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 한홍구 (돌베개, 2016)
5부 민주화 이후의 사법부, 과거는 청산되었는가?(1988~1997)
1 ‘공안판사제’를 꿈꾼 안기부
- 1989년 동구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운동권 진영에는 급진적 사회변혁 대신 체제 내의 개혁을 추구하는 움직임. 시위 조직 사건으로 실형을 살았거나 위장취업을 해서 노동현장에 갔던 사람들 중 뒤늦게 고시를 통과하는 사례가 나옴.
- 서울대 총학 출신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산 이정우가 1990년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이어 고시 3과에 모두 합격해 화제가 되었고, 같은 해 사법시험에서는 [깃발] 사건으로 실형을 산 이흥구가 처음으로 합격. 시위 관련 유기정학을 받은 ‘위장취업자’ 원희룡은 1992년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하기도 했다. 운동권 출신 사시 합격자 수는 1993년 20명이었고, 1996년에는 100명 선을 넘어 더는 화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 이홍구는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1993년 3월에 서울지법 남부지원 판사로 임명. 2년 후 안기부 보고서에서, 문제 성향 판사의 좌익사범 관용조치가 빈발하고 있다면서, 운동권 출신 예비 법조인의 법조계 진출 시 관용조치 증가가 명약관화하기 때문에, 법원과 협조하여 문제 성향 판사의 형사부 보직 배제를 유도해나감이 바람직 운운.
- 안기부의 신원조사 대폭 강화되고, 1997년 서울고법 판결(시국사건 전과가 있는 연수원 수료자중 검사직 지망생을 임용에서 떨어뜨림을 확정) 이후 대법원은 공공연하게 학생운동 전력자들의 판사 임용을 거부. 이후 학생운동으로 형을 받은 사람들이 연수원 성적과 상관없이 판검사 임용에서 탈락. 그러나 형을 산 적이 없는 운동권 출신까지 걸러낼 방법은 없었고, 1980년대의 시대정신을 간직한 사람은 걸러내기에는 너무 많았다.
- 1988년 소장 판사들의 사법부 독립 요구로 세칭 2차 사법파동이 일어난 이후, 정치권력이 사법부의 인사나 판결에 개입하는 데는 상당한 제약이 생김. [한겨레]도 1992년에 이미 이일규 대법원장 이래 재판과 관련한 압력은 없어졌다라고 단언.
- 그럼에도 정치권력이나 안기부는 사법부 판결에 영향을 미치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지 않음. 안기부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20~30대 판사가 70%가 되고 영장실질심사 등 피의자의 인권 보호하는 장치가 상당 수준에서 도입된 상태에서, 북한은 물론 일부 좌익세력들의 조직, 투쟁전략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반 형사부에 사건을 맡겼다가는 체제도전 세력들에게 수시 불구속, 무죄선고 등 관대한 처분을 내리는 경우가 속출할 것을 우려. 그 대안으로 법원에 민사, 형사, 가사부와 별도 공안부 신설할 것을 제안. 국가관이 투철하고 전문지식을 보유한 판사들로 하여금 공안사건을 전담케 하겠다는 이야기.
- 안기부는 이렇게 하면 배당 규칙을 둘러싼 시비나 잡음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그러나 안기부의 바람은 그해(1997년)말 국민들이 정권교체를 선택함으로써 실현될 수 없었다.
2 법관들에게도 이념교육이 필요하다?
-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열린 제6차 8.15 통일대축전 행사를 둘러싸고 벌어진 한총련 사태는 여러 가지 신기록. 5공 최대의 공안사건인 건국대 사건의 연행자수 1200명의 다섯 배에 가까운 5800여 명의 연행자를 내고 진압. 범청학련의 815행사는 6년째 계속되던 연례행사였는데 유독 1996년에는 공식행사가 끝난 뒤에도 경찰이 봉쇄망을 풀지 않았다. 학생들의 해산을 용납하지 않고 계속 몰아붙인 것이다.
