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계곡에서 시작된 물은 새사도교회를 거쳐 지지교를 지나 번암초교 동화분교를 거쳐 동화교 아래를 지나 동화호(동화댐)로 흘러와 잠시 갖혀 있다가 다시 흘러 죽림교(죽림정사 옆)를 거쳐 번암교에 이른다. 그리고 덕산계곡에서 시작된 물은 방화동자연휴양림이 있는 오토캠핑장을 휘돌아 산마루 민박집과 양지민박을 지나 번암면 사암리를 거치는데 이 곳 물줄기를 용림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물은 죽산교를 지나 장수온천을 거쳐 죽림교(번암교 옆, 동화댐 아래 죽림교와 동명이교다)를 거쳐 번암교에서 합수되는 현장을 물꾸르미 내려다 보며 번암교를 막 지나니, 좌측으로 번암조경이 있다.
▲번암초중교 표지석
좀 더 걸어올라 가니 길가에 번암초등학교와 번암중학교 표지석이 마치 장승처럼 길쭉하게 세워져 있고 학교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학교 정문 못미쳐 우측에는 의병장 전해산 장군의 추모비가 서있다. 학교 초입에 이르자 세멘트로 만든 기단 위에 작은 공적비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이름은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어 식별하기가 곤란하지만 "이 분은 본교 학생들을 위하여 전장 260미터의 진입로를 포장해 주시어 그 공을 기리고자 비를 세웁니다. 1980.7.15 번암중학교"는 글귀가 적혀 있다. 학교를 거쳐 내려오니 멀리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좌우 산자락 사이를 연결한 동화댐이 보인다. 동화댐을 올려다 보면서 걸으니 길가에 번암면 보건지소 건물이 나온다. 보건소 건물에 붙어있는 머리돌에는, 본 시설은 농어촌특별세 일환으로 1998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치한 것이라며, 지난 2000년 8월 8일에 3억 6천만원을 들여 102.8평 규모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머릿돌을 보고 있을 때 보건소에서 할아버지 한분이 지팡이를 짚고 나오더니 무슨 생각을 해서 그런지 알수는 없으나 잠시 빙긋 웃으면서 하늘을 보다가 갈 길로 걸어 가신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아픈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 너희를 씻은 듯이 낳게 하리라"는 다소 엉뚱한 말이 떠오른다. 사실 노인 인구가 많은 곳이 농촌이지만 변변한 의료시설의 거의 없는 현실에서 보건소는 아픈 사람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주님품 같은 곳이니 내 엉뚱한 말도 그리 틀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노단리 두견마을 표지석
보건지소를 지나 동화댐 쪽으로 올라가는 작은 삼거리에는 이름이 예쁜 두견마을이라는 작은 원형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바로 번암면 노단리의 자연마을 중 하나인 두견마을 입구라서 세운 표지석일 것이다.《장수군지》에 따르면 "노단리리는 남노령의 주봉을 이룬 대성산 동쪽 언저리에 포근하게 자리잡은 삼백여 대촌의 명당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마을이 번암면 소재지인 노단마을이다. 이 마을은 근세 조선초 중엽에 형성된 흥성장씨 취락이다. 어느날 이곳을 지나던 도사가 명명했다 하는데, 이 마을의 주룡을 이루는 산이 성현이 명기를 띠었다해서 대성산이라 이름하였다 하며, 이 마을의 형국이 노나라에서 태어난 대성인 공자님의 집터와 같다고 하여 노단이란 이름을 붙혔다는 것이다. 이렇듯 명당이라 그런지 시골답지 않게 날로 번성해 가고 있다."고 한다. 노단에는 원노단, 하노단, 신기, 두견, 시동강마을이 있다. 두견마을에는 큰뜸, 가운데뜸, 견천이 있다.
요천 자료집에는 노단리 견천마을에 살았던 사람이 쓴 글(수필)이 한편 실여 있다. <성적산聲笛山은 알고 있다>(임중택, 2007)는 글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백산맥의 한 줄기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견천마을, 그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평지가 이닌 비탈진 곳에 20여 호가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으며, 뒷산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살기 좋은 동네이다. 낮에는 들에 나가 일하고, 밤이면 집에 들어 새끼 꼬기나 짚신을 삼고 책을 읽으면서 살았다.
