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많은 농요 중, 특출하고 뛰어난 농요를 찾아가 보기로 하자.
●고양군 호미걸이 농요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대화리에 위치. 서울의 신촌역(기차)앞에서 시외버스로 1시간 남짓한 거리. 일산미가 생산되는 넓은 평야와 낮은 언덕으로 둘러싸인 농촌마을이다. 김호권을 비롯하여 60여 명의 농요회원이 마을에 살고 있고 선소리꾼인 김동관은 서울에 있다. 고양군에선 곁들여 행주산성을 관광할 수 있다.
●학산 오독떼기 농요 강원도 명주군 구정면 학산 2리에 위치. 강릉시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이다. 가창자인 동기달·조영원·최찬덕 등이 살고 있는 석천 마을은 강릉단오제에서 대관령국사 성황신으로 모시고 있는 범일국사의 탄생지로 마을엔 전설적인 학바위, 굴산사의 당간지주·석탑들이 남아 있음.
●정금농요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정금리에 위치. 횡성읍에서 멀지 않으며, 마을 입구까지 군내버스가 다닌다. 이 마을의 엄영태·우영진·윤양수로부터 영서지방의 대표적인 농요를 들을 수 있고, 횡성회다지소리로 대통령상을 받아 건립한, 마을의 민속관에서 160여 점의 민속자료들을 관람할 수 있다.
●통명 농요 경북 예천군 예천읍 통명동에 위치. 안동에서 예천읍까진 직행버스로 45분 거리이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농요이다.
●고성 농요 경남 고성군 고성읍 우산리에 위치. 충무시에서 고성읍까지 버스로 20분 거리이다. 마을엔 할미당 돌무지와 이팝나무 등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농요이다. 이상수·유영례 등의 가창자들이 살고 있다.
●진도군 들노래 전남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의 의신 들노래(허옥인 : 돈지리지주)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인지리의 들노래(조공례 등 가창자들이 지산면 인지리에 살고 있다)를 듣고 볼 수 있다.
●익산 지게목발노래 전북 익산군 삼기면 오룡리 검지마을에 위치. 이리시에서 택시를 이용할 수 있는 거리이다. 마을 안에 농요회관이 지어져 있어 단체로 익산 농요를 배울 수 있다.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농요이다. (보유자 : 박갑근)
●남제주군 덕수리 농요 제주도 남제주군 안덕면 덕수리에 위치. 방아돌 굴리는 노래 등으로 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는 민속마을이다. 불미노래 등 제주도 특유의 노래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외에도 충북 마제 농요, 충남 서산 볏가릿대, 수영농청, 밀양발례, 공처, 장산도 들노래, 해남 들노래, 고흥군 한적마을 농요, 김포 두레농요, 청도군 농요, 황해도 범몰이 농요, 평남 농요 등이 있다.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최자운**
<국문초록>
본 논문에서는 논매기 상사소리가 영남지역 여러 마을에서 수용, 전승되는데 중요하게 작
용한 요인을 현장조사를 통해 살펴보았다. 8개 조사마을 중 경남 거창 개화마을과 고성 우산
리, 경북 경산 자인면은 노동 방식이 동일하고 자생소리 없다는 점에서 상사소리의 수용 요
인을 검토하는데 유리한 조건이다. 논배미의 규모 대비 노동 투입 인원이 충분하지 않은 상
황에서 초벌에 비해 덜 힘든 세벌 논매기 때 모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논의
긴 쪽으로 훔치는 방식이 상사소리 수용의 기본 요건이 되었다.
8개 조사마을에서는 공통적으로 두벌 이후 손으로 훔치는 일에서 상사소리를 구연하였
다. 한창 벼가 커가는 상황에서 해야 하는 일도 많고 힘 역시 더 드는 논매기 때는 외래소리
가 들어갈 만한 여지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창자들이 상사(祥事) 자체를 상서로운 일,
좋은 일로 인식하고 있고, 어느 정도 모가 크고, 힘도 덜 드는 논 훔치는 상황은 이 소리의
문자적 의미와 결합하여 상사소리의 특유의 관념이 형성되었다. 상사소리는 좋은 소리, 풍년
을 부르는 소리라는 관념은 이 소리가 훔치거나 쌈싸는 일에 활용되는데 일조하였다.
* 이 논문 또는 저서는 201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5S1A5A8012546).
** 세명대학교 교양과정부
238 韓國民謠學 第46輯
모든 논매기 과정에서 일하는 내내 수시로 상사소리를 부르되 선소리 가창자 수도 많은
경남 거창 개화마을과 고성 우산리, 그리고 부잣집 논의 만물 논매기 때만 소리를 부르되,
전체 가구 대비 선소리 가창자 비율이 낮은 경산 자인의 사례를 통해 구연 빈도와 소리의
기능 확장이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전 들말에서 두벌 훔치기에서 시작된 상사소리
가 초벌 매기로 확장된 것 역시 구연 빈도와 관련이 있었다.
영남지역 논매기 상사소리는 자생소리가 없는 상황에서 손으로 훔치면서 크게 힘들지 않
고 논의 긴 쪽으로 일하는 경우와 손으로 훔치면서 크게 힘들지 않은데 자생소리 있기 때문
에 쌈싸는 소리로 수용된 경우, 그리고 자생소리가 없어 훔치는 소리로 수용된 경우로 수용
되었다. 이후 손으로 훔치면서도 더 꼼꼼하고 품이 많이 드는 일과 호미로 매는 일로 기능이
확장되었다. 이렇게 상사소리가 각 마을에 전승되는데 노동 인력 및 논매기 방식, 구연 횟
수, 그리고 상사(祥事) 관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앞으로 본고의 논의 결과를 바탕으로 상사소리 흐름에 있어 중요한 지역에 대한 현장조사를
실시하여 본 논문의 결과를 검증하는 동시에 및 새로운 요인은 없었는지 검토할 것이다. 아울러,
경기도에서 출발하여 충남 부여와 논산을 경유, 전북으로 진출한 방아소리의 수용 요인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여 우리나라 논매는 소리의 수용 요인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고자 한다.
핵심어 : 논매기 상사소리, 논매기 방식, 상사(祥事) 관념, 구연 빈도, 선소리꾼, 수용 요인
Ⅰ. 서론
농업노동요 연구에 있어 하나의 소리가 특정지역에 수용되는데 중요하게
작용한 요인에 대한 탐색 작업은 우리나라 노동요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과
직결된다. 여러 가지 기능의 논농사 소리 중 논매는 소리는 역사적 연원이
깊고, 분포 지역이 넓으며, 노동 방식 및 그에 따른 각편(version)이 다양하
다. 논맬 때 부르는 상사소리는 방아소리와 더불어, 우리나라 전 지역에 걸쳐
분포되고 있어, 논매는 소리가 수용되고 전승되는 이유를 논의하기 위한 대
상으로 적합하다.1) 영남지역 중 경북은 자생소리와 상사소리 간의 경쟁이
포착되고, 경남은 상사소리가 독주하고 있다. 이곳은 논매기 상사소리의 자
체적 면모 및 자생소리들과의 관계가 가장 다채로운 곳 중 하나이다.
1) 김진순은 논매기 상사소리를 후렴에 따라 중부지역의 <얼럴럴 상사데야>, 경남지역의 <상사디여>,
경북 일부지역의 <에헤.. 상사디여>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김진순, 「한국 농업노동요의 분류와 분포」, 구비문학연구 제4집, 한국구비문학회, 1997, 325쪽.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239
기존 민요 자료집에 실린 콘텍스트(Context) 정보의 편차가 심한 상황에서
본고의 목적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마을별 토박이 대상 현장조사를 통해
마을 인문 및 자연지리, 농사 환경, 노동 방식 등 논매는 소리와 관련된 사항을
전반적으로 점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모든 영남지역 논매기 상사소리를 현장
조사할 수 없으므로, 여기서는 지역성 및 역사성을 담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통 마을에 비해 현장 연구 조건이 유리한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
전승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하고자 한다. 실제 농사 현장에서 소리를 익힌 무형
문화재 1세대들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화석화된 전승이 이미 현실화 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들에 대한 면담 조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영남지역에는 경북 4곳, 경남 2곳의 민요보존회에서 논매기 상사소리를
보존하고 있는데, 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치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안
동 저전동농요>, <예천 통명농요>는 경북 북부, <상주 초산동 농요>는 경북
서부, <경산 자인 계정들노래>는 경북 남부, <거창 일소리>는 경남 북부, 그
리고 <고성농요>는 경남 중앙지역이다. 이 보존회들은 영남지역 거의 전 지
역에 걸쳐 분포할 뿐만 아니라 각 보존회에서 전승하고 있는 상사소리의 면
모 역시 다층적이다.
