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 편지,
1931년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 하던 주 목사가 장로교에서 탈퇴한
윤치병 목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동래구에서 열리는 釜山區域教役者修養會(부산구역교역자수양회)에 참예하였다가
돌아와서 형님의 下示를 보았습니다.
일이 필경(畢竟) 그렇게 되고 보니 교회와 형님을 위하여 遺憾(유감)됨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의(異議)는 끝가지 문제이고 합하지 못할 바에는 갈라서는 것도
無防(무방)한 일이 외다(일입니다).
드러(들어)가 여러 사람의 叢中(업중)에 서시든지 나아와 (나와서) 호우로 서시든지
오직 그편에 이르기를 바라오매(바라오며),
또한 여태까지 형님이 밟아 오신 길이 其後를 위하여 쌓아 나온 자취인 줄 아오니
主께서 分明(분명히 兄님과 갓치(같이하실 줄을 믿습니다.
萬人의 사명이 반드시 한길이 아니겟사온즉(아니겠지만)
형님은 兄님의 길에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소서.
六月十五日
교제(敎弟) 주기철 올림
윤치병 (尹恥炳 1889-1979)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출신의 목사. 복음교회 창립 전에는 조선예수장로회[1] 소속이었다. 충남 논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 주병(柱炳) . 사립기호학교,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에게 한글을 배웠다. 이때 기독교에 입교했고 일본 세이소쿠영어학교, 고베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귀국후 홍덕학당 교사로 교회에 봉사하며 교육과 전도에 힘썼다. 1929년 경북 영주중앙교회를 창립, 전북 김제 봉월리교회, 시무중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와의 의견충돌로 사임하고, 1935년 최태용 등과 함께 복음교회를 창설했다. 그 후 <복음과 감사>를 창간하여, 발행인으로 활동했고, 소천하기 직전까지 익산금마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주기철(朱基徹, 1897년 11월 25일 ~ 1944년 4월 21일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출신으로 장로교 목사이다. 주기철(朱基徹) 목사의 원래 이름은 주기복(福)이었다.[2] 한상동 목사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독립운동가이다. 아울러 손양원 목사와 더불어 한국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아호(雅號)는 소양(蘇羊)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