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박봉애( 朴奉愛) - 세상 것 돌아보지 않고 4. 비난과 핍박을 한몸에 받으며 1 이대(梨大) 사건, 연대 사건이 일어났다. 미션스쿨인 이대에서 통일교회 다니는 학생과 교수들에게 통일교회냐, 학교냐를 택하라는 식의 압력을 가해 통일교회를 택하겠다는 학생 14명과 교수 5명으로부터 자퇴서를 받아 처리한 것이다. 2 졸렬한 학교 당국의 처사에 사회여론은 일제히 비난을 가했으나 교단 지도층의 종용을 받고는 그 논조를 달리했다. 그때 이화여고 졸업반에 내 큰 딸이 다니고 있었다. 신앙이 좋은 내 딸은 학교에서 틈 있는 대로 교우들에게 전도하였다. 3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엔 운동장 가에 앉아 성가도 부르고 기도도 하였다. 그 사실이 학생들 입을 통해 교사들에게 알려져 학교에서 문제가 되었다. 처음엔 교목(校牧)이 불러다가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4 그러나 계속 전도를 하고 찬송과 기도를 드리니 결국 교직원 회의에 부쳐져 퇴학 조치를 내렸고 그 사실이 내게 전달되었다. 나는 학교를 찾아갔다. 교문에서 지면이 두터운 신 교장을 만났다. 그는 반가워하면서 ‘어떻게 학교에 나오십니까’ 한다. 5 “내 딸을 퇴학시킨다고 해서 왔소” “아니 박 선생님의 딸을 누가 퇴학시킨다고 했어요” 하고 되묻는다. 책임 전가를 해서 정면충돌을 피해 보자는 속셈임을 안 나는 “내 딸이 통일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내려 쫓아 버렸다면서요” 단도직입식으로 말을 걸었다. 6 교장실에 들어가 “나 분주한 사람이고 교장선생님도 분주한 분이니 간단히 내가 묻는데 대답만 해주면 내 딸 데리고 가리다. 내 딸이 이화여고 교칙 몇 조를 어겨 퇴학시키려 하는 것이오? 이 대답만 하시오. 학칙을 어겼으면 퇴학을 당해야지요” 하고 재촉했다. 교장선생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굳어지면서 횡설수설이다. 7 “아니 교회 나가는 것이 퇴학의 조건이오? 언제 입학할 때 그런 조건 걸고 입학시켰소? 국가의 헌법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이화여고는 헌법을 무시하오? 지금 이 학교 학생중에는 무당, 점쟁이 딸도 있을 터인데 왜 통일교회만 문제삼고 있소. 이대(製大)가 퇴학을 시켰으니 우리도 시킨다는 것이오? 당신 학교에서 언제부터 학칙을 고쳐 이대 학칙을 빌려왔소? 내 딸은 내가 나가는 교회를 내가 데리고 나갑니다” 교장선생은 말이 없다. 8 “학생은 학교 테두리 안에서 교육시키는 것이고 그 외에는 부모가 책임지는 것이오. 학급 실장이오. 우등생인 착한 아이를 교회 문제를 가지고 퇴학시켜 보시오. 나는 학교를 상대로 끝까지 싸워 보겠어요” 하고 학교를 나왔다. 9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학교에서 사정을 한다. 사회의 물의가 있으니 더 좋은 학교로 전학시켜 줄 테니 다른 학교로 옮겨 달라고 석 달 동안을 졸랐다. 만일 퇴학만 시켜봐라 신문에 떠들어서 사회문제를 삼고 말겠다고 별렀다. 10 내가 정당에 관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끝내 퇴학시키지 못했으나 졸업시 전과목을 90점 이상에서 70점 이하로 떨어 뜨렸다. 내 딸이 만일 이대를 다녔더라면 나는 이대와도 싸웠을 것이다. 이렇듯 내 주변의 힘겨운 장벽들도 아이들이 엄마의 뜻을 이해하고 따라주는 것이 대견스러워 물질적인 어려움쯤은 쉽게 넘을 수 있었고 항상 감사의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다. 11 배우지 못한 할머니들의 조리 없는 기도도 왜 그리 은혜스러웠는지 몰랐다. 평양서부터 이 뜻을 따라나온 옥세현 모친, 지승도 모친, 이기완 모친, 더욱이 연소한 청년의 몸으로 죽음의 휴전선을 따라 넘어왔다는 김원필 선생, 그분들의 모습은 바로 성자의 모습들이었다. 12 초창기 출발시부터 변함없는 모습으로 죽음의 자리까지 동참하면서 역사의 초석을 꾸미며 따라온 그분들은 정말 내 신앙 노정의 등불처럼 우러러 보였다. 