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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9. 묵상글 들 ( 연중 제 28주일. - 치유의 단계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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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9. 연중 제 28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치유의 단계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오늘 연중 제28주일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으로 중요한 말은
나병환자, 치유, 감사, 찬미입니다.
그런데 치유를 받은 사람이 감사와 찬미를 드린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감사와 찬미를 드린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만난 것에 비해
치유만 받은 이스라엘 사람 아홉은 예수님을 의사로만 만난 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가장 쉽게 이해되는 것은,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임을
감안할 때 엄마에게 도움을 받은 것보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때
더 고마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우리는 종종 부모의 사랑은 마땅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모는 자기를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사랑에 감사하기는커녕,
많은 경우, 그 사랑이 못마땅하다고 오히려 불평불만을 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불평불만을 하는 딸에게 엄마는 불평불만을 하지 않습니다.
감사하기는커녕 은혜를 원수로 갚는데도 못마땅해하지 않으십니다.
엄마의 압도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때문에 상심하지 않습니다.
상심傷心이란 무엇입니까?
상처 입은 마음이란 뜻이니 상심한다는 것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감사합니다.’대신 불평불만이 나오는 것은, 주님께 상처가 되지 않고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우리가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치유만 받은 이스라엘 사람과 구원을 받는 이방인을 보며
다시 한번 깊은 성찰과 반성을 해야겠습니다.
우리의 건강에는 네 가지 차원이 있다는 것을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치유도 네 가지 차원이 있겠지요.
육신 건강과 육신의 치유.
마음 건강과 마음의 치유.
정신 건강과 정신의 치유.
영적 건강과 영적인 치유.
오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육신만 치유 받은 사람들입니다.
더 치유 받았어도 기껏해야 마음의 치유를 받았겠지요.
혹 더 나아가 정신의 치유까지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봤자 그는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다가 죽을 뿐
저세상에서까지 구원받은 사람은 못됩니다.
주님을 구원자가 아니라 의사로만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치유해주심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 바라고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이 치유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라고 치유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육신의 치유에만 관심이 있습니까?
주님을 구원자로 만나고 있습니까?
나는 주님처럼 사람들에게 구원자를 만나게 하고 있습니까?
나 자신이 아직 구원자를 만나지 못했기에 병자들을
구원자께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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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9. 연중 제 28주일. .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28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참된 감사가 무엇인지를 우리게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구약에서 감사는 항상 미래에 대한 동경과 고귀한 은총을 인정하고 갈망한다는 점에서 신약의 감사를 예고합니다. 다른 한편 감사는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과거의 의인들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기도 속 어디에서나 나타나고 절정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감사는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입니다.
성서에서 감사는 자주 기쁨, 찬미와 환호, 하느님께 대한 현양 등을 나타내는 문맥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공적인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몸이 깨끗해진 나병환자처럼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는 것은 하느님이 행하신 기묘한 일들을 선포하고 그분의 업적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
감사는 인간의 마음속에 울리는 계시의 메아리와 같습니다. 히브리어로 감사의 뜻은 경탄하고 고마워하며 고백하는 것이며 축복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감사는 성서의 역사를 이끌어 왔으며 종말론적인 희망에로 나아가게 합니다 참된 신앙의 첫 출발점은 감사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감사의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된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리스도교적 감사의 독창성과 중요성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교젹 감사는 성찬례 안에서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행위이고 감사의 완전한 표현은 성체성사로서 감사는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선사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가장 고귀한 행위는 감사였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성부께 당신의 생명을 봉헌하신 제사가 바로 성찬례입니다. 주님의 전 생애는 끊임없는 감사였고, 주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감사드리도록 하기위해 분명하고 장엄하게 이 감사 표현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감사의 본질적 대상은 하느님의 업적이고 특히 기적을 통해 드러나는 메시아 시대의 실현이며 하느님께서 인간에 선사한 그분의 말씀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의식하고 주님의 모범을 따르면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감사를 자신들의 새로운 삶의 길잡이로 삼았듯이 우리 또한 그 모습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의 말처럼 감사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감사할줄 모르는 것은 신앙의 샘과 자비의 이슬과 은총의 물줄기를 말려버리는 타오르는 바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란 기쁨을 돌려주는 행위이며 사랑을 돌려주는 행위입니다. 감사가 어려운 것은 겸손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감사는 과거의 아픈기억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겸손되이 기쁨으로 승화하고 사랑으로 품어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에 참으로 응답하고 자기가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감사와 위선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감사 그 자체는 우리를 진실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참된 감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사는 한 주간 되시길 빕니다.
