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_1 ‘롤러코스트’ 국가대표 10년
양동근은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최악의 성적뿐 아니라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란 극과 극을 경험하면서 농구월드컵에도 출전했다. 양동근은 자신의 10년간 국가대표 생활을 “롤러코스트”라고 표현했다. 점프볼 2018년 2월호에 ‘대한민국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영원한 캡틴 양동근’ 기사를 게재했다. 인터뷰를 제외하더라도 양동근의 국가대표 10년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는 주요 내용을 그대로 가져왔다.
양동근이 처음으로 성인 국가대표팀 태극마크를 단 건 일본에서 열린 2001년 동아시아경기대회다. 정식 대표팀이라기보다 2군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남자농구 대표팀은 애초에 순수 대학생으로 구성되었다. 실제 대회에는 4명을 교체해 출전했다. 박지현 전 DB 스카우트는 “상무 2명, 프로 1년 차 선수 2명, 대학 선발 8명 등 총 12명이었다”고 기억했다. 대회 결과는 3승 3패로 예선탈락이었지만, 야오밍과 왕즈즈가 출전한 중국을 김주성과 손규완 등의 활약을 앞세워 100-97로 꺾었다.
상무 소속으로 동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했던 손규완 캐롯 코치는 “얼마 전에 (김)주성이를 만나 그 경기 이야기를 했었다. 정확하지 않은데 중국과 경기 초반 18-2인가 크게 앞서다 대등한 경기를 했을 거다”며 “예선 탈락해서 주전들이 출전한 중국을 꺾은 그 경기가 묻혔지만, 그 때 참 재미있었다. 당시 가드는 황성인이 주로 뛰고 박지현이 백업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양동근은 많이 뛰지 못했을 거다”고 했다.
양동근이 1군 성인 대표팀에 처음 뽑힌 건 2005-2006시즌 정규리그 우승과 함께 MVP에 선정된 2006년이다. 월드바스켓볼챌린지대회(WBC)에서 대표팀 데뷔전을 치른 양동근은 도하 아시안게임까지 출전했다. 김민수는 “TV에서 보던 더 크고 더 잘 하는 NBA 선수들과 부딪히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며 대표팀 경력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로 WBC를 꼽았다. 양동근은 첫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WBC에서 너무 강한 상대를 만나 “아무것도 못했던 대회”로 기억한다. 이어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남자농구 역사상 처음으로 5위에 그쳐 메달을 따지 못했다.
남자농구 대표팀은 2007년 일본 도쿠시마에서 열린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3위로 명예회복을 했지만, 2009년 중국 천진에서 열린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역대 최악인 7위까지 맛봤다. 남자농구 대표팀의 추락의 끝을 경험한 양동근은 도약의 중심에 섰다. 유재학 모비스 감독이 대표팀 감독을 맡고, KBL의 적극 지원 속에 미국 전지훈련뿐 아니라 래니 윌킨스 고문까지 영입해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대비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은 양동근이 주요 국제대회에서 처음으로 결승에 진출한 대회이기도 하다. 결승에서 중국에게 71-77로 아쉽게 패하며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KGC인삼공사를 우승으로 이끌고 2012년 런던올림픽 최종 예선 대표팀 감독을 맡은 이상범 감독은 대표팀을 소집하기도 전에 양동근을 주장으로 임명했다. 이상범 감독은 “에이스인데다 책임감이 강하다. 못할 때나 잘할 때나 표정이 똑같아서 선수들을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양동근을 주장으로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양동근은 이때부터 대표팀 붙박이 주장을 맡았다. 2013년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유재학 감독을 대표팀에서 다시 만나 16년 만의 농구월드컵 진출에 기여한 양동근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이란을 꺾고 금메달의 영광까지 안았다.