전국 규모의 민요 조사를 통한 기초 정보가 축적되면서 개별 및 권역별
농업노동요의 특징, 인접지역간의 교섭 및 전파 양상 등의 논의가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2) 이러한 흐름 속에서 논매기 상사소리 역시 여러 논자들
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 강등학은 전국 논매는 소리의 판도를 정리하면서 상
사소리의 경우 경기도의 김포평야, 혹은 강원도 영서지역(홍천, 횡성 일대)에
서 자생하여, 동진이나 서진하며 각 지역에 영향 준 것으로 파악하였다.3) 그
2) 본고와 관련된 논저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강등학, 「경북지역 <논매는 소리>의 기초적 분석과 지역적 판도」, 한국민속학 40, 한국민속학회,
2004, 217~251쪽.
권오경, 「영남민요의 전승과 특질」, 우리말글 25, 우리말글학회, 2002, 217~241쪽.
김인숙, 「경상도 논농사 소리의 음악적 특징과 분포」, 한국민요학 제12집, 한국민요학회, 2003,
41~74쪽.
김헌선, 「경상북도 지역의 논농사와 민요」, 구비문학연구 3집, 한국구비문학회, 1995, 379~401쪽.
조사 일시 문화재 명칭 제보자 문화재 지정 일시
2011. 9. 4 경산 자인계정들소리 이상준(1949), 이지우(1933) 2005년 경북 31호 지정
2011. 8. 3 안동 저전동 농요 조석탑(1954), 조석재(1933) 외 1980년 경북 2호 지정
2011. 8. 2 예천 통명농요 강원희(1950) 외 보존회원들 1985년 중요 84-2호 지정
2011. 8. 3 상주민요 육종덕(1931) 1987년 경북 13호 지정
2011. 8.15 거창 일소리 박종석(1934) 2004년 경남 30호 지정
2008.10. 7 고성농요 김영규(1931) 1985년 중요 84-1호 지정
240 韓國民謠學 第46輯
의 논의는 여러 소리들과의 관계 속에서 상사소리의 이동 경로를 거시적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본고의 입론 과정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였다.
영남지역 논매는 소리를 다루는 자리에서 권오경은 경북 경산, 영천, 청도,
고령, 안동, 예천 등 주로 낙동강 좌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 논매기 상사
소리가 충청도에서 예천, 안동, 울진 방면으로 전파, 다시 의성, 포항, 영천,
경산, 청도, 고령 등지를 경유하여, 최종적으로는 낙동강을 따라 서부 경남지
역으로 내려간 것으로 파악하였다.4) 권오경의 논의는 영남지역 상사소리의
흐름을 세밀하게 밝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위 두 연구자의 논의를 통해 논매기 상사소리의 전국 및 영남지역 윤곽은
어느 정도 드러났다. 특히, 지금까지 조사된 자료들에 대한 귀납적 분석을
기반으로 위 연구들이 도출되었다는 점에서 활용 가치가 크다. 이러한 상황
에서 다음 단계에서 이루어져야 할 작업은 위와 같은 흐름이 일어나게 된
소이(所以)를 밝히는 일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남하하던 논매기 상사소리
가 영남지역 여러 마을에서 수용, 전승되는데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무엇이
었는지 현장조사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에서 실시한 조사 관련 사항을 제시하면 아래 표와 같다.
3) 강등학, 「모심는 소리와 논매는 소리의 전국적 판도 및 농요의 권역에 관한 연구」, 한국민속학
38, 한국민속학회, 2003, 15~91쪽.
4) 권오경, 「<영남지역> 논매는 소리의 전승 양상과 사설 구성의 특질」, 한국민요학 12집, 한국민요
학회, 2003, 12쪽.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241
Ⅱ. 영남지역 논매기 상사소리 전승 보존회의 논농사 상황
1. 경북지역
<경산 자인 계정들소리> 기능 보유자인 이지우(1933)는 경산시 자인면 신
관리 출신이다. 전체 60가구 정도 되는 신관리는 경주 이씨 집성촌으로, 인
근의 다른 마을에 비해 경제 상황은 넉넉한 편이었다. 농토의 대부분이 천수
답이었던 관계로, 농사 짓기가 어려웠다. 1943년에 마을사람들이 합심해서
마을 인근에 위치한 신제지를 조성하였고, 그 이후에 논에 물 대기가 조금씩
나아졌다.
이곳에서는 입하(立夏) 무렵 못자리를 만든다. 모는 1마지기에 2명꼴로 심
는데, 마을 전체적으로 모를 다 심으려면 15일에서 20일 정도 걸린다. 마을
위쪽에 위치한 저수지와 가까운 논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모를 심게 되며,
모심기 철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모를 심는 이유
는 못자리를 만들었거나 혹은 쪄서 논에 던져둔 상태에서 모심기가 늦어지면
그 사이에 뿌리가 내려 옮겨심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남성은 논 갈기 및
썰기, 모 찌기, 그리고 모 포기 운반을 주로 하고, 여성은 아침밥과 새참 준
비, 모찌기 거들기, 모심기를 담당한다. 모심기 자체는 주로 품앗이를 통해
여성들 중심으로 했다. 모는 흔틀모(막모)로 심다가 일제강점기에 함석이나
나무에 눈금을 그려 만든 ‘모 숭구는 기계’ 혹은 ‘못틀’이 도입되었고, 그 이
후에 못줄을 대서 모를 심었다.
모심을 때는 ‘정자소리’를 하였다. 모심기를 대부분 여성 중심으로 한 관계
로, 선소리는 8:2 비율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더 많이 했다. 소리는 일을 하
는 도중이나 참 먹고 나서 등 정해진 때가 없이 수시로 했는데, 이 마을에서
는 전체 논일하면서 하는 소리 중 모심는 소리를 가장 많이 하였다.
논매기는 한 마지기당 1.2~1.5명 정도 투입되었다. 모심고 나서 10일에서
15일 정도 지나서 손으로 아시논을 훔치는데, 잡초의 일종인 올비가 많은 논
242 韓國民謠學 第46輯
은 그 올비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호미로 매기도 한다. 그 뒤 열흘에서 보
름 정도 지나서 손으로 두벌논을 훔친다. 이때가 전체 김매기 중 가장 알뜰
히 일해야 하는 때이다. 마지막으로 논의 상태를 봐서 손으로 만물논을 훔치
기도 하는데, 이 일은 ‘골 탄다’고 한다. 골을 탄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때
는 벼 포기 사이사이의 공기 소통이 목적이어서 슬슬 지나가면서 피만 뽑으
면 된다. 아시논과 두벌논은 논의 짧은 쪽으로 일렬로 서서 앞으로 나아가면
서 훔치고, 끝까지 가면 다시 줄을 맞추어서 반대편으로 돌아오는 형태로 일
을 한다. 각각의 김매기 기간은 5~6일 정도 소요된다. 만물논은 그리 힘들지
않기 때문에 일렬로 서서 논의 긴 쪽으로 한 번에 마무리한다.
이 마을에서는 만물 때 ‘상사소리’를 하였다. 마을 선소리꾼은 3, 4명 정도
되는데, 일하는 사람 수, 논배미 모양 등에 따라 논두렁에 서서 소리 하기도
하고, 사람들 속에서 하기도 하였다. 모심기 철에는 여자들도 바쁘다 보니,
삶은 감자나 막걸리 등 참을 내올 여가가 없다. 그러나 만물 때는 힘든 논일
을 다 마무리된 동시에 여자들이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관계로, 일판에
서의 먹거리가 비교적 풍성했다. 같은 만물논이더라도, 가족 중심이나 이웃
사람 몇이 일할 때는 소리를 하지 않고, 부잣집 논에서 일하는 사람이 10여
명이 넘어가서 일을 마친 뒤 부잣집으로 이동하여 막걸리, 국수 등을 먹을
수 있는 상황에서 주로 소리를 하였다.
<안동 저전동 농요> 전승 지역인 안동군 서후면 저전동은 한양 조씨 집성
촌으로, 음지부락, 양지부락, 거리부락, 정외부락, 진살부락, 동녘부락, 산야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300호 정도 되는데, 일꾼을 둘 정도의
집은 5가구 정도이고 마을 사람들은 그 집 땅에서 소작을 하였다. 품앗이 등
논일할 때 친족관계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모심기철 가난한 사람들은
품값을 벌기 위해 ‘멕이’로 일을 많이 했다.5)
5) 원래 모심기는 한 마지기(200평)에 2명이 일을 해야 하는데, 멕이로 일을 하면 1명이 투입되었다.
