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전운(戰雲) 1
"크윽!"
선실에 도착하자마자 참고 있었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위에 숨어있는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당당한 모습으로 이곳까지 왔다.
"퉤!"
입안 가득 고인 피를 뱉어내자 피와 함께 여러 개의 작은 덩어리들이 쏟아진다.
이빨.
천무맹의 삼 공자인 정천무룡 백무천의 이가 부러진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평범한 이가 아니었다. 천무맹의 삼 공자가 된 후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옷깃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백무천의 이름이,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진 채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이다.
"백-산! 이 버러지 같은 놈!"
너무나 어이없는 일을 당하고 말았다. 승부에서는 분명히 이겼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내공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지만 버러지 놈을 처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놈이 졌다고 선언을 했고 겉보기에 분명 자신이 이겼지만 스스로가 이겼다고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근처에 접근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놈에게 안면을 강타당했고 그 결과물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버러지처럼 야비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정상적인 상태일 때는 계집의 치마폭에 숨어 있다가 몸이 이상해지자 무인(武人)도 아닌 놈이 정식 비무를 신청해 왔다.
한 가지 확인한 것이 있다면 놈의 내공이 변변치 않다는 것이다. 몸놀림은 놀라울 정도로 기민했지만 자신의 안면을 친 세 번의 공격에 그가 입은 피해는 이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만일 내공의 고수였다면 자신은 지금 이곳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순간 오한이 드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난 백무천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놈! 죽인다. 반드시… 울컥!"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심화가 더욱 커지고 결국 피를 토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뱉어낸 피와 이빨은 버러지 놈에 의해서 만들어진 흔적이었지만 지금의 피는 자신이 울화에 못 이겨서 남긴 흔적이었다.
단 한 번도 패배를 모르고 살아왔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만상투인루에서 부상당했던 것은 자신의 자만심에서 그리된 것이었지 결코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자꾸만 꿈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만해라 사제, 진정하고 몸부터 추슬러라."
비도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던 운학자가 백무천의 선실에서 나오는 고함소리에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핏속에 섞여서 바닥에 흩어져있는 여러 개의 하얀 이들을 보았다.
안쓰러웠다.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하던 자신의 사제가 처음으로 좌절을 겪고 있었다.
자신이 인정하는 인물과 비무에서 패했다면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고 더욱더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생각지도 않은 빙혼마녀에게 철저하게 패한 것은 물론 평소에 버러지라 인간 취급도 안 했던 놈에게는 이가 부러지는 수모를 당했다.
그가 보았을 때도 이긴 비무가 아니었다. 다만 대외적으로는 이긴 것으로 되었기에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을 뿐이었다.
"비도가 가리키는 곳을 알아냈다."
역시 삶의 연륜이란 무시할 수 없는 것인가, 패배와 굴욕감으로 힘들어하는 사제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최고의 방법을 쓰고 있었다. 지금 백무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물론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강한 무공이 필요하게 되었다. 고금오천무에 해당하는 무공은 최대한 익혀봐야 서로 동수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공을 익혀서 그 두 가지를 합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천검무극류를 익혀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가 조천영과의 비무에서 나타났다.
'다른 것에 몰두하다 보면 이번 일은 잊겠지.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빨리 버려야 할 것이야….'
운학자의 처방은 금방 먹혀들었다.
"어디입니까, 사형?"
백무천의 얼굴 표정이 변했다. 다 죽어가던 얼굴에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고금오천무가 묻힌 곳을 찾았다는 것에 대한 기쁨의 표정이 아니었다. 반드시 찾아서 익혀야 한다는 결심을 보여주는 얼굴이었다.
"항산(恒山)이다."
"산서성(山西省)이란 말입니까? 먼 길이 되겠군요…."
천검무극류가 묻혀있는 곳의 위치가 밝혀졌다. 이제 그곳으로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익힐 것이다. 반드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빙혼마녀 그리고 버러지 놈, 기다려라.'
절로 마음이 급해지고 조급증이 일었다. 자신에게 찾아온 또 하나의 행운이 그 실체를 드러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 빨리 익혀서 이 치욕을 갚아주고 싶었다.
"새벽에 출발하도록 하지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는지 백무천의 목소리가 한결 차분해졌다.
운학자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의 의연한 모습에 대한 대견함이다. 아무리 분해도 일에는 선후가 있어야 한다.
이런 점이 오늘의 사제가 있게 한 것이다. 사문의 지원도 거의 없이, 이십 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다른 모든 이들을 제치고 맹주 후보 일 순위가 되게 한 원동력이다.
작은 일보다는 큰일을 우선하는 결단력과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은 나이를 먹었다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맹은 어찌할 거냐?"
"지금은 알릴 필요가 없지요. 도착 후에 그때 가서 알려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전에 비도가 이곳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확인은 시켜주어야지요."
"복안이라도 있는 게냐?"
"이곳에서 비도 쟁탈전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비도의 주인은 버려지고요."
백산에게 비도가 있다는 소문을 흘리고 자신은 항산으로 떠날 예정이다. 자신이 비동(秘洞)을 찾을 때까지 비도는 계속 이곳에 있어야 하고 그래야 맹의 이목을 이곳에 묶어둘 수 있다.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살아남는 방법이고 최고가 되는 방법이었다.
이익은 먼저 취해야지 타인과 나눌 것이 없다. 취하고 난 찌꺼기만 가져다주어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감격해하기 마련이다.
'네놈도 편하게 살 수 없게 해주마.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살아있어라. 팔이 없어져도 좋고 다리가 없어져도 좋다. 나를 확인할 수 있는 눈만 가지고 있어라… 제발 부탁이다, 버러지.'
이를 부득부득 갈아댔으나 가슴속을 풀어주는 시원함보다는 미약한 소리와 함께 고통만 밀려오고 있었다.
백산을 부숴버리기 위한 백무천의 음모, 그러나 그것은 음모가 아닌 사실이었으니, 지금 백산의 수중에는 아직도 팔지 못한 비도가 다섯 장이나 남아있었던 것이다.