✝️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10월 성령 열매성월 2주간 인내 / 친절 /성실✝️
금주간 성서읽기 1코린 9-16장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파베르니(Faverney)의 화염 속에서도 손상을 입지 않은 성체
프랑스 -1608 년
스위스 국경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의 유래깊고 매우 소중히 여겨지는 파베르니 대수도원에서는 성령강림절을 언제나 특별히 성대하게 맞는다. 가까운 곳에서는 물론 먼 곳에서도 찾아오는 수많은 순례자들은 고백성사를 보고 성체를 영하고 그러면서 완전한 대사(大赦)를 얻기 위해 이 수도원으로 몰려왔다.
1608년 5월 24일 성령강림절인 일요일이었다. 순례자들이 성체 앞에서 밤낮으로 성체조배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 3일 기도를 위한 성체현시를 봉정했다.
성당은 특히 화려하재 장식되었다. 기도하는 신자들이 사방에서 성체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길다란 성단소(聖壇所)의 뒷벽에 붙어 있는 중앙 제대 위에다가 성광을 세워놓지 않고, 신자석이 시작되는 성단소 난간에서부터 상당히 앞쪽에다가 특별히 만들어 놓은, 옥좌 모양의 목제 제대 위에다 성광을 세워 놓았다. 똑같은 이유에서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봉헌된 성체를 성광의 유리를 속에다 넣어서 모셨다. 이것은 성체의 아랫 부분을 성광 안에 가로놓여 있는 은도금된 틀로 장식한 고대의 성광이었는데,성녀 아가다의 성유물 속에 포함되어 었던 것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초가 세워져 있는 지극히 예술적인 촛대와 진짜 고블랭직(織)(벽 휘장에 사용됨)과 귀중한 비단천, 그리고 수많은 화려한 꽃으로 호화로운 옥좌 모양의 제대를 장식 하였다.(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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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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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9. 연중 제 28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오늘은 연중 28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과 순종, 그리고 감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방민족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예언자 엘리야가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고, 나병이 나앗습니다. 그러나 사실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고 씻으라는 엘리야의 전달을 받았을 때 무시당하는 것으로 여기고 화가 나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장군님, 만일 엘리야가 더 어려운 일을 시켰더라면 틀림없이 장군님은 그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언자가 시키는 대로 해 보시지요’라는 부하의 말을 듣고서, 마음을 바꿔 엘리야가 시키는 대로 순명하여 치유를 입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치유를 입은 것은 말씀에 순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돌아설 줄을 알고, 한없이 낮아질 줄 알며, 치유해주신 분께 감사할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감사의 표현으로 선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초대교회공동체에서 고백하던 찬미가(2티모 2,11-13)로서 바오로 사도는 죽음에서 되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선언하면서, 그분의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성실하심을 찬미하면서 복음에 대한 순명과 믿음의 행동을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사이의 어떤 마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이 소리를 높여 말하였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사제들에게 가던 중에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마치 <제1독서>에서 나아만이 엘리야의 말을 믿고 순명하여 나병이 나았듯이, 나병환자 열 명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명하여 치유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이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1독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8)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혹 자기 자신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까닭은 아닐까요? 그래서 여전히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자비를 다 누리고 있으면서도 아버지께서 베푸는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 있는 큰 아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왔습니다. 그러니,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곧 믿고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니 나병환자 아홉은 비록 자비를 입고 치유는 받았을지라도 그들에게 구원이 선언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에게는 구원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자비를 입고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여전히 아버지의 집 문밖에 서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치유 자체가 아니라 은총을 주시는 분께 드리는 감사와 영광입니다. 곧 치유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치유를 주시는 분께 ‘돌아와’ 발 앞에 엎드리는 겸손한 자세로 감사하며 흠숭을 드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감사함이 곧 구원이 됩니다.
