스가야마(春日山) 산자락에는 토우다이지(東大寺)와 관련이 깊은 여러 사원이 있었는데, 전신이었던 콘슈지(金鐘寺,콘슈산보우,金鐘山房)말고도, 코우묘우왕후(光明皇后)의 발원으로 카스가야마(春日山) 서쪽 산자락에 세워진 후쿠쥬지(福寿寺)라는 사찰도 있었다고 한다. 콘슈지(金鐘寺)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로는, 天平11年(739年)의 쇼우소우인몬죠(正倉院文書)에 '콘슈산보우(金鐘山房)'으로 확인된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콘슈산보우(金鐘山房)의 기원에 관해, 이에나가사부로우(家永三郎,1913-2002)은 神亀5年(728年)에 쇼우무일왕(聖武天皇)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에나가(家永)는 '쇼쿠니혼기(続日本紀)' 神亀5年 11月3日条에 '従四位下 치누오우(智努王)로 하여금 조우산보우시쵸우칸(造山房司長官)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에 주목하여, 이것이, 같은해 9월에 생후 돌도 못되어 죽은 왕자(皇太子) 모토이오우(基王,727-728)의 명복을 빌기위해, 쇼우무일왕(聖武天皇)이 '산보우(山房)'를 창건하도록 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바로 '콘슈산보우(金鐘山房)'에 해당한다고 추론했다. '토우다이지요우로쿠(東大寺要録)'가 인용한 天平14年(742年)7月14日자 다이죠우칸부(太政官符)에는 '콘코우묘우지(金光明寺)라고 칭한다. 본래이름은 콘슈지(金鐘寺)'라고 되어 있어, 전 해인 天平13年에 쇼우무일왕(聖武天皇)이 발원한 코쿠분지(国分寺), 코쿠분니지(国分尼寺) 창건에 즈음하여, 콘슈지(金鐘寺)가 야마토노쿠니(大和国) 지방의 코쿠분지(国分寺,콘코우묘우지(金光明寺))로 비정되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콘슈산보우(金鐘山房,콘슈지(金鐘寺)), 福寿寺, 콘코우묘우지(金光明寺) 간의 관계에 관해 여러 설이 있고, 콘슈지(金鐘寺)의 정확한 위치, 후쿠쥬지(福寿寺)와의 관계등, 구체적사실에 관해서는 아직 불분명한 점이 많다. 콘슈산보우(金鐘山房,콘슈지(金鐘寺))의 위치에 관해서는, 출토된 기와 등으로부터, 토우다이지(東大寺) 니가츠도우(二月堂)의 북쪽에 위치한 마루야마니시(丸山西) 유적을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시되고 있다. 한편으로, 후쿠쥬지(福寿寺)는 죠우인(上院)지구(니가츠도우(二月堂)、홋케도우(法華堂) 부근)이 있어, 이것이 산보우(山房)와 함께 콘슈지(金鐘寺)라고 불렸을 것으로 보고 天平14年 무렵에는 야마토노쿠니(大和国)의 코쿠분지(国分寺)로서 콘코우묘우지(金光明寺)라고도 불리우게 되었다고 하는 설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홋케도우(法華堂)는 이들 전신사원에 부속 불당이었다고 추정되며, 콘코우묘우지(金光明寺)의 콘도우(金堂)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971-72년에 걸쳐 홋케도우(法華堂) 지붕수리시, 사용된 기와를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天平12年(740年)부터 同15年까지 사용되었던 쿠니쿄우쇼요우노카와라(恭仁京所用瓦)와 같은 양식의 명문기와가 다수 발견되어, 이로부터 홋케도우(法華堂)의 건립연대를 이 시기로 보는 학설이 있다. 한편으로 쇼우소우인(正倉院)에 남아 있는 天平19年(747年)正月8日자 문서에, 콘코우묘우지(金光明寺) 조우부츠쇼(造物所)가 견삭보살의 光柄와 花蕚를 만들기 위해 '鉄二十挺'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문서를 최초로 발굴한 미술사가 미나모토토요문네(源豊宗,1895-2001)에 의하면, 홋케도우(法華堂) 본존인 부공견삭관음상의 광배와 대좌 제작용 주문으로 보고 天平19年(747年)에는 본존상이 제작중이었던 것으로 보았다.
