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자는 성도를 통해 성경처럼 예수를 읽습니다. 골 4:1-6
주신 말씀 골4:1-6말씀을 통해 [불신자는 성도를 통해 성경처럼 예수를 읽습니다]는 말씀이 선포될 때 큰 은혜의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면전 , 얼굴 앞에서 산다는 신전의식 즉 코람데오 사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좀 늘어질 때도 있고 긴장이 완화될 때도 있는 것이지 항상 긴장만 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되는 긴장이 스트레스를 주어 암이 되고 병이되어 사람의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휴식이 영이신 하나님께서 피곤치 않고 곤비치 않아 휴식이 필요 없는 분이 시면서도 인간들에게 휴식을 주시기 위해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안식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 활동을 통해서 노래하고 춤추며 그림을 그리고 축제를 즐기도록 주셨습니다.
축제 즉 페스티발은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 절기를 지키는 유대인의 잔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여가활동을 통해 심신을 충분히 쉬어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와 성도가 구별되는 것은 휴식을 취하며 새로운 힘을 얻어 다시 시작하는 것이 성도의 휴식이라면 , 불신자들은 휴식이 더 힘들고 더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이는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을 인간에게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되게 하시므로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 대신해 다스리며 정복하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섬기며 예배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널리 펼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즉 성도는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듣게 됩니다. 보게 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리 설명을 해도 도저히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어쩌다 듣기라도 하면 머리가 아프고 도저히 무슨 말이 무슨 말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불신가족들과 함께 있는 방에서 연속극을 보고 있을때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를 틀어 반응을 보시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불신자는 이 세 상도 모르는데 어떻게 다음 세상을 알아요 죽으면 끝인것 아니예요? 골치 아프니까 할렐루야는 혼자 있을때 틀고 연속극 틀어요.
어떤 불신자는 저 목사 연봉이 수억이라지.... 목사들 돈 잘 번다며..비아냥댑니다.
어떤 불신자는 다 좋은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정직하게 바르게만 살 수 있나. 그러니까 인간이지...
요즘 한기총 회장 출마하면 수십억이 든다면서요?
요즘 목사들이 아예 정치할려고 이슬람채권법, 정보사 첩보극등에 적극적으로 사사건건 나서대요 이제 우리나라도 기독교정당이 집권할 날이 오겠죠?
반응들이 다양합니다.
그런데 긍정적이거나 우호적인 반응보다 부정적이고 냉소적 반응이 대부분입니다.
분명 천만성도가 있으니 기존사회구조를 바꾸어 놓아야 하는데 쇠퇴기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신자화율이 인구의 십분의 일만 넘어도 기독교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하는 외국의 예와는 다른 구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복에 대해서 많은 말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았고, 다윗을 복되게 하셨으며, 산상수훈도 복에 대해 말하고 계시록도 복을 주시겠다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을 좋아합니다.
자기가 한 것보다 더 많은 수확과 수입 즉 횡재를 바라며 그 횡재가 이루어진 것을 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복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심과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림이 진정한 행복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식하고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불신자에게 성도가 예수를 읽는 성경이 될 수 있을까요?
바울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개인적으로는 근본적인 혁신을 권면하고 그리고 가정에 대한 도덕적 교훈을 하며 교회가 즉 성도들이 취하여야 할 태도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행위로 구원받는다고는 가르치지 않고 있으며 구원을 받은 성도들답게 사는 행위를 요구하고 그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 면전에서 살듯 신전의식 생활을 해야 한다.(1)
본문 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하였습니다
3:18부터 4:1까지 바울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이 된 성도들이 힘써야 할 신앙일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상전들아는 표현은 아비들아, 아내들아 남편들아, 자녀들아, 종들아에 이은 여섯 번째 부름입니다.
여기서 상전들아는 예수님, 하나님, 황제라는 뜻이 아니라, 빌레몬과 같이 그 수하에 종들을 부리고 있는 부자나 기업가등을 말합니다.
그 당시 교회 내에는 종들의 숫자에 비해 상전들의 숫자가 훨씬 적었으나, 바울은 그들에게도 따라야 할 윤리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주인들에게 말하는 내용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의와 공평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 즉[ 디카이온]은 옳은 것을 뜻하는 것으로 ,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모습이나 조건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공평 즉[이소테타]는 동등, 공정을 말합니다.
