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세 가지 원칙
극동 지역인 중국, 조선, 일본은 흥미롭지만 절망적일 정도로 희한하며, 이 땅에 대한관심은 오로지 이 비이성적으로 기이한 점에 있다는 생각이 우리에게 지배적이다. 거꾸로 쓰고, 거꾸로 말하고, 책상다리로 앉고, 집에 들어갈 때 모자는 안 벗는데 신발은 벗고, 동시대 사진이라기보다 우리 문명의 사진 원판 같아 보이는 것을 가지가지 방법으로 따른다. 이것은 실로 사회적 현상으로, 강한 호기심을 끌 만하지는 않다. 또한, 낯설기 때문에 그 모습들이 매우 흥미롭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런 주제는 흐지부지되고 흥미는 잃게 되어 있다. 볼 기회도 적고 세세히 챙기지 않으면, 눈을 뜨고 있으되 머리는 쓰지 않고, 보이는 대로 생각한다.
사실, 극동에 대한 관심은 막 깨어났지만, 그것의 생명, 그것의 힘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극동이 매우 흥미로운 이유는 극동지역이 우리 문명을 비추는 거울을 - 그 거울은 모든 거울 같이 거울 속의 오른 쪽은 우리에게 왼쪽이 되는 그런 거울이다 - 들고 있기 때문이고, 극동의 이런 기이함을 처음 마주하면, 우리 자신의 일 처리 방법을 따져 보고, 살펴보고,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극동의 매력이 있다. 이를 위해 사람들이 몇 주를 머무르려고 일본에 갔다가 몇 년 동안 눌러앉는다. 가장 매혹적인 기후, 사람들의 멋진 도시 성향, 풍습의 진기함 보다 훨씬 더 강력한 자력은 이 풍습들이 우리에게 열어주는 세계의 삶의 샘을 바라보는 시야다. 이 풍습들은 우리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한다.
우리는 그 관계 외에 어떤 것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이질감을 깨닫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보거나 심지어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깨어나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습관은 인식을 흐리게 한다. 우연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과 무분별하게 혼동한다. 하지만 문제의 주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자.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보자. 그리 하면,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무엇인지 이전에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극동지역이 사회학에서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바로 그런 관점이다.
생각하건대, 극동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고, 즉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우리 자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이러한 암묵적인 동의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사람이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원칙을 간과하려는 은밀한 경향이 있다. 즉, 그는 우리 자신과 같은 존재이며, 그의 행동을 결정하기 위한 추론과 같은 동기를 가진 존재이며, 우리의 특징은 단지 자물쇠인 그를 여는 특정한 열쇠일 뿐이라는 원칙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녹슬어 버린 열쇠일지도 모른다. 기후로 인해 자물쇠가 부식되어 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약간의 인내심을 가지고 연구하면, 마침내, 그것은 우리가 생각 했던 것보다 더 익숙한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극동 사람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충분히 거슬러 올라가 그의 계보와 우리 계보가 한군데서 만난다면, 오늘날 우리가 관찰하는 두 형태의 삶의 양상에 대한 비교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며, 단순히 기이하기 때문에 기이함이 주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관심을 갖게 한다. 우리의 행동방식과 연관 지어 매우 다른 점에서 볼 때, 극동 사람의 행동은 우리에게 우리의 공통된 먼 과거와 인류의 가능성과 적응성을 결정하는 역사적 시차를 줄 것이다. 대비가 클수록 결과적인 시차도 커진다. 그러므로 발전 단계를 지정할 수 있다면, 우리가 두 종족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비교할수록, 사회학을 전반적으로 아는 것이 더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문명국가를 말하고 있는 중이다. 두 부족 중 하나가 야만인 이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야만적이고 침체된 사회라는 과거의 모습만을 발견해야한다. 하지만 지금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은 문명화된 민족이다. 그들의 상태는 대부분의 면에서 우리만큼 높지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 높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두 길이 서로 다르지만 유사한 초기 상태에서 발전 했다는 점이다.
