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주일설교 고린도후서5:1-10
본문: 고린도후서5:1-10
제목: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오늘은 고린도후서5:1-10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지난 주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낙심할 수 있는 삶이지만
우리 속에 누가 계신지
무엇이 있는지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살았습니까?
여러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비추어서
예수의 생명으로 빛나고 있습니까?
그래서 겉 사람이 낡아지는 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습니까?
인생 속에 겪는 여러 고난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습니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 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렇게 사신 분도 있고
어떤 순간 그렇지 못해 넘어지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1.우리에게는 죽는 날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1절에서“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이라고 본문을 시작합니다.
상당히 묵직한 말입니다.
무엇인가 뚝하고 떨어지는 느낌,
그래서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 듭니다.
바울은 우리가 죽게 된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게 된다는 말을 그림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알기 쉬운 말로 하기 위해
우리 몸을 집이라고 하고
죽음을 집이 무너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말은 거짓말이지만
한 가지 사실은 만은 참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죽는다는 것
그것이 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죽게 된다.”는 것
인정하고 있습니까?
말로는 우리가 죽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시한 부 판정을 받은 암 환자들도
자신이 죽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분명한 것 하나는
죽는 날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장막 집은
공동번역 성경은
“우리가 들어 있는 지상의 장막 집”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장막 집은 우리의 육체를 말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들어 있는 곳
하나님이 주신 보배가 들어 있는 곳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빛나는 것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바울은 장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 곧 일시적인 것에 대해서
언급했던 주제를 계속해서 이어 갑니다.
장막 집은 이동하는 삶을 사는
유목민이 사용하는 일시적인 거처입니다.
몽골의 게르나 사막의 유목민들이 쓰는 텐트를 말합니다.
양들이 풀을 뜯어 먹고 없으면 옮기게 됩니다.
얼마나 자주 옮기겠습니까?
장막 집은 계속해서 사는 견고한 집과 대조해서
임시적인 거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장막은 눈에 보이는 것이며
임시적으로 잠시 사용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말해왔던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머물러 있는 인간의 육체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장막 집이 인간의 육체를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나약하고 한시적이며 무가치한 것을 나타내줍니다.
바울이 육체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장막 집에 비유할 때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의 불완전성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진다고 말할 때
그것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진 시련과 심각한 고난을 당하며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실제로 죽음을 맞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세상은 그때 저승사자가 온다고도 하고
그때 황천에 간다고 하고
어떤 이는 황천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돈다고 말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믿는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장막 집, 우리가 들어 있는 지상의 장막 집
곧 속사람이 살고 있는 우리의 육체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저승사자가 오는 것도 아니고
황천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하늘의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합니다.
믿는 자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집입니다.
집도 다 같은 집이 아닙니다.
같은 평수라도 평당 300만원에 짓는 집이 있고
평당 몇 천만만원 주고도 짓는 집이 있습니다.
사택은 가장 저렴하게 집을 지어서
벌써 여기저기가 상하고 있습니다.
새들이 마음대로 구멍을 내기도 하고
쥐들이 쉽게 드나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지어도
사람이 지은 집은 언젠가는 무너지며
늘 수리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지은 집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으신 집은 어떨까요?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가지신 그분이
지으신 집은 어떤 집일까요?
우리의 생명이 살고 있는 집은 참 연약합니다.
발만 잘못 짚어도 인대가 상하고, 뼈가 부러지고,
여기저기가 깨지고 피나 나고 상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 육체가
얼마나 연약한 질그릇인지를 알려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장막 집에서 신음을 합니다.
이 육체에 가지고 사는 것은
고통이며 슬픔이며 아픔입니다.(2절)
그래서 이런 신음 소리를 내는 성도들은
갈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4절)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집,
곧 하나님이 지으신 집으로 덧입기를 갈망합니다.
그렇게 하늘의 집으로 덧입게 되면
죽음이 생명에 삼켜져 없어지게 되기에
우리는 하늘의 집으로 덧입기를 갈망합니다.
그렇게 덧입게 되면
우리는 벌거숭이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지은 집으로 살게 됩니다.(3절)
하지만 지금 이 땅에서
이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 땅에 사는 것으로 인해 탄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이 장막에 있는 것 곧 이 땅에서 사는 것
곧 육체를 가지고 사는 것은
짐을 진 것 같다고 말합니다.