"맹에도 그렇게 알리십시오, 계속 추적하고 있다고. 연매에게는 제가 별도로 알리겠습니다."
* * *
다음날 새벽 두 마리의 전서구가 동정호를 가로질러 하늘 끝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두 마리의 전서구가 도착한 곳, 정도 무림의 요람이자 정의를 집행하는 핵(核)인 천무맹(天武盟)이었다.
백 년 전, 거세게 일어났던 천마맹에 대항하기 위하여 구파일방이 힘을 모아 창설했던 정도의 하늘(天), 오백 년 전 혈겁천(血劫天)을 멸망시켰던 천검(天劍) 담사월(潭士月)의 유지를 기린다는 명분을 가지고, 그의 후예인 검제(劍帝) 담운천(潭雲天)을 초대 맹주로 추대하여 어언 백년의 세월 동안 정도의 기둥이 되어온 곳이다.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 칭해지는 소림사가 있는 숭산(嵩山)의 동쪽 태실봉(太室峰), 그 중턱에 수백의 고루거각들이 천하를 굽어보며 오연한 자세로 서 있다.
천무맹의 맹주 거처인 천무전, 그리고 원로들의 거처인 장생원(長生院) 등 일전(一展), 일원(一院), 오각(五閣)의 전체 상주 인원 만오천여 명, 명실상부한 강호 최대의 방파가 천무맹이다.
그러나 천무맹의 역사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초대맹주인 검제 담운천이 있을 때만 해도 창설초기였고 천마맹이란 거대한 적이 있었기에 구파의 협조가 비교적 수월하여 잘 운영이 되었다.
그러나 담운천의 이십 년 치세가 끝나고 그 다음부터 문제가 발생하였다. 마땅한 맹주감이 없자 구파일방이 돌아가면서 천무맹을 장악했던 것이다.
십일 대 맹주였던 소림의 각인대사, 저 유명한 쌍천불의 제자인 그가 맹주로 있을 때까지는 천무맹이라는 거대 단체가 구파의 하위단체로 있으면서 구파일방의 이름으로 하기에 곤란한 일의 처리를 도맡아 했다.
그러나 각인대사 집권 시에 있었던 원나라의 멸망과 오천맹의 사건 등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커다란 사건들이 생겨나자 그의 집권이 길어졌고 그것에 대해서 구파일방이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강호무림의 정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각인대사의 집권이 장기화되면서 소림의 위세가 너무 커져버린 까닭이었다.
이에 다급함을 느낀 나머지 문파에서 맹주로 있던 각인대사를 축출하게 된다. 이십 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하던 각인대사 시대의 몰락이었다.
다시 십여 년을 공동으로 천무맹을 관리해 오던 구파일방은 한계점을 느끼게 되고 자신들의 명령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허수아비 맹주를 찾았다.
구파일방과 연관이 있으면서도 각 문파의 정식제자가 아닌 자(者), 그들의 선택은 속가제자였다. 속가제자들 중에서 인물을 고르다 선택된 사람이 화산파의 속가제자였던 검신(劍神) 화진악(華辰岳)이었다.
강호무림에서 명성도 얻고 있는 인물이었고, 또한 검신 화진악보다 더 위대한 화산파가 있었기에 그 정도 인물이라면 구파일방이 다루기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착각이었다.
속가제자(俗家弟子)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무림 거대문파의 자금줄이다.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무인들이 돈을 벌 리가 없고 그들도 사람인지라 먹는 것은 일반인과 같으니 문파를 꾸려나가는데 돈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돈줄들이 바로 속가제자인 것이다.
평상시에는 자파(自派)의 자금줄 노릇을 하고 유사시에는 전력(戰力)이 될 수 있으니 문파 내에 있는 단순한 무공 몇 가지 가르쳐준 것치고는 상당한 대가가 아닐 수 없다.
말로는 속가제자라며 대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본산에 있는 제자들에 비해서 많은 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또한 속가제자들이었다.
언제나 본파 제자들에 비해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속가제자, 그것을 잘 알고 있던 화진악은 자신이 맹주가 되자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한 것이 구파일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의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어 작금(昨今)에 와서는 구파일방을 내려다보는 최대 방파가 되었고, 강호인들마저도 정도의 횃불로 구파일방 위에 천무맹을 놓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내성 깊숙한 곳에 있는 맹주의 처소이며 회의장인 천무전(天武展)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십천각(十天閣), 무천각(武天閣), 제마각(制魔閣), 신룡각(新龍閣) 등 사각(四閣)이 위치하고, 그 사각을 중심으로 방사형태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천혜의 요새를 형성하고 있다.
천밀각(天密閣).
오각 중 유일하게 내성이 아닌 외성에 위치하고 있는 곳, 두 마리의 전서구가 도착한 장소였다. 천무맹의 최고 정보기관이며 대외비를 다루는 곳으로 강호전역에 활동하고 있는 밀정의 수만 해도 삼천이 넘는 최대 인원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정보 수집 능력에 있어서도 구파일방 중 최대 방파인 개방에 버금간다고 할 만큼 뛰어난 곳이고, 정보를 다루는 기관이면 최고 권력기관임이 분명한데도 외성의 한적한 곳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두 사층으로 되어있는 칙칙한 건물의 최상층, 두 마리의 전서구 중 한 마리가 향한 곳이었다.
흑단처럼 윤기 있는 머리, 약간 튀어나온 이마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검은 눈동자는 많은 서책을 탐독한 인물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깊이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세상을 오시할 것 같은 오뚝한 콧날과 앵두를 연상시킬 만큼 붉고 작은 입술은 육감적이기도 했지만 상당히 고집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선명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이 흑의미녀가 방금 도착한 전서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제천신뇌(制天神腦) 제갈수연(諸葛秀蓮).
여인의 몸으로 대 천무맹의 군사가 될 만큼 뛰어난 오성과 냉철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제갈세가의 현가주가 바로 그녀다.