- 예상대로 법원은 한총련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함. 1996년 8월 한총련 사태에 관한 한 법원은 5공 시절의 사법부만큼이나 권력에 협조적이었지만, 안기부는 여전히 사법부를 못마땅해했다. 안기부는 민주화 이후 과거와 같이 판결에 개입할 수 없게 된 데다 학생운동 출신 법관까지 나오자 매우 불안해졌다. 1993년 12월 안기부법 개정으로 국보법 7조(고무, 찬양)와 10조(불고지)에 대한 안기부의 수사권이 폐지. 공안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초보적 변화였지만 안기부의 권한을 최초로 축소시킨 사건.
- 한총련에 대한 정부당국의 강성기류는 해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음. 1997년 한총련 제5기 출범식 폭력시위와 관련 구속된 학생들의 숫자는 195명. 폭력시위를 근절한다는 차원에서 구속자 전원을 기속한다는 방침. 이런 상황에서 서울지검 판사 20여 명은 6월 14일 서울지검 공안 2부장 신건수로부터 ‘학생운동의 변질과 실체’라는 주제의 특강을 들음.
안기부 보고서는 이에 대해 지난 6.14. 서울지법의 서울지검 공안2부장 초청 강연 시 일부언론이 한총련 사건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연에 참석했던 판사들은 좌익세력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고 호평하는 만큼, 법원으로 하여금 북한전문가 또는 공안 분야에 정통한 학자 등을 초정하여 자연스럽게 이념교육을 실시토록 유도하는 한편 차제에 사법연수원의 안보교육도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
- 안기부의 보고서는 법조계 일각이라는 표현으로 우호적 여론만 소개하지만, 이 사건으로 법조계와 언론은 무척 시끄러웠다. 민변뿐 아니라 변협도 법원이 이런 강연을 마련한 것 자체가 형사소송법의 근본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
[한겨레]는 사설과 기자의 논평을 통해 한총련 사건 재판을 앞둔 판사들이 집단으로 재판의 한쪽 당사자가 될 공안부장을 초청해 한총련 특강을 받는 사실을 해괴한 일이라고 강력히 비판. 판사들은 모든 사건에 대해 예단을 갖지 않고 증거를 토대로 판단을 해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을, 법원이 어겼다는 것이다.
3 민주화와 제2차 사법파동
- 1987년 대선에서 승리한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양김의 분열로 간신히 당선. 1988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이 125석으로 제1당을 차지했으나, 김대중의 평민당이 70석. 김영삼의 민주당이 59석, 김종필의 공화당이 35석을 차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국회 출현. 새로운 헌법에 의해 정부와 국회의 개편이 마무리되자 새로운 사법부 구성이 중대한 과제로 제기. 재야는 새로 구성될 사법부에서 이렇다 할 수뇌부 개편이 없다면 그것은 새 정부가 제6공화국이 아니라 5.5공화국 정부임을 입증하는 증거라며, 사법부 개혁을 강력히 촉구.
- 노태우 대통령은 동향인 경북 출신의 김용철 대법원장의 유임을 원함. 전임자에 비해 나름 의미있는 판결들이 없지는 않았음. 그러나 김용철은 전두환이 임명한 제5공화국의 대법원장. 유임시키려고 국회 통과를 위해 야당의 협조를 구한다는 소문이 돌자, 소장 판사들이 행동에 나섬.
- 1988년 6월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들을 중심으로 법관들의 서명운동.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 사법부가 인권의 최후의 보루가 되지 못하고, 국민들은 기본권을 국민들 자신의 희생과 노력으로써 스스로 쟁취해 왔다고 지적. 민주화 열기 와중에서도 사법부가 아무런 자기반성의 몸짓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사법부를 불신하고 심지어는 매도하게 되었다고 평가. 사법부가 새로운 신뢰를 쌓아갈 발판을 마련하는 길은 사법부의 수장 등 대법원의 면모를 일신함에 있다고 주장.
법조계에서는 이 성명서 발표를 쿠데타에 버금가는 혁신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임. 처음 성명서에 서명한 판사는 37명이었지만 금방 430여 명으로 늘어남. 당시 법관 숫자가 1000명이 안 됐고, 부장판사급 이상은 서명에 참가하지 않은 사실을 고려하면 평판사 직급 법관들은 대부분 서명한 것.