짐을 잔뜩 지고 가는 사람은
어깨가 눌리고, 다리가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땀도 나고 힘도 많이 듭니다.
짐에 눌려 넘어지고 다치고 고통을 당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한
우리는 힘든 일이 많습니다.
배도 고프고 아프기도 하고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고
상처나 병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육체를 가지고 살면서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육신을 버리기를 원합니다.
너무 힘들어서 “죽겠다”는 말을 달고 합니다.
“죽고 싶다”고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장막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육신을 벗어 버리고서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아무리 육신에 문제가 있어도
이 육신을 버릴 수 없으며 소중하게 잘 관리해야 합니다.
육신을 천하게 여기거나 소용없는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됩니다.
연약하지만 그 안에 보배를 가진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뒤에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 육신을 벗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덧입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육신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것으로 덧입는 것입니다.
육신은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는 것이
이 땅에서 죽음이며
하늘로부터 오는 집을 덧입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까?
실제로 세상에서는 썩을 것에
안 썩을 것이 덮이면 다 썩을 것이 됩니다.
아무리 신선한 100계란을 풀어 놓았다고 해도
한 개의 썩은 계란이 그 안에 있으면
전체가 다 썩게 되어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썩을 육체가, 무너질 육체가
생명의 것으로 삼킨바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이치로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이런 일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이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5절)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심을 믿습니다.
성령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믿도록
보증을 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해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 주셔서
감동 감화하여 믿게 해 주십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며 복된 일입니까?
놀라운 선물을 주시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2.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살도록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한 그릇이지만 보배를 주셔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죽게 되지만
그냥 썩어지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집으로 덧입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죽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토록 생명이 역사하는 존재가
되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래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하십니까?(6절)
두려움과 조바심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담대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음이 든든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두려움과 조바심 없이 염려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묻는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 든든히 가지라고 합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앞길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죽음 이후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앞날에 대해서 불안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 수 없는 어떤 일 생길지 모르기에 불안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주로 믿어 생명을 가진 자에게는
그런 불안감이 없으니 담대하게 살라고 합니다.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 자는 죽는 날도
두려움이 없이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사는 것은
주님과 떠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6절)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다고 해서
그냥 담대하게 든든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으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7절)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역사하도록
예수를 믿음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늘 인정하며
행동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를 행동하게 합니다.
좋아 보이는 것이 있으면 욕심이 납니다.
두려운 것이 있으면 두려워집니다.
내게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불안하여 집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잘하면 시기심이 납니다.
나를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질투심이 납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면
원망이 생기도 탓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으로 있는 것이 욕심이요
두려움이요 염려요
시기와 질투심이요 원망과 탓입니다.
그것은 우리 육신을 가진 자들의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는 자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육신을 따라 자동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에 따라 수동으로 사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자라고 하면
육신을 바탕으로 하는 자동적인 삶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의 바탕에서
믿음을 따라 수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하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삶에서 행동으로 보여 져야 하는 일상속의 행동입니다.
3.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고 싶다. (8절)
그래서 믿는 자는 주와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마라나타!”하고 외칩니다.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하고 외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자동으로 올라오는 행동 속에서
그것을 믿음을 통해 수동으로 행동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더 이상 애쓰고 수고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주님을 따라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동으로 예수의 생명이
내게서 나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죽게 되면 주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몸으로 있든지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든지
주를 기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주를 기쁘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원이고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이고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10절)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선악 간에 우리의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내가 나를 기쁘게 하며 살았는지
주를 기쁘게 하고 살았는지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나를 기쁘게 한다는 것들은
실상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
곧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9절)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주님이 우리가 이루어 가야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이 땅에 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우십니까?
이 세상에 사는 것이 힘들어서
빨리 주님이 오셨으면 하십니까?
그래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근심과 염려와 두려움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누구를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직 그분 예수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것이 고통이고
또한 죽는 날이 오지만
우리는 담대하게 두려움 없이
예수를 믿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이고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2020을 지워버리고 싶다고 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는데
연말이 다가오는데 그것을 따라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절을 세상이 주는 것 때문에
흔들려 낙심하기 보다는
오늘 내가 믿고 따라가야 할 예수님이
내게 계시다는 것을 믿고
오늘이라는 시간에 집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