이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족 중에서 일본민족과 밀접한 동족 관계인 조선민족이 아마도 우리 종족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광활한 태평양은 오늘날 하루의 시작점 이다. 그 곳은 수 세기 동안 해류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건너는 것을 제외하고 누구도 건널 수 없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아마도, 몽골종족들 중 일부는 북쪽으로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멕시코와 페루의 죽은 문명들이 관심을 끌어 이제서야 그 마땅한 권리를 얻기 시작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두 종족이 떨어져 사는 거리를 기준으로 풍습의 차이를 측정할 수 있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그 기준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리고 현재 우리의 목적상, 그것은 대부분 진실이다. 우리가 인도에서 서쪽으로 가면 우리는 유럽이라는 더 큰 인도문명을 발견하게 되지만, 거기서 동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차이점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비교민족학에 대한 연구는 흥미롭지만, 내가 인간의 보편적인 친족에 대해 말한 것을 우리 자신과 비교해서 조사할 목적으로는 흥미롭지 않다. 여기 내가 언급하고자하는 것은 그 반대다. 우리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는 엄밀히 말하면 위도가 아니라 현재 경도에서의 대척점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 어떤 의미에서든 그들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들이 너무 달라져서 현재 익숙하지 않지만 우리에게도 익숙했던 과거 어느 시점까지 성급하고 간략하게나마 뒤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도움도 없이는 극동의 사람들을 알 방법이 없다. 과거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잠시 독자들의 관심을 부탁한다.
그런 고려가 피상적으로나마 가장 가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조선은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이것은 불필요한 발언으로 보일 수 있으며, 특히 조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책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나는 독자에게 조선은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사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발을 꼬집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고 실례인 상황에서, 만약 조선에서도 그렇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그리고 한 두 사람이 아닌 수백 사람을 대상으로 그러한 추론을 한다면, 현명한 답을 하기 전에, 많은 오해가 예상되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될 것이다. 외모가 단순하다면, 그것만 기술하면 된다. 그러나 모든 화가들에게 알려져 있듯이, 그림의 효과를 주는 것은 표면에 드러나는 색깔들만이 아니라, 숙련되지 않은 눈으로는 알아차리기 힘든 다른 색깔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을 이해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최대한 간략하게 고려할 의무가 있다. 훨씬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의 현재 입지와과거의 입지를 중국과 일본과 비교할 수 있으며, 조선 관습의 원천을 우리에게 밝혀줄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왜 이러한 관습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관습이 의미하는 바를 배우게 될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들 관습이 결국 조선사회가 우리에게 기이하게 보이는 상황을 만든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과거를 따라가면, 내가보기에, 부분적으로 개인 적이고 부분적으로 사회적인 세 가지 큰 특징이 그런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세 가지 대원칙이라고 부른다.
그 원칙들은 서로의 개별적인 효과를 증가시키면서 상호작용을 해왔지만, 각각은 그 자체로 다른 두 가지와는 상당히 독립적이다. 이 세 가지 원칙은 몰개성의 질, 가부장제, 여성의 지위다. 이러한 원칙들을 단서로 삼으면, 수수께끼는 더 이상복잡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관습들은 첫눈에는 매우 특이해 보이지만, 우리가 어릴 적부터 익숙했던 것들 중 가장 간단한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설명될 것이다.
극동 지방의 특징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세 가지 영향을 설명하기 전에, 그 영향을 받은 것은 조선뿐만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종족의 혈통을 살펴 봐야한다. 이는 곧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로 이어질 것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종족의 언어 진화의 역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들은 개인의 특징 형성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혈통과 교육이다.
종족의 언어에 대해 사실인 것은 종족특성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누구인가?”와 "그들은 누구에 의해 길러졌는가?”라는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이 과학적 진단을 조선 종족에 적용해보자.
우선, 그들의 조상에 대해서.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 타타르족이다. 그들은 서로 먼 친척이며, 여전히 만주족, 몽골족, 그리고 아마도 타타르족, 특히 터키인과 멀리 연결되어 있다. 우화적으로 친족관계를 암시하는 일본의 옛 전설이 있지만, 종족적 자긍심으로 인해 너무 문자 그대로 해석되었다하여, 의심과불신의 대상이다. 내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또 다른 친족의 증거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가장 놀라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가장 호전적 인 땅에서 가장 유명한 전사인 일본의 유명한 장군 요시쓰네와 관련된 것이다.