홋케도우(法華堂)는 토우다이지(東大寺) 다이부츠덴(大仏殿) 동쪽 구릉지에 남면하고 서있다. 정면 5칸, 측면 8칸이며, 측면 8칸 중, 뒤쪽 4칸 공간에 본존을 비롯한 여러 불상을 안치한 쇼우도우(正堂)、정면 쪽 2칸 공간이 라이도우(礼堂)이며, 그 사이의 2칸 공간은 츠쿠리아이(造り合い)이라고 불리우는 절충공간이다. 여기서 쇼우도우(正堂) 부분만 나라시대 건축이고, 라이도우(礼堂)은 카마쿠라시대에 덧붙여진 부분이지만, 쇼우도우(正堂) 부재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부터, 나라시대에도 라이도우(礼堂)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어, 창건 당시 쇼우도우(正堂)과 별도의 건물로 라이도우(礼堂)가 앞뒤로 나란히 서있는 나라비도우(双堂)형식의 불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쇼우도우(正堂)은 우진각지붕, 라이도우(礼堂)은 팔작지붕이며, 창건시기는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天平年間의 말기인 8세기후반의 건축으로 보고 있다. 현재의 라이도우(礼堂)이 부설된 시점에 관해서는, 상량문을 근거로 하여 正治元年(1199年)으로 보는 설과, 타이헤이즈카(大瓶束) 부재에 남아 있는 명문을 근거로 文永元年(1264年)으로 보는 설이 있지만, 어쨌든 라이도우(礼堂) 부분은 카마쿠라시대의 건립으로 보고 있다. 다이부츠덴(大仏殿)으로부터 언덕길을 오르면 홋케도우(法華堂)의 측면을 보게 되는데, 이때 왼쪽 절반이 바로 나라시대, 오른쪽 절반이 카마쿠라시대 건물인 셈이다. 오른쪽부터 4개의 기둥위에는 공포가 없고, 대신 장식성이 강한 雨樋이 있다. 이는, 쇼우도우(正堂)과 라이도우(礼堂)이 원래 별도의 건물로, 이 곳에 雨樋가 있었던 흔적으로 보인다. 북쪽의 나라시대 건물부분에는 중인방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반해, 남쪽 카마쿠라시대 건물부분에는 중인방이 아니라, 그 아래부분에 貫이 사용되고 있다. 각각 공포양식에도 시대 차이가 보인다.
건물 안에는 라이도우(礼堂) 부분의 측면 3칸에는 마루가 깔려있는 데에 비해, 쇼우도우(正堂) 부분의 측면 5칸은 흙바닥으로 정면 3칸, 측면2칸의 수미단이 설치되어 있다. 단지, 부재에 남은 흔적으로부터, 창건당시에는 쇼우도우(正堂) 부분에도 마루가 깔려 있었던 것이 아사노키요시(浅野清)의 조사로 밝혀졌다. 나라시대의 불당은 흙바닥이 통례로, 전부 마루가 깔린 건물의 예는 드물다. 천정 중앙과 좌우에는 총 3면의 천개가 있는데, 중앙에 연화형의 주위에 방사상으로 8개의 연화를 붙인 것으로, 총 9개의 연화의 가운데에는 동경을 여기저기 끼워넣었다. 3개의 천개 중 가운데는 후보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내에는 21세기 초까지 다수의 불상을 안치하고 있었다가, 2011년 토우다이지(東大寺) 성보박물관 개관에 맞춰, 일부 불상은 옮겨갔다. 옮기기 전의 홋케도우(法華堂) 건물 내의 불상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내진 가운데 팔각 이중 불단 위에는 가운데에 건칠부공견삭관음상, 그 협시불로 소조 일광, 월광보살상이 서 있었다. 팔각불단의 좌우에는 건칠 범천, 제석천상이 서있었고, 그 각각 앞에는 건칠 금강역사상이, 수미단의 네 귀퉁이에는 건칠 사천왕상이 서있었다. 그 외에 본존 뒤쪽 좌우에는 소조 길상천, 병재천상이 안치되어 있었고, 범천상 앞에는 목조 부동명왕이동자상, 제석천상의 앞에는 목조 지장보살좌상이 있었다. 거기에, 본존의 뒤쪽에 놓여졌던 불감에는 소조 집금강신상을 북향으로 안치했다. 이들 18구의 불상 중, 목조 지장보살좌상과 부동명왕이동자는 중세의 작품이지만, 나머지 14구는 나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본존을 포함해, 비교적 키가 큰 9구의 불상은 탈활건칠기법으로 제작되었고, 나머지 5구는 소조이며, 집금강신상은 비불로, 매년 12월 16일(개산조 로우벤(良弁)의 기일)에만 개방된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존상구성으로, 그 전거와, 이들 불상들이 창건 당시부터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나라시대 불상 중, 길상천, 병재천 상은 다른 불당에서 온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다른 불상에 관해서는 재질, 높이의 차이 등, 본존을 포함한 건칠불 9구가 홋케도우(法華堂) 본래의 불상으로 소조의 전일광, 월광보살상은 다른 불당에서 옮겨온 것이라는 학설과, 반대로 전일광, 월광보살상이 원래 안치되어 있었다고 하는 학설이 있었다. 본존 뒤의 집금강신상에 관해서는 '부공견삭신변진언경'에서 설하고 있는 내용에 근거하여, 본존과 함께 만들어졌다는 설과, 다른 불당에서 옮겨왔다는 설이 있었다.
