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리(高句麗) :
삼국지(三國志)권30, 위서(魏書)권100, 북사(北史)권94, 남사(南史)권79, 김부식 삼국사기
- 구리(句麗) : 삼국지(三國志)권30, 남사(南史)권79, 김부식 삼국사기잡지(雜志)6
- 하구리(下句麗) : 삼국지(三國志)30
- 고구리(高句麗) : 후한서(後漢書)권85, 송서(宋書)권97, 양서(梁書)권54
- 구리(句驪) : 후한서(後漢書)85, 양서(梁書)권54, 한서(漢書)권26
- 하구리(下句驪) : 한서(漢書)권99, 양서(梁書)권54
- 고리(高麗) : 위서, 북사, 구당서, 당서(魏書, 北史, 舊唐書, 唐書)
- 고리(高驪) : 송서(宋書)
- 고리( 離) : 삼국지(三國志)
- 고리( 離) : 양서(梁書)
- 구여(句餘) : 사기(史記)
- 색리(索離) : 북사(北史)
- 맥이(貊耳) : 후한서(後漢書)
- 구루(溝 ) : 삼국지(三國志)
- 요동국(遼東國) : 진서지리지(晉書地理志)
- 평주목(平州牧) : 양서(梁書)권54
왜 같은 대상을 두고 이와 같이 다른 표현으로 나타 나는 것일까?
수백개에 이르는 비슷한 북방의 부족들을 표기하는 과정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구려와 부여는 같은 말이다.
삼국 사기는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37년으로 기록하고
668년에 唐에 멸망 당한다고 전한다.
약 7백년간 존속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구당서와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9백여년간 존속 했다고도 쓴다.
고구려가 망했다는 싯점은 분명 한 것 같고,
그렇다면 고구려의 건국 연대가 잘못 됐다는 얘기가 아닌가?
고구려의 건국은 분명치 않다.
주몽의 탄생은 광개토비에 나타난다.
광개토비에는 그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기록되어 있지만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기록에 없다.
그런데 고주몽의 성씨는 解씨와 高씨오 양분 된다.
호태왕비에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하백의 따님이라고 했다.
하백은 중국 측 기록에 많이 등장 하는데 물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최근 까지는 우리 역사 학계는 호태왕비의 하백을 중국 측 신화에 나오는 하백과 동일시 했으나
최근 연구 결과 하백이란 밝음을 뜻하며 "해" 즉 태양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몽은 외가의 성을 따랐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주몽이 해씨가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더불어 주몽은 유화부인의 명에 따라 전국을 주유 했다고 호태왕비는 기록하고 있다.
주몽은 정말 고구리의 건국 신화와 같이 객지를 떠돌다가 소서노를 만나서 나라를 세웠을까?
창업이 그와 같이 쉽다면 소설이다.
解씨는 북부여 단군의 성씨이다.
그러나 삼국 사기는주몽은 해모수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고구리의 건국을 BCE37년으로 고정 시키면 해모수와 주몽의 관계는 조작이다.
그러나 구당서가 말하는 고구리의 존속 기간이 9백여년이라는 말이 맞는 다면
주몽의 아버지는 해모수가 맞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연대가 150년~180년 정도 잘려 나간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 초기 왕조표를 보자.
1대 동명성왕(東明聖王) (재위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고구려 건국자 이름 주몽(朱蒙)
2대 유리왕(琉璃王) (재위 기원전 19년 ~ 서기 18년) 이름 유리(類利)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18년 ~ 44년) 유리왕의 三男 이름 무휼(無恤).
4대 민중왕(閔中王) (재위 44년 ~ 48년) 대무신왕의子 이름 색주(色朱)
5대 모본왕(慕本王) (재위 48년 ~ 53년) 대무신왕의 차남 이름 해우(解憂)
6대 태조왕(太祖王) (재위 53년 ~ 146년) 유리왕의 六男인 재사의子 이름 궁(宮) 119살에 사망 최장수왕
주몽으로 부터 시작된 해씨 왕조가 고씨로 바뀌는 때가 6대 태조 대왕이다.
그런데 태조 대왕의 재위 기간이 93년이나 된다.
고구리는 70~80여개의 대부족과 수천개의 부족으로 구성된 나라 였으며
고구려 5부에서 왕이 선출되는 나리이다.
강력한 왕권 중심 국가가 아니라는 말이며 왕은 언제든지 교체가 될 수 있었던 나라이다.
주몽이 단군을 이어 받지 못한 것을 볼 때 주몽은 해모수의 여러 아들 중 한명일 수 있으며
소부족장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구리의 존속 기간이 9백년이라는 근거를 따라가 보자.
북방계인 진시황이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한지 3代째 진나라는 멸망한다.
이때 초패왕 항우와 지방 하급관리의 아들인 유방이 소위 말하는 楚漢 전쟁 끝에
유방이 승리하고 최초의 漢族이 통치하는 최초의 국가를 건설한다.
그런데 유방이 초패왕 항우와 전쟁을 할 때 유방의 후원국이 흉노고구리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묵돌 선우의 나라가 고구리라는 것이다.
흉노라는 말은 나라 이름이 아니다.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을 짱깨와 쪽발이라고 하듯이 "슌누"라는 종족을
표기 과정에서 욕으로 기록한 용어가 흉노 이다.
유방과 漢나라를 속국으로 만들어 버린 슌누가
나라 이름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대목이다.
유방이 중국을 통일 하자 흉노고구리는 유방에게 많은 요구를 했을 것이다.
이에 유방은 40만 대군을 휘 몰아 흉노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오히려 흉노에게 포위 되어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함께 매년 공주를 상납하는 것을 포함한
조공을 하겠다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풀려 난다.
현재 중국의 史家들은 고구리의 개국 년도를 漢의 개국 년도 보다 앞선다고 말한다.
이러한 근거는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고구리를 흉노의 나라로 보기 때문이다.
漢나라의 개국년도는 BCE 206년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고구리의 개국 년도를 BCE37년으로 기록 되어 있으며
668년에 멸망한 것으로 기록 한다.
약 700여년간 존속하였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신당서에는 당의 시어사 가언충이 고려비기를 인용하여
"고구리는 900년을 넘지 못하고 80살 먹은 당의 장수에게 망한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이것을 두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당의 가언충이 고구려는 漢대로부터 나라를 가져
오늘날 90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라고 지적을 한다.
당나라 고종과 가언충의 대화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