동생에게 반기를 든 반란에 패배한 그는 단숨에 사라져 버렸다. 그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결코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의 운명에 대한추측은 결국 특정 계층의 상상력에 가장 매혹적인 문제가 되었다. 몇몇은 그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상가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너무 평범한 마무리였다. 그래서 전설에 의하면, 그는 북쪽으로 여행을 가서, 먼저 예쏘로 건너간 후, 사할린으로 건너가 마침내 아시아 대륙에 도착했고, 명석한 두뇌는 강렬한 의지에 더해져, 과거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는 장엄한 복수를 결심했다. 몽골족의 지휘자가 되어 세계를 지배하고 정복하고, 그의 위대한 계획에 따라 일본을 제압하고 초라하게 만드는 것을 꿈꾸었다. 가장 대담한 그 상상은 현실적일 수 없었다. 그의 생애는 언뜻 초자연적이었다. 그의 욕망이 실현되는 것을 보기 위해서 그는 그저 소원을 빌었어야만 한 듯 보였다.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중국을 정복하고, 조선을 제압하고, 스스로 왕좌에 앉았다. 그는 비록 고향을 떠났지만, 지금 그를 에워싸고 있는 영광으로 볼 때, 충분한 복수를 한 것이다. 북아시아는 그의 것이었고, 유럽도 그의 이름에 몸을 떨었다. 그 이름이 칭기즈 칸이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승리에도 불구하고, 만약 옛날 요시쓰네로 보면, 그는 직접적인 복수를 하지 못했다. 섬으로서의 일본의 위치는 그의 힘을 느끼게 하는 것, 즉 다른 모든 사람들이 절을 하는 힘으로부터 일본을 구했다. 그래서 아무리 성공적인 경력일지라도, 이전의 길을 다시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이야기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지 않음에도, 굳게 믿는 일본인들이 많다. 하지만 명성이 사라지지 않는 사례로만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그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살아온 것은 그가 아직 육체적으로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유발했다.
조선과 일본인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어렵다. 소위 투란족에 속한다 해도 대부분 어족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언어(아리아족 또는 셈족 사이 강한 지표 중의 하나)는 연관성을 결정하는데 거의 쓸모가 없다. 사실, 아리아어 또는 셈어권에서, 어근은 느리게 변화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고, 관계를 설정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한편, 투란 어군에서는 어근이 거의 쓸모없다. 그 어근은 유목민족이 임시 거주지에서 천막을 바꾸듯이 바뀐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이 근본적으로 바뀌는데 몇 십 년이면 충분하다. 문장에서의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먼 단서만을 제공한다. 그 위치도 결국 변하기 때문에, 그 과정의 단계를 추적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실제로 아주 가까운 두 민족이라도 그런 변화의 원칙에 충실함에 있어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민족보다 나을 게 없다.
앞서, 애스턴씨와 체임벌린씨는 최근 조선어와 일본어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단어들을 발견했는데, 이 발견은 두 종족이 혈족이라는 증거 중 하나이지만, 현재로서는 얼마나 가까운 혈족인지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둘 다 알타이 어족에 속한다는 것만 알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 두 종족 모두 혈연으로 중국인과는 조금도 가깝지 않다, 언어에 관한 한 중국어의 근본 개념은 일본어나 조선어가 영어 사이만큼 일본어나 조선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즉, 두 종족 사이에는 아직 뚜렷한 연관성이 없다. 중국어와 일본어 또는 조선어 사이에 공통적인 어근 형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두 언어에서 단어의 구조, 위치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원주민의 관습과 풍습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관찰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이는 우리에게 조선인의 특징을 형성하는 두 번째 요소인 종족의 교육을 고려하는 이유가 된다.
한 종족의 발전 역사는 한 개인의 성장과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며, 아마도 그 종족의 지적인 삶만큼 두드러진 특징은 없을 것이다. 어떤 종족에서 태어난 소년의 피 속에는 그 혈통의 유전적 경향이 흐른다. 인생의 처음 몇 년 간은 집안의 영향 아래서 자란다. 그러고 나서 그가 학교에 보내지는 시기가 온다. 그는 그 이전의 방법들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그의 길옆에 놓여 있던 것 이상의 것을 배우게 된다. 한 동안 그는 자기 생각을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배우는데 열중한다. 그는 나이를 먹고 학교를 떠난다. 외부에서 오는 것에 대한 공부에 온전한 집중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배웠는지의 상호작용으로 바뀐다. 소화시키고, 동화시키고, 표출한다.