이렇게 내 신앙의 눈이 뜨이고 열이 가해지자 우리 집안에서는 반대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빠는 교회를 그만두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딸들이나 내가 한번 작정한 뜻길인지라 말을 들을 리 없다. 13 그러자 핍박이 들어왔다. 그렇게 아끼고 귀여워하던 아이들에게 매질을 하는 것을 볼 때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매일 아침 당사(黨舍)에 출근하기 전 교회에 들려 기도하곤 했다. 교회를 다녀가지 않으면 그날은 반드시 불유쾌한 일이 생기고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날엔 불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교회를 들려가야만 했다. 14 자식과 아내를 교회에 빼앗겨 버렸다고 느끼는 아빠는 주위에서 잡다하게 들리는 비난의 소리에 더욱 분격하여 이성을 잃어버린 경지에 섰다.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은 교회 가는 길목에 지켜서 있다가 개울에 처넣으려 하던 일, 집으로 끌려가 온몸이 퉁퉁 부어 멍이 들도록 맞아 목욕탕에 갈 수 없었지만 하늘이 대신 맞아 주었는지 하나도 아프지 않던 일들이 생각난다. 15 5년 동안을 그이와 교회 문제로 다투었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되자 그이는 정치적인 힘을 빌려 나에 대한 화살을 교회 쪽으로 돌려 탄압하려 했다. 가족회의가 열린 자리에서 그때 교회에 같이 나오던 둘째 아들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16 아버지는 큰 아들과 현재의 집에서 살기로 하고 어머니는 동생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서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히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기쁘게 그 제의를 받아들였고 가족회의 결과에 따라 살던 집을 그대로 내어주고 나는 전셋집을 얻어 따로 이사 나왔다. 17 새가 공중으로 나는 기분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그때의 훨훨 날 것 같은 기분이 그러하지 않을까? 부부가 한 가정의 울타리 속에 살지만 뜻과 심정이 같지 못할 때, 그 가정은 사랑의 화원이 아니라 사랑의 무덤임을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이다. 18 가정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넘어선 나에게 또 무거운 십자가가 젊어지워졌다. 1955년 이대, 연대 사건이 있은 후 우리 교회는 기성 교단의 핍박을 받은 것은 물론이요, 정치적인 압력이 가중되었다. 전국에는 통일교회 간판이나 선전 포스터를 붙이지 못하도록 치안국에서 지시가 내려졌다. 계몽 대원들이 부락에 들어가면 기성교회로부터 모략중상을 받았고 경찰의 정면 방해를 받았다. 19 자유당 정권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독재 정치로서 국민을 우롱하고 있을 때이다. 그때 이 대통령 비서라는 자가 나서서 나를 투옥시킬 방법을 모의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들은 민주당 부녀 부장의 위치에 있는 나 박봉애를 무서워하고 있을 때이다. 20 정치적인 방법으로는 여론이 무서운지라 교회와 연결시켜 교회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나를 감옥에 가둬두자는 계획이었다. 야당의 선두에 서서 선거 때마다 전국을 누비면서 집권당의 횡포와 부패를 국민 앞에 폭로하고 이 대통령은 헌법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말대로 민주당의 최고위원보다 박봉애의 독설을 더 무서워했다. 21 아무리 교묘한 수단으로 표를 만들어 놓아도 박봉애가 한 번 다녀가면 그 표 깨어지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고들 했다. 