지금처럼 텔레비전이 없는 것은 물론, 라디오나 신문도 없었다. 농사철에는 농사일에만 전념했고, 농한기에는 성적산에 올라 갈비나무나 장작을 만들 수 있는 나무를 마련해서 한겨울 따뜻한 온돌방에서 온 식구가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다. 남쪽에서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오면 초목들은 생기가 돋아 잎을 내고, 여름에는 천지에 기가 교류해서 꽃이 피고 성장한다. 그래서 봄이나 여름에 산에 오르면 사람도 자연의 기운을 받아 순해진다.
봄에는 갈비나무 지게에 진달래꽃 한 아름 꺾어 나무 짐에 꽂아 집에 와서 온 식구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으며, 가을이면 머루 다래 따서 집안 식구는 물론 이웃과 나누어먹기도 했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고사리 꺾고 취나물 뜯어 삼 싸고 무쳐 온 식구가 한 자리에 둘러 앉아 맛있게 먹던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성적산 정상까지 올라 갈비나무를 했고, 때론 산 너머 더 먼 곳까지 가서 오전과 오후 하루에 두 짐씩 나무를 했다. 정상에 오르기 까지는 경사가 70-80도 가량 비탈진 곳으로 S자 모양으로 지그재그 길이 나 있다. 한 번은 정상에서 잘못해서 나뭇짐과 함께 넘어져 나뭇짐이 산 아래로 굴러 산 밑에 와서 보니 한 짐 나무가 한 줌밖에 없었던 황당한 일도 있었다. 그 날은 빈 지게로 집에 돌아갈 수밖에. 산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안아준다. 인간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게 하며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게 함은 물론 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소나무는 우리 생활에 쓰임새가 많다. 우리 민족은 소나무와 함께 살아왔다. 태어날 때부터 솔가지 매단 금줄을 보았으며, 소나무로 기둥과 대들보도 만들고 그런 집에서 소나무 장작불로 밥도 지어먹고 그 불로 데워진 온돌방에서 자라왔다. 솔잎으로 송편 지어 먹었고, 솔잎주(酒)도 담아 마셨다. 송홧가루는 다식을 만들었고, 송피(松皮)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송진이 뭉친 호박으론 마고자 단추를 만들어 달았고 소나무 병풍을 걸어두고 그 푸른 빛깔과 운치를 즐기며 살았고, 죽은 뒤에는 소나무로 짠 관에 묻혀 자연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성적산은 내 내 숨결이 묻어있고 내 어린 시절 손때와 땀방울이 배여 있는 산이다. 기쁠 땐 기쁜 대로, 슬플 땐 슬픈 대로 오르내렸던 산. 답답하고 우울할 때도 많이 찾았던 산이다. 산 정상에 올라 발 아래를 멀리 내려다 보면 사방이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 싸였고, 남원과 장수를 있는 신작로 길만이 가르맛길처럼 보일뿐이다.
더 넓은 세상을 관조할 수 있다는 힘이 솟구치는 동기부여를 해주고, 삶의 권태나 허무의 늪에서 벗어나고 세상사의 잃었던 의욕을 되찾을 있도록 해 준 산, 그 산이 바로 성적산이었다.
고향! 부르면 부를수록 정감이 넘치는 곳, 고향은 그리움인가!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곳. 지금 그곳에 뉘가 있어 내 마음이 이렇게 애타는 걸까. 몇 분 남은 피붙이 늙어가는 소리, 자꾸만 가슴이 미어지는 한명(限命)을 점치는 오동잎소리에 인생과 쉴 곳을 더듬게 한다. 고향땅 거기에는 지금도 또 다른 나로 채워진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 이것들이 또 다른 모습으로 고향을 지키고 있겠지. 스치는 한 줌 바람도 한 줌의 흙도 내가 아니고는 그곳에 남아 있을 수 없다. 고향은 싫어진다고 아니 갈 수가 없고 멀리 떨어져 있다고 아니 갈 수 없는 곳이 고향이다.
그곳에서 내 부모형제가 태어났고 아버지의 핏줄이 면면히 흐를 때 어머니의 젖줄은 내 생명을 이어주지 않았는가. 옛날 이 성적산에서 피리를 불면 드렝이 마을(동화댐 속에 묻히고 현재는 없음)에서 이 피리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마을이름이 드렝이 마을이라고 전해오기도 하고, 성적산 깊숙한 곳에 성지가 있어 공을 들이러 찾아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니 분명 여느 산과는 다른 의미가 부여된 산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적산은 내 영혼이 노래하는 영원한 존재인 것을...*드렝이: 듣다, 들어라에서 온 말."