이제 이 모든 일이 종족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아주 먼 옛날부터 완전히 자급자족하고 완전히 독학한 종족은 없었다. 그들 거의 모두 유학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서 학교를 다녔는지 혹은 그들이 무엇을 배웠는지에 따라 결과에 가장 뚜렷한 차이가 있다. 유럽 국가들은 친척들, 예를 들어 사촌들이나 먼 친척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극동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것을 얻었다. 아니면, 낯선 사람들이 본래 친족이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적어도 외계인으로 여겨졌을 만큼 먼 관계다. 그 결과, 학생들은 그런 사실들을 기 억해, 머 리로는 어떤 전형이나 정형을 익히지만 가슴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그 은밀한 영향들, 자신의 본성에 전혀 안 맞는다면, 그들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문명의 정신을 느끼지 못한 채 문명의 문자를 배웠다. 이 사실은 더 상위의 그리고 더 나중의 조선 문명에 대부분 적용되지만, 더 심오한 종족 특성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이러한 점들에 어느 정도 일치했다.
중국은조선의 교주였다. 당시 중국문명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무례한 타타르 종족들이 그것에 현혹되어 감명을 받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도매금으로 채택하고 거기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다. 외형적인 표현에 관한한, 그들은 이것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우리는 그들이 왜 더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조선인들이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후속적으로 더 나은 문명을 키우지 않은 것은 아마도 바로 그 기반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들이 초기 발전에서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면, 중국도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중국이 일반적으로 생산적이었던 방향에서는 타타르족도 생산적 이었고, 타타르족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방면에서는 중국도 불모지였다.
조선인들은 외국으로부터 교습을 받기 전에 약간의 국내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그 초창기에도 결코 야만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종족적 특성을 발달시켰다. 그들은 이질적인 국민이 새로이 이입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제도들을 가지고 있었다. 군데군데이기는 하지만, 이국적인 장식이 강하게 착색된 가운데 옛 지방색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원주민의 특성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 그리고 순수하게 타타르 특성을 알고 설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이유는 외부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둘째 치고, 종족으로서 영속하느냐 자체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타르족은 글쓰기를 알게 되었다. 이 시기 이전에는 그들의 생각을 기록하거나 그들의 행동에 대한기억을 보존할 수단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조선인의 특징을 이루는 배경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 될 수 있는 세 가지 원칙은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요소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원래 같은 혈통이었으며, 이후 중국식 교육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매우 독특한, 타타르 종족에 비해 중국인들에게서 훨씬 강하게 나타나는 보수주의의 영향을 받아왔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닌 삶과 힘을 주위로부터 얻게 된다. 그들은 중년까지 지속된 소년기의 조잡한 사고방식을 따른다. 어떤 종족이 어린 시절의 마음을 간직한 채 성장해 가면, 그것은 살아있는 시대착오다.
더 보통의 나라들에게 그런 풍습이 이상하게 보일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종족에 특유한 특성의 존재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발전단계에 있는 모든 종족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그러한 특성 이 다른 곳에서 나타났던 것 이상으로 영속된 사실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나갔어야 할 특성이 견고한 형태로 결정화되는 것이다. 그것은 발전이 부분적으로 정지된 특이한 경우다. 근본적인 원칙의 진화는 견제되는 한편, 문명의 피상적인 자잘함은 계속 자라났다. 이 세 가지 원칙을 좀 더 구체적으로 고려하기 전에 몇 가지 대담한 필치로 윤곽을 그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먼저, 그들의 몰개성에 대해서. 물론몰개성은모든 나라의 어린이들에서 볼 수 있는 상태다. 모든 사람은 외부 사물을 보는 사람이 자신이 라는 것을 의식하기 전에 외부 사물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러한 객관적인 상태를 벗어나, 사람은 단순히 시키는 일만 하는 것보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보다 매력적인 상태로 전환한다. 어떤 면에서 한인간이나한민족이 결국 또 다른 몰개성의 시기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상태는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타타르족은 여전히 몰개성의 첫 번째 상태에 있다. 이런 점에서 원시시대 이후 변한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의 특징은 교육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혈통에 대한문제다. 중국인들이 몰개성적이기 때문에 타타르인들은 더욱 그렇다. 모든 국가는 이러한 특성이 유지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지며,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그러한 특성이 없거나 존재하는 경우에 따른다. 예를 들어, 우리가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로 눈을 돌리기만 해도, 그것이 한 국가에 어떤 다른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부분적으로, 한편으로는 관료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제도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조선에서는 상대적으로 몰개성의 결과이고, 그 너머 섬에서는 개성의 결과다.