- 고위 법관들은 소장 판사들 행동에 격앙했지만, 정작 김용철 대법원장은 서명이 확산되자 모든 책임은 수장인 나에게 있다면서, 서명 사태는 사법 발전을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니 사법부 발전의 계기가 돼야 한다, 라고 기자회견을 갖고 사퇴.
- 노태우 정권은 국회의 의석 분포 상 공화당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김종필의 고등학교 후배인 대법원 판사 정기승을 대법원장 후보로 지명. 나름 표 계산을 한 것이지만, 법조계 안팎에 기름을 붓는 꼴. 서울형사지법원장에서 대법원 판사가 된 정기승은 군사정권과의 협력으로 영달한 대표적 인사로 꼽혔기 때문. 대한변협과 민변에서 동시에 반대성명. 국회에서 148표에 7표가 모자라 임명동의안이 부결. 이제 대법원장은 야당의 적극적 협조를 얻을 수 있는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이일규 전 대법원 판사가 부각. 이일규 체제 출범으로 사법부에 대한 외압이 완전히는 아니라 해도 상당히 사라짐.
4 제 3차 사법파동과 ‘정치판사’ 논란
-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자 사법부 개혁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오름. 4월 29일 서울지법 서부지원 김종훈 판사가 법원 상층부에 개혁을 촉구하는 의견서 제출. 이어 광주지법 방희선 판사, 대구지법 신평 판사 등의 언론기고문이 나오고, 마침내 6월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들이 [사법부 개혁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라는 문건을 발표.
- 이들은 지난날 사법부의 비겁함을 꾸짖는 역사 앞에 참담한 심정으로 속죄한다, 과거사 반성과 청산 없이는 사법부 개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없다,고 고백. 내용은 5년 전의 제2차 사법파동 때에 비해 상당히 격렬했고 사회에도 큰 반향을 불러옴. 진보적인 민변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변협도 사법부 수뇌부와 정치판사의 퇴진을 요구.
5 사법부의 과거청산
-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이행기의 정의를 세우는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 그중 사법부의 과거청산 문제는 예민하고 복잡. 인혁당사건, 수많은 조작간첩사건도 모두 사법부의 판결을 거쳤다는 점에서 사법부는 과거청산에 대한 요구를 비껴갈 수 없었다.
- 2005년 9월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독재 권위주의 시절 사법부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지켜내지 못하고, 인권보장의 보루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과거를 말하며 가슴 깊이 반성한다고 밝힘.
- 과거사문제는 재심 확대를 통한 청산, 부당한 재판에 관여한 법관 청산, 위원회 구성을 통한 방식 등 3가지가 있을 수 있음. 판사 개개인의 재판 독립 해칠 우려와 관련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문제를 지적.
- 2008년 9월 이용훈 대법원장은 과거사에 대해 다시 사죄. 권위주의 시대의 각종 시국 관련 판결문을 분석했고 조만간 발간될 사법부의 역사자료에 포함에 국민에게 보고할 예정이라고 했으나, 과거청산 작업은 가시화되지 않음. 이명박 대통령이 앞장서, 과거와 싸우면 미래가 피해를 본다, 사법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한다, 라는 주장을 펴면서 행정부 차원의 과거 사건 진실규명 작업 무력화.
*민주화 이후 검찰개혁은 이루어졌는가?
- 검찰이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킨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를 실현해야 할 검찰이 정치적 사건의 무리한 기소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범죄 수준의 스캔들로 손가락질을 받는다. 군사독재 시절 권력의 시녀였던 검찰은 민주화 이후에는 시녀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로 등장. 민주화로 군과 안기부가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청와대의 권력은 임기라는 덫에 걸려 힘이 약해진 반면, 검찰은 삼성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통제받지 않는 막강한 권력으로 부상.
- 민주화로 큰 권한을 누리게 된 검찰은 자정기능을 수립하지 못했고, 민주정권은 검찰개혁에도 문민통제에도 모두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