▲장수 물빛공원 물레방아. 좌측 뒤로 보이는 것은 동화댐 두견마을에 있는 견천을 지나 동화댐 아래로 접어드니 장수물빛공원이 나온다. 지난해 8월 19일에 개장한 물빛공원을 당시 지역 신문중 하나인《전북중앙신문》(유일권 기자)은 "장수 물빛공원이 준공과 함께 문을 열어 색다른 볼거리 제공으로 휴식공간으로 각광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장수군은 동화댐 일대에 장수 물빛공원을 완공하고 19일 오후 6시 30분 장재영 군수를 비롯해 각급기관사회단체장, 지역주민 등 3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수 물빛공원 내 워터월 광장에서 개장식을 가졌다.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동화댐 제방밑 일원에 조성된 장수 물빛공원은 총 사업비 87억여원이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으로 조성면적 34,017평방미터에 상징분수, 터널분수, 조각분수원, 바닥분수, 워터월, 물꽃정원, 생태연못 등 물 테마 시설이 들어서있다. 군은 매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 자연유압식인 워터 홀, 캐스케이드, 계류, 금강섬진강원, 생태연못 등을 가동할 계획이다. 또한 금요일부터 일요일 오후 7시부터 8시까지 모든 분수와 조명시설을 가동, 방문객들에게 물과 환경의 소중함을 알리고 건강한 생태도시 장수군의 이미지를 높여나갈 방침이다. 장재영 군수는 '동화댐과 뜬봉샘생태공원 등과 연계해 건강 장수의 근원인 ‘생명(물)’의 상징이자 생태관광, 자연학습공간으로 조성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철이고 게다가 폭설에다가 기온마져 뚝 떨어져 있으니 찾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물빛공원은 더없이 황량하고 텅비어 있다. 그래서 지금은 물빛공원 보다는 눈빛공원이라고 불러야 할 것같다. 물빛공원에서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대형 물레방아였다. 동화댐 아래 조성된 물빛공원의 대형 물레방아를 보면서 그래서는 안되겠으나, 훗날 유전자원이 바닥 나서 전기마져 끊겨버린 날이 온다면 저 동화호 물로 대형 물레방아를 돌려 방아를 찟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동화호 물빛공원을 지나 동화댐 둑 아래로 가깝게 들어가자 동화댐 물을 이용한 수력발전소가 쉴새 없이 돌아가고 있다. 수력발전소 건물 옆으로는 동화댐 둑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설치돼 있다. 세멘트로 만들어진 계단을 한참을 올라가서 둑방에 홀로서니 산중 물기운이 찬바람과 함께 확 밀려온다. 여기 모인 물은 분명 지지계곡에서 흘러온 물들이 모여(갖힌) 동화호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그 자태를 나그네에게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겨울철 호수 표면은 유독 시퍼렇게 보인다. 댐 제방 우측의 길가 화단에는 동화호라는 대형 표지석과 동화호의 규모를 알려주는 안내 표지판들이 세워져 있다. 안내표지판에는 공사명이 동화지구 대규모 농촌 용수개발사업이라고 적혀 있고, 몽리면적은 4,051헥타이르(본댐 3,000, 마곡제 151, 송동양수장 59, 용림제 151, 용평제 201)이고, 공사개요는 저수지는 제당 474미터이고 제고는 70.6미터다. 또한 저수량은 3,235만톤이고 사업비는 222,160백만원이 소요됐고 공사기간은 1987.12.24~2002.12.31이라는 글들이 실려있다. ▲동화호 표지석
동화댐 건설로 인해 마을이 수몰되어 실향민이 된 주민들에 대한 가슴 아픈 사연을《장수군지》는 "우리나라 8대종산인 장안산괴 백두대간인 백운산 두 줄기사이에 자리잡고 있던 이마을은 1750년경에 형성되었으며 상평과 하평 두 자연마을을 합쳐 상하평이라 불리웠다. 벽계승람에는 상하평응上下坪應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인근 주민들은 이마을을 드렝이라 즐겨 불렀는바 그 유래를 보면 옜날 어떤선비가 성적산聲笛山 에 올라 피리를 불었는데 피리소리의 높고 낮은 아름다운 음율이 번암면 여러마을에 퍼졌는데 이소리를 '들리느냐, 들어라. 들린다, 들었다'에서 피리소리에 응대하는 의미를 부여하여 그때부터 이 마을을 드렝이라 불리워 왔다고 한다. 마을지세를 보면 마을 뒷편 산 능선을 중심으로 이 마을이 있는 동쪽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여 온화한 느낌을 주는 반면 반대편 사암리 쪽은 경사가 심하고 힘있게 솟아오른 세봉우리가 있어 삼봉산이라 부른다. 한때 50가구 300여명의 주민이 다정하게 살아왔던 이 마을은 1987년부터 시작된 동화댐 건설로 인해 마을이 없어저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실향민이 되어 전국각지에서 흩어저 살고 있다. 사진은 이 마을 언덕에다 세운 '망향의 동산' 으로서 여기에는 망향각과 망향비, 망향의글과 마을지명, 이곳에 살았던 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마을비가 세워져 있으며 , 매년 5월초 실향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망향제를 올리며 정담을 나누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화호 취수탑 연락교
