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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에는 하지(夏至)입니다. 낮의 길이가 연중 가장 길다는 날이지요. 그렇게 해가 길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지나면 다시 짧아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낮의 길이가 짧아져 가는 가운데 오히려 더위는 드세지기 시작합니다. 길어져 오는 동안 땅을 덥히느라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올 여름 더위가 평년보다 셀 것이라 예보되어 있는데 어찌 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요. 40도 가까이까지 경험을 했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노인 인구가 늘어난 만큼 위험도 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있습니다. 복지 문제도 경쟁화하겠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두려워집니다. 특히 의료복지는 노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것마저 빈익빈 부익부가 된다면 우리나라도 영화 제목처럼 ‘노인이 설 땅은 없다’가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요즘 병원 가는 회수가 늘어가고 있으니 관심이 더 많이 갑니다. 병원에 가면 아마도 반은 노인들로 보입니다. 하기야 병원뿐인가요? 이제는 전철을 타도 앉아 갈 생각은 포기했습니다. 경로석은 진작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지요. 70대 중반은 이제 노인 축에도 끼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노인 연령도 올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기야 그것도 쉽지 않은 결정이라 여겨집니다. 60 초반 사회에서 밀려난 젊은(?) 노인들이 본인 먹을 것 다 챙겨가지고 나오지는 못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냥 방치할 수는 없겠지요. 뭔가 도움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부담은 커지는데 부담할 사람은 줄고 있으니 이 또한 숙제입니다. 거참!!
가끔 생각합니다. 조금 빨리 나이 먹은 것도 다행이다 싶은 것이지요. 별난 생각입니다. 거참! 아무튼 더워지는 날씨 대비해야겠습니다. 건강해야 버티지요. 마음부터 밝게, 좋은 주말입니다. ^)^
2023년 6월 17일 김종우 목사 드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 : 4)
<남은 인생 10년>
죽으려는 자는 살고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은 죽고, 그게 인생이고 세상입니다. 사실은 살겠다고 오는 사람도 없고 죽겠다고 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흔히 말하듯 죽고 사는 것은 그저 하늘의 뜻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은 더 살고 싶은 것입니다. 다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에 마지못하여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죽은 사자보다 산 개가 낫다는 말도 있지요. 가보지 않아서 모르기는 해도 뭐라 말하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습니다. 아무리 좋아도 저승에서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하는 것들이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고통도 그 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그곳의 고통은 이곳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경험하고 거기서는 하지 않는 것이 나리라 생각합니다.
몹쓸 병으로 인한 강제 이별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많습니다. 영화 중에는 잘 아는 ‘러브 스토리’가 고전에 속할지 모르겠습니다. 애잔한 피아노 선율로 흐르는 주제가는 여전히 귀에 맴돕니다. 그리고 눈 쌓인 운동장에서 뛰고 뒹굴고 사랑놀이 하는 두 연인들을 따라가며 흐르는 음악 또한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병으로 한참 먼저 떠나야 하는 아내를 힘없이 바라보는 ‘올리버’의 마음을 우리 모두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후에 여러 가지 질병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질병들이 우리와 멀지 않아서 때마다 공감과 감동을 주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사랑이 깊고 진실할수록 이별은 더욱 아프게 다가옵니다.
‘마츠리’가 축하를 받으며 퇴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글쎄. 축하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병실에서 끝나는 것보다는 그래도 그 사이 바깥을 실컷 구경해보고 마감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퇴원은 하지만 때마다 정기 검진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이 무슨 획기적인 의학의 발전이 없다면 기한은 길지 않게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의 힘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그래도 일단 오랜 만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온 식구가 모여 축하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생활을 찾습니다. 동문회에도 나갑니다. 함께 하였던 친구들을 반갑게 만납니다. 그리고 ‘카즈토’를 만납니다. 서먹해 보이지만 측은해보이기도 하여 가까워집니다.
부모의 가업을 버리고 멀리 도시로 나온 후 부모님과도 소원합니다. 하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고, 생을 끝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거주하던 집 베란다에서 그냥 뛰어 내립니다. 그다지 높지는 않았기에 죽지는 않았습니다. 부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합니다. 마츠리가 문병을 갑니다. 아직 서로를 잘 모릅니다. 그래도 어쩌면 삶에 대한 무게로 인하여 뭔가 통하는 것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츠리로서는 카즈토가 딱함을 지나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대로 한 마디 툭 던집니다. ‘꽤 약아뻐졌는데.’ 카즈토의 마음에 그 말이 박혔습니다. 무슨 의미일까? 시간이 지나 퇴원하여 마츠리를 만나 묻습니다. 무슨 의미냐고요.