이 의와 공평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으로써 언제나 의와 공평의 원리로 세상을 다스려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이 상전들에게 의와 공평으로 종들을 대하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령으로 종들을 대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동정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종들의 권리를 보장해주고 그들을 정의롭게 대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상전들이 노예를 취급하는 도덕적인 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의와 공평으로 인간을 다스리시므로 당연히 성도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라는 것이 당연히 해야할 의무라는 것입니다.
종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은 가진 자들의 행패요 교만입니다.
상전들이 종들을 의와 공평으로 대하여 선히 대하면 그 선을 행한대로 악하게 착취하고 핍박하면 그 행위의 악한대로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과 좋은 여건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로 주신 물질과 권세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악하게 행하거나 도리어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천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상전들에게 실천적 권면을 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주지시킵니다.
그것은 주인들 위에 하늘의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그 신분이 종이든 주인이든 진정한 세상의 주인되신 하나님 면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땅의 주인보다 하늘에 있는 상전되시는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을 가지시고 모든 행위를 최종적으로 심판하시는 최종심판자인줄 고백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특히 성도들은 하늘에 우리의 상전이 계심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무례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상전들은 능동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하늘에 계신 주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지속적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땅에 있는 작은 권세나 부를 자랑하지 말고 그들 위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 앞에 순복하며 살라는 강력한 명령입니다.
인간은 자기 위에 절대자 하나님이 계심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의와 공평을 바로 행할 수 있는 연약하고 간사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죄악으로 부패하고 왜곡된 인간에게 있어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와 힘을 의롭게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의 한계가 도달해 있음을 알면서도 끝까지 항공기폭격을 하며 시위대에 미사일을 공격하여 수천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리비아의 카다피는 모든 국민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고 모든 국민이 목숨을 바쳐 자기를 지켜 줄 것이라 망언을 말합니다.
수십조를 착취하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릅니다. 양심이 없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절대왕정 절대권력의 역사는 공평이 아니라 무자비한 독재와 부정, 불의가 나타납니다.
인류는 이의 모순을 제거하고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삼권분립을 해서 서로 견제하도록 했습니다. 삼권을 분립하고 윤리강령을 만들어도 스스로 정화계획을 수립하고 다짐을 하고 선서를 해도 여전히 부정부패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위에 있는 자가 자기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 것이지 백성이 목숨을 바쳐 한 지도자를 구하는 것은 바른 질서가 아닙니다.
삼권분립으로 견제한다는 것은 인간이란 동등한 힘으로 서로 견제하고 공평을 유지하려고 하니 출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그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오늘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 처럼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너무 부담되잖아요.
젊은 처녀가 마트에서 보안요원으로 근무합니다. cctv에 분유를 훔치는 아줌마가 보입니다.
다른 사람처럼 고가의 백이 아닙니다. 고가의 녹음기 핸드폰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른척 할 수 없습니다. 쫓아가서 잡습니다. 아줌마가 울며 죄송하다 말합니다.
여종업원이 계산대에 가서 대신 계산을 해줍니다.
아기가 예뻐서 제가 선물을 드립니다. 잘 먹이세요...
분유를 훔친 아줌마가 계속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입니다.
이것을 본 사장은 그 여종업원에게 상금을 줍니다.
그 애인도 더 사랑스러워 [그런일 있으면 대신 계산하고 나한테 말해 내가 계산한 것 갚아줄]께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상전들이 행해야할 의와 공평입니다.
사랑은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지만 함께 하는 것입니다.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커피를 대신 타 주는 것입니다.
자리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내가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그 사람 편에서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함께 걸어가주는 것입니다.
등을 밀어주는 것입니다. 위로와 격려의 말을 다정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가 죽어 많은 목숨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려 하나님이시면서 이 땅에서 우리 죄를 사하시려 죽으셨습니다.
인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큰 사랑을 논하거나 실천하지 못하는 작은 자들입니다.
내 입에 들어가기 전 다른 사람의 입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노숙자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 독거노인에게 연탄한 장을 드리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자들은 하늘에 상전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방법이신 의와 공평을 이루며 살아갈 때 나를 통해 예수를 보여 주고 나를 통해 성경을 읽듯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성도되기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불신자에게 성도가 예수를 읽는 성경이 될 수 있을까요?