이를 우리는 오늘도 <미사경문 감사송>에서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구원의 도리요 길이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이 감사제를 통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이토록 자비를 입었으니, 저희도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6)
주님!
감사하게 하소서!
청하기도 전에 듣고 계시는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베풀어지기도 전에 이미 품으신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치유보다 치유시키는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 깃든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무감각하지 않게 하시어,
치유를 받고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배은망덕은 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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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9. 연중 제 28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감사함은 구원을 가져옵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십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기를 희망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남에게 돌리고 심지어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운함이 앞섭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면,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또 주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순간을 참지 못하고 불평불만 할 때가 많습니다.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아홉을 가지고도 열을 못 채운 것에 서운함을 지닙니다.
감사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1차원적인 감사입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되거나 더 많이 갖게 되면, 감사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갖지 못한 것을 불평하는 수준입니다.
2차원적인 감사입니다.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과 비교하되 더 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3차원적 감사는 불행을 당해도, 힘들고 어려워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악조건 안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조건부의 감사가 아니라 ‘그럼에도’의 감사입니다. 전천후 감사입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 동굴 속에 지내면서 지은 시편이 있는데, 최악의 순간에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감사드리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드리며 그분 앞으로 들어가라.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을 찬미하여라”(100)“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을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116,12).
감사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인가요? 우리는 안락한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나병을 치유받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주님께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열왕5,17). 감사함이 주님과의 만남에로 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 17,13). 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법을 무시하고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즉각 고쳐 주시지 않고“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없었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떼를 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고,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완전히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아직 미숙한 신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병이 나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을 고친 분이 육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소외당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몸이 치유되었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는 것이 더없이 큰 기쁨입니다. 은총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만이 성숙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단순히 육적인 치유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치유 받은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나병을 치유 받은 것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병이 나은 것을 확인받기 위해서 사제를 찾아갔습니다. 병이 나아서 감사드리는 것보다 내가 이제는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는 것이 더 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깁니까?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고 있는지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했는데 그 아홉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는 것은 결코 마땅히 받아야 할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은혜를 당연하다고 생각 말고 받은 은혜를 통해서 감사를 드리고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다윗이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고 노래하였듯이 매일 매 순간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 3,15-17). “감사는 겸손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모쪼록 간절히 원하던 은총을 받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얼굴을 바꾸지 말고 감사함을 일깨우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남에게 베푼 것은 모래 위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 판에 새겨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받은 것은 잊고 베푼 것에 대한 위안과 보상을 기대하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혜, 그리고 부모 형제 친척, 자녀를 통하여, 또한 이웃에게 받은 많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육체적 병이 나은 사람도 언젠가 죽습니다. 그러니 병이 나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함은 구원을 가져옵니다. 구원받음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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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9. 연중 제 28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화 중에 ‘언제가 가장 행복했는지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감사할 일이고, 아직까지 건강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주어진 일이 있는 것에도 감사를 드리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질문을 받은 후에 행복했던 때를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합격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10년간의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8년간의 보좌신부를 마치고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부모님을 위해서 작은 집을 마련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돌아보면 주로 제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졌을 때였습니다. 이런 말을 들었던 때가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3시간이 행복하고, 쇼핑을 하면 3일이 행복하고, 결혼하면 3년이 행복합니다.” 행복에도 유효기간이 있고, 행복에도 여운의 깊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원하는 것을 모두 채울 수는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살면서 원하지 않는 것들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내의 마음과 다른 나의 행동 때문에 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렇게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서 유효기간이 없는 참된 행복을 이야기하신 분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진리를 알게 되는 행복을 이야기하신 분이 있습니다. 이 행복은 누가 가져갈 수 있는 행복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빼앗길 수 있는 행복도 아닙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행복입니다. 가난해도, 병들었어도, 죽음의 강을 건널지라도 느낄 수 있는 행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은 행복에 가까이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도 행복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말씀은 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감사’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 번 담갔습니다. 그리고 나병이 치유되어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나아만이 행복한 것은 나병이 치유된 것만은 아닙니다. 나아만의 이야기가 성서에 기록된 것은 나병이 치유되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통해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10명의 나병환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0명의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드린 것처럼 10명 중에 1명이 예수님을 찾아가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깨끗하게 치유된 10명의 나병환자가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치유된 것을 감사드리면서 예수님을 찾아갔던 1명의 나병환자가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참된 행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감옥에 갇혔을지라도, 박해를 받아 매를 맞을지라도, 죽음의 강을 건널지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언제가 감사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감사의 배를 타고 기도의 노를 저어 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행복이요, 언제나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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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9. 연중 제 28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단체로부터 강의 청탁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그날 오후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이 단체 책임자 되시는 분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른 신부님께 강의를 부탁했는데, 제가 강의하는 시간에만 가능하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게 강의 시간을 바꿔 달라는 부탁이었지요. 하지만 저 역시 그 시간만 가능했기에, 그 신부님이 강의하시고 저는 다음에 강의하겠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곧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신부님 화나셨어요? 그러면 그냥 원래대로 해주세요.”