과거 오천맹의 일원이었던 가문의 전력 때문에 맹 내의 최고 실세가 될 수 있는 천밀각의 각주임에도 불구하고 외성의 이 한적한 곳에 기거하고 있는 것이다.
벌써 오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구파일방의 인물들은 그 누구도 오천맹을 잊지 않고 있었다.
천무맹의 군사를 감시하는 사람도 있는지 사방을 예리하게 살피던 제갈수연이 전서구의 목에서 무엇인가를 살짝 빼냈다.
'득(得), 행(行), 혼(混), 애(愛).'
네 글자, 백무천의 전서였다.
비도를 얻었고 비밀도 풀었으니 맹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려달라는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랑한다는 말 애(愛), 제갈수연에게 따로 한 말이었다.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그 글자를 가만히 쓰다듬고 있었다.
"군사님, 한 시진 후에 천무전으로 드시라는 전갈입니다."
"알았다."
'또 회의인가? 아무런 결론도 없는 탁상공론을 하기 위해서 또 부른다 이거지?'
일층으로 내려온 제갈수연이 회의 자료를 찾는지 이것저것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멈추시오!"
내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경계를 서고 있던 두 명의 위사가 제갈수연을 제지하고 나섰다. 그런 그들을 흘깃 쳐다본 그녀는 조용히 품속에서 명패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통과!"
벌써 삼 년째, 이제는 익숙해지기도 하련만 언제나 굴욕감이 앞선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적도 있었다. 가문의 존립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이런 모욕까지 참아가면서 살아남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무맹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가문을 이어가고 있는 남궁세가와 팽가가 부러웠다. 그래서 차기 맹주가 될 가능성이 높은 백무천에게 더 끌렸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한번이 더 남은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명패를 그대로 쥔 채 나직한 한숨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맹주의 집무실인 천무전의 검문을 지나서 그녀가 도착한 곳은 천무맹의 대소사가 결정되는 회의장인 천명실(天命室)이었다.
이곳에서 나가는 명령은 하늘의 진언이라 해서 천명실이라 했다던가. 맹주를 포함한 오대 각주만이 참석할 수 있는 곳이다.
"어서 오시오, 제갈 군사."
맹주인 검신 화진악, 화산파의 속가제자로 시작하여 그곳에서 배웠던 태을검법(太乙劍法)을 바탕으로 무극태을검법(無極太乙法)을 창안, 나이 삼십오 세 때 검신으로 추앙받기 시작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맹주이자 제마각주인 화진악을 중심으로 부맹주이며 무천각주인 낙양 설가장 장주 뇌음천자(雷音天子) 설검후(雪劍厚), 십천각주인 개방의 파면신개, 신룡각주인 백의천룡(白衣天龍) 화인걸, 네 명이 제갈수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평안들 하셨습니까?"
의례적인 인사와 함께 제갈수연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모든 분들이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화진악이 주위를 돌아보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고하시오, 군사."
"네, 일단 강호 정세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숙지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 강호정세는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 같은 상태입니다. 일말의 계기만 주어진다면 바로 폭발해버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오십 년간의 평화 속에 양대 세력이 너무나 비대해졌고 유일한 불만 해소책이었던 만상투인루마저 사라진 작금의 상황은 양 맹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하등의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대처해야 할 방안은…."
"됐소, 군사. 대처방안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고 군사는 현재 상황만 간단히 보고하면 되는 것이오."
십천각주인 개방의 파면신개 악만금이었다. 언제나 제갈수연의 의견은 무시되었지만 오늘은 더 심했다. 제갈수연의 판단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단지 현 정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할 뿐이었다. 파면신개의 말에 다른 각주들도 당연하다는 듯 인정하고 있는 모양새 또한 이상했다.
"만상투인루 파괴에 대한 단서는 찾았소?"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뇌산의 한 중턱에서 귀조수 연동립과 그의 심복이었던 냉면살마 종천수가 화살을 맞고 숨져있는 것만 발견되었을 뿐입니다."
"천무맹의 정보통이란 천밀각이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이요."
있을 수 없는 질책이었다. 같은 각주의 신분이고 동일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사적인 자리에서야 웃어른이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지금 이곳은 공적인 자리이다. 공대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제갈수연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십천각에서 따로 알아낸 것이라도 있소이까?"
맹주 화진악이 끼어들면서 다소 거칠어진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우리 십천각에서는 만상투인루가 폭파되고 난 후 그곳 뇌룡현을 떠난 무리들을 중심으로 조사를 했소. 그런데 이상한 인물이 한 명 발견되었소. 철혈투에서 광천마승 요불을 물리치고 투신이 되었던 다쇠불알 백산이란 자가 사라진 것이오. 아, 여기서 다쇠불알이란 그 사람의 별호요. 원래는 운수대통 다쇠불알인데 너무 길어서 다쇠불알만 말한 것이오…."
"십천각주! 그자가 만상투인루를 무너뜨렸다고 해도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소."
제갈수연은 전쟁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파면신개는 만상투인루를 멸망시킨 인물에 대해서만 논하자 그것이 못마땅했는지 무천각주며 부맹주인 설검후가 말을 잘랐다.
파면신개.
얼굴에 있는 화상에 의한 흉터 때문에 본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고 해서 생긴 별호이다. 얼굴 때문에 성정이 괴팍하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며 적의를 보이는 그의 성격 때문에 천무맹 내에서도 그와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나 현재 구파일방 중 가장 강한 문파가 개방이었고, 모든 정보를 쥐고 있기에 그들의 입김이 가장 셌다. 그리고 이년 전에 자신이 자청하여 십천각주를 맡겠다하여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것이다.
"끝까지 들어보시오, 무천각주! 왜 말을 자르는 게요."
흥분하여 벌게진 얼굴로 파면신개가 소리를 질렀다.
부맹주인 뇌음천자 설검후.