1996년에 본존을 안치한 팔각이중불단을 정밀조사했을 때, 이중불단 하단에 팔각형의 대좌가 놓여있었던 흔적이 6군데 확인되어, 전일광,월광보살상과 현재 토우다이지(東大寺) 카이단인(戒壇院)에 있는 소조 사천왕상 등 총 6구의 대좌 흔적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상에서 볼때, 홋케도우(法華堂의 창건당시 안치했던 불상은 건칠 부공견삭관음상, 일광보살, 월광보살상 (원래 존명은 범천, 제석천 ?), 사천왕상 (현재 카이단인(戒壇院)에 안치), 집금강신상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2011년이후, 일광보살상, 월광보살상, 길상천상, 병재천상, 부동명왕이동자상, 지장보살상은 홋케도우(法華堂)에서 내진설계가 되어 있는 토우다이지(東大寺)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건물 내에 불상 10구가 안치되어 있다. (부공견삭관음상, 범천, 제석천상, 금강역사상 한쌍, 사천왕상, 집금상신상)
건칠부공나색관음입상은 국보로 나라시대 작품이며, 높이 3.6미터이다. 三眼八臂으로 제작되었고, 보관 정면에는 은제아미타여래상과 함께 보석과 투조장식을 한 화려한 보관을 썼으며 나라시대 공예 수준을 알 수 있는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소조집금강신입상 또한 국보로 인왕상을 한 몸에 표현한 것이며, 본존인 부공나색관음의 뒤에 있는 즈시(厨子)에 북향으로 안치되어 있다. 오른손에 금강저를 들고 눈을 치켜뜬 위압적인 표정의 무신상이다. 오랫동안 비불이었던 탓에 제작 당시의 채색이 잘 남아 있다. 토우다이지(東大寺)의 개산조인 로우벤(良弁)의 넨지부츠(念持仏)로 전해오며, 타이라노마사카도(平将門,?-940)의 전설로도 유명하다. 전설에 의하면, 타이라노마사카도(平将門)이 東国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이 소조상의 상투를 묶던 끈 한쪽이 벌이 되어 날아올라 마사카도(将門)를 찔러 괴롭혔다고 전한다. 실제로, 현재 이 상의 상투 끈 한쪽이 없다.
니가츠도우(二月堂)은 국보로 음력 2월에 행해지는 오미즈토리(お水取り,슈니에,修二会)가 거행되었다고 해서 명칭이 붙여졌다. 타이라노시게히라(平重衡)의 병화(1180年)와 미요시마츠나가(三好・松永)의 전투(1567年)등에도 소실을 면했지만, 정작 寛文7年(1667年)、오미즈토리(お水取り) 행사 중에 실화로 소실되어 2년후에 재건되어 오늘까지 전한다. 본존은 각각 대관음, 소관음으로 부르는 2구의 십일면관음상으로 모두 비불이다. 나라시대인 8세기 창건되었다가, 1669년에 재건한 건물로, 나라지방의 '오미즈토리(お水取り)'가 열리는 건물로 알려져 있다. '오미즈토리(お水取り)'의 정식명칭은 슈니에(修二会)로 8세기부터 이어져 오는 종교행사이다. 니가츠도우(二月堂)은 바로 슈니에(修二会) 행사용 건물로 특화된 특이한 공간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17세기에 재건되면서 슈니에(修二会)와 함께, 중세의 분위기를 짙게 느낄 수 있다. 토우다이지(東大寺) 콘도우(金堂,다이부츠덴(大仏殿))의 동족에 언덕길을 올라간 끝에 위치하고 있고, 십일면관음을 본존으로 하는 불당이다.
바로 남쪽에 산가츠도우(三月堂)로도 불리우는 홋케도우(法華堂)가 있고, 이들 당우가 모여있는 일곽을 죠우인(上院)이라 하는데, 다이부츠카이겐(大仏開眼) 이전부터 존재했던, 토우다이지(東大寺)의 전신사원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니가츠도우(二月堂)은 수차례의 소실 위험을 면했지만, 寛文7年(1667年)、슈니에(修二会)의 満行 즈음인 2月13日에 실화로 소실되어, 현재 건물은 그 직후인 寛文9年(1669年)、에도막부의 지원으로 종전의 규모, 형식을 답습하여 재건된 것이다.
