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바보들
건강식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계란을 살 때 꼭 유정란을 (有精卵)을 삽니다.계란에는 유정란과 무정란이 있습니다. 암탉이 혼자 난 계란이 무정란이고 암탉과 수탉이 함께 만들어 낸 계란이 유정란입니다. 계란을 부화하거나 암탉이 품었다고 다 병아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유정란만 부화되어 병아리가 되는것입니다. 무정란은 품고 있으면 오히려 썩어 버립니다 겉보기에는 무정란이 유정란보다 더 클 수가 있지만 크기가 병아리의 부화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람입니다.
사람도 겉보기에는 다 똑같이 멀쩡한 사람입니다. 도리어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보다 더 똑똑하고 더 교양있고 더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정란만이 병아리를 부화할 수 있듯이 마음속에 하느님을 받아 들인 사람만이 새 생명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분을 모시면 그분의 생명이 당신 안에서 잉태됩니다.믿는다는 것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터무니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특히 인가의 두뇌로 생명을 조작할 수 있고 연장할 수 있게 된 이 첨단 과학의 시대에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바보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그래서 믿음을 가진 이들을 우리는 `거룩한 바보들`이라고도 말합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이 거룩한 바보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역사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세상 사람들은 지성과 외모, 확신게 찬 태도 등을 존중하지만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계획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 오직 그분께 의지할 줄 밖에에 모르는 단순한 사람들을 종종 사용하십니다.그런 까닭에 사람의 약삭빠른 계산법이 당장은 통하는 것 같아도 지나고 나면 부질없다는 것이 드러납니다.믿음은` 역전(逆轉)의 법칙`을 당신의 현실로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나는 알고 있다네,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욥기19,25)
이는 욥이 고통 속에서 외쳤던 말입니다. 이것이 욥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재산 , 자녀,가축들 마침내는 자신의 몸뚱아리에까지 찾아온 `날벼락`을 보고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해 준답시고 가뜩이나 억울한 속만 더 뒤집어놓습니다.``그것은 필경 죗값임에 틀림이 없으니 하느님께 이실직고하고 용서를빌게나!하고 욥을 죄인 취급했던 것입니다.욥은 아무리 뒤져 봐도 집히는 잘못이 없었습니다.그는 세상 사람들이 죄다 자신을 죄인으로 손가락질해도 하느님만은 자신의 무죄함을 알고 계시며 언제가는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욥은 저렇게 소리쳤던 것입니다.욥의 신앙고백에는 욥의 몸부림이 실려 있습니다. 조금만더 머물러서 되새김해 보면, 이 짧은 신앙고백에 그의 현재와 미래가 , 그의 삶 전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크레도 인 데움``(라:credo in Deum)=`나는 믿나이다,하느님을``
사도신경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전능하신 아버지 , 하늘과 땅의 창조주``(라: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oeli et terae)입니다. 우리말에서는 이것이 몸뚱그려져서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전능하신 `이라는 수식어가 ``천주(하느님)를 꾸미고 있는데,이는 하느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믿는다는 의미로 오해 할 수 있습니다.그런데``나는 믿나이다. 하느님 곧 전능하신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이라고 번역해야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즉 내가 믿는분이 하니님이신데 그분은 이러저러한 분이라고그분의 속성을 부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이렇게 원문대로 번역을 해 보면 , 문장 구조가 욥기의 신앙고백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나는 믿나이다,~을 ``뿐만 아니라 고백 하는 내용도 거의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런데 우리는 미사나 묵주기도 때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우리의 사람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고 건성으로 중얼거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욥의 신앙고백에 욥의 삶의 무게가 실렸듯이 , ``나는 믿나이다.하느님을``이라고 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에도 우리의 삶의 무게가 실려야합니다.즉 내 삶의 온갖 물음, 회의 , 실패, 절망, 등에 대한 대답이요 대안이요 보루로서 하느님이 고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럴수 있을까?이것이 이번 장의 중심 문제입니다.
사도 신경에 다 있다.
사도신경은 본래 비전이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생각해 보기 전에 사도신경(使徒信經)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사도신경이라는 말은 `사도로부터 내려온 신앙고백문`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신앙고백문`은 비밀리에 전파되었다고 합니다.곧 비전 (秘傳)이었습니다.초세기 수백 년간 신앙고백문이 아무에게나 누설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종이에 `기록하는것`을 엄하게 금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생명과도 같은 신앙고백문이 아무렇게나 나돌아서 값싼 취급을 받거나 곡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그래서 신앙공동체에 속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들에게만 구전(口傳)으로 전수 하였다.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소중하고 귀한 말씀이 남용되거나 왜곡되지 않도록 미연에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문자 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증거 곧 그리스도인 각자와 그 공동체의` 삶`으로써 전파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자 했습니다.그러니까 믿음은 어떤 지식의 전달이나 설명을 통해서 전수되는 것이 아니고,더불어 살면서 모범으로 보여주고 동반해 주고 인도해 주는 것으로 전수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셋째, 신앙고백의 한 단어를 `마음에 새기고`그와 더불어 살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그들은 신앙고백문을 골수에 박히도록 외어야 했습니다.그들은 이 고백문을 늘 반복해서 소리 내어 말함으로써 자신들이 과연 믿음 안에서 누구에게 속한 존재들인지 상기해야 했습니다.이것은 신앙을 온전히 내면화하고 체화(體化)시켜서 저절로 행동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최상의 길이었습니다.
첫댓글 나는 믿나이다..하느님의 말씀을 ~~ 사도요한님, 수고 많으십니다. 항상 함께 해주셔요.
이렇게 자매님이 보살펴 주시니 힘이 막 솟아 오릅니다. 자매님 법동성당 사랑방에는 성서쓰기 하고있구요 로마서는 다썻고 창세기 쓰고 있는데 힘이 되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