원래 부맹주는 이인(二人) 체제로 되어있었다. 전통적으로 구파일방에서 두 명이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맹주라는 직책은 상징적으로 묶어두고 모든 실무는 부맹주 두 사람의 합의하에 처리하는 식으로 천무맹을 이끌어 왔었다. 그러던 것이 삼 년 전 제갈수연이 군사로 등장하면서 바뀌어 버렸다.
원활한 지휘체계를 세운다는 명목 하에 부맹주직을 하나로 줄였고, 그 하나의 부맹주직을 놓고 소림과 무당이 서로 양보하고 있는 사이에 무천각주인 뇌음천자 설검후에게 전격적으로 낙점이 된 것이다.
부맹주직이 싫어서 양보했던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형식상 거절했던 것인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제갈수연이 추대한 인물이 설검후였다.
그래서 천무맹 주도권의 상당 부분이 구파일방에서 맹주에게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구파일방의 입장에서는 설검후가 못마땅한 것은 당연했다. 그도 부맹주직을 거절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마디의 거절도 없이 수락했던 것이다.
설검후를 노려보던 파면신개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뇌룡현이 근거지였던 그자가 악양에 나타났고, 전 무림의 관심이 쏠려있는 천선비도를 가지고 있다는 거요. 그리고 그들의 일행 중에…."
"지금은 그 뇌룡현의 인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마맹과의 전쟁여부입니다."
이번에는 제갈수연이 파면신개의 말을 바로 잘랐다. 강호인들은 관심을 가지되 맹에서는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 백무천이 원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천선비도보다 천마맹과의 전쟁이 더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문을 외성으로 몰아내었던 구파일방, 그리고 끊임없이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저들, 그래서 그녀가 천밀각주로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이 권력의 실세로 있던 부맹주직에서 구파일방을 제외시키는 것이었다.
형식과 체면을 중시하는 그들의 허점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끌어내려 버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복수였다.
"맞습니다. 천선비도 건은 무룡대주인 정천무룡이 잘 하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마불가침협정이 깨진 지금 천마맹과의 일전 여부입니다. 군사께서는 계속해 보십시오."
가재는 게 편인가. 자신을 부맹주로 만들어준 제갈수연을 설검후가 계속해서 옹호하고 나섰다.
"천마맹에 있는 저희 밀정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의 권력다툼에서 주전파인 검마 요대철이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곳의 신진고수들도 그를 지지하고 있고요. 결국 우리의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선제공격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싸우느냐 아니면 그들이 공격하는 것을 방어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들이 천밀각과 개방의 차이점이다. 개방의 인물들에 의해서는 이런 고급정보가 쉽게 나올 수가 없다. 수없이 많은 정보를 조합하여 고급정보를 만들어 내지만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시간을 다투는 때에는 신속하게 대처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강호 최고의 정보통인 개방이라는 거대 단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정보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이유였다.
"저희 의견은 선제공격입니다. 어차피 치러야 할 전쟁입니다. 일단 시작되면 긴 시간과 많은 물량이 들어가는 소모전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고 맹의 사기를 위해서도 선제공격이 타당하다고 사료됩니다."
신룡각(新龍閣).
젊은 소장 무인들의 집합체. 신구(新舊)의 조화를 위해 젊은 무인들만의 세계를 별도로 만들어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한다는 명목으로 창설된 단체이며 젊은 혈기에 의해서 생겨날 수 있는 불평불만을 자체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기능을 갖도록 한 곳이다.
현재 각주는 백의천룡 화인걸로 맹주의 아들이다.
"저희 무천각도 신룡각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결국 맹주의 제마각과 구파일방의 십천각을 제외한 세 곳이 선제공격에 찬성하고 나섰다. 하지만 화인걸은 맹주의 입장에 있기에 중립을 유지하고 있을 뿐 그도 선공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전쟁을 반대하는 곳은 구파일방의 연합체인 십천각 한 곳 뿐이라는 것이다.
다가오는 위협에 대비하여 미리 그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방법. 그것이 자신들의 지위를 지켜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기 있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상대방이 자신을 공격할지 안 할지 그런 것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제거되어야 할 세력인 것이다. 지금껏 자신들의 주도권과 영역을 지켜오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그렇게 해서 세력을 유지해왔던 구파일방의 연합체인 십천각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우리는 선제공격에 반대하오이다. 소위 정의를 수호한다는 천무맹이 먼저 도발한다면 설사 이긴다 하더라도 전쟁을 일으켰다는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외다."
구파일방의 수백 년 생존방식을 포기하는 발언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제갈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천무맹이 구파일방의 영향력에서 상당 부분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구파일방이 없으면 전력(戰力)을 유지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파면신개가 십천각의 의견을 모을 때 반전을 주장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나머지 문파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천무맹의 이름으로 치러지는 전쟁 참여는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득이 별로 없다.
전쟁에 승리하게 되더라도 모든 영광은 천무맹이 차지할 것이고 자신들은 상처뿐인 영광만 얻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닌 것이다. 지금도 거의 모든 속가제자들이 천무맹으로 떠났는데 천마맹과 전쟁에서마저 주도권을 쥐지 못하면 그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임이 불 보듯 뻔한 이치가 아니던가.
결국 자신들의 필요성이 인식되고 강호인들이 간절히 원할 때 나서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좋습니다. 일단 오늘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고 각각의 의견을 정리해서 다시 뵙도록 하지요."
이미 이러한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화진악이 폐회를 선언하였다. 어차피 뭔가 경각심을 일깨워 줄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구파일방의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회의를 할 때마다 자네에게 미안하군! 자네가 이해를 하도록 하게."
각주들이 물러가자 화진악이 제갈수연을 향해 구파일방의 홀대에 대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자네를 내성으로 옮겨주고 싶어도 아직은 저들이 필요하네."
구파일방 때문에 제갈수연을 그대로 방치한다는 소리였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임의대로 일을 처리할 수 없다는 간접적인 의사표시였다.