동화호 표지석 위에는 6.25참전 용사비가 서있고 그 위에는 1990년 3월 12일에 설치된 번암2우량관측소 건물이 있다. 건물 앞쪽 도로 건너편 산자락에는 관리사무소로 여겨지는 스라브 건물도 보인다. 우랑관측소 바로 위에는 동화호 안쪽으로 놓인 길이 40미터(폭2미터)의 취수탑 연락교(1994.12 준공)가 있다. 나는 다시 동화호 표지석 옆의 동화댐 제방으로 돌아와 제방길을 걸어 반대편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동화댐 좌측 끝에 이르니 동화호 물을 자동적으로 배출시키는 수로가 놓여 있는데, 물을 가두는 댐바닥 보다 훨씬 높게 조성해서 물이 차오르면 자연적으로 넘쳐 흐르게 만들어 놓았다. 다시 동화댐 둑방을 되돌아 걸어와 둑방으로 올라왔던 계단을 따라 내려가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백용성 스님의 생가가 있는 죽림정사로 향했다. 죽림정사 초입에는 동화댐에서 흘러온 물이 처음 통과하는 다리인 죽림교가 놓여 있다. 2003년 4월에 만들어진 이 다리의 길이는 48.5미터이고 폭은 9미터다. 죽림교는 이곳 마을 이름이 죽림리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번암교 옆 노단삼거리에도 이 다리와 같은 이름은 죽림교가 있다.
▲동화댐 아래 죽림교
용성 스님의 생가터에 조선된 죽림정사 낙성에 대하여 2007년 10월 당시《연합신문》은 <용성스님 생가터, 죽림정사 낙성 회양식>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 했다. "(장수=연합뉴스) 이윤승 기자 =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였던 용성龍城(863-1940)스님의 생가터 복원 및 죽림정사 낙성 회양식이 9일 오전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정사(주지 법륜스님)에서 원로스님과 전국 불자대표, 군민 등 3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됐다.
용성스님은 1911년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에 대각사를 세워 대중 포교활동을 시작했으며, 1921년 한국불교사상 처음으로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해 불교 대중화에 이바지하고 3,1운동때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를 대표했다.
또한 불교가 기복신앙 정도에 머물러 있던 시기에 수선회修禪會 등을 통해 참선수행과 부처의 가르침이 담고 있는 철학적 의미 등을 알려 불교의 근대화에 앞장섰다. 1만3천여평방미터에 조성된 생가터 복원과 대웅보전, 기념관, 교육관, 요사체 건립 등에는 유훈실현후원회 후원금과 국.도비 등 111억7천여만원이 들어갔다.
또 죽림정사는 용성스님의 생애를 기리기 위해 연못을 한반도 모양으로 만들고 3.1운동 때 전국을 뒤덮었던 태극기를 표석으로 세웠다. 용성스님의 제자인 도문(조계종 원로의원.72)스님은 죽림정사에서 유훈실현후원회 지도법사를 맡아 10여 년간 불사를 진행해 왔다. 이날 불교합창단의 축하공연과 국악인 오정해씨와 동국대 관현악단 등이 출연하는 '용성음악제'도 열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번암면 죽림리에 있는 죽림정사는 불교의 최초 사원인 죽림정사와 이름이 똑같지 않은가. 죽림정사는 중인도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王舍城이라고도 함) 북방에 있는 가란타죽림迦蘭陀竹林에 최초로 생긴 불교사원으로 가란타죽원迦蘭陀竹園·죽원가람竹園伽籃이라고도 한다. 코살라국 사위성舍衛城의 기원정사祇園精舍와 함께 불교 최초의 2대가람二大伽籃으로 불리는데 석가모니가 생존해 있을 때 자주 이곳에 머물면서 설법한 불교 포교의 중심지였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의하면 가란타죽림은 가란타(迦蘭陀 Kalandaka) 장자의 소유로서 왕사성의 여러 동산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곳이었다.