멕이는 일이 고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몇 집이 대부분의 농토를 소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자리
는 부족하고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많다 보니, 이마저도 경쟁이 붙었다. 수확철에 지주(地主)가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243
이 마을에서는 논배미 규모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집안사람 포함하여
이웃끼리 알음알음으로 품앗이로 일을 했다. 옛날부터 모찌기, 모심기는 여
성과 남성이 같이 일을 하였다. 한 사람이라도 일손을 보태야 하는 형편이
다 보니, 여성이라고 집안 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사람 수가 많으면
논의 긴 쪽으로 못줄을 대고, 그렇지 않으면 짧은 쪽으로 줄을 대었다. 논
의 긴 쪽으로 못줄을 댈 경우 비교적 빨리 일을 마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
다. 오랜 시간 허리를 숙이고 모를 심다 보면 허리도 아프고 지겹기 때문
에 모심는 소리를 했으나 인근의 다른 마을들처럼 소리를 즐겨 한 것은 아
니다.
논매기는 보통 한 마지기당 한 명씩 투입되는데, 모심고 나서 15일에서
20일 정도 지나서 호미로 아이논을 맨다. 논을 매기 전에 물을 잘 댄 논은
잡초가 덜 나고, 그렇지 못하면 풀이 많이 난다. 아이논 맨지 15일에서 20일
정도 지나서 손으로 두벌 훔치기를, 또 20일 정도 지나 손으로 세벌 훔치기
를 한다. 모심기에 비해 투입 인원이 적기 때문에 논매기 품앗이 구성은 비
교적 수월하고, 일하는 기간도 짧은 편이다.
노동 강도로 따지면 논농사 중 아이논매기가 가장 힘들고, 그 다음이 모심
기, 두벌 논매기 순이다. 가장 힘든 아이논의 경우 두 골에 발을 두고 양 옆
의 두 골까지 해서 모두 네 골을 맨다. 호미로 맬 때에는 힘들어서 소리할
여유가 없고, 아이논에 비해 훔치는 골의 수가 더 많지만 힘이 덜 드는 두벌
과 세벌 때는 ‘긴소리’와 ‘상사소리’를 한다.
저전동에서는 두벌과 세벌 때 손으로 훔치면서 하는 소리를 모심는 소리
보다 더 자주 한 편이다. 그 이유는 손으로 훔치는 일이 모심기에 비해 덜
힘들기도 하거니와 이 일 뒤에는 유흥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선소리
꾼은 일을 마칠 즈음 긴소리와 상사소리를 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논
논의 상황을 보고 소작료를 정하는 ‘단품’ 때 다음 해에 소작을 주지 않으면 당장 먹고 살 것이
없기 때문에 소작농 중 일부는 부잣집에 잘 보이기 위하여 자신들은 엄두도 못내는 명태 등을 뇌물
로 바치기도 했다.
244 韓國民謠學 第46輯
을 다 매고 칭칭이소리를 부르면서 부잣집에 도착한 사람들은 막걸리 한 잔
씩들 하면서 논을 훔치는 흉내와 함께 긴소리, 상사소리를 부르며 한바탕 노
는 ‘마당논’을 한다. 이곳에서 그들은 저녁을 해결하고 쌀 한 되를 품값으로
받아 귀가한다.
<예천 통명농요>는 예천군 예천읍 통명리에서 전승되던 민요이다. 통명리
는 각성민촌으로, 12개의 자연마을 250가구 정도로 구성되었다. 이 마을은
인근에서 가구 수가 가장 많은 편이었다. 전체 가구 중 일꾼을 2명 이상 두고
농사짓는 집은 9가구 정도 되었고, 그들이 전체 농토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나머지 가구들은 대부분 소작을 지었다.
일제강점기에 저수지가 2개 지어지기는 했으나 물을 댈 수 있는 마을 논
은 제한적이었다. 대부분의 논은 비가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천봉답이었
고, 작은 웅덩이를 파서 두 사람이 두레박을 마주 잡고 물을 퍼올리는 경우
가 많았다. 음력 3월 중순 몹씨(볍씨)를 담그고, 아이․두벌 논갈이를 한 뒤
물을 댄다. 그런 뒤 써레질과 번지질을 하고 모를 심는다. 통명리는 이모작이
70%, 일모작이 30%였다. 이모작은 하지(夏至) 전 3일, 후 3일에 모를 심고,
일모작은 조금 더 일찍 망종(芒種) 전후에 심었다.
모는 품앗이로 심는데, 1마지기당 2명꼴로 투입되어 마을 전체적으로는
한 달 정도 소요되었다. 모심기는 전통적으로 벌모로 심다가 6.25 전쟁 이후
에 나무 판에 4개의 구멍을 뚫은 형태의 판모, 1970년대 초반부터 줄모로
심었다. 판모나 줄모를 할 수 없는 논이 다수 존재했기 때문에 벌모가 완전
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통명리는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으로 모를 심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 젊은이들이 도회지로 이사가는 등 인력이 부족해지
자 여성들도 논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모작을 짓는 논은 보리 수확과 모심기를 연이어 해야 하는 관계로 일손
이 바빠 모심는 소리를 할 여가가 없고, ‘송아지 따기’ 심기로 심는 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는 논의 형태에 따라 능률을 올리기 위해 가로 형태
로 한 사람이 심고 가면 그 아래에서 다른 사람이 심고, 그러면 그 아래 사람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245
이 다음으로 심어가다가 제일 먼저 시작한 사람이 논 끝부분에 도착하여 아
래 쪽에 남는 부분을 도와주고, 그 아래 사람은 다시 자신의 아랫 부분을 도
와주는 방식으로 모를 심기도 했다. 제일 먼저 모를 심은 사람이 어미 소 역
할을 하고 그 아래 사람이 어미 소리를 따르는 송아지와 같기 때문에 명칭을
송아지 따기라고 했다. 이곳에서는 모심을 때 소리를 그렇게 즐겨하지는 않
았다. 부잣집 논에 모를 심으면서 일하는 사람도 많을 경우 일을 마치고 다
같이 술과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는데, 이때 해질 무렵 일을 거
의 다 한 상태에서 ‘아부레이수나’와 모를 다 심고 논에서 나오며 부르는 ‘돔
소소리’를 하였다.
논은 품앗이로 매는데, 1마지기당 1명씩 투입되었다. 모를 심은 지 15일
에서 20일 정도 지나 모를 심은 논의 짧은 쪽으로 일렬로 서서 애벌논을
호미로 맨다. 일이 고될 뿐만 아니라, 호미 크기가 크고 끝이 송곳처럼 뾰
족하여 자칫 발등을 찧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때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보통 1명당 3골씩 매었다. 이 마을은 1인당 호미로 매는 골의 수가 가장
적은 편이다.
애벌 뒤 20일 정도 지나 모 양 옆으로 난 잡초를 없애기 위해 논의 긴 쪽
으로 일렬로 서서 앞으로 가면서 두벌을 손으로 훔치는데 이때는 잡초를 뜯
어 땅에 묻으면서 지면을 되도록 평평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에 따
라서 손이 땅이나 벼 포기에 닿아 쓰라리기 때문에 뽕나무껍질이나 닥나무껍
질 등을 엮어 ‘손걸이’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두벌 손 훔치기를 한창 할
때는 ‘긴소리’, 일을 거의 마치고 쌈을 쌀 때 ‘상사소리’, 일을 거의 마칠 때
‘방아소리’, 그리고 일을 다 마치고 논 밖으로 나올 때 ‘에히용소리’를 한다.
논매기를 마치고 집으로 오면서 부르는 소리로는 ‘캥마쿵쿵 노세’가 있다. 이
곳의 특징은 훔치기, 마무리, 나오기, 이동 등 각 상황에 따른 소리가 분화되
어 있다는 것이다.
모심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두벌 훔치는 소리 역시 부잣집 농사 때 일을
거의 마쳐가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통명리에서는 전체 논농사 소리 중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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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 훔칠 때 하는 소리를 가장 많이 하였다. 시간적으로 일하는 것에 여유가
있고 그렇게 힘이 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일을 마친 뒤 부잣집에서
이루어지는 뒷풀이의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상주 초산동 농요> 전승 지역인 상주시 초산동은 각성받이 마을로, 쌍
암(40가구 정도), 안마실(28가구), 진등(8가구)마을로 구성되었다. 70여 가
구 중 일꾼을 둔 일꾼 두세 명을 두고 농사를 지은 집은 7가구 정도 되었
다. 전체 가구 대비 지주(地主)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이다. 이 마
을은 다른 마을에서 이 마을로 고공살이를 하러 올 정도로 부촌(富村)이었
다. 일제강점기 때 3년간 비가 제대로 오지 않아 이 일대 대부분의 마을에
서 농사를 짓지 못해 곤란을 겪었지만, 이 마을에는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마을 농토로는 물대기가 좋은 사벌뜰과 그렇지 않은 상주뜰이 있었다. 사
벌뜰은 무논이 많았고, 곳곳에 삼거리보, 삼보, 방매보, 아랫보, 어득보 등의
보가 있었다. 이곳 땅은 대부분 마을 지주(地主)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상주
뜰 주변에서는 이모작을, 사벌뜰 주변에서는 일모작을 하였다. 상주뜰은 보
리를 갈지 않으면 먹고 살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모작을 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일모작을 하는 곳은 망종(芒種)부터, 이모작을 하는 곳은 하지(夏至)
전후로 모를 심는다.