토우다이지(東大寺)의 寺伝에 의하면, 슈니에(修二会)는 짓츄우(実忠,726-?)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며, 다이부츠카이겐쿠요우(大仏開眼供養)과 같은 해인 天平勝宝4年(752年)에 처음으로 거행되었다 하여, 니가츠도우(二月堂)도 이 때 창건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동시대의 사료에 언급은 없어,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니가츠도우(二月堂) 및 홋케도우(法華堂) 부근은 다이부츠카이겐(大仏開眼) 이전부터 토우다이지(東大寺)의 전신사원에 해당하는 후쿠쥬지(福寿寺)와 콘슈지(金鐘寺) 등의 사원이 있었다고 전하는 곳으로, 니가츠도우(二月堂) 앞의 붓쇼우노야(仏餉屋)의 해체수리시 시행된 발굴조사로, 전신사원의 유구와 8세기 이전의 기와가 출토된 바 있다. 니가츠도우엔기에마키(二月堂縁起絵巻,天文14年・1545年)등의 寺伝에 의하면, 슈니에(修二会)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天平勝宝3年(751年)에, 짓츄우(実忠)가 카사기(笠置,현재 쿄토후(京都府) 남부의 카사기쵸우,笠置町)의 류우케츠(龍穴) 깊숙이 들어갔을 때, 거기에 도솔천의 나이인(内院)으로 통해 있어서 거기에서는 천인들이 현신한 십일면관음을 중심으로 케카(悔過)의 행법(行法)을 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케카(悔過)라 함은, 말 그대로, 자신의 과오를 관음보살에게 참회하는 것인데, 짓츄우(実忠)은 이 행법(行法)을 인간세계로 가지고 오고 싶었지만, 그를 위해서는 현신한 십일면관음을 모시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한다. 인간계로 내려온 짓츄우(実忠)은 나니와츠(難波津, 현재의 오오사카시 츄우오쿠) 해안부터 관음보살이 계시다고 전하는 바다 저편의 보타락산을 향해 향화를 올리며 공양했다. 그 때, 그 보답이었던지, 100일정도 되었을 때, 현신한 십일면관음보살이 바다위로 올라와 래영했다고 한다.
짓츄우(実忠)가 받은 관음상은 7촌 크기의 동제상으로 사람처럼 따뜻했다고 한다. 설화이긴 하지만, 짓츄우(実忠)이라고 하는 등장인물은 그 출신은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실존하는 승려였다고 한다. '토우다이지요우로쿠(東大寺要録)' 중 '東大寺権別当実忠二十九箇条'에 짓츄우(実忠) 자신이 '~天平勝宝4年에서 大同4年에 걸친 70년간, 매년 2월 1일부터 二七日(14일간)간, 十一面悔過를 수행했다.'고 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어, 이를 슈니에(修二会)의 시작이 天平勝宝4年이라고 보는 근거의 하나로 보고 있다. 단지, 天平勝宝4年부터 大同4年'의 연대가 70년이 아니라, 58년이다.
니가츠도우(二月堂)이라는 독특한 명칭을 이해하기 위해, 슈니에(修二会)와의 관련을 알 필요가 있다. 토우다이지(東大寺)의 슈니에(修二会)는 매우 복잡하고 다채로운 내용을 담은 행사로, 개요만 대략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슈니에(修二会)는 음력 2월 二七日(14일간)에 걸쳐 거행되는 행사로, 니가츠도우(二月堂) 본존인 십일면관음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국가의 안정번영과 만민의 행복을 기원하는 십일면참회 법요이다. 현재는 양력 3월 1일부터 14일간 거행되고 있다. 법요는 렌교우슈우(練行衆)라고 하여, 특별하게 선정된 11명의 승려가 집행한다. 행사의 중심이 되는 것은 내진에서 거행되는 '六時의 행법(行法)'이다. 이는 하루 중에 정오, 일몰, 저녁, 한밤, 늦은 밤, 새벽에 걸쳐 총 6회 (六時)의 행벅을 거행하는 것으로, 정오는 오후 1시전후, 저녁때는 오후 7시전후, 새벽은 심야 1시 전후에 거행된다.
행법은 참회작법, 기원작법, 주금작법으로 나뉜다. 그 중, 참회작법에는 산화행도, 칭명회과, 보호, 오체투지 등을 포함한다. 보호라고 하면, 렌교우슈우(練行衆)기 나무관세음보살이란 명호를 되풀이해서 외치는 것으로, 작법의 하나의 절정이다. 육시 중, 저녁 때와 늦은 밤에는 참회작법 후에 기원작법과 주금작법이 거행된다. 기원작법의 중심은 신명장과 과저장의 봉독으로 일본 전국에 있는 신의 이름과, 고대 이후로 니가츠도우(二月堂)과 인연이 깊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올리는 것이다. 주금작법은 밀교적수련법이다.