"맹주님의 마음은 간직하겠습니다."
제갈수연도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외성에 있더라도 검문만은 맹주 직권으로 없애줄 수는 있다. 그러나 맹주는 그리하지 않았다. 구파일방 때문이라는 핑계를 달고는 있지만 그도 제갈수연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백무천과의 관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해야 옳았다. 비밀유지를 위해서 극도로 신경을 썼지만 맹주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군사의 말대로라면 현 상황에서는 우리가 선제공격을 하더라도 이기기는 힘들 것 같은데…."
다시 공식적인 입장으로 돌아왔는지 자네에서 군사로 호칭이 바뀌었다.
알고도 묻는 것이다. 아무리 천무맹의 독자적인 힘이 강하다고 하지만 구파일방의 도움 없이는 천마맹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고 있다.
그것을 알기에 파면신개가 저렇게 배짱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아마 저들이 원하는 것은 부맹주 자리의 복귀겠지요. 삼 년 전으로의 회귀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죠. 자신들은 제집에 앉아서 맹의 무사들만 희생시키려 할 것입니다. 극약처방을 써야죠."
"극약처방이라…."
화진악이 자신의 코를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군사가 생각한 곳은 어디인가?"
화진악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이제 육십 대, 평소에는 털털한 노인네 같은 그런 맹주였지만 천무맹의 맹주로 집권한 세월이 이십 년이다. 제갈수연의 극약처방이란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제가 생각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방법은 사로화(死路花) 침서안 -길에 피어있는 꽃을 꺾고, 서안을 침략한다-이것이 먹히지 않을 경우 두 번째로 침(侵) 동화(冬花)-겨울 꽃을 침략한다-입니다."
"그럼 이용할 세력은?"
자신들의 적을 치는 것이 아니라 구파일방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일을 벌이는 것이다. 결국 아군을 쳐서 그들의 경각심을 일깨워야한다는 뜻이다. 그런 일을 하는데 천무맹의 세력을 이용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제갈수연이 제시한 방법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지 그곳을 칠 세력을 묻고 있는 것이다.
"맹주님께 따로 세력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제갈수연의 말에 화진악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비밀세력, 아들인 화인걸도 모르고 있는 것을 제갈수연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바꾸고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도 알고 있었나? 역시 천밀각주구먼… 군사에게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는 제갈수연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녀도 가문을 위해서 별도의 세력을 준비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리 강대한 세력은 아니지만 과거 자신의 가문과 같이 오천맹의 한 축을 담당했던 가문의 잔여세력이다.
구가대(求家隊).
황보세가의 후예들이다. 삼십 년 전, 의문의 멸문을 당했던 그들의 후예를 후일 가문의 재건이란 약속과 함께 제갈세가의 세력으로 포섭했던 것이다.
"자네가 꽃(花)을 맡게. 내가 서산(西山)을 맡지. 그리고 오늘 우리의 밀담은 없었던 이야기네."
화진악의 자질을 엿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구파일방에 눌려서 아무런 힘을 쓰지도 못할 것 같은 화진악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 정세는 물론 수하들의 비밀까지도….
물러나는 제갈수연의 등이 축축하니 젖어들었다. 화진악이 마지막에 보여주었던 눈빛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비밀이 누설되면 죽음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왕왕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니… 두 사람이 떠나고 난 천명실에 마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솟아나는 인물이 있었다. 동안의 노인, 한 점의 사기도 보이지 않는 맑디맑은 정광, 결코 사악해 보이지 않는 그런 인상이었다.
'서산(西山)이라… 한쪽에 걸려있는 중원 전도를 가만히 응시하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꺼지듯 사라졌다. 이 노인은 또 누구인가? 천무맹의 최심처인 이곳을 제집 드나들 듯 가볍게 드나드는 인물은. 천명실의 실내에는 노인이 떠나면서 중얼거린 말만 맴돌고 있었다.
"세상일이란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더 많다네…."
* * *
"우씨, 어째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
배 위에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잡아 바로 옆에 놓으며 투덜거리고 있는 털옷을 입은 인물, 백산이었다.
벌써 상당한 공격을 받았는지 그의 옆에는 수북하니 화살이 쌓여있었다.
백무천의 이를 뽑은 후 악양에서 하루를 쉰 일행은 동정호에서 배 한 척을 통째로 빌려 양자강을 따라 안휘성(安徽省)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철혈투의 투신이었던 다쇠불알 백산에게 천선비도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소문에 놀란 일행은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서 도망치듯 악양을 빠져 나왔는데 양자강 한복판에서 수적 떼를 만나고 말았다.
그들은 일단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인지 가타부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화살을 퍼붓고 있었다.
"석 대인, 저 자식들은 뭐요?"
일행 중 그래도 강호지식이 가장 많은 석숭을 향해서 백산이 물었다.
자신도 황당한 짓을 많이 하기야 했지만 황당한 경우를 당해보기는 또 처음 아닌가. 이유라도 알아야 대처를 할 터인데 무작정 화살만 날려대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저들은 장강수로연맹 중 이곳 동정호에 기반을 두고 있는 네 개의 집단이네."
동정호로 유입되는 네 개 하천에서 수적질을 하고 있던 농수채, 상강채, 원수채, 자수채의 수적들이 모두 여덟 척의 배를 끌고 와서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런 것을 두고 설상가상이라 하는 것인가! 그들의 뒤쪽으로는 비도를 노리는 또 다른 무인들의 배가 퇴로마저 막고 추격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도망을 가자해도 갈 곳이 없다.
"정말 천선비도가 너에게 있는 게냐?"
갈태독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백산을 쳐다보며 물었다.
요 며칠간 상당히 이상한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아무리 동정호 구경이란 말로 얼버무리고 있지만 악양에서 너무 오랫동안 지체했다.
그리고 독령곡에서의 수구해 사건, 석숭과 이야기할 때 들었지만 수구해의 죽음에는 분명 이놈이 관련되어 있는데 자신이 따지고 들자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는 것이었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으니 다그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천선비도를 가졌다며 모든 무인들이 쫓아오고 있는 상황을 접하고 있다.