초산동은 워낙 뜰이 넓고 일손은 한정된 관계로 여성이 들에 나가 모를
심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들은 논 갈기, 써레질, 쪄 놓은 모 나르기 등을
하고, 여성들은 모 심기를 했다. 기본적으로 가족은 포함되고, 이웃끼리 알음
알음으로 일정을 조정하여 모를 심었다. 이 마을은 1마지기에 1.2명씩 일을
한다. 다른 곳에 비해 일하는 사람 수가 적은 편이다.
벌모나 줄모와 관계없이 모를 심을 때는 논의 짧은 쪽으로 못줄을 대었다.
간혹 사람들이 많을 경우 긴 쪽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이러한
방식은 인원의 부족함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하루 종일 모를 심다 보면 피곤
하고, 지겨운 관계로 베틀노래, 공검못노래 등의 ‘정자소리’를 불렀다. 모심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247
는 소리 선소리 가능자는 논매는 소리 가창자에 비해 더 많고 그런 만큼 구
연 횟수도 빈번했다.
보통 반나절이면 하나의 일 단위가 끝이 나기 때문에 오전과 오후로 나누
어 논매기 일정을 짰다. 논을 맬 때는 1마지기에 1.2명씩 일을 한다. 모심고
나서 아시 논 맬 때까지 논에 물을 대어 놓았다가 모심은 지 15일에서 20일
정도 지나 아시 논을 맬 때가 되면 논에 물을 뺀다. 어느 정도 물기가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모를 심은 방향대로 일렬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아시논을
맨다. 고랑이 넓고 논바닥이 마르지 않기 때문에 호미질 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 뒤 다시 물 대었다가 15-20일 정도 지나 두벌 논매기 전에 물을 뺀다.
이때는 논의 세로 방향으로 가면서 손으로 잡초를 뽑아 땅 속에 묻는 식으로
일을 하는데, 간격이 좁아도 논 훔치기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두벌논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가 아시논매기에 비해 길기 때문에 마지막 정도에 가면
기러기 날아가는 형태가 되고 자연스럽게 원형으로 쌈을 싸면서 일을 마무리
한다.
사람들은 모심기나 논매기 때 가능한 복판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복판에
서면 가장자리에 비해 매거나 훔쳐야 하는 골의 수가 2, 3골 정도 많기 때문
이다. 그런 이유로 복판은 청․장년층이, 가장자리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이 선다. 선소리꾼은 대체로 나이가 많기 때문에 주로 가장자리에 서는 경
우가 많다.
아시 및 두벌 논을 맬 때 보통의 경우에는 소리를 잘 하지 않고, ‘온손’
모둘 때’ 주로 하였다. 온손을 모으는 것은 부잣집 논을 매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이는 경우를 말한다. 부잣집의 경우 보통 50마지기가 넘기 때
문에 논을 매게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이 총동원되어야 했다. 누구네 집에서
온손 모은다는 소식이 들리면 마을 사람들은 그 날은 모든 일정을 비워두었
다. 이 날은 마을 선소리꾼도 2, 3명은 오기 때문에 소리판이 훨씬 풍성해질
수 있었다.
아시논을 맬 때는 ‘소호니소리’를 한다. 일하는 템포에 맞추다 보니 장단은
248 韓國民謠學 第46輯
다소 느리고, 일하는 사람들은 다섯 번에 한 번씩 허리를 펴면서 후렴을 더
큰소리로 받았다. 두벌 때는 손을 빨리 움직이므로, 아시 논매기에 비해 소리
의 장단이 빠르다. 이때 사람들은 일의 초반부에 ‘방아소리’, 중반 이상 넘어
가면서 ‘절로소리’, 쌈 쌀 때 ‘상사소리’, 일을 마친다는 신호로 ‘오우사소리’
를 불렀다. 아시 논매기 소리와 두벌 논 훔치기 소리는 모두 온손을 모을 때
하기 때문에 구연 빈도는 거의 비슷하다.
2. 경남지역
<거창 일소리>는 경남 거창군 일대에서 전승되는 민요를 중심으로 구성되
었다. 기능 보유자 박종석(1934)은 거창군 거창읍 가지리 개화마을 출신이
다. 개화마을은 50여 가구로 구성된 각성받이 마을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집은 5, 6가구 정도이고 나머지는 소작농이었다. 이 마을은 천수답이
대부분이어서 농사 여건이 좋지 않았다.
모심기는 음력 5월 중․하순이 가장 좋은 시기이고, 날이 가물게 되면 7월
중순까지도 심었다. 한 달 정도 모를 심는데, 한 마지기 당 2명씩 일을 했다.
모심을 때는 이웃집끼리 의논해서 품앗이로 일을 한다. 보통 부잣집부터 모
를 심고, 그 뒤에 마을 상황에 따라 이후 일정을 정하였다. 부잣집은 농토가
많아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표면적 이유도 있지만, 사람들이
부잣집 논매기에 이견 없이 다 모일 수 있는 것은 소작과 함께 ‘꼬지모’ 관행
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안동 저전동의 ‘멕이’, 예천 통명리
의 ‘돈내기’와 비슷한 형태의 꼬지모를 한다. 앞의 두 마을이 일을 해주고 품
값을 받는 것이라면 이곳은 부잣집에서 곡식을 미리 빌려서 먹고 그것을 모
심기로 해주는 것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꼬지모를 하려
는 사람들 역시 많았다. 이 일과 본인 집 모심기를 병행하다 보니 모심기 철
은 일 년 중 가장 힘들고 바쁜 때였다.
이곳에서는 모심기 및 논매기 선소리꾼을 ‘한비루’라고 한다. 한비루는 남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249
성과 여성이 8:2 비율이다. 모를 심을 때 한비루는 모심는 사람들 정중앙에
서서 독창으로 ‘정자소리’ 앞부분을 하면 일하는 사람들이 제창으로 뒷소리
를 받는다. 모심을 때는 남녀가 섞여서 일을 한다. 모심는 일이 한 달 정도의
기간 동안 하루 종일 허리를 숙이고 장시간 해야 하다 보니, 피곤하고 지겨
운 관계로, 정자소리를 자주 하였다.
개화마을 일대 논은 토질(土質)이 부드러운 편이다. 논갈이 및 써레질에
걸리는 시간도 다른 지역에 비해 짧다. 모심을 때와 달리 지심 맬 때는 논에
물대기도 양호하다. 아시 논매기는 모를 심고 나서 20일 정도 지나, 지심을
손으로 훔친 뒤 묻는 식으로 한다. 논의 짧은 쪽으로 일렬로 서서 가다가 끝
부분에 도착해서는 군인들이 사열받듯이 반원을 돈 뒤 다시 반대쪽으로 일을
했다. 두벌 논매기는 지심이 많지 않을 경우 손으로 훔치고, 그렇지 않을 때
는 호미로 왼손으로 지심을 제친 뒤 오른손에 든 호미로 지심을 엎어서 묻어
버렸다. 이때는 보통 한 사람당 4골씩 맨다. 두벌 뒤 15일에서 20일 정도 지
나 하는 세벌은 손으로 훔치는데, 벼 포기 사이의 공기 순환이 주된 목적이
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지 않다.
논맬 때 한비루는 모심을 때와 마찬가지로, 논매는 사람들의 정중앙에 선
다. 논매는 소리는 아시, 두벌, 세벌 모두 ‘상사소리’ 한 가지만 불렀다. 개
화마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부잣집 논매기는 물론이고, 일하는 사람
이 서너 명 정도밖에 되지 않더라도 소리를 주고받으며 일 하기를 선호했
다. 모심는 소리와 같이, 하루에 5번 이상 논매는 소리를 하는 것이 다반사
였다.
<고성농요>는 경남 고성군 고성읍 우산리 일대에서 전승되던 민요로 이루
어졌다. 우산리는 외우산마을, 내우산마을, 그리고 산촌마을 등으로 구성되
는데 우산리의 중심마을은 외우산마을이다. 3개 마을 중 내우산마을과 외우
산마을은 산 밑에 있어서 논에 물 대기가 좋았고, 산촌마을은 평지에 있기
때문에 물 대기도 어렵고 농사도 녹록치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대가면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농사 여건이 호전되었다.
250 韓國民謠學 第46輯
마을 주변으로 관개시설이 확충되면서 마을 주변의 농토가 개간되었는데, 이
때 외우산마을 앞쪽에 조성된 뜰이 이민(移民)뜰이다. 뜰 조성 이후에 들 주
변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었다.