강의하러 가기 바로 전날 그 단체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제가 아닌, 다른 신부님께서 강의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황해서 그 단체장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의사 전달에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라는 답장이 오더군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강의 준비도 열심히 했고, 강의에 필요한 준비물까지도 모두 사놓은 상태였는데, 이 모든 일들이 헛일이 된 것입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힘이 들어갔는지, 안경 닦다가 안경테가 부러지기까지 했습니다. 또 문턱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계속해서 실수 연발입니다.
안 좋은 생각을 하니, 안 좋은 일만 계속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좋은 것도 많습니다. 강의하지 않아도 되니, 먼 곳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주말 교통 체증에 시달릴 일도 없습니다. 또 할 일이 많았는데 여유 있게 주말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강의하지 못하게 된 것,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이르시지요.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해서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병 환자는 율법에 따르면 성으로 둘러싸인 큰 도시에는 들어갈 수 없었고, 예루살렘 성전에는 얼씬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사람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어서 예수님을 보고서도 멀찍이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나병이라는 병으로부터 깨끗해진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께 감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나머지 아홉은 왜 감사를 드리러 오지 않았을까요? 하느님의 영광이 이루어졌음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깨끗해진 것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자기를 고쳐 주신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부정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만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순간에서도 감사의 이유를 찾으며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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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사랑하듯이, 용서받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용서한다.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용서받은 기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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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9. 연중 제 28주일. 키엣 대주교님.
은총의 시작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실 때,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들은 치유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떠났고 모두 병이 나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 구원의 은총’이 지니는 몇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유다인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곳으로 서로 왕래조차 하지 않고 지저분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자 금지된 경계를 넘어가셨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나병 환자를 만나는 것 또한 금기를 행하신 것입니다. 당시 나병 환자는 태어날 때부터 더러운 죄인으로 여겨졌고 나병 환자를 만나면 자신도 더러워진다고 생각했기에 스스로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숨어살았습니다. 그들은 가장 낮은 천한 계층이었고 사회에서 추방된 쓰레기와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셨고, 자비를 청하는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사회에서 업신여김을 당하는 사람, 사회의 망각 속에 묻혀버린 사람, 따돌림을 받는 사람, 그들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주님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감히 어느 누가 주님께 ‘이 땅에 내려와 주십시오’ 하고 청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주님을 이 땅으로 내려오시게 만든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상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누구의 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 스스로 내려 오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수님이 자신들의 땅을 밟으시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비참한 생활속에 미래에 대한 꿈 조차 꿀 수 없는 그들의 육체는 심판을 받고 추방된 몸이었습니다. 육체가 건강한 사람도 기적을 만나지 못하는 데, 하물며 이런 비참한 몸을 한 그들이 어떻게 감히 주님을 만나는 꿈을 꿀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셨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극한의 고통 바로 그들의 고통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여 자비를 베풀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역 없는, 조건 없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구원의 은총은 믿음으로 맞이하여야 합니다.
주님 구원의 은총은 조건 없이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다고 하여 그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갖고 간구하는 사람만이 자비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예수님ㄲ 자비를 청하는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소리 높여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구원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나병환자들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부르며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과 자비를 청하는 모습에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둘째는, 사제에게 보여주기 위해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치료의 은총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만으로도 그들은 믿음을 갖고 길을 떠났고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바로 자신을 구원한 것입니다.