다시 백산에게 무엇인가 물으려는 순간 내리던 화살비가 갑자기 뚝 그쳤다.
"난 농수채의 채주인 야저 강진구(姜鎭久)라 한다. 수중에 있는 비도를 내놓는다면 생명은 보장하겠다."
붉은 색의 깃발을 달고 있는 배에서 자신의 머리통보다 더 큰 도끼를 들고 있는 사십 대의 거구가 이쪽을 쳐다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어이! 멧돼지, 너 돈 많아?"
또다시 나오는 백산의 선문답. 두 손을 입에 대고 나발모양을 만들고는 목에 힘줄이 돋아나도록 소리치는 것이었다.
내공을 익힌 무림인이면 절대 저런 짓을 하질 않는다. 내공만 실어서 보내면 가볍게 이야기해도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목 아프게 힘쓸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백산은 마치 무공이 없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습관이다. 워낙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무신경하다 보니 무공을 익히지 않았을 때의 모습들이 흔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돈 많으면 사라고. 내 싸게 줄게."
백산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농수채를 비롯한 모든 배에서 일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야, 이놈아 우리는 수적이야! 수적보고 물건을 사라는 그런 멍청한 말이 어디 있냐?"
"그건 맞는 말이네. 도둑놈에게 물건을 사라고 하면 살 리가 없지? 그럼 그때부터는 도둑놈이 아닐 테니까."
제 딴에는 수적의 말에 일리가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할 수 없지, 뚫고 가는 수밖에.'
"석두 활!"
활을 잡은 백산이 그동안 자신의 옆에 쌓아두었던 화살을 집어 들고 시위에 먹이더니 야저 강진구를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어이! 멧돼지, 왼쪽 어깨야."
당겼던 시위를 놓자 빛살 같은 속도로 화살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얼굴에 한껏 비웃음을 머금은 야저 강진구가 자신의 도끼를 이용하여 화살을 그대로 쳐냈다.
아직도 자신들을 수적으로 보고 있는 놈들이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천무맹이나 천마맹이 어쩔 수 없는 수적이 있던가.
분명 강호 초출이 어쩌다 비도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감히 무공의 고수인 자신에게 활을 쏘다니… 미친놈이 아닌가. 그의 비웃음대로 화살은 그대로 부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채주님, 저기 저…."
화살을 쳐내고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사색이 된 부하들의 얼굴이 보였다.
"허억!"
두 대의 화살이 바로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왼쪽 귀를 향해서 또 하나는 자신의 하초를 향해서.
기겁을 한 강진구의 몸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으윽!"
왼쪽 어깨에 전해지는 무시무시한 고통. 놈의 말대로 자신의 어깨에 화살 하나가 깊숙이 박혀버렸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이 피하고자 했던 화살은 근처에 오지도 않고 일장 앞에서 힘없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결국은 자신을 겨냥하지도 않았던 화살에 몸을 날려 일부러 맞은 꼴이 되어 버렸다.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화살을 향해서 뛰어드는 멍청한 행동을 하고 말았다.
"별호가 어울려!"
다시 저쪽에서 고함소리가 들여왔다. 야저란 별호, 돼지란 말이다. 즉 멍청한 돼지가 딱 맞는 별호라며 놀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해잠! 잠인(潛人)을 출병시켜라."
인상이 잔뜩 구겨진 강진구가 수하를 향해서 거칠게 외쳤다.
잠인(潛人), 수적질을 하는 장강수로연맹의 가장 필수적인 병력. 적의 배를 무력화시키는 수공의 달인들이다.
"석두, 애들 집합시켜!"
농수채의 배에서 수십여 명의 검은 인영들이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본 백산이 광견조를 집합시켰다.
"마차를 메고 왔을 때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느냐?"
"옛!"
"지금부터 물고기 잡는 놀이다, 들어가라!"
아무런 의문도 필요 없다. 그들도 놈들이 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싸워야 할 뿐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석두와 광견조원들이 웃옷을 벗어 한쪽으로 던져 놓더니 그대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저 애들 수공은 할 줄 아느냐?"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갈태독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석두와 광견조 일행을 쳐다보며 물었다.
"수공은 무슨… 헤엄만 칠 줄 알면 되지."
"허…."
갈태독과 석숭의 입에서 동시에 어이없다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수공이란 것이 하루이틀에 익힐 수 있는 것이던가. 육지에서는 제아무리 날고 기는 고수라 할지라도 물속에서는 평범한 어부보다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저들은 물속에서 밥도 먹을 수 있는 물귀신들인 것이다. 그런 그들을 수공이라곤 일초 반식도 모르는 애들을 보고 상대하라며 보내버린 상식을 초월한 백산의 행동에 기차 찼던 것이다.
갈태독의 예상대로 물 속에 들어간 석두와 광견조는 엄청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적의 공격도 공격이지만 겨울의 차가운 물에 의해서 굳어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순식간에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빨랐다. 온몸에 착 달라붙는 수어피(水魚皮)라는 특수한 옷을 입고 있는 농수채의 인물들은 마치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며 자신들의 무기인 호수구(護手鉤)를 휘둘러 대고 있었다.
호수구는 끌어당기는 무기인 구에 초승달 모양의 월아(月牙)를 부착하고 손을 보호하는 장치를 부착한 무기이다.
즉 구의 끌어당기는 묘용과 월아의 날카로움, 그리고 구의 반대편도 창끝처럼 뾰쪽하게 되어있다. 주로 적의 무기를 낚아채거나 의복이나 신체를 잡아당겨 움직이게 할 수 없게끔 하여 적을 살상하는 무기이다.