모심기와 논매기는 모두 품앗이로 했다. 품앗이가 여의치 않을 경우 7, 8
명 이상의 가족 구성원이 총동원되어 일을 할 때도 있었다. 모는 보통 하지
전 삼일, 후 삼일 즈음부터 남성과 여성이 함께 심는데, 모심는 소리는 주로
남성들의 몫이었다. 모를 심고 보름에서 20일 정도의 시간 간격을 두고 초벌,
두벌, 세벌, 그리고 논 상황에 따라 맘논을 매는데, 이곳에는 진흙땅이 많아
모든 논매기 과정에서 손으로 풀을 뽑아서 땅 속에 묻어버리는 식으로 지심
을 제거했다. 일렬로 서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논을 훔치다가 논배미 끝부분
에 도착하면 반원을 그리며 돈 뒤 다시 대열을 정비하여 반대쪽으로 나아간
다. 양쪽 가장자리에 서는 사람은 바깥쪽으로 크게 돌면서 대열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복판에 선 사람들보다 한 두골 정도 작게 잡았다. 그리고 두 사
람 중 한 사람이 선소리를 매겼다. 가장자리에 서는 사람은 다른 이들보다
약간씩 앞서며 소리를 하는 것이 효과가 더 컸기 때문이다.
초벌 논부터 세벌 논까지의 훔치는 속도 및 양은 차이가 나지만 일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초벌논 훔치기는 논바닥이 고르지 않은 상황에서
지심 제거 및 쓰러진 모포기 세우기 등의 일 때문에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리
고, 그에 따라 소리 역시 가장 느리게 부른다. 두벌 논부터는 노동 상황이
호전되고, 일의 양도 적어지기 때문에 훔치기의 속도도 붙고, 소리의 장단
역시 빨라진다. 이 마을에는 일하는 사이사이에 ‘상사소리’와 ‘방아소리’를
불렀고, 그만큼 선소리를 매길 줄 아는 사람도 많았다.
이상 6개 조사 마을별 논매기 단계에 따른 노동 방식 및 소리를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조사 일시 문화재 명칭 제보자 문화재 지정 일시
2011.7.16 진천 용몽리 농요 이정수(1940) 2003년 충북 11호 지정
2011.8.11 대전 들말두레소리 고석근(1929) 2002년 대전 13호 지정
경산 자인면 안동 저전동 예천 통명리 상주 초산동 거창 가지리 고성 우산리
아시논
도구 손/호미 호미 호미 호미 손 손
소리 ․ ․ ․ 소호니소리 상사소리
상사소리+
방아소리
두벌논
도구 손 손 손 손 손/호미 손
소리 ․
긴소리+
상사소리
긴소리+
상사소리+
방아소리+
에히용소리
방아소리+
절로소리+
상사소리+
오우사소리
상사소리
상사소리+
방아소리
세벌논
도구 손 손 손 손 손 손
소리
상사소리+
우야소리
긴소리+
상사소리
․ ․ 상사소리
상사소리+
방아소리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251
Ⅲ. 호서지역 논매기 상사소리 전승 보존회와의 비교
전국에서 논매기 상사소리를 무형문화재로 전승하고 있는 곳은 영남지역
과 호서지역이다. 호서지역 두 마을 사례를 살핌으로써 영남지역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고자 한다. 조사 관련 사항을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진천 용몽리 농요> 기능 보유자인 이정수(1940)는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
돌실마을 출신이다. 돌실에는 웃돌실과 아랫돌실이 있는데, 기계 유씨와 평
양 조씨가 전체 40호 중 80% 정도를 차지했다. 돌실마을은 농사철이 되면
개천에 여러 개의 보를 막아서 논에 물을 대었다. 사월 초파일 때 못자리를
만들고, 하지(夏至) 전후 삼 일부터 모를 심는다. 이 마을은 양반마을이라는
관념이 강해서 남녀 간 내외가 심했고,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으로 논농사를
252 韓國民謠學 第46輯
지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일자리를 찾기 위해 마을 젊은 사람들이 도회지
로 이주하게 되면서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여성이 모심기에 투입되게 되었
다. 1960년대 후반부터 호남지역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온 사람들이 많았는
데, 친정에서 논일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이 사람들 중심으로 여성들이 논일
을 점차 하게 되었다.
모심기 철이 다가오면 동네 일꾼사랑에 사람들이 모여서 일정을 조율하였
다. 모심는 기간은 25일에서 한 달 정도 걸렸으며, 모심을 때는 남성 선소리꾼
이 사람들 속에서 같이 일을 하면서 ‘하나소리’를 상황에 따라 수시로 하였다.
논을 매기 위해 두레가 서면 가구 당 한 명 이상은 나와야 한다. 동네 구장
등 행정 책임자가 좌상을 맡아 한 해 논매기 일정을 조율하고, 품값을 계산했
다. 두레는 참여 인원이 많아 보니 노동 효율은 좋지만 그로 인해 불편한 점도
종종 발생했다. 제보자가 어렸을 때는 대부분 두레로 논을 맸으나 이후 품값
계산에 따른 이웃 간 불화가 빈번해지자 점차 품앗이로 일을 하게 되었다.
두레로 논을 맬 경우 사람이 많기 때문에 논의 짧은 쪽으로 1열로 늘어서
서 한꺼번에 빠른 시간 내에 매어 간다. 품앗이로 일할 경우 사람 수가 적어
서 논의 긴 쪽으로 기러기가 날아가는 형태로 한다. 이때 가장자리에 서는
사람을 겉부리, 중앙 부분에 서는 사람은 한부리라 한다. 겉부리는 4골씩, 한
부리는 빨리 나아가면서 대열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3골씩 맨다. 눈썰미가
있고, 전체 일을 조율할 수 있는 이가 겉부리를 하고, 장정들이 한부리를 주
로 한다.
모를 심은 지 15일에서 20일 정도 지나서 호미로 아시논을 맨다. 그 뒤
일주일에서 10일 정도 지나서 손으로 두벌논을 뜯는다. 논매기는 1마지기에
보통 0.5~0.8명 정도 투입되는데, 매거나 뜯는 일에 투입되는 사람 수는 동
일하다. 일찍 모를 심은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기 때문에 매기와 뜯기는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논매기는 모심기와 같이 촌각을 다투지도, 하
루 종일 일하지도 않는다.
돌실에는 40여 호 중 선소리꾼이 4명 정도 되었다. 가구 수 대비 선소리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253
가창자 수는 많은 편이다. 논을 매거나 뜯을 때 선소리꾼은 북치면서 일하는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한다. 호미로 맬 때는 ‘에하오소리’, 손으로 뜯을 때는
‘상사소리’를 하는데, 매거나 뜯을 때 관계없이 필요에 따라 수시로 소리를
하였다. 이러한 면은 모심는 소리와 비슷하다.
<대전 들말 두레소리>는 대전시 대덕구 목상동 일대에서 전승되던 소리들
로 구성되어 있다. 기능 보유자 고석근(1929)은 대전 대덕구 신탄진 문평리
들말 출신이다. 들말은 앞들말이 70호 정도, 뒷들말이 50호 정도 되었다. 들
말 옆으로 갑천이 흐르고 있어 일제 강점기에 구답 및 신답수리조합이 만들
어졌다. 마을에서 몇 사람씩 수리조합원이 되어 수로(水路)를 관리하였는데,
물꼬 관리와 함께 수로와 연결된 논에 물이 공평하게 공급되도록 하는 것이
수리조합원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들말은 인근지역에 비해 지주
도 많고, 마을 및 농사 규모가 크며, 논농사 여건 역시 좋았다.
모는 품앗이로 심는데, 1마지기당 1.5명 정도 투입된다. 이곳에서는 전통
적으로 ‘삭 심기’로 모를 심다가 방틀(2인 1조로 모를 심는 틀)이 도입되었
고, 그 다음에는 줄모로 심었다. 옛날부터 남녀가 같이 모를 심었는데, 넓은
농토에 비해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선소리는 대부분 남성 중심으로 ‘상
사소리’를 한다. 이 소리는 전체 논농사에서 불리는 상사소리 중 장단이 가장
느리다.6)
들말두레는 인근에서 가장 큰 두레 중 하나였다. 부락 회의를 통해 논매기
에 따른 두레 일정을 짰다. 두레가 서게 되면 1가구 당 1사람씩 나와야 하고,
만약 그날 나오지 못하게 되면 하루치 품삯을 마을에 내야 했다. 논매기는
1마지기당 0.8명 정도 일을 한다. 논은 가로로 매되, 끝까지 가게 되면 반원
을 도는 것이 아니라, 그 부분에서 뒤돌아서 열을 맞추어 다시 반대 방향으
로 오는 식으로 일을 했다.