구원의 은총은 주님과 만난다는 믿음의 기쁨으로 맞이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주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과 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과 기쁨의 근원입니다.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은 단지 병이 치유되는 기쁨만을 가졌을 뿐 주님과의 친밀한 기쁨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믿음만 있었고, 주님을 만난다는 믿음은 부족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병이 없어지자 믿음도 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단 한 사람만이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는 주님과의 친밀함을 위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쁨의 원천과 새 생명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주님께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삶의 의미의 원천을 찾은 그의 기쁨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 기쁨으로 그의 삶은 영원히 멈추지 않는 감사의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게 하여주소서. ‘감사하는 마음’이 제 모든 삶에 진정한 행복을 주는 것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습니까? 구원의 은총을 맞이하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2. 구원을 청하는 믿음과 주님을 만나는 믿음은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을 찾기 위해 떠나보십시오.
3. 불편한 사람, 감히 접근하지 못하거나 금기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 이유를 살펴보십시오.
말씀의 실천
1. 삶 속에서 감사를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내가 가진 것들과 사람들을 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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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9. 연중 제 28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치유의 여정
-겸손과 순종, 만남과 치유, 감사와 찬양-
가장 많이 듣고 가장 많이 받는 인사가 건강하시라는 것입니다. 영육간의 건강을 비는 인사입니다. 사실 영육간에 병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정도나 양상의 차이일뿐 병자입니다. 그래도 수십년간 쓸수 있는 사람만큼 정교하고 완벽한 기계도 없을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 솜씨가 얼마나 깊고 오묘한지 감탄하게 됩니다. 몸을 통한 하느님 체험이며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제가 고백성사중 보속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영육의 말씀 처방전’은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아직 영육의 건강에 이보다 더 좋은 처방전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야 영육의 건강, 특히 영혼의 건강입니다. 제가 우리 수도형제들을 사랑하는 것도 영혼의 건강 때문입니다. 영혼이 건강하면 육신의 관리도 용이해집니다. 바로 수도형제들의 담백하고 순수한 형제애, 아가페 사랑이 영혼 건강의 표지입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다음 성규 72정을 믿고 살아가기에 이런 사랑에 영적건강입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낫게 말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의 사랑의 대헌장 같은 깊고 아름다운 내용으로 이 말씀을 명심하고 살아가기에 담백하고 순수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정말 이런 사랑을 지닌 이들이 건강한 영혼들입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강조하는 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한 필수적 세 우선순위입니다.
“첫째 하느님 믿음, 둘째 건강, 셋째 돈이 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한 기본 조건이다. 이 우선 순위가 절대로 바뀌어선 안된다. 참으로 하느님 믿음이 영육의 건강과 품위를 위한 최우선 요소다. 노년뿐 아니라 인간의 품위 유지를 위한 필수적 우선 순위다.”
어제는 모처럼 여덟분 형제자매들의 피정지도가 있었습니다. 강의는 제가 좋아하는 가장 필요하다 싶은 ‘희망의 여정’이었습니다. 끝으로 드린 결론 말씀에 모두 진지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대로 오늘 미사에 참석한 사랑하는 모든 형제자매님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주님을 만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자, 오늘 가장 아름다운 곳 수도원에 하루 순례피정을 왔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일년사계 사계절로 압축해 보면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점검하며 날마다 삶을 재정비하기기 바랍니다. 환상은 사라지고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 인생,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인생을 하루로, 또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와 있습니까? 어제 피정오신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루중 오후 3-4시, 일년사계중 가을이라 했고, 저는 과연 가을인생을 보람있게 살아가는지 물었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기도의 계절, 수확의 계절이라 하는데, 과연 공부많이 하고, 기도많이 하고, 영적열매 잘 무르익어가는 가을인생인지 물었습니다. 좀 지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겨울철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며 저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을 생각했습니다. 전화위복의 삶,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은 나병환자들, 나병으로 절망하여 자포자기한 것이 아니라 열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 만나 치유받았으니, 역설적으로 전화위복 나병은 축복과 감사의 계기기 되었고 삶은 한층 깊어졌을 것입니다.