그것은 내가 국민의 편에 서서 그들의 억울한 울분을 대신 터뜨려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로 자유당의 모사꾼들은 선거전에 나를 1년만 무슨 죄라도 뒤집어 씌워 잡아넣자고 결정한 것이다. 22 나를 투옥시키고 교회 활동에 브레이크를 걸자는 것이다. 뜻을 위해 투옥당하는 것은 오히려 영광이었다. 그러나 나로 인하여 교회에 영향이 미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할 때 나는 어느 길을 택해야 할 것인가? 하늘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보다 가치 있는 것일까 고심하였다. 23 오늘까지 쌓아 올린 내 모든 위신과 명예, 사회적 모든 여건을 헌신짝처럼 벗어버리느냐 아니면 신앙을 포기하느냐 하는 기로에서 심각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일생을 바쳐 쌓아 올린 탑을 자기 손으로 무너뜨린다는 것은 죽음을 택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24 통일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친구가 끊어지고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통일교회 나간다는 말을 숨기고 꺼려 했지만 나는 일부러라도 내 아는 사람들 앞에서 숨기지 않았다. 25 너같이 똑똑한 사람이 왜 통일교회에 나가느냐고 비꼴 때도 나는 오히려 자랑스러워 원리를 들으시오. 원리를 들어보지도 않고 지성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소? 하고 여유 있게 반박해 주었다. 26 그렇게 큰 소리를 탕탕 치던 나 자신이건만 신앙이냐 아니면 나 자신의 정치적 생명, 사회적 지위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설 때 고민이 생기고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좀 쉽게 넘어갈 방법은 없는가 하고…그러나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니 최후의 판단은 기도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가 11월이다. 27 ‘내 갈길이 어느 길인지 하늘이여 가르쳐 주옵소서’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냉수 목욕을 하고 효창공원에 나가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공원에 제일 먼저 나가 하늘 앞에 기도하기 백 일, 나는 드디어 하늘의 음성을 듣고 있었다. “너를 버려라, 너를 버릴 때 진정한 너를 찾는다. 28 물질적인 너를 버리고 영적인 너를 찾아 세워야 한다. 네 명예, 위신, 사회적 지위는 한낱 물거품 같은 것. 하늘은 6천 년 동안 타락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싸워오지 않았느냐, 피어린 역사를 엮어내려 오면서 하늘이 언제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였더냐, 선지 성현들의 희생의 터전 위에 너 같은 죄인을 구하였건만 너는 무엇을 주저하느냐” 29 처음 뜻길을 출발할 때 너는 하늘 앞에 맹세했다. 뜻을 위해 살겠다고 민족을 위해 죽겠노라고 역사적인 혁명 대열에 가담하여 이 민족의 비운의 역사를 바로잡겠노라고. “너는 제3의 인생을 기꺼이 출발하지 않았느냐?” 하늘의 음성이 내 귀를 울리고 있었다. 30 나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간으로 들려 올라가는 듯한 환상의 시간이 지나자 가슴 가득히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주위를 돌아보았다. 분명 나는 효창공원 잔디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이다. 31 새 출발을 하자. 하늘이 필요할 때 제물로 바쳐지는 영광의 새 출발을! 세상이 욕을 하건 멸시하건 그것은 흘러가는 역사와 더불어 사라져 버리는 것. 영원한 역사를 위해 모든 생활을 미련 없이 청산하자. 영광된 상처를 입자. 타도를 당하자. 하늘이 같이하면 그 외에 더 큰 자랑이 어디 있겠는가! |