모심은지 20일 정도 지나 아시논을 매는데, 일렬로 서서 앞으로 나아가면
6) 대전광역시, 들말두레소리 실황 DVD, 대전문화뿌리찾기 4.
254 韓國民謠學 第46輯
서 호미로 지심을 파서 묻는 식으로 일한다. 이때 ‘상사소리’를 부르는데, 모
심는 소리에 비해 장단 다소 빠르다. 들말 선소리꾼은 전체 120여 가구 중
5~6명 정도 되었다. 논맬 때 북이 준비되면 선소리꾼이 일하는 사람들 전면
에서 북을 치면서 소리하고, 그렇지 않으면 일하는 사람과 같이 어울려서 소
리를 한다.
아시논을 맨지 10일에서 보름 정도 지나 손으로 논을 훔치는 이듬논은 10
일 정도 걸렸다. 보통 5골씩 매는데, 일하는 방식은 호미로 할 때와 동일하
다. 이때는 잡초를 제거하면서 손으로 땅을 평평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렬로 서서 앞으로 가면서 ‘어두야 저하소리’를 부르고, 거의 다 맨 뒤 쌈을
쌀 때 ‘상사소리’를 부른다. 쌈싸는 소리 상사소리는 이 마을에서 논농사 상
사소리 중 장단이 가장 빠르다. 그 뒤는 피사리로 지심 작업은 마무리된다.
논농사의 경우 호미로 하는 아시논매기가 가장 힘들고, 그 다음이 모심기,
손으로 훔치기 순이다.
충북 진천의 경우 호미로 매는 아시 논매기 때는 자생소리인 에하오소리
를, 두벌 손으로 훔칠 때는 상사소리를 불렀는데 지주(地主)의 논뿐만 아니
라, 보통의 경우에도 소리를 즐겨 불렀다. 그러다 보니 전체 가구 수 대비
논매는 소리 선소리 가창자 비율도 높았다. 대전 들말에서는 부잣집 논에서
모심기, 호미로 매기, 손으로 훔치기 때 각각 상사소리를 불렀다. 전체 조사
마을 중 상사소리의 기능이 가장 다양한데, 농사 여건이 좋고 농토도 넓으
며 전체 가구수 대비 부자의 수가 많은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요
컨대, 자생소리가 있으면 두벌 훔치기 후 쌈 쌀 때, 그렇지 않을 경우 두벌
논 훔칠 때 사용된다는 점에서 호서지역 논매기 상사소리는 영남지역과 노
동 양상 및 수용 조건 등이 상통한다. 구연 빈도에 따른 선소리 가창자 비
율, 마을 경제 조건에 따른 소리 수용 정도가 달라지는 면은 다음 장에서 재
론하기로 한다.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255
Ⅳ.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 및 확장 요인
경북 경산 자인면, 안동 저전동, 예천 통명리, 상주 초산동, 충북 진천 용몽
리에서는 두벌 이후 손으로 훔칠 때, 경남 거창 개화마을과 고성 우산리, 그
리고 대전 들말에서는 논매기 전 과정에서 상사소리를 불렀다. 8개 조사마을
에서 공통적으로 상사소리를 부르는 때는 손으로 훔치며 지심을 제거하는 작
업이다. 이처럼 외래에서 유입된 상사소리가 두벌 훔치기에서 사용되는 것과
관련하여, 서영숙은 충북지역 농업노동요를 논의하면서 논매는 소리의 경우
초벌 호미로 매는 소리는 비교적 고정적이고, 두벌 손 훔치기 소리는 다양한
여러 가지 소리 부른다고 하면서 지역 특징을 찾으려면 초벌 때 호미로 매는
소리가 유리하다고 하였다.7) 그의 논의를 통해 외래소리가 두벌 손 훔치기
에 사용되는 것이 비단 상사소리만 해당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 소리가 두벌논 이후에 불리는 이유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마을에 따른 상사소리의 수용 및 확장 정도, 자생소리
의 관계 등이 상이하므로, 위 공통점을 일률적으로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외래소리가 수용됨에 있어 기존에 불리고 있는 소리가 없으면 관계가 없겠으
나, 그렇지 않을 경우 기능요의 특성상 먼저 자리 잡고 있는 소리와의 관계
설정이 불가피하다. 마을별 자생소리 상황을 살펴보면, 경남 거창 개화마을
과 고성 우산리, 그리고 경북 경산 자인면8)에는 자생소리가 한 편도 없다.
경북 안동 저전동과 예천 통명리, 대전 들말에서는 손으로 훔칠 때, 충북 진
천 용몽리에서는 호미로 맬 때 하는 자생소리가 있다. 소리가 가장 풍성한
곳은 경북 상주 초산동으로, 호미 및 손으로 할 때 모두 자생소리가 있다.
모든 조사 마을에서 두벌 이후 훔치기 때 상사소리가 사용되는 상황에서 자
7) 서영숙, 「충청북도 농업노동요의 전승양상 분석」, 한국민요학 제20집, 한국민요학회, 2007, 157~
158쪽.
8) 경산 자인에서 일 마치는 신호로 사용하는 ‘우야소리’는 상사소리 수용 후 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256 韓國民謠學 第46輯
생소리의 유무(有無)를 중심으로 각 마을에서 상사소리를 수용함에 있어 중
요하게 작용한 요소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논매기 방식
지심이 많이 자란 경우 경남 거창 개화마을에서는 두벌논 때, 경북 경산
자인면의 경우 아시논 때 각각 호미를 사용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경남 거
창 개화마을과 고성 우산리, 경북 경산 자인에서는 세벌 모두 손으로만 논을
훔쳤다.9) 소리의 경우 경남 거창 개화마을과 고성 우산리에서는 논매기 전
체 과정에서, 경북 경산 자인은 세벌 훔치기 때만 상사소리를 불렀다.10) 이
세 마을은 노동 방식이 동일하고 자생소리가 없다는 점에서 상사소리의 수용
요인을 검토하는데 유리한 조건이다.
위 세 마을 중 논매는 소리가 가장 적은 곳은 경북 경산 자인면이다. 자생
소리가 한 편도 없는 상황에서 8곳 모두에서 나타나는 기능이 경산 자인에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곳이 상사소리 수용의 원초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소리를 하지 않는 초벌과 두벌 훔치기 때 논의 짧은
쪽으로 이동하는데, 줄을 맞추어 논을 훔치며 나아가다가 한쪽 끝에 도착하
면 다시 일렬로 정렬하여 반대편으로 나아가는 식으로 일을 한다. 노동 강도
가 가장 약한 세벌 훔치기 때는 논의 긴 쪽으로 일렬로 서서 가면서 일을
하고, 선소리꾼이 소리를 매기면 일하는 사람들은 후렴을 받다가 다섯 번째
마다 한 번씩 허리 펴면서 더 크게 소리치는 식으로 한다.11) 논의 짧은 쪽으
9) 경북 경산 자인의 논매기 방식 및 그에 따른 소리가 경남 두 곳과 비슷한 것은 지리적 인접성과
관련 있다.
10) 기존 논의에서도 경남지역 논매는 소리의 미발달에 대해 지적한 적이 있다.
강등학, 「모심는 소리와 논매는 소리의 전국적 판도 및 농요의 권역에 관한 연구」, 한국민속학
제38권, 한국민속학회, 2003, 53쪽.
권오경, 「영남민요의 전승과 특질」, 우리말글 25, 우리말글학회, 2002, 14쪽.
류종목, 「경남민요의 요사적 특성」, 한국민요대전 경상남도민요 해설집, 삼보문화사, 1994, 29쪽.
11)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31호 자인 계정 들소리 실황 DVD.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257
로 일하는 상황은 논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가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비교적 짧고, 해야 할 일도 많다. 짧은 쪽보다 논의 긴 쪽으로 일할 때의 구
연 조건이 더 유리함을 알 수 있다.
논의 긴 쪽으로 훔치는 상황에서 상사소리를 부르는 것은 경북 다른 마을
에서도 확인된다. 경북 예천 통명리와 상주 초산동에서는 공통적으로 모를
논의 짧은 쪽으로 심고, 호미로 매는 아시논매기 역시 모를 심은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일을 한다. 그 뒤 두벌 손으로 훔치기를 할 때는 논의 긴 쪽으로
가면서 잡초를 제거한다. 초벌과 두벌 때 논매는 방향을 다르게 해야 벼 포
기를 중심으로 사방에 난 잡초를 모두 제거할 수 있다. 경북 예천 통명리,
상주 초산동도 경산 자인면과 마찬가지로, 논의 긴 쪽으로 손으로 훔치는 일
을 할 때 상사소리를 불렀다. 위 세 사례를 통해 논배미의 규모 대비 노동
투입 인원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초벌에 비해 덜 힘든 세벌 논매기 때
모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논의 긴 쪽으로 훔치는 방식이
상사소리 수용의 기본 요건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12)
2. 상사(祥事) 관념
조사 마을 중 호미로 일할 때 하는 소리가 없으면서 손으로 훔칠 때 하는
자생소리가 있는 안동 저전동, 예천 통명리, 대전 들말에서는 공통적으로 두
벌 손 훔치기 중 쌈 쌀 때 상사소리를 수용하였다. 호미와 손으로 일할 때
모두 자생소리 있는 상주 초산동 역시 손으로 쌈 쌀 때 상사소리를 불렀다.