무기 전체를 공격에 사용할 수 있어 공격력이나 방어력도 뛰어났다. 더구나 지금 석두와 광견조가 있는 곳은 물속, 움직임도 쉽지 않은 판에 사오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호수구를 이용해서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공격을 해대고 있으니 석두 일행의 고난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강기의 경지에 있는 고수들이었기에 이 정도의 상처로 끝나고 있는 것이지 조금만 무공이 약했더라면 전부 몰살을 당할 뻔했다. 그러나 석두와 광견조의 고난은 몸의 움직임이 둔해서 생기는 것만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물속이라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지혈되지 않아 석두와 광견조의 시야마저 가로막고 있었다.
"허억!"
내심으로 지른 비명소리다. 머리 쪽으로 다가오는 섬뜩한 느낌에 재빨리 고개를 뒤로 젖힌 석두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과 함께 벌어진 입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또다시 검은 놈 네 명이 다가오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던 결과인지 떨어졌던 체온이 올라가고 몸이 풀어지자 움직임이 조금씩 편해지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놈 중 가장 선두에 있는 자를 향해서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광풍신권이라 명명했던 백보신권이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으나 너무 느렸다. 지상에서는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소림의 절세 신공이 물 속에서는 너무나 약했다.
물기둥이 형성되어 나아가는 모습에 전방에 있던 놈들이 가볍게 피하고 있는 것이다.
스악!
다시 석두의 몸에 상처가 생기며 핏물이 번지고 있었다. 사방을 향해서 백보신권을 난사하며 대항해 보았으나 놈들은 너무 가볍게 피할 뿐이다.
"땅 바닥을 단단하다고 생각해라. 너무 단단해서 너희들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라. 그리고 그 안쪽을 생각해라. 그 안쪽에만 힘을 넣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단단한 벽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벽을 통과해서 진력을 쏘아낸다고 생각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라 생각해라."
마차를 메고 올 때 백산이 한 말이었다.
"그럼 벽 뒤로 어떻게 너희들의 힘을 보낼 수 있느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가는 것이다. 마음이 가면 힘이 가는 것이다. 자신을 믿어라!"
백산의 말을 생각하고 있던 석두의 행동이 기민해지고 있었다.
'그래 저놈들과 나 사이에 있는 이 물은 벽이다. 이 벽을 넘어 저놈들을 격살해야 한다.'
석두의 손이 부드럽게 앞으로 내밀어지고 일장 저편에서 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확 번지며 수로채 인물 한 명이 얼굴 가득 피를 쏟아낸 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랬다. 유권은 이미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올 때 마차를 메고 오지 않았던가. 어느 사이 백산이 요구했던 발자국이 남지 않은 경지, 그 경지에 올라 있었음에도 이곳이 물속이라는 것과 적과 자신의 거리가 멀었기에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두의 급작스런 공격에 흠칫 놀란 잠인들이 무서운 속도로 물살을 헤치며 석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방법을 터득한 석두에게는 그들의 공격이 더 이상 생명을 위협하는 장애가 되지 못했다.
유권 중에 최고라는 용왕유권이 물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름도 용왕유권인가, 분노한 용왕이 화를 내듯이 사방에서 터지는 강기. 물의 벽을 넘어 흑의인의 몸에서 붉은빛을 쏟아내며 터지고 있었다.
석두의 춤사위가 벌어졌다. 어깨를 향해 쏘아져 들어오는 잠인의 무기를 피하며 오른발이 앞으로 뻗어나가고 상대가 있었던 곳이 붉게 물들며 검은 시체가 물 위로 떠올라 가고 있었다.
오직 검만을 사용하던 석두가 물 속에서 박투술을 펼치고 있었다. 그도 오구에게 박투술을 배웠기에 일휘나 백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었다.
용왕유권을 터득한 석두에게 물 속은 바깥보다 더욱 자유로웠다.
몸을 회전시키거나 위로 올라가는 과정이 너무 쉽게 이루어지고 누운 상태에서 회전을 하며 사방으로 용왕유권을 날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양손과 양발에서 전부 붉은 색의 강기가 쏟아져 나와 물의 벽을 넘나들었다. 석두의 사지가 움직인 곳의 일장밖에는 언제나 검은 죽음이 떠올랐다.
이미 유권을 터득한 석두는 비교적 편안하게 상대를 격살하고 있는 반면에 소살우를 비롯한 광견조는 아직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몸은 터득하고 있었는데 아직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택한 방법이 삼 인이 한 조가 되어 삼각을 만들며 등을 방어하면서 상대를 막아내는 것이었다.
'이런 개자식들….'
소살우의 입매가 사정없이 위로 치올라갔다.
너무 순식간에 공격을 하고 멀어지는 놈들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광풍신권을 이용해서 난사를 해보았지만 자신의 눈에도 확연하게 보이는 강기를 자신들보다 수배 이상 빠른 저들이 피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안 돼!'
그의 눈에 찍새가 당하는 모습이 보였다. 호수구 세 개가 찍새의 몸에 박혀들었던 것이다.
'죽여버린다, 개새끼들….'
입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도 모른 채 무작정 앞으로 헤엄쳐 나갔다. 온몸에서 붉은 혈광이 피어나며 소살우의 주변이 붉게 물들고 손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은 혈광이 움직일 때마다 호수구가 튕겨져 나갔다.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상대를 죽이겠다는 한 가지 일념으로 손과 발을 움직이자 드디어 놈들의 얼굴이 뭉개지며 물위로 떠올라가는 것이었다.
적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반드시 없애버리겠다는 살심이 물의 벽을 넘어 적을 격살하고 있는 것이었다.
찍새가 당한 것을 본 광견조원들에게 이미 자신의 생명이란 없었다. 열두 명 전부가 붉은 혈광에 휩싸인 채 사방으로 유영하며 적을 향해 손과 발을 휘둘러댔다.
그들의 손속은 잔인했다.
자신들의 손과 발에 의해 발현된 유권에 의해서 이미 절명한 잠인들의 머리를 다시 박살내버리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지도 몰랐다.