証言 朴奉愛 - 世間のものには目もくれずに 4. 非難と迫害を一身に受けて 梨花女子大事件、延世大事件が起こった。ミッションスクールである梨花女子大から、統一教会に通う学生と教授に、統一教会か大学か選べというような圧力をかけ、統一教会を選んだ学生一四名と教授五名に辞退書を出させ処理したのだった。 拙劣な大学当局の処理に、社会世論は一斉に非難したが、教壇指導層の説明を受けてからはその論調を変えた。 そのとき、梨花女子校三年生のクラスに私の長女が通っていた。信仰が篤い私の娘は学校で時間があればいつも級友を伝道していた。 昼食の時間や放課後には運動場の隅に座り、聖歌を歌ったり祈祷したりした。そうした事実が学生の口を通じて教師たちに知れ学校で問題になった。 初めは校牧(学校専任の牧師)に呼ばれて教会に行かないように忠告を受けた。しかし続けて伝道をし、讃美歌を歌い祈祷を捧げたので、結局教職会議にかけられ、退学措置になったことが私に伝えられた。私は学校を訪ねた。 校門で顔見知りだった申校長に会った。 彼は笑顔で私を迎えながら「何故、学校に来られたのですか。」と言った。 「私の娘を退学させるというので来たんです。」 「何だって。朴さんの娘さんを誰が退学させると言ったのですか。」と聞き返してきた。責任転嫁をして正面衝突を避けようとする下心が分かった私は、「私の娘が統一教会に通っているという理由で退学処分を下し、学校から追い出したそうですね。」私は単刀直入に言った。 校長室に入り、「私は忙しい身であるし、校長先生も忙しい方なので私が聞くことに簡単に返事だけしてもらえば私の娘を連れて帰ります。私の娘が梨花女子校の校則何条を破って退学になるというのですか? この答えだけが聞きたいのです。校則を破ったのだったら退学させられるしかないでしょう?」と催促した。 校長先生の顔色が蒼白になり顔もこわばってしどろもどろになった。 「いや、教会に通うことが退学の理由だと言うんですか。入学するとき、そんな条件で入学させた覚えはありません。国家の憲法が信仰の自由を保障しているのに梨花女子高は憲法を無視するのですか。今、この学校の中にはムタン(巫女)信仰や、占い師の娘もいるはずなのに、なぜ統一教会だけ問題にするのでしょう。梨花女子大学が退学処分をしたので私のところも退学になるのですか。あなたの学校ではいつから校則を変えて梨花女子大学の校則を取り入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か。私の娘は私が通っている教会に通わせます。」校長先生は何も言えなかった。 「学生は学校の枠のなかで教育するものであり、それ以外は父母が責任を持つものです。優等生でおとなしい子を教会問題のために退学にできるのてすか。私は学校を相手に最後まで闘ってみます。」と言って学校を出た。 そんなことがあってからは、学校側から過ちを正してきた。社会の物議がうるさいので、もっと良い学校に転校させてあげるから、別の学校に移ってほしいと三ヵ月間要求し続けてきた。 万が一退学させようものなら、新聞に騒ぎ立て社会問題にしてやろうと決心していた。 私が政党に関係していたので結局退学させることができず、卒業時、全科目九〇点以上だったのに七〇点以下まで下げられてしまった。 私の娘がもしも梨花女子大学に通っていたら私は梨花女子大学とも闘っていただろう。 このように、私の周りの大変な障壁も子供たちが母のみ旨をよく理解し従って来てくれることが感謝であり、物質的な困難はたやすく乗り越えることができ、いつも感謝の心で過ごすことができた。学問のないおばあさんの祈祷もなぜこんなにも恩恵が多いのか分からないほどだった。 平壌からこのみ旨に従ってこられた玉世賢さん、池承道さん、李キワンさん、そしてまだ若い青年のみでありながら死の休戦線を越えてきた金元弼先生、このような方々の姿はまさに聖者の姿だった。 草創期の出発点から変わりない姿で死の境地までも共にしながら歴史の初石を飾り従ってこられた方々を私は自分の信仰路程の灯火のように仰ぎみてきた。 このように私の信仰の目が開かれ熱が入ってくるとともに私の家で反対の役事が起こり始めた。主人は教会を辞めろと強要した。しかし娘たちや私が一度決めたみ旨の道を辞めるはずがなかった。 それからは苦痛の日々が始まった。こんなにも大事に可愛がって育てた子供たちに父親が鞭を加えているのを見たとき、私は気が狂いそうになった。 そんな中でも私は毎朝、党舎に出勤する前に教会に立ち寄り祈祷したりした。 教会に行かなければその日は必ず不愉快なことが起き、家に早く帰ったりすると不和が起こったため、教会に行かざるを得なかった。 子供と妻を教会に奪われたと感じた主人は周囲から聞かされる非難の声に更に激憤し理性を失う境地に至った。最も忘れられない場面は、教会に行く道に待ち伏せしていて小川へ放り込もうとしたこと、家に引っ張り込まれ身体中が腫れるほど殴られ、お風呂にも行けない状態だったのに天が代わって殴られてくれたのか、ひとつも痛くなかったことも思い出される。 