호미로 맬 때 자생소리가 있되 손으로 훔치는 소리가 없는 충북 진천에서는
12) 인접 지역 혹은 개별 소리의 타 지역 영향과 관련한 논의는 권오경과 유명희의 연구를 참조할 만하
다. 권오경은 어느 한 지역의 민요가 다른 곳으로 영향을 미칠 때 기능성, 예술성, 정서성이 중요한
작용을 한다고 했고, 유명희는 홍천지역 내 논매는 소리의 경우 생활권 및 농사 환경 등이 교섭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권오경, 「민요 교섭 양상과 문화적 의미」, 한국민요학 제13집, 한국민요학회, 2003, 16쪽.
유명희, 「홍천 산간지역의 <논매는 소리>교섭 양상」, 역사민속학 제41호, 역사민속학회, 2013,
143~163쪽.
258 韓國民謠學 第46輯
비어있는 자리에 상사소리를 받아들였다. 다섯 마을에서는 두벌 이후 훔치는
소리가 있으면 쌈 싸는 소리로, 그렇지 않을 경우 훔치는 소리로 상사소리를
받아들였다.
위 마을에서 초벌 호미로 일할 때 상사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무
엇일까. 초벌논매기 때 1인당 3골을 맨다는 것에서 보듯, 경북 예천 통명리
와 안동 저전동에서는 이 시기에 소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자생
소리도 없었다. 대전 들말은 상사소리를 하므로 자생소리가 없었다. 경북 상
주 초산동과 충북 진천 용몽리에는 자생소리가 있다. 두벌 훔치기 이후 쌈을
쌀 때 상사소리를 사용하는 것처럼 이때도 같은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그
러나 두 곳에서는 초벌 논매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쌈을 싸지 않았다. 공통적
으로 초벌논 호미로 매는 때는 외래소리가 파고들 수 있는 여지가 부족한
것이다.
두벌 이후 훔치기 상사소리의 구연 상황이 잘 표현된 자료를 살펴보자.
일락서산에 해는 지고/ 올놀놀 상사디야/ 월출동녘 달이 돋네/ 올놀놀 상사디야
/ 들어가세 들어가세/ 올놀놀 상사디야/ 주인댁으로 들어가세/ 올놀놀 상사디야/
막걸리 한 잔씩 논아먹고/ 올놀놀 상사디야/ 놀고가세 놀고가세/ 올놀놀 상사디야/
마구재비로 띠어노세/ 올놀놀 상사디야/ 풍년일세 풍년일세/ 올놀놀 상사디야/ 그
년 수학이 풍년일세/ 올놀놀 상사디야/
(거창일소리보존회, 거창 일소리 팸플릿, 11쪽)
경남 거창 개화마을은 논매기 각 상황에서 상사소리를 가장 많이 부르는
곳 중 하나이다. 위 인용문의 작중 상황은 해질녘 하루 일을 마쳐가는 즈음
이다. 작중 화자는 주인집에 가서 술 한 잔 하며 사람들과 어울릴 생각에 한
껏 고무되어 있다.13) 그런 이유로 현재 상황을 전혀 힘들다고 여기지 않으
13) 김진순은 현재 우리나라 기능 중심의 민요 분류체계로 인해 논매는 소리, 모심는 소리 등의 놀이적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259
며, 올 해도 풍년이 들 것이라고 노래한다. 한 해 농사가 마무리 되되, 힘들지
않는 노동 상황에서 이제 일을 마치면 부잣집에서 뒷풀이를 할 예정이므로,
풍농(豐農)까지 관심이 확장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논매는 소리 중 소리 자체에 대한 평가나 관념이 구체적으로 표
현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상사소리는 다르다. 노동의 수고로움을 잊기 위한
목적이 아닌, 노동의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상사소리를 부르는
마을에서 조사한 상사소리 관념 관련 내용을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옛날 어른들 물어보믄 상사하면은 좋은 일, 상서로운 일, 이런 뜻을 말씀하시더
라구요.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어른들이 말씀시더라구요. 하루 일에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시간이니까. 상사소리가 나오면은 하루 일이 거의 마무리되는 상
태에요. 즐거운 마음으로.
(예천 통명농요 회장 강원희, 2011.8.2. 예천통명농요 전수관)14)
상사데소리라는 것은 ‘오홀롤 상사데야’ 그라쟈나. 상사라는 것은 최고 좋다는
소리거든. 여름에 베가 그러니깨 인저, 한참 유월달 벼가 커 올라오는 것을, 식전에
들에 나가서 이슬이 칵 있는 거 해 뜰 때 보면 그 이상 좋을 수가 없어. 그로고
인저, 해 넘어갈 석양판에 벼를 보면 그것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최고 좋은
때라고 해서, 좋은 소리다 해서 상사데소리다 하는 거지.
(진천 용몽리농요 기능보유자 이정수, 2011.7.16. 진천 용몽리 농요 전수회관)
기능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고 하였다. 상사소리의 사례가 그의 연구에 따른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김진순, 「한국노동요의 기능과 역할」, 한국민요학 제24집, 한국민요학회, 2008, 84쪽.
14) 강원희 회장은 예천 통명농요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상사디야는 상사(祥事), 좋은 일을 뜻할 때
상사가 됩니다. 그래서 상사디야 소리는 일이 논에서 거의 마칠 무렵에 일꾼들이 반달 모양에 형
(形)을 이루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 84-나호 예천 통명농요 DVD.
260 韓國民謠學 第46輯
예천 통명리 강원희는 상사(祥事)는 좋은 일, 상서로운 일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하루 농사 일 마무리되어가는 때 하는 상사소리 역시 즐겁고 좋은
소리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진천 용몽리 이정수는 상사(祥事)라는 것은
최고 좋다는 뜻으로, 아침저녁으로 벼가 잘 자란 상태에서 상사소리를 하면
상사의 의미만큼이나 기분이 좋고, 그런 이유로 상사소리는 좋은 소리라고
하였다.15) 예천 강원희는 하루 농사 일이 마무리되어 가는 상황으로, 진천
이정수는 한 해 농사 마무리되는 것으로 이야기했으나, 두 제보자 모두 상사
소리는 최고 좋은 소리, 풍년을 부르는 소리라고 인식하고 있다.
상사소리 자체만으로 기본적으로 한창 벼가 커가는 상황에서 해야 하는
일도 많고 힘 역시 더 드는 논매기 때는 외래소리가 들어갈 만한 여지가 없
다. 이런 상황에서 가창자들이 상사(祥事) 자체를 상서로운 일, 좋은 일로 인
식하고 있고, 어느 정도 모가 크고, 힘도 덜 드는 논 훔치는 상황은 이 소리
의 의미와 어울린다. 힘든 농사 일을 마친 가창자들의 심히 상태도 무시할
수 없다. 요컨대, 상사(祥事)의 문자적 의미와 논 농사 상황,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결합되면서 상사소리만의 관념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 관념
은 훔치거나 쌈싸는 일에 상사소리가 활용되는데 일조하였다.