만일 이들에게 이 나병이 없었더라면 평생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축복과 감사에 대한 생각도 미약했을 것이며 삶도 깊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아픔이나 고통에 절대로 좌절하지 마시고 그럴수록 주님께 가까이 이르도록 열심히 노력하여 겸손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전화위복의 삶으로 만드십시오. 정말 아프고 힘들수록 ‘열심’과 ‘겸손’, ‘자비’의 수행에 더욱 박차를 가해 축복과 감사의 삶이 되도록 하십시오.
참으로 나병 덕분에 겸손히 자비송을 바치는 나병환자들입니다. 정말 부끄러워할 것은 영육의 ‘병’이 아니라 영육의 ‘죄’입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병으로 인한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죄로 인한 영혼의 죽음입니다. 탐욕, 간음, 탐식, 낭비, 질투, 시기, 혐오, 차별, 폭행, 배척, 미움, 분노, 나태, 허영, 교만, 거짓, 위선, 인색, 중독등 이런 부정적 영적나병의 죄들을 정말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고 주님을 만나 회개와 더불어 치유받아야 비로소 영육의 건강입니다. 바로 복음의 나병환자들처럼, 영적나병 환자들인 우리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방금 자비송을 바치며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가 궁극으로 바칠 청원기도는 간절한 믿음으로 바치는 자비송 하나뿐입니다. 자비송과 더불어 회개와 겸손이 뒤따르고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치유를 받습니다. 그 당시 나병환자들 모두가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자포자기 하지 않고 주님을 찾았던 열 사람만이 주님을 만나 치유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치유요, 그래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과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는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말씀하셨고, 그대로 믿고 순종하여 떠나는 순간 몸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발생합니다. 치유받은 열명중 한명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참으로 육신의 치유에 이어 찬양과 감사가 뒤따라야 온전한 영육의 전인적 치유인데 아홉은 반쪽의 치유만 받은 꼴이 되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느쪽입니까? 아홉명 쪽입니까? 감사와 찬양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한명 쪽입니까? 참 안타깝게도 온전한 전인적 치유를 받은 사람은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림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완전한 치유의 구원 선언입니다. 이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찬양과 감사로 표현되는 믿음이요 이 믿음으로 치유의 구원을 받아 파스카의 부활의 삶을 살게 된 치유받은 나병환자 한 사람입니다.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에 하느님 찬양과 감사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주인공 나병환자 시리아 사람 나아만도 그 좋은 증거입니다.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명령한대로 겸손히 순종의 믿음으로 요르단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그자 나병환자인 나아만은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 졌습니다. 이어 나병환자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리니 복음의 치유받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비로소 영육의 온전한 전인적 치유입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이 종이 드리는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십시오.”
이에 대한 엘리사의 반응은 얼마나 멋진지요! 참으로 영육으로 온전히 건강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입니다.
“내가 모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결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선물을 받아 달라는 거듭된 청에도 엘리사는 요지부동입니다. 엘리사도 멋지고, 이에 대한 나아만의 순수한 마음의 반응도 감동적이고 멋집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정말 아름다운 참 사람 둘을 만나니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시다면,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이 종에게 주십시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일편단심 겸손히 열심히 하느님만 사랑하고 섬기겠다는, 참으로 흙처럼 겸손하고 낮아진 나아만의 약속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들은 둘 다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복음의 사마리아 사람과 열왕기 상권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우리에게는 빛나는 회개의 표지가 됩니다. 참으로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전인적 구원의 치유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여러분도 사마리아 사람처럼, 시리아 나아만처럼 치유받고 싶습니까? 시공을 초월하여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살아 계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섬기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님께 대한 기억과 열렬하고 한결같은 섬김의 사랑은 전인적 치유의 구원에 결정적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가 사랑하는 테모테오에게 준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렇게 되살아 나신 파스카의 주님께서 친히 집전하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님을 기억하고 사랑하여 섬길 때 온전한 치유의 구원에 주님을 닮아 참으로 영육으로 건강한 삼실의 사람, 즉 진실, 절실, 성실의 참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 삶은 치유의 여정입니다. 주님을 만나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치유입니다. 겸손과 기도, 만남과 치유, 찬양과 감사중에 이뤄지는 복된 치유의 여정입니다. 끝으로 제 좋아하는 행복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 저의 평화, 저의 희망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 파스카의 삶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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