렌교우슈우(練行衆)은, 정오와 일몰때를 끝낸 후, 일단 기도소로 돌아와, 저녁때에 다시 시작한다. 그 때, 수행하는 렌교우슈우(練行衆) 한사람을 횃불이 인도한다. 횃불은 그 후, 니가츠도우(二月堂) 정면의 무대를 돌고, 관객을 향해 불꽃을 흐트린다. 소위 '오타이마츠(おたいまつ)'가 이것인데, 연일 계속되지만, 그 중에서도 '미즈토리(水取り)'의 수행 직전인 3월 12일의 밤에는 바구니횃불이라 하여 특별히 커다란 횃불 11개가 니가츠도우(二月堂) 무대에서 튀어나와 주위엔 구경꾼으로 북적거린다. 이와 같은 작법이 매일 펼쳐지는 이외에도 여러가지 작법이 행사중에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3월 12일부터 14일까지 행해지는 달타행법과, 12일 늦은 밤 (정확히는 13일 새벽)에 행해지는 '미즈토리(水取り)'의 수행법이 유명하다. 달타는, 이국적인 모자를 쓰고 '핫텐(八天)'으로 분장한 렌교우슈우(練行衆)가 차례차례로 내진 정면에 뛰어나와, 방울과 석장으로 소리를 내다가, 대도를 휘두르다가, 찹쌀을 지진 하제(ハゼ)를 흩뿌리는 등의 행위를 하면서 절정에는 '카텐(火天)' 역의 렌교우슈우(練行衆)가 길이 3미터가 되는 큰 횃불을 안고 뛰어올라 내진을 한바퀴 돈 다음, 그 횃불을 라이도우(礼堂)을 향해 던져 쓰러뜨려, 불꽃을 흐뜨리는 횃불가지를 한다. '닷탄(だったん)'의 어원도 알려져 있지 않아, 의문투성이의 수행법이다. 슈니에(修二会)의 대명사가 되고 있는 미즈토리(水取り)는 3월 12일 늦은 밤 도중에 행해지는 것으로 니가츠도우(二月堂) 앞에 있는 와카사이(若狭井) 우물에서 향수를 퍼올려, 십일면관음에 올리는 의식이다. 이는 전승에서는 와카사노쿠니(若狭国)의 오뉴우묘우진(遠敷明神) 덕분에 솟아오르는 영험한 물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슈니에(修二会)는 밀교와 신도의 요소와 봄맞이의 민간풍속이 절충된 부분도 있어, 무척 복잡하고 의문이 많은 행사이다.
건물은 토우다이지(東大寺) 다이부츠덴(大仏殿) 동쪽의 구릉지에, 서쪽을 정면으로 세워져 있다. 니가츠도우(二月堂)은 治承4年(1180年)의 타이라노시게히라(平重衡)의 난 중에도 소실을 면해 나라시대 건물이 근세까지 남아 있었다가, 寛文7年(1667年)、슈니에(修二会) 와중에 실화로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니가츠도우(二月堂)은 그 후 바로 寛文9年(1669年)에 쇼군 토쿠가와이에츠나(徳川家綱,1641-1680)의 지원으로 재건된 것이다. 에도시대의 건축물이지만, 그 내부구성 등은 종래의 형식을 답습하고 있다. 에도막부의 지원으로 지어진, 근세 불당의 대표작인 동시에 유서깊은 전통과 많은 의문을 품은 '오미즈토리(お水取り)' 행사의 장이라는 목적에 특화된 특이한 건물로 높이 평가되어,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7칸, 측면 10칸으로 우진각지붕이며, 가장 앞쪽 한칸은 횃불을 흩뿌리는 무대로 난간을 설치했다. '오미즈토리(お水取り)'의 횃불가 무대 밖으로 튀어나오는 부분이 이부분이다. 건물은 경사지에 앞부분이 밀려나오듯이 지어져, 마루 밑에는 엮은 기둥으로 건물을 지지하는 카케즈쿠리(懸造) 방식으로 지어져 있다. 이런 카케즈쿠리(懸造) 방식은 키요미즈데라(清水寺)、이시야마데라(石山寺)、하세데라(長谷寺) 등, 관음을 본존으로 하는 사찰 본당 건축에 잘 발견되며, 관음이 남해의 보타락산에 거한다고 하는 경전 내용에 바탕을 둔 것이다.
건물의 정면 좌우(남북쪽)에는 계단이 있어, 건물의 통로가 되고 있다. 북쪽계단은 지붕이 붙어 '노보리로우(登廊)'라 하여, 렌교우슈우(練行衆)이 기도소로부터 니가츠도우(二月堂)으로 수행하러 올라갈 때에 이곳을 지나간다. 남쪽의 계단은 3월 12일 깊은 밤의 '미즈토리(水取り)' 때에 와카사이(若狭井)로 내려갈 때에 이용된다. 건물 정면 앞에는 수호신하의 하나인 코우죠우샤(興成社)가 있어 그 옆에 로우벤스기(良弁杉)가 있다. 또한 건물 아래쪽(서쪽)에는 슈니에(修二会) 관련 부속건물인 산로우쇼(参籠所)、아카이야(閼伽井屋)、붓쇼우노야(仏餉屋)、유야(湯屋) 등이 세워져 있다.
건물 내의 구성이 복잡하여, 일반적인 불당건축과 다른 점이 많다. 내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중앙의 수미단에는 비불인 본존, 십일면관음을 안치하여 그 주위에는 슈니에(修二会)의 여러가지 작법이 행해지는 장소로 렌교우슈우(練行衆) 이외에는 출입금지이다. 내진 바깥쪽의 좌우와 뒤쪽(북, 동, 남쪽)은 한 칸 폭의 외진으로, 그 바깥쪽에 다시 코헤야(小部屋)로 칸막이가 있어, '츠보네(局)'라고 한다. 내진 정면 앞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마루바닥의 라이도우(礼堂) 공간으로, 라이도우(礼堂)의 좌우(남북쪽)은 북쪽이 '칸진노마(勧進の間)'、남쪽이 '레이지노마(例時の間)'로 불리는 코헤야(小部屋)이다. 라이도우(礼堂)의 앞(서쪽)에도 '츠보네(局)'가 있어 이른바 '니시츠보네(西局)'이라 불린다. 니시츠보네(西局)의 서쪽이 바로, 불꽃을 흩어 뿌리는 무대가 된다.
