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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립니다. 장마철이라지만 밭작물이 타 들어갈 정도로 꽤 여러날 가물어서 빗줄기 한번 구경하기가 떠나간 님 궁둥짝 보기만큼 힘들다 싶었는데 때가 되니 하루가 멀다하게 비가 내립니다. 하늘을 보니 오늘은 제대로 비가 한번 올 모양입니다. 못 믿을 기상 예보를 보는 것보다는 자연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이 더 낫지 싶네요.
큰비가 올 것 같아 이러 저런 비 대비를 하려고 새벽에 일어나 나가보려 하니 방충망 바깥 면에 하루살이 같은 작은 벌레가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불빛과 따뜻한 곳을 찾아서겠지요. 큰비가 오게되면 동물들이 먼저 압니다. 새나 벌들은 일체 자취를 감추고 자주 울어대는 고라니 소리도 끊겨서 산골은 적막강산으로 변하지요.
바람이 풀잎을 흔들고 비가 시작되면 정적 속에 물의 연주소리만 들립니다. 고요 속에 산골집 지붕을 두드리며 처마를 가르는 낙숫물 소리며 개울물 소리, 바람 소리를 듣노라면 자연 교향악이 따로 없지요. 더러는 독경 소리로 들리기도 하고, 더러는 굵은 붓으로 휘젓듯 가슴을 긁어댈 때도 있고 마음 먹기 따라서 다르게 느껴지고 들려집니다.
큰비가 오면 연례행사처럼 개울 따라 이어진 산골 외길이 끊겨 한동안 송이골 작은 동네는 고립이 되지요. 산에서 계곡을 따라 이어져 내려오는 식수 파이프도 엉망이 되어 장마 때나 겨울 폭설 때는 미리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예비로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오래된 전기선 때문에 전화, 전기나 인터넷이 끊기기도 해서 양초나 건전지 준비도 해야 하고요.
며칠 간 고립이 되면 이것저것 불편하기 마련이지만 해마다 겪다보니 마음의 준비를 하게되어 그러려니 합니다. 몸에 찌꺼기가 많이 생기면 일부러 단식을 하듯, 늘 바쁜 농사일이며 효소일로부터도 자연스레 해방되어 아랫집도 못 내려가는 나만의 시간을 갖게 되면 방에 군불이나 지펴놓고 미루어두었던 책도 읽고 방바닥에서 뒹굴거나 글도 좀 끄적거리기도 하고 집안정리도 좀 하면서 몸도 마음도 쉬고 제 자신도 돌아보고 비울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기도 하지요.
정형화되지 않고 늘 다른 모습으로 어울려 변하는 자연의 모습을 보노라면, 마당에 있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낳고 자라고 잎 지고 열매 맺는 과정을 보노라면 생자필멸 우주 대자연의 섭리와 숨결이 느껴집니다. 온갖 법칙과 규제를 정하고 갖가지 경전이며 책들은 끊임없이 나오지만 세상의 역사는 점령과 투쟁을 멈출 날이 없고 아기울음 소리와 상여소리는 쉬임없이 이어집니다.
광우병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더니 금강산 관광 길에 총격으로 죽은 여자 분의 소식이 남북 간의 큰 문제가 되고 있네요. 생각해 보면 참 세상에 죽는 방법도 여러 가지지요. 밤길에 맨홀에 빠지기도 하고 풍선을 불다가 죽기도 하고 길 가다가 머리에 벽돌이 떨어지기도 하고, 누구는 사고난 비행기를 일부러 기다렸다 타기도 하고 누구는 요행히 일이 생겨 취소해서 살아나기도 하고... 발냄새 때문에 룸메이트를 살해했다는 외국 기사가 인터넷에 실렸던데, 무더운 여름, 발냄새에도 신경 쓰셔야 되겠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러 살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깝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듯 싶습니다. 남에게 폐를 안 끼치고 부끄럼 없이 살다가 가고 싶은데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겠지요. 말과 행동을 같이 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어서 행동을 책임 있게 하려면 말을 신중하게 뱉어야 할 텐데 말부터 앞서는 경우가 있어서 속으로 아차 할 때가 더러 있지요.
종일 빗소리를 들으며 산골집에 있자니 문득 어릴 때 보았던 펄벅의 "대지" 영화가 생각납니다. 심한 가뭄에 땅은 갈라지고 먹을 식량은 없는데 그나마 남은 농작물은 엄청난 메뚜기 떼가 날아와 온 동네를 쓸어가 버리는... 가난한 소작농 왕릉이 대지주가 되기까지의 일대기를 그리면서 땅에 의지해 사는 중국인들의 삶의 다양한 모습과 사회상을 그린 이 영화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박경리의 "토지"를 연상하게 하지요. 학창 시절 제 마음에 물을 준 좋은 책과 영화였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책도 다시 읽고 영화도 보고 싶어지네요.
텃밭에 효소재료로 쓰려고 수세미 덕을 올려두었는데 수세미는 안 보이고 사이사이에 심은 제비콩잎만 무성해 졌습니다. 잘 살펴보면 군데군데 수세미가 올라가고 있기는 한데 수세미 자라라고 다 큰 제비콩을 잘라낼 수는 없고 그냥 두려고요. 쇠비름 이파리가 빗 속에서 파릇합니다.
- 비가 온다 오누나 장맛비가 오는구나
잿마루 억새풀밭 바람 따라 흔들린다
영월 송이골에서 보리피리 올림
출처: 블로그 송이골 편지(http://blog.daum.net/intonature/5762025) 글쓴이: 보리피리
첫댓글 농사를 짓다보니..비가 와도 비를 맞으며 해야 할 일들이 있네요. 때로는 스스로 심통을 부려서...하루 일을 쉽니다. 보리피리님처럼 낙수 소리를 들으며 명상에도 잠기고..어수선한 집안 정리도 하고..효소도 뒤집어주고..때론 평소보다 더 바쁜 하루를 보내기도 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