둘째로 모든 감각을 주인에게 집중하라.(2-3)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문 2-3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고(마 26:41)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얼마나 귀한 시간입니까.
모세는 기도를 드리는데 사람과 대화하듯 하였습니다(출 33:11).
그래서 기도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뜻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뜻으로 해야 합니다(계 5:8).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은 내 생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계획과 뜻을 이루기 위해 정성을 다해 신을 달래고 절하고 대접하면 신이 인간의 원함을 이루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복이 아닙니다. 말대로 세상의 부귀영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은 타락의 지름길입니다.
바울 사도가 [기도를 항상 힘쓰라]는 말은 ‘확고부동하게 계속하다, ’변함없이 헌신하고 충성하다’ ‘애착을 가지고 전념하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기도를 하되, 중도에 응답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여 포기하거나, 회의에 빠져 그만두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갖고 일관되게 지속해 나가라는 말입니다.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은 기도와 감사는 신앙인에게 분리될 수 없는 영적 덕목입니다.
환경과 기분을 초월한 감사는 하나님을 향하여 깊은 기도를 유발해내는 촉매제가 됩니다.
그래서 기도 생활에 감사가 선행되어야 하며, 감사는 기도응답에 대한 강한 믿음의 표시인 것입니다.
이를 너무 강조해서 성도들의 주머니를 울궈내서는 안되지만 성도는 자원해서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기도한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지만,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은 하나님의 전적 권리이며 그 응답이 나에게 최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은 주의를 집중하여 조심하며 깨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지휘관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첨병의 신호에 집중해야 합니다.
발자욱 소리가 나면 안됩니다. 인기척이 나서도 안됩니다.
숨소리도 죽여야 합니다.
훈련된 군견은 적이 가까이 다가와도 짓지 않습니다.
적이 가까이 왔을 때 [물어!] 한마디 명령에 목덜미를 물고 끝까지 늘어집니다.
죽어도 매달립니다. 모든 신경을 집중하여 주인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모든 육체의 감각 즉 오감을 주인에게만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는 것은 단지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즉각 뛰어 오를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군견처럼, 항상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성도는 기도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가?
기도에 깨어있지 않으면 간교한 마귀의 술책에 넘어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마치 우는 사자처럼 그 삼킬자를 찾아 두루다니고 있기 때문에 성도가 일순간이라도 방심하면 그 표적이 되어 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되 집중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중언부언하면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자기 본성에서 나오는 욕심대로 잘못 구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기도 응답이 있은 후에도 마귀는 기도응답에 대한 불만족이나 불신으로 계속적으로 미혹하기에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 감사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불신대신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그분이 주시는 어떠한 응답도 늘 감사로 받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불신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성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기 때문에 감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전투중의 군사가 항상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듯이 영적인 군사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벽을 쌓으며 이방인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때 한손에 무기를 한손에 망치를 들고 항상 적을 주시하며 적들이 쳐들어오면 적을 향해 즉각 달려나가 싸운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일은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며 감사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언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섬기기 위해 처소마련을 완성하고 우리를 데리러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 주님에게 집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게으름을 피우다 깊은 잠에 취해 졸고 있다 새벽에 주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데 내가 준비가 안되어 아니 여러 가지 핑계로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빌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썩은 재물처럼 우리의 욕심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감사로 가득찬 향기로운 기도를 드리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되 잠에 취해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별해 구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성도되기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불신자에게 성도가 예수를 읽는 성경이 될 수 있을까요?
셋째로 말을 은혜롭게 해야 합니다.(6)
통키타 가수 장웅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그 분의 아들이 신유라는 가수인데 아직 젊은 청년인데 트로트 가수입니다.
아들을 위해 항상 메니저로써 역할을 자원합니다.
자기가 작곡한 곡중에서 반응이 좋을 것 같으면 아들에게 취입을 시킵니다.
노래하기 전에 왕소금을 먹습니다.
목을 잘 관리해야 하는데 배추를 절이듯 목도 잘 절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다가 성도가 저렇게 절여져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구나 하며 생각합니다.
소금에 절여지면 숨은 죽지만 결코 그 본질이 변하지 않습니다.
즉 성도들이 자기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이성과 지식과 경험이라는 것을 소금으로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본성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소금으로 절여진 목에서 나오는 말은 거친말이 아니라 부드러운 말입니다.