니가츠도우(二月堂)의 내부는, 내진을 외진이 감싸고, 거기에 다시 '츠보네(局)'가 감싸고 있는 복잡한 구성인데, 창건당시부터 이와 같은 복잡한 구조다고는 보기 힘들다. '토우다이지요우로쿠(東大寺要録)'의 '諸院章'에는 '三間二面庇瓦葺二月堂 一宇'라고 되어 있어 입구 3칸에 전후 2면에 문이 붙어 있는 작은 건물로, 거의 현재 니가츠도우(二月堂)의 내진 부분에 해당한다. 현재의 니가츠도우(二月堂)의 구조를 보더라도, 내진은 주위를 산카라토(桟唐戸)로 구획한 폐쇄적인 공간이고, 또한 내진부분만 덮은 팔작지붕이 따로 있는 독립적인 건물 구조가 되어 있다. 내진의 북, 동, 남쪽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외진은 바닥이 마루가 아닌 돌바닥으로, 라이도우(礼堂)에서도 내진 인접한 부분 역시, 돌바닥이어서, 내진은 사방이 돌바닥으로 둘러싸여 있는 구조가 된다. 이런 점도, 내진이 원래 하나의 건물이었던 것을 짐작케 한다. 건축사가의 연구에 의하면, 원래 '三間二面庇'의 작은 당우였던 것에, 먼저 라이도우(礼堂)이 덧붙여지고, 카마쿠라시대에는 내진의 삼면에 히사시(庇)가 부가되어, 거기에 라이도우(礼堂)에도 히사시(庇)가 덧붙여지는 식으로 현재와 같은 규모로 변모했다고 짐작된다.
니가츠도우(二月堂)의 서쪽에는 코우죠우샤(興成社)、동북쪽에는 오뉴우샤(遠敷社)、동남쪽에는 이이미치샤(飯道社)가 있다. 오뉴우샤(遠敷社)는 '오미즈토리(お水取り'와 관련이 깊어, 와카사(若狭)의 오뉴우묘우진(遠敷明神)을 모셔왔다고 한다. 이이미치샤(飯道社)는 유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짓츄우(実忠)와 인연이 깊은 오우미노쿠니(近江国) 코우가쿤(甲賀郡)의 이이미치진쟈(飯道神社)로부터 모셔왔다고 하며, 코우죠우샤(興成社)는 토우다이지(東大寺)의 지누시노카미(地主神)를 모시고 있다. 슈니에(修二会)가 시작되는 3월 1일의 저녁과, 법회가 끝나는 3월 14일 늦은 밤 (15일 새벽)에는 렌교우슈우(練行衆)이 슈니에(修二会)의 차질없는 행사를 기원하고 감사하기 위해, 렌교우슈우(練行衆)이 이들 신사에 참배한다. 또한, 쇼우노진쇼(惣神所)라고도 부른다.
니가츠도우(二月堂)의 본존은 크고 작은 2구가 있어, 모두 십일면관음이다. 1구는 내진 중앙에 안치되어 '오오간논(大観音)'이라 부르며, 다른 1구는 불감에 봉납되어, 보통 오오간논(大観音)의 앞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으로, '코간논(小観音)'이라 부른다. 오오간논(大観音)・코간논(小観音) 모두 절대의 비불로, 슈니에(修二会)의 효우요우(法要)를 맡은 렌교우슈우(練行衆) 조차 그 모습을 참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슈니에(修二会)는 음력 2월, 현재는 3월 1일부터 14일까지의 기간에 집행되지만, 그 14일 중, 上七日(전반 7일간) 동안은 오오간논(大観音)이 본존이 되고, 下七日(후반 7일간)은 교대로 코간논(小観音)이 본존이 된다. 크고 작은 2구의 본존이 존재하는 이유, 슈니에(修二会)의 전반과 후반 동안 본존이 바뀌는 이유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오오간논(大観音)은 슈니에(修二会)의 作法이 행해지는 내진 중앙에, 내진주로 둘러쌓인 높은 수미단 한가운데에 서있다. 슈니에(修二会) 기간 중, 수미단 주위는 동백과 남천촉의 조화, 단구(壇供、떡) 등으로 장엄된다. 수미단 안쪽에는 4기의 보탑(오층탑)을 세우고, 더 안쪽에 오오간논(大観音)이 안치되어 있지만, 두꺼운 장막으로 둘러쌓여 있어, 안치상황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다. 한편, 코간논(小観音)은 불감에 봉납되어 있다. 그 불감에는 문이 없어, 수시로 개방하지 못하고, 불감 아래에 신사의 미코시(神輿)와 같은 모양의 나가에(轅, 가마채)가 붙어 있다. 실제로 이 불감은 미코시(御輿)라고도 하는데, 슈니에(修二会)의 上七日 마지막날인 3월 7일의 저녁에 렌교우슈우(練行衆)이 메고 나가게 된다.