3. 구연 빈도
경남 거창 개화마을, 고성 우산리, 경북 경산 자인면을 통해 상사소리 수
용 양상을 비교적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앞서 말한바 있다. 이 세 곳 중
만물 훔치기 때 소리를 하는 경북 경산 자인에서는 부잣집 논에서 일할 때만
노래를 하였다. 모든 논매기 과정에서 소리를 하는 경남 고성 우산리와 거창
개화마을에서는 공통적으로 필요한 경우 수시로 소리를 했다. 이렇게 보면,
15) 이와 관련하여, 진천 용몽리에서는 손으로 뜯는 일을 마칠 때 기분이 좋다는 의미로, ‘이후후후-’
하고 길게 소리치는 ‘골매 치기’를 하였다. 이곳의 골매 치기를 통해 상사소리 구연자들의 당시
심리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261
일하면서 노래를 자주 하는 곳이 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확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경북 경산 자인은 60여 가구 중 논매기 상사소리 선소리 가창자가 3, 4명,
경남 거창 개화마을 50여 가구 중 10명 이상, 고성 우산리 역시 개화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성 우산리와 거창 개화마을 사람들에게 상사소리 한 두
마디 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16) 이 세 마을에서는 공통적으로 20여일
이상 계속되는 모심기 철에 일하는 중간 중간 정자소리를 불렀고, 그런 이유
로 일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정자소리를 부를 줄 알았다. 요컨대, 모든 논매
기 과정에서 일하는 내내 수시로 상사소리를 부르되 선소리 가창자 수도 많
은 경남 거창 개화마을과 고성 우산리, 그리고 부잣집 논의 만물 논매기 때
만 소리를 부르되, 전체 가구 대비 선소리 가창자 비율이 낮은 경산 자인의
사례를 통해 구연 빈도와 소리의 기능 확장이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17)
구연 빈도가 높을수록 상사소리 확장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대전
들말에서도 확인된다. 이 마을은 농사 규모나 여건의 면에서 다른 곳과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현실적 이유로 하나 둘 품앗이로 전환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이곳에서는 1980년대 초반 제초제(마세트)가 등장할 때까지 두레
전통이 이어졌다.18) 이 마을에서 모심기 및 논매기와 그에 따른 소리는 불가
분의 관계였다. 그런 이유로 이곳에서는 처음에 후렴을 반복하는 형태의 쌈
싸기 상사소리를 수용한 뒤 일상적 구연이 거듭되면서 선후창 형태의 논매기
상사소리로 확장되었을 것이다.
16) 한 마을 선소리 가창자의 수는 시기에 따라 가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 농업노동요의 특
성상 수요에 따른 공급이 이루어지므로 그 수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17) 전체 8개 마을 중 농사 여건이 좋고, 농토도 넓은 곳은 대전 들말과 상주 초산동이다. 상주 초산동
은 전체 70여 가구 중 선소리 가능자가 3, 4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온손을 모을 때만
소리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마을에서 소리 가지 수 많은 것은 전체 가구 수 대비 지주의
수가 많은 관계로 다른 마을에서 수시로 하는 것만큼이나 자주 소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 대전 들말의 두레 전통이 강한 이유는 이 마을 모심기 및 논매기 때 한 마지기 당 투입 인원이
각각 1.5명, 0.8명밖에 되지 않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농사가 많다 보니 두레를 통하지 않고서는
농사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262 韓國民謠學 第46輯
충북 진천 용몽리, 대전 들말, 경남 거창 개화마을, 고성 우산리에서는 논
맬 때 사람의 많고 적음, 음식의 준비 여부와 관계없이 소리를 했고, 경북
안동 저전동, 예천 통명리, 경산 자인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부잣집 논에서만
했다. 그런데 소리를 자주 한 곳은 호미로 맬 때 하는 소리가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은 호미로 일할 때 하는 소리가 없다.19) 구연 빈도는 상사소리 수용
뿐만 아니라, 소리를 부르는 것 자체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영남지역 논매기 상사소리 수용 단계를 재구하면, 처음에는 자생
소리가 없는 상황에서 손으로 훔치면서 크게 힘들지 않고 논의 긴 쪽으로
일하는 경우(경산 자인)와 손으로 훔치면서 크게 힘들지 않은데 자생소리 있
기 때문에 쌈싸는 소리로 수용된 경우(안동 저전동, 예천 통명리, 상주 초산
동), 그리고 자생소리가 없어 훔치는 소리로 수용된 경우(진천 용몽리)이다.
이후 손으로 훔치면서도 더 꼼꼼하고 품이 많이 드는 일(고성 우산리, 거창
가지리)과 호미로 매는 일(대전 들말)로 기능이 확장되었다. 이렇게 상사소
리가 각 마을에 전승되는데 노동 인력 및 논매기 방식, 구연 횟수, 그리고
상사(祥事) 관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Ⅴ. 맺음말
본 논문에서는 논매기 상사소리가 영남지역 여러 마을에서 수용, 전승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 요인을 현장조사를 통해 살펴보았다. 8개 조사마을 중
경남 거창 개화마을과 고성 우산리, 경북 경산 자인면은 노동 방식이 동일하
고 자생소리 없다는 점에서 상사소리의 수용 요인을 검토하는데 유리한 조건
이다. 논배미의 규모 대비 노동 투입 인원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초벌에
19) 상주 초산동은 부잣집 논맬 때만 소리를 했는데도 호미와 손으로 일할 때 자생소리를 구연하였다.
그 이유는 각주 17번에서 제시하였다.
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263
비해 덜 힘든 세벌 논매기 때 모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논
의 긴 쪽으로 훔치는 방식이 상사소리 수용의 기본 요건이 되었다.
8개 조사마을에서는 공통적으로 두벌 이후 손으로 훔치는 일에서 상사소리
를 구연하였다. 한창 벼가 커가는 상황에서 해야 하는 일도 많고 힘 역시 더
드는 논매기 때는 외래소리가 들어갈 만한 여지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창
자들이 상사(祥事) 자체를 상서로운 일, 좋은 일로 인식하고 있고, 어느 정도
모가 크고, 힘도 덜 드는 논 훔치는 상황은 이 소리의 문자적 의미와 결합하여
상사소리의 특유의 관념이 형성되었다. 상사소리는 좋은 소리, 풍년을 부르는
소리라는 관념은 이 소리가 훔치거나 쌈싸는 일에 활용되는데 일조하였다.
모든 논매기 과정에서 일하는 내내 수시로 상사소리를 부르되 선소리 가
창자 수도 많은 경남 거창 개화마을과 고성 우산리, 그리고 부잣집 논의 만
물 논매기 때만 소리를 부르되, 전체 가구 대비 선소리 가창자 비율이 낮은
경산 자인의 사례를 통해 구연 빈도와 소리의 기능 확장이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전 들말에서 두벌 훔치기에서 시작된 상사소리가 초벌 매기
로 확장된 것 역시 구연 빈도와 관련이 있었다.
영남지역 논매기 상사소리는 자생소리가 없는 상황에서 손으로 훔치면서
크게 힘들지 않고 논의 긴 쪽으로 일하는 경우와 손으로 훔치면서 크게 힘들
지 않은데 자생소리 있기 때문에 쌈싸는 소리로 수용된 경우, 그리고 자생소
리가 없어 훔치는 소리로 수용된 경우로 수용되었다. 이후 손으로 훔치면서
도 더 꼼꼼하고 품이 많이 드는 일과 호미로 매는 일로 기능이 확장되었다.
이렇게 상사소리가 각 마을에 전승되는데 노동 인력 및 논매기 방식, 구연
횟수, 그리고 상사(祥事) 관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앞으로 본고의 논의 결과를 바탕으로 상사소리 흐름에 있어 중요한 지역
에 대한 현장조사를 실시하여 본 논문의 결과를 검증하는 동시에 및 새로운
요인은 없었는지 검토할 것이다. 아울러, 경기도에서 출발하여 충남 부여와
논산을 경유, 전북으로 진출한 방아소리의 수용 요인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
여 우리나라 논매는 소리의 수용 요인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고자 한다.
264 韓國民謠學 第46輯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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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역 무형문화재 지정 논매기 상사소리의 수용에 관한 현장론적 연구 265
A Field Study on the adopt of the Sangsa-sori
which are designated as intangible cultural asset
in Youngnam area
20)
Choi, Ja-un*
The aim of this paper is to investigate Acceptance factor of the weeding
a rice paddy Sangsa-sori in Youngnam area. There are no native song in
Gyungnam Gaehwa village, Wusan-li and Gyungbuk Singwan-li. A way of
weeding a rice paddy are equal too. These villages had a decided advantage
to examine acceptance factor of the Sangsa-sori. To weed a rice paddy the
long side of the rice paddy come into Fundamental requirement of the accept.
The third weeding a rice paddy less harder than the first weeding a rice paddy.
All investigation villagers song a Sangsa-sori in the Second and third
weeding a rice paddy. Because the rice is doing well and have much to do
villagers leave no room for song. Singers regard a Sangsa(祥事) as an
auspicious event. Sangsa(祥事) abstraction combined with Rice grows and the
second weeding a rice paddy. Since then arrived at a abstraction of the
Sangsa-sori. Sangsa(祥事) abstraction contribute to used on working. During
a fundamental requirement villagers song Sangsa-sori often. Singing frequency
concern with function expansion.
Because there is no native song, When finish weeding a rice paddy accepted
* Semyung Univ. the Faculty of Liberal Arts
266 韓國民謠學 第46輯
in the second weeding a rice paddy. A Labor manpower, A way of weeding
a rice paddy, Number of singing and Sangsa(祥事) abstraction have an
influenced singing in villages.
key-words : Weeding a rice paddy, Sangsa-sori, A way of weeding a rice paddy,
Sangsa(祥事) abstraction, Frequency of singing, Precentor,
Adopt factor
<이 논문은 3월 18일 투고되어
3월 28일~4월 17일까지 심사기간을 거쳐
4월 20일 게재 확정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