가란타 장자는 본래 외도外道를 숭배했으나 뒤에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불교로 개종하면서 이 죽림을 승단에 기증했다. 이 죽림에 당시의 마가다 국왕인 빔비사라 왕이 가람을 지어서 정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과 〈사분율四分律〉에 의하면 이 죽림도 빔비사라 왕이 보시한 것이라고 한다.
▲죽림정사에 있는 대웅보전(위)과 백용성 스님 생가(아래)
죽림정사에서 나는 세 편의 시를 볼수 있었다. 대중처소에 걸려있는 이서구 전라감사 예언시와 생가에 걸려있는 용성 진종 조사의 출가시와 기념관에 걸려 있는 용성 진종 조사의 오도송이 바로 그 것이다. 백용성 스님에 대해서는 교룡산 편에서 얘기 했으니 여기서는 죽림정사에 걸린 세 편의 시를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먼저 전라감사 이서구의 예언시豫言詩를 비롯해, 용성 스님의 출가시出家詩와 오도송悟道頌을 들어본다.
이서구 예언시
장안내룡지두처長安來龍至頭處 장안산에서 내려온 용의 머리가 이르는 곳은
혈재고봉상상정穴在高峰上上頂 높은 봉우리 위의 정상의 산혈에 있음이로다
적덕하인래점처積德何人來占處 지혜와 복덕이 구족한 도인이 와서 머물러 거처하면
금팔은삼부여해金八銀三富如海 3·8 동방목 해동 우리나라가 금 은이 가득한 부유국이 되리로다
용성 진종 조서의 출가시
불망전세사不忘前世事 지나간 세상의 일을 잊지 아니하고
몽중불수기夢中佛授記 꿈 가운데 부처님이 수기하여 주셨도다
출가덕밀암出家德密庵 남원 지리산 교룡산성 덕밀암에 출가하니
기불친몽불其佛親夢佛 그 부처님이 꿈에 친견한 부처님이로다
용성 진종 조사의 오도송
금오천추월金烏千秋月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만리파洛東萬里波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어주하처거漁舟何處去 고기잡는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의구숙로화依舊宿蘆花 옛과 같이 갈대꽃에서 자도다
죽림정사 대웅보전 앞에서 합장하고 나서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지만 겨울철 눈 속에 죽림정사를 찾은 사람은 없고, 용성스님 기념관 역시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 있어 죽림정사가 마치 동안거에 들어간 분위기다. 다만 하늘에는 흰구름과 바람 그리고 산새들만 오가며, 죽림교 아래로는 여전히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을 뿐이다. 죽림정사를 나와 죽림마을 골목을 돌아 나오니 어느 민가에서는 만들어 내놓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골목길에는 옻칠을 한, 남원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소반小盤들이 층층이 쌓여 바람에 말려지고 있다. 장수 번암에서 만들어 내는 것도 남원이라는 상표를 붙이고 있는 것은 남원목기의 유명세뿐만 아니라 옛날에 이곳의 행정구역이 남원에 포함돼 있었고, 지금도 생활권은 여전히 남원에 속해있다.
세멘트로 포장된 농노길과 함께 이용되는 요천 제방을 따라 내려오니 축사(우사)가 두 어동이 나온다. 길가에는 소의 배설물이 가득 쌓여있고 배설물 위에 내린 눈이 녹아서 배설물과 함께 흘러 나오는 오수(폐수)가 무방비 상태로 요천으로 유입되고 있다. 이 곳은 구제역에서 안전하기는 하는지를 걱정하다가, 일전에 배달된 신문에서 본, 감동적인《똥 꽃》을 쓴 전희식 농부가 기고한 <공장 축산을 매장하라>(한겨레 2011.1.10)이 다음과 같이 떠오른다.
"만약에 말이다. 시애틀 북미원주민 추장이 그랬던 것처럼, 구제역으로 살육당하는 소·돼지를 대표해서 1970년대를 살았던 늙은 소 한 마리가 연설을 한다면 오늘의 구제역 사태를 두고 뭐라 한탄할까?