꽉 다문 입이었지만 입 꼬리가 양쪽으로 치켜 올라간 것이 물속에서도 웃고 있는 것인가.
그들의 살기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광견조의 광기에 놀란 잠인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머리마저 수어피로 감싸고 있어 그들의 얼굴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유일하게 드러나 있는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제는 도망갈 수도 없게 되었다. 광견조원들이 그들을 공격하는 방법을 터득함은 물론이고 물에서 움직이는 방법까지 스스로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인 일조, 물 속에서의 움직임에 아직도 미숙한 그들이었기에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서로의 손과 발을 마주치며 그 반발력을 이용하여 상대를 격살하고 있었다.
노리는 곳은 정확하게 머리 쪽, 하체를 먼저 공격했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머리를 공격해서 박살을 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소살우의 짝은 모사였다. 지금도 소살우와 모사는 두 사람이 한데 어울려 잠인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소살우의 정권이 앞으로 뻗어나가고 모사가 머리를 숙이자 바로 뒤에서 공격해오던 잠인의 머리가 박살이 났다.
고개를 숙인 모사가 더 깊이 잠수를 하며 소살우의 다리 아래로 빠져나가서 또 한 명의 잠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수중 이곳저곳에 잠인들의 찢겨진 얼굴조각들이 흩어져 유영하고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사방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광견조의 모습도 붉은색, 잠인들의 몸에서 흐르는 것도 붉은 색, 양자강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 저기…."
강진구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맨 처음 시체가 떠오를 때만 해도 그의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놈들은 천선비도를 내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자신의 부하들이 적을 죽이고 적을 죽이고 그 결과물이 떠오른다고 생각했었다. 죽은 시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배 위에 있던 농수채인물들의 놀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물 속에서는 귀신도 잡을 수 있다던 장강수로연맹의 잠인의 시체가 떠오른 것이다.
처음엔 한두 명의 희생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의 얼굴색이 해쓱하게 변해버렸다.
마치 독(毒)이 풀어진 해조에서 붕어떼가 떠오르듯 그렇게 잠인들의 시체가 떠올랐다 잠시 후 하나씩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것도 머리가 완전히 깨져서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무수한 시체들이었다.
삽시간에 그들 배 주변이 잠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석두와 광견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붉은 물보다 더 진한 혈광이 이곳저곳에서 터지는 광경뿐이었다.
"다른 배에 연락을 해라, 전부 죽여버리라고."
수하들의 죽음에 분노한 강진구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외침이 터져 나오고, 농수채의 배에서 붉은색의 깃발 두 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잠시 후, 다른 배들로부터 조금 전의 잠인들과 같은 복장을 한 인물들이 무수히 물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자존심의 동물인가!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계속해서 시도를 하곤 한다.
지금 장강수로연맹의 채주들이 그런 꼴이었다. 농수채 잠인 오십 명의 시체를 보았으면 현실을 인정하고 물러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부하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용왕유권이구나?"
"광풍유권이오."
갈태독과 백산의 대화 내용이다. 배 위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갈태독과 석숭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다. 헤엄치는 것만 알고 있던 석두와 광견조원들이 수공의 달인이라는 잠인들을 상대로 버틴 것은 물론이고 상대를 완전히 격살하여 전부 저승으로 보내버리는 것이 아닌가.
마차를 들고 오면서 배웠던 것이 강기만 부드럽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용왕유권, 그 전설의 무공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바닥에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했던 백산의 말, 그것이 바로 용왕유권의 핵심이었다.
또다시 생명의 위협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만들고 그 속에서 전설의 무공을 습득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목숨을 담보로 한 무공 습득, 무공을 습득해야만 살 수 있기에 용왕유권이란 천고의 절예를 터득할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갈태독이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 많은 인명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로채 채주들의 무지함과 광견조의 잔인함이 답답했던 것이다. 광견조원들이야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쓴다고 하지만 수로채의 채주라는 자들의 행사가 너무 어이가 없음이다.
견디다 못한 갈태독이 그대로 몸을 날렸다. 삼십 장 이상 거리를 단숨에 날아간 그가 달려드는 농수채의 부하들을 간단하게 제압하고 강진구의 목을 틀어쥐었다.
"부하들을 물려라! 빨리."
"웃기는 소리, 우리 수로연맹에는 후퇴란 없다. 죽여라!"
얼굴색이 하얗게 변해 있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놈아! 너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야. 네놈 부하들이 다 죽는단 말이다."
갈태독이 강진구에게 살기를 흘려내며 고함을 질렀다. 화가 났음이다. 자신의 생명은 귀중하게 여기는 놈들이 왜 부하들의 생명은 하찮은 벌레 취급을 하는가.
죽어가는 저들이 무슨 신념이 있겠는가. 가족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오직 도둑질을 하기 위해 나섰다가 수장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하찮은 욕심을 위해 수많은 부하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대장이란 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다. 자신이 대장인 이유가 그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그들이 다 죽으면 자신도 더 이상 대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나 하는 것인지.
죽음과 같은 공포였다. 초극고수인 갈태독이 화를 내자 그의 몸에서 엄청난 살기가 발산되었고, 그 살기에 강진구의 하체가 따뜻해지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공포에 선 채로 오줌을 지리고 있었는데도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 봐라!"
갈태독이 강진구의 목을 잡은 채 물 쪽으로 돌렸다. 시체, 시체, 목 없는 시체들, 또다시 물에 들어갔던 다른 수채의 잠인들이 무더기로 떠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의 대항 의지를 상실했는지 남아있던 잠인들이 배로 오르는 광경이 보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네 개 수채의 인물들도, 백산 일행을 뒤쫓던 인물들도, 잔인한 살겁의 현장에 넋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백여 명의 잠인들이 처참하게 죽어 나갔다.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치곤 너무나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말이 없는 강물은 자신의 몸 색깔이 붉게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장강수로연맹의 최정예인 잠인 백여 명의 사망, 중원을 밟은 석두와 광견조가 처음으로 벌인 살육이었고,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