五年間、彼と教会問題で闘った。しかし解決が見られないので、彼は政治的な力を借りて私に対する矢を教会の方へ向けて弾圧しようとした。 家族会議が開かれた席で、そのとき一緒に教会に通っていた二番目の息子が次のように提案した。お父さんはお兄さんと今の家に住むことにし、お母さんは弟妹たちを連れて別の場所に引っ越して、もっと楽に暮らすべきてはないだろうか。 夫婦が一つの家庭の垣根の中で住んでいながら志と心情が一致しないとき、その家庭は愛の花園ではなく愛の墓となってしまうことが骨身にしみたからだ。 家庭の十字架を負ってコルゴダの丘を越えてから、また私に重い十字架が負わされた。 一九五五年、梨花女子大学、延世大学事件が起こった後、我々の教会は既成教会に迫害を受けたのはもちろん、政治的な圧力が加重された。全国で統一教会の看板や宣伝のポスターを貼れないよう治安局から指示がくだされた。啓蒙隊員たちが町に入っていくと既成教会から謀略、中傷を受け、警察の正面妨害にあった。 自由党政権は民主主義に逆行する独裁政治で持って国民を愚弄しているときだ。そのとき、李大統領の秘書だという者が出てきて私を投獄する方法を謀っているという情報が入ってきた。 彼らが民主党の婦女部長の位置にある私、朴奉愛を恐れているときだ。 政治的な方法では世論が恐いので教会と連結させ教会弾圧を強化する一方で私を監獄に閉じ込めようという計画だった。 野党の先頭に立って選挙の度ごとに全国を回りながら執権党の横暴と腐敗を国民の前に暴露し、李大統領は憲法の上に君臨していることを攻撃したので彼らの言う通り民主党の最高議員より朴奉愛の毒舌をもっと恐がっていた。 どんなに巧妙な手段で票を獲得しても朴奉愛が一度回るとその票が崩れていく音が聞こえると言われた。それは私が国民の側に立ち彼らの重苦しい鬱憤を代わりにはらってあげたからだろう。 それで自由党の謀略家たちは選挙の前に、一年間私をどんな罪でもいいからかぶせて捕まえようと決めたのだった。私を投獄して教会活動にブレーキをかけようというのだ。 み旨のために投獄されるのはむしろ名誉だった。しかし私のことで教会に影響を及ぼしてはいけないと思うとどちらを選ぶべきなのか迷った。 天のために何をどうするのがより価値あることなのか苦しんだ。 今日まで積み上げて来た私のすべての威信と名誉、すべての社会的条件を履き潰した草履のように捨ててしまおうか、でなければ信仰を捨てるかの岐路で深刻に悩み始めた。 自分が。生をかけて積み上げた塔を自分の手で壊すということは死を選ぶのと同然だった。 統一教会に通っているからといって、友達がいなくなり、人から指を指されるのが問題ではなかった。 ある人は統一教会に通っていることを隠して気にするが、私は無理にでも知っている人々の前で隠したりしなかった。 あなたみたいに賢い人がどうして統一教会に行くのかと皮肉っても、私はむしろ誇らしく原理を聞きなさい。原理を聞きもしないで知性人と自認できますか。と余裕を持ってやり返した。 このように大きな口を叩いていた自分だったが、信仰か或いは自分の政治的生命、社会的生命かという選択の岐路に立つと、悩みが生じ心が弱くなるのはどうすることもできなかった。もう少しやさしく乗り越える方法はないだろうかと思いながら。 しかし自分の力ではどうすることもできず最後の判断は祈祷で解決するしかなかった。それが一一月だった。 「私の行くべき道はどの道なのか、天よ、教えたもう。」 私は夜明けの四時に起き水行をして孝昌公園に行って百日祈祷を始めた。 公園に誰よりも先に出ていき天の前に祈祷すること百日、私は遂に天の声を聞いた。 「自分を捨てなさい。自分を捨てたときに本当の自分を見いだす。物質的な自分を捨てて霊的な自分を探しださなければならない。おまえの名誉、威信、社会的地位は単なる泡のようなものだ。 天は六千年の間、堕落人間を救うために闘ってきたのではないか。血にまみれた歴史を収拾しながら天はいつ威信や体面を考えたか。先知聖賢たちの犠牲の基盤の上にお前のような罪人を救ったというのにお前は何をためらっているのか。 初めてみ旨の道を出発したとき、お前は天の前に誓った。み旨のために生きようと民族のために死のうと歴史的な革命の隊列に加担し、この民族の悲運の歴史を立て直そうと。 お前は第三の人生を喜んで出発し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天の声が私の耳に聞こえてきた。 私は頭を上げて天を仰いだ。空中に持ち上げられるような幻想の時間が過ぎ、胸一杯に聖霊の花火が燃え上がり始めた。周囲を見回した。明らかに私は孝昌公園にひざま付いているはずなのに。 天は私の祈祷に答えてくださったのだ。 新しい出発をしよう。 天が必要とするとき、祭物となる栄光の新しい出発。 世間が悪口を言っても蔑視しても、それは流れて行く歴史とともに消えてしまうもの、永遠なる歴史のためにすべての生活を未練なく清算しよう。栄光の傷を受けよう。天が共にあるならそれ以外にもっと大きな誇りがどこにあるというのか。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