이 코간논(小観音)의 불감은 보통 오오간논(大観音) 앞에 안치되어 있지만, 매년 2번, 2월 21일, 3월 7일에 옮겨지는데, 2월 21일은 '미코시아라이(御輿洗い)'라 하여 불감을 라이도우(礼堂)으로 모시고 나와, 예를 다해, 깨끗이 씻게 된다. 이는 3월 1일부터의 슈니에(修二会)의 본 행사에는 포함되지 않는 준비단계의 행사인 셈이다. 깨끗하게 씻겨진 불감은 그 뒤 내진으로 옮겨지지만, 그때에는 오오간논(大観音)의 앞이 아니라, 뒤쪽으로 안치된다. 그리고 슈니에(修二会)의 上七日의 기간동안 오오간논(大観音)이 법요의 본존이 되면서, 코간논(小観音)은 뒤쪽에 숨겨진 상태로 있게 된다. 하지만, 3월 7일 저녁부터 늦은밤에 걸쳐 '코간논슈츠교(小観音出御)'와 '코간논고뉴우(小観音後入)'라는 의식이 거행되면서 갑자기 코간논(小観音)이 주역이 된다.
'코간논슈츠교(小観音出御)'는 3월 7일 오후 6시경부터 거행되는 데, 그때까지 오오간논(大観音) 뒤쪽에 안치되어 있던 코간논(小観音)의 불감이 일단 내진 남서쪽 모서리에 임시로 안치되어 행사준비를 한 후, 라이도우(礼堂)으로 옮겨져 나와, 불감 앞에 놓여진 상 위에 향로, 등불, 꽃 등의 공양물이 올려진다. 그 뒤, 깊은 밤인 0시 넘어가면서 '코간논고뉴우(小観音後入)'가 거행된다. 이는 라이도우(礼堂)에 옮겨 나온 불감은 대시 내진으로 들여놓는 의식으로 불감은 일단 외진에 들어가 외진의 북, 서, 남쪽으로 한바퀴 돈 후, 내진 오오간논(大観音)의 정면앞에 안치되어, 이후 下七日 동안의 본존이 코간논(小観音)이 되게 된다. 코간논(小観音)이 안치된 불감은 寛文7年의 니가츠도우(二月堂)이 소실된 후에 제작된 것으로, 가장 아래쪽에는 파도를 나타내는 문양이 있어, 구름에 올라탄 관음의 미쇼우타이(御正体,동경)가 부착되어 있다. 이는 '니가츠도우엔기(二月堂縁起)'에 현신의 관음이 바다너머 먼 나라에서 나니와츠(難波津)으로 내영했다고 하는 전설을 의미하는 것으로, 코간논(小観音)이 보타락 도래의 현신의 관음으로 신봉되고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슈니에(修二会)의 전반과 후반으로 본존이 교대되는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헤이안시대 후기에 오오에노치카미치(大江親通,?-1151)가 쓴 '시치다이지쥰레이시키(七大寺巡礼私記)' 중, 토우다이지(東大寺) 켄쟈쿠인(羂索院)에 관한 대목에서 슈니에(修二会)에 관해, '매년 2월 1일에는 호우조우(宝蔵)에서 코즈시(小厨子)를 메고 나와 본존의 앞에 안치한다'고 하는 구전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불교도상집인 '카쿠젠쇼우(覚禅抄)' 巻第四十五 중, 십일면관음의 공양법에 관한 부분이 있는데, '토우다이지(東大寺) 니가츠도우(二月堂)의 행법은 二七日(14일간)에 행하는 것으로, 제 8일째에 인조우(印蔵)의 불상을 모시고 나온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인조우(印蔵)'은 토우다이지(東大寺)에 있었던 쿠라(蔵)의 하나로, 이들 문헌의 기술에 따르면, 코간논(小観音)은 슈니에(修二会) 전용 본존으로 평소에는 호우조우(宝蔵)에 봉납되어 니가츠도우(二月堂) 안에는 안치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이 언제가부터 니가츠도우(二月堂)에 계속 안치되는것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川村知行은 '二月堂衆中練行衆日記'의 久安4年(1148年)2月5日의 내용에 '仏後観音御宝殿'이라는 문구를 중시하여, 2월 5일의 시점에서 '仏後', 즉 본존 뒤쪽에 '간논(観音)의 호우덴(宝殿)'이 있었다기 보다, 코간논(小観音)이 쿠라(蔵)의 안이 아니라, 그냥 니가츠도우(二月堂)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코간논(小観音)이 인조우(印蔵)로부터 니가츠도우(二月堂)으로 옮겼다는 내용은 이 해(1148년)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오오간논(大観音)・코간논(小観音) 모두 절대의 비불로, 일반공개은 물론, 사진도 공개되지 않지만, 중세이전에는 지금만큼 절대적으로 비불로 관리되지는 않았고, 불교도상집에 오오간논(大観音)・코간논(小観音)의 도상도 나오기도 한다. 