성도의 말은 투박한 말이 아니라 정제된 다음어진 말입니다.
성도의 말은 감언이설의 달콤한 말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말입니다.
성도의 말은 거짓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은 불리해도 손해라도 진실만을 말하는 말입니다.
본문 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하였습니다.
성도들의 언행은 불신자들에게는 성경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들은 신구약 66권을 읽지만 불신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고 성도들의 행위를 보고 성도의 행위를 통해서 예수를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위 여하에 따라 기독교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행을 삼가야 합니다.
6절에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과 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소제나 번제의 제사를 드릴 때 소금을 쳐 거룩하게 하듯 성도의 언어가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금이 방부제의 역할 뿐만 아니라 맛을 내듯 성도가 하는 말은 싱겁고 가벼운 의미 없는 말이 되어선 안 됩니다.
성도의 말은 생명을 살리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갈급한 심령을 뻥 뚫리게 하는 생명수 같은 말이어야 합니다.
성도의 말은 욕심에 사로잡힌 말이 아니라 지혜로운 말이어야 합니다.
음란하고 더러운 말을 삼가고 항상 정하고 바른 말을 해야 합니다.
성도의 말이 우상이나 다른 신을 찬양하지 않고 오 직 예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성도의 말이 항상 거룩함과 지혜로 가득차게 되면 성도의 행실이 거룩하게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언어란 단순한 의미전달만이 아니라 말하는 자의 인격과 영적 분위기까지 함께 전달되기 때문에 항상 경건한 자들과 함께 교제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불신자들을 멀리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말 정직한 말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말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옳고 정의로운 분위기에 젖어야 합니다.
평상시는 교회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늘 다투고 싸우면서 전도 때만“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사랑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하면 불신자들이 ‘너희나 잘해 돈 여자 권력이라면 환장한 개독교들아’하며 돌아섭니다.
성도가 세상에 보여지는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불신자들이 성도를 보고 행위를 보고 근면하고 성실하며 정직하고 사랑이 넘치는 그 행실을 보게 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직하구나 예수 믿으면 근면하구나 예수 믿으면 서로 사랑이 많구나 나도 저 친구들처럼 예수 믿어 저들과 함께 교제하고 저들의 공동체에 들어가야지 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언행을 삼가야 합니다.
사람은 말을 하는 사람의 인격이 말에 표현되어 나옵니다.
그래서 깡패출신 목사는 ‘그것 얼마만 있으면 먹을 수 있어’ ‘ 짱이야’
‘본때를 보여야지’ ‘탁 눌렀더니 꼼짝 못하더라구...’하는 말을 합니다.
그럼으로 평소 생활과 언어가 거룩하고 지혜롭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도한다고 말씀을 전한다고 복음이 증거되지 않습니다.
바울사도는 말하기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여러분을 들어 귀히 쓰임받기 원하신다면 평소의 생활이 거룩하고 구별된 삶이 되도록 언행에 주의하고 바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기뻐하되 항상 기뻐하고 , 감사하되 모든 일에 감사하며, 말씀을 묵상하되 항상 곁에 두고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아무리 작은 말이라도 무익한 말을 버리고 불결한 말을 삼가고 부정적인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합니다.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항상 돕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항상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평소의 삶을 통해 마음에 하늘의 신령함과 사랑이 늘 넘치게 해야 합니다.
성도의 언행이 구별되고 천국복음이 전파 될 때 하늘의 비밀을 깨우쳐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복음전파에 쓰임 받을 때 하나님께서도 자신 있게 우리를 들어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사용해 주실 줄 믿습니다.
결론
성도들의 생활이 정숙하고 경건하고 서로 삼가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마 5:16).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기도하는 생활을 하며 말을 항상 조심성 있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불신자에게 성도가 예수를 읽는 성경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 면전에서 살듯 신전의식 생활을 해야 한다.(1)
둘째로 모든 감각을 주인에게 집중하라.(2-3)
셋째로 말을 은혜롭게 해야 합니다.(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 여러분의 삶을 통해 불신자들이 예수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 있듯이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고 감사하며 모든 신경을 주님께만 집중하고 은혜로운 말 감사의 말을 많이하는 성도여러분 되시기 원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주님께서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알고 계신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서 놀라운 상급을 예비하시고 이 땅에서 풍요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