전에 우리는 들판에서 풀을 뜯고 살았습니다. 논에서 쟁기를 끌었고 무거운 등짐을 장터로 옮겼습니다. 진실된 노동으로 한 통의 여물을 받았고, 짚 몇 단으로 일용할 양식을 삼아 고단한 하루를 넘겼습니다. 일 년에 몇 번 제사상이나 명절상에 귀한 음식으로 오르긴 했지만, 한 번도 식탐의 재료가 되어 사시사철 고깃집에 걸려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달포 사이에 100만 마리나 죽임을 당해 언 땅에 파묻혔습니다. 매일매일 소주에 곁들여 우리를 뜯어 먹던 이들이 포클레인 삽날로 우리를 짓뭉개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재앙을 왜 죄 없는 소·돼지에게 뒤집어씌우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좁은 쇠창살 속에 가두어놓고 평생을 사료만 먹이는 짓을 누가 했습니까. 90% 이상을 외국에서 사온 사료를 먹이면서 눈앞에 펼쳐진 7월의 무성한 풀밭에는 제초제를 뿌려대고 우리는 단 한 입도 풀을 뜯지 못하게 한 게 누구입니까
짝짓기를 하지 못하게 하고는 강제는 인공수정으로 새끼만 빼내 가는 짓을 누가 했습니까. 구제역이 왜 번지는지 정녕 모르고 하는 짓들입니까. 대량살육과 생매장으로 과연 구제역을 막을 수 있다고 믿기나 하는지요? 예방 백신만 확보하면 이런 사태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나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동차에 기름 넣듯이 지금의 배합사료는 쇠고기 만드는 공장에 넣는 공업용 원료입니다. 우리는 원래 되새김 동물입니다. 위가 네 개인 우리는 되새김질을 해야 정상적인 순환작용, 소화작용을 합니다. 유전자조작(GMO) 옥수수를 갈아 만든 이따위 배합사료는 단백질 덩어리와 다름없습니다. 1:1로 균형을 이뤄야 할 오메가6 지방산이 오메가3보다 무려 66배나 많은 옥수수는 되새김질은커녕 목구멍을 넘기면서 흡수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몸은 망가지고 살만 찝니다. 막사 구석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항생제들은 우리 몸뚱이를 지탱하는 의족이자 의수입니다. 우리는 늘 약물중독 상태입니다.
소 한 마리가 구제역에 걸리면 반경 얼마 안에는 전부 몰살당해야 하는 이 비참을 누가 조성했습니까. 자식같이 키웠는데 하루아침에 살처분당했다고 통곡하는 축산농가에 할 말이 있습니다. 정녕 자식을 이렇게 키우는지 묻고 싶습니다. 영양제와 항생제로 자식을 키우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축사에서 나오는 순간 바로 도살장으로 끌려가 컨베이어벨트 쇠갈고리에 걸려 빙글빙글 돌면서 바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것을 그들은 알 겁니다. 목숨이 다 끊기지 않은 채로 머리가 잘리고 사지가 조각납니다. 이런데도 자식처럼 키운다는 말은 우리가 듣기에 거북합니다. 인간들이 야속하고 원망스럽다 못해 원혼이라도 살아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좁은 이 땅에 소만 340만 마리나 됩니다. 갓난애부터 노인병원 와상환자까지 다 쳐서 14명당 한 마리입니다. 돼지는 1000만 마리나 됩니다. 세 끼 밥 먹고 살자고 이런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끝 모를 탐욕과 식욕을 부추긴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진정 파묻어야 할 것은 공장식 축산이며 돈벌이 목적의 산업축산입니다. 시급히 생매장해야 할 것은 과도한 육식문화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건강에 보탬이 되고 싶지 건강을 망치는 원흉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정 한 식구처럼 살고 싶은 것은 우리들입니다. ‘축산물’이 아니라 ‘가축’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유제류의 원혼을 위로하는 초혼제를 지내고 속죄하기를 호소합니다. 참된 속죄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마지막 한 마리의 소가 구제역으로 쓰러지기 전에. 마지막 한 마리 돼지가 파묻히기 전에.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죽림교에서 바라다 본 번암교
현재 농부이자 ·전국귀농운동본부 공동대표로 있는 전희식 선생의 말은 백번 지당하다. 어느덧 발걸음은 덕산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지지계곡 물과 합류되기 직전인 죽림교에 다다랐다. 죽림이라는 의미있는 명칭를 가진 마을에서 현재 국가 비상사태나 다를바 없이 진행중인 구제역 사태를 지켜보면서 죽림에서 태어나 남원 교룡산 덕밀암으로 출가해서 남원의 옛 지명인 용성이라 법명을 받은 용성 스님도 지켰던 '불살생不殺生' 계율이야 말로 이시대 우리가 지켜야 할 생명의 최고의 가치가 아닐까. 오늘의 요천답사 일정을 끝내고 번암에서 남원행 버스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