코간논(小観音)의 도상은 東寺観智院旧蔵의 '十一面抄'이라는 도상집에서 보인다. 이는 도상 옆에 '東大寺印蔵像'라고 부기되어 있어 코간논(小観音)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도상적인 특징으로는, 두상의 십일면을 상하로 4단으로 겹쳐 표시한 점이 있다. 타카노야마(高野山)사이난인(西南院) 소장의 '카쿠젠쇼우(覚禅抄)'의 '十一面巻'의 우라가키(裏書)에도 '니가츠도우(二月堂)'으로 부기된 십일면관음의 두부만을 그린 그림이 2점이 있어, 그중 1점에는 두부의 윗면을 상하 4단으로 겹쳐진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 있는데, 바로 이 그림이 코간논(小観音)으로 다른 1점의 그림은 오오간논(大観音)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오오간논(大観音)・코간논(小観音) 모두 절대 비불이지만, 오오간논(大観音)의 동제광배 만은 일반공개되어 있다. 이것은 寛文7年(1667年)의 니가츠도우(二月堂) 화재 때에 파손된 동제광배의 파편을 모아 나무판에 대어 맞춘 것으로 신광부는 높이 226.5센티미터, 두광부는 직경 72.3센티미터이다. 신광부는 주형으로 안쪽, 가운데, 바깥쪽으로 경계가 선으로 구분되어, 바깥쪽에는 화염문양을 표현하고 있다. 앞뒤로 전체에 끌 등으로 새겨넣는 선각 기법으로 많은 불보살상을 표현하고 있지만, 현재는 판에 붙여져 있어 뒷면의 도상은 탁본으로만 알수 있다. 앞면은 상단 중앙에 5구의 여래상, 그 주위에 제불상을 표현하고 있다. 중단은 중앙에 크게 천수관음입상이 표현되어 있고, 그 위와 좌우에는 52개의 격자 구간에 각각 여래좌상을 표현하고 있다. 하단에는 신선상 등이 표현되어 있다. 현재 탁본으로만 확인가능한 뒷면에는, 상단에 불보살 군상, 중단에는 대불연변에서 보였던 것과 같은 천계도、하단에는 수미산도를 표현하고 있다. 두광부는 결실부가 많아 자세한 도상은 확정할 수 없다. 대불연변의 선각이 균일한 굵기로 선각되어 있던 것에 비해, 이 광배의 선각은 굵기의 변화가 보이는 점을 볼 때, 같은 나라시대이지만, 대불연변보다 연대가 내려가는 것으로 짐작된다.
카이단인(戒壇院)은 중이 출가하면서 계를 받는 곳으로 天平勝宝7歳(755年)에 간진(鑑真) 화상을 초대하여 창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享保18年(1733年)에 재건된 것으로 중앙에 법화경 견보탑품에서 설한 보탑이 모셔져 있고, 그 주위에 사천왕상이 수호하고 있다. 소조 사천왕입상 역시 국보로 홋케도우(法華堂)의 일광/월광보살상, 집금강신상과 함께 나라시대 소조상의 최고걸작 중의 하나이다. 분노의 표정을 드러낸 지국천, 증장천상과 눈섭을 찌푸린 채 분노를 숨긴 광목천, 다문천상의 대조가 볼 만하다. 기록에 의하면 창건 당시의 카이단인(戒壇院) 사천왕상은 동조(銅造)였고, 현재의 사천왕상은 후세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다.
쇼우로우(鐘楼)는 국보로 카마쿠라시대인 13세기초의 건축물이며, 걸려있는 범종은 국보로 다이부츠카이겐(大仏開眼)과 같은 시기인 天平勝宝4年(752年)에 제작되어 중세이전에 만들어진 범종으로서는 가장 큰 높이 385센티미터, 구경 271센티미터의 거작이다.
카이산도우(開山堂)는 국보宝로 개산조인 로우벤(良弁)의 초상을 안치하고 있는 당우로 내진은 正治2年(1200年)、외진은 建長2年(1250年)에 지어졌고, 난다이몬(南大門)과 함께 다이부츠요우(大仏様)건축의 드문 예이다. 본존인 목조 로우벤(良弁) 승정좌상(국보)은 헤이안시대 초기인 9세기의 작품이다.
테가이몬(転害門)은 국보로 경내 서북쪽, 쇼우소우인(正倉院)의 서쪽에 있으며, 타이라노시게히라(平重衡)의 병화(1180年)、미요시마츠나가(三好・松永)의 전투(1567年)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건축물의 하나이다. 카마쿠라시대에 수리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라시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