두 번째는 가부장제다. 그것은 몰개성처럼 가장 이른 시기부터 살아남았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종족적 특성이다. 백성들이 유목민이었기에 가장 자연적이고 매우 유용한 제도였다. 그들은 방어와 교류를 위해 무리 지었고, 각 가정의 가장이 가장 적합한 족장이었다. 직계 가족시대부터 가부장제는 점점 더 많아지는 후손들에게 확대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정착하면서, 비록 그것이 생긴 이유는 사라졌지만, 그들은 고대의 관습에 매달렸다. 가늠이 안되는 원동력에 새로운 충동이 더해져 계속되었다.
이러한 관습의 계승은 중국으로부터의 외국 교육과 함께 그들에게 왔고, 우리가 나중에 다룰 상황의 일치에 의한 것이었다. 순종의 굴레가 가벼워지고 느슨해지기 보다는, 더 무겁고 구속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전의 나라에서, 아들의 의무는 주로 야외 일이었는데, 일의 특성상 전념할 필요는 없었다. 유목 생활이 농업으로 바뀌면서 그의 관심은 더욱 집안으로 옮겨졌다. 집안에서 봉사하는 것은 들판에서 복종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끈끈한 관계였다. 의무는 배가되었고 더 강제적이었다. 아들은 일찍이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아버지를 섬겼고, 효도는 필요의 위치에서 미덕의 지위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여성의 지위를 다룬다. 국가 단위에서, 여성의 지위는 지위 낮은 남자보다도 상대적으로 항상 낮았다. 체력이 약한 여성은 체력이 존중의 기초가 되는 곳에서 자연히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남성들이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더 나약하지만 더 공평한 성을 존중하는 기사도적인 배려가 점차 이루어졌다. 이제 극동 국가들은 봉건제 시대가 도래했지만, 서구 국가들과 대체로 유사한 상황에서 충성이 기사도를 대신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여성이 사회 무대에 처음 등장했을 때, 극동에서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 후로도 그랬다. 이 종족들의 역사는 여성의 도움과는 별개로 남성의 역사였다. 모든 사회적 의도와 목적상, 여성은주인의 방랑에서 노예로 따라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예전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깨끗하고, 더 편안하지만, 민족의 지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더 높지 않았다. 여자는 처음부터 그 종족에서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현 시점의 종족 생활에서도 아무것도 아니다.
이 세 가지 특성 이 제도로 발전했는데, 나는 따로따로 앞으로 더 자세히 다루겠다. 그러나 나는 특히 처음에 그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왔다. 극동 생활에 대한 수천 가지의 세부사항과 여전히 극동 사상의 흥미로운 방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것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종족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행동에 익숙해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러한 행동들이 생겨나는 동기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과거를 잘 기억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원칙들을 길잡이로 이용하면 조선과 일본의 방식과 관습을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것들이 더 이상 우리 사고방식으로 처음에 분명히 그렇게 여긴 대로뒤섞이지 않을 것이다.
참고. 혹시 모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조선어와 일본어에 대해 말해 온 것은 물론 순수한 조선어와 일본어에도 적용된다고 말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중국 - 조선어와 중국 - 일본어는 단순히 중국어와는 다른 발음이다. 현재의 조선과 일본의 말은 구분이 불가능하지는 않은 두 종류의 말이 섞여있다. 이 관계는 영어의 앵글로 - 색슨어와 노르만어 관계에 비할 수 있으나, 전자가 훨씬 더 뚜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