양동근의 국가대표 마지막 대회는 2015년 중국 장사에서 열린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다. 대표팀은 중국과 예선에서 크게 앞서다 경기 막판 역전패 했다. 잡을 수 있는 경기를 놓친 대표팀은 이후 일정이 꼬였고, 중국은 역전승 이후 승승장구했다. 대표팀은 결국 6위에 머물렀다. 최연길 해설위원은 “우리가 중국을 꺾었다면 중국이 우승하지 못했을 거다. 우리나라 성적도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며 “양동근 선수는 그럼에도 아시아에서 최고 가드라는 걸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2019 FIBA 농구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이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열렸다. 지난해 11월 두 경기를 치르기 위해 모인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주장 양희종은 2006년 WBC부터 오랜 시간 양동근과 대표팀에서 활약했다. 양희종은 “동근이 형은 주장으로서 선수들을 잘 이끌고 맏형으로서 솔선수범한다. 보여지는 이미지 그대로 장난도 많이 치고, 할 때는 정확하게 하는 선수”라며 “주위에서 ‘영원한 캡틴 양동근’ 그러는데 부족한 면이 없다”고 양동근을 치켜세웠다.
대표팀 주장 양동근의 뒤에서 힘을 실어줬던 김주성 DB 코치는 “동근이는 지금도, 옛날에도 열심히 하는 선수였다. 몸이 좋든 안 좋든 꾸준하게 하는 선수”라며 “그런 모습을 좋아하고, 그런 친구가 들어와서 대표팀에서 잘해줘 보기 좋았다”고 양동근을 아끼는 마음을 내보였다.
선후배 동료 선수들만 인정하는 게 아니다. 감독과 코치로서 대표팀 양동근을 지켜본 이상범 감독은 “동근이는 나뿐 아니라 모든 감독들이 좋아한다. 왜냐하면 솔선수범해서 팀을 끌고 가서 그건 감독으로서 고마운 거다”고 양동근을 인정했다. 2011년과 2015년 대표팀 코치로 양동근과 인연이 있는 김상식 KGC인삼공사 감독은 “고참이나 어린 선수나 다들 훈련을 열심히 한다. 그 중에 동근이는 팀을 아우르는 역할을 많이 했다. 감독과 코치가 언급한 것 외에도 선수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다”며 “시대가 변하면서 팀 분위기를 강하게 잡아도 안 되고, 너무 풀어줘도 안 되는데 그런 강약 조절을 잘 했다”고 양동근과 기억을 되새겼다.
대표팀에서 끝없는 추락을 맛봤던 양동근은 코트 안팎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고, 하나로 단단하게 뭉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그 토대 속에 다시 최고의 자리까지 섰다.
양동근은 2006년 월드바스켓볼챌린지대회부터 2015년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까지 10년 동안 국가대표팀에서 많은 선수들과 호흡을 맞췄다. 최고의 기량이 아닌, 자신과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선수 베스트 5를 뽑아달라고 부탁했다. 양동근은 고민하며 선수들 이름을 한 명씩 언급했다.
“가드는 없죠. 제가 가드라서 제가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랑 같이 뛴 가드가 없어서요. 대표팀 생활에선 김승현 선수가 무조건 1번(포인트가드)이에요. 2번(슈팅가드)은 저랑 가장 오래 뛴 조성민 선수이고. 3번(스몰포워드)은 문태종 선수. 임팩트가 너무 강했어요. 3번은 너무 바뀌었는데 김성철 형, 이규섭 형, 양희종, 허일영 등 그 때마다 슛 감각에 따라 들어왔다가 나갔어요. 그 중에 제가 뛸 때 베스트를 뽑는다면 태종이 형이에요.
그리고 4번(파워포워드)은 김주성 선수. 5번(센터)은 서장훈 선수. 장훈이 형은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때 1년 같이 뛰었는데 누가 봐도 우리나라 최고의 5번이에요. 그걸 또 받쳐줄 수 있는 선수가 주성이 형이고요. 주성이 형은 또 제가 대학 선발일 때부터 계속 봐왔어요. 만약 장훈이 형이 아니라면 오세근이 4번, 주성이 형이 5번이에요. 그런데 장훈이 형을 뺄 수 없어요.”
첫댓글 대표팀은 바닥도 쳐보고 금메달도 땃으니 ㅋ 대단하긴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