결코 사랑하지 않을 거야, 퇴원하고 다짐하였습니다. 그야 상대가 없을 때 하는 다짐입니다. 어떤 상대가 나타나는가, 살다보면 여러 가지 가능성이 생깁니다. 더구나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주 만나다보면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것 또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요. 그냥 좋아집니다. 게다가 정이란 것이 생기면 자꾸 신경 쓰게 됩니다. 없으면 생각나고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살맛이 없고 살 의미조차 없었던 카즈토에게 의미가 발생한 것입니다. 바로 마츠리입니다. 일터도 생깁니다. 주변 친구들이 사랑하고 결혼하는 모습에 마음이 끌립니다. 자신의 인생도 새롭게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욕이 생깁니다.
어느 날 마츠리가 갑자기 눈앞에서 쓰러집니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본인은 압니다. 아직 여유는 있습니다. 잠시 입원하였다가 나옵니다. 카즈토와의 사이는 점점 깊어집니다. 함께 하는 시간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운 시간들이 많아질수록 마츠리의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시간도 많이 흘렀습니다. 몸이 점점 약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어느 날 카즈토와 짧은 여행으로 같이 밤을 지내고 이른 아침 먼저 숙소를 나옵니다. 잠에서 깬 카즈토가 깜짝 놀라 쫓아 나옵니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마츠리를 붙잡습니다. 뭐가 잘못된 거야?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아니 잘못한 거 없어. 내가 그 동안 속인 거야. 나를 떠나. 나를 잊어야 해.
그래도 이렇게 떠날 수는 없지. 그래서 자기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비슷한 경우를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움이 될까 싶어 남기는 것입니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제 정말 사는 맛이 나고 있는데 왜 죽어야 하는 거야? 죽기 싫어. 살고 싶어. 부모의 마음도 찢어집니다. 곁을 지켜주던 언니의 마음도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보탤 힘이 없습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원고는 책으로 나옵니다. 그 친구는 먼저 카즈토에게 원고를 보여주었습니다. 마츠리를 찾아와 마지막을 지켜줍니다. 영화 ‘남은 인생 10년’(The Last 10 Years)을 보았습니다. 일본 영화입니다.
천국, 거저 갑니까?
앞에서는 오래 전에 나온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20세기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서 미국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십여 년 전의 일입니다. 미국에서 출판된 하나의 책이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뉴욕타임즈 17주 연속 종합 1위를 기록하고 미국 출간 5개월 만에 300만 부가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모 일간지에 이 책이 크게 소개되었는데 그 기사 제목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3분간 의식 잃었던 소년 --- “천국 여행했어요”’입니다. 4살 소년이 맹장염 수술 도중 잠시 의식을 잃은 가운데 천국을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그곳에서 자기가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할아버지를 보고 왔다고 하여 옛날 가족사진을 보여주니 그 할아버지를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본 예수님과 사람들, 천사 그리고 집 등을 명확하게 설명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소문을 타고 유명해지자 대형 출판사가 책을 내자고 하여 책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21세기 판 ‘내가 본 천국’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사실 여부를 떠나 거기든 여기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역시 천국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비단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도 죽은 후의 일에 대해서 궁금해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정말 좋은 곳인가 보다. 그러니까 한 번 가면 돌아오는 사람이 없지.’ 그럴지도 모르지요. 모르기 때문에 죽은 후의 세상은 기대가 되기도 하고 또 한편 두렵기도 합니다. 이러한 궁금증을 가장 확실하게 풀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 성경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천국에 대해서 말씀은 하고 있는데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래서 자꾸 엉뚱한 곳에서 그 답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견고해지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든든히 서고 앞으로의 신앙생활에 덕을 세우는 것이라면 그런대로 유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의존하여 성경은 제쳐두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유익보다는 해가 더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천국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놀라운 비밀이고 우리가 목숨을 걸고 바라볼 만한 비밀이지요. 그러므로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 곧 성경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는 비사 곧 비유로 기록된 천국을 읽고 봅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밝히 보게 되는 날이 옵니다. 이 말씀이 기록된 지 근 2천 년이 됩니다. 어쩌면 이제 때가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정말 그 좋은 때를 맞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경성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잠도 자지 말고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지요. 하나님 말씀에 귀를 열고 눈을 열고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행 13 :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이런 잘못을 다시 하지 않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셔도 모르고 천국도 못 들어갑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세상에 처음 있었던 하나님 나라를 압니다.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사람 아담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 동산을 거니셨습니다. 창 3 :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에덴동산을 거니시던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왜요? 하나님 말씀을 거역했거든요. 죄를 지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는 생령, 살아있는 영이었던 아담이 이제 죽은 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아담은 더 이상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이지요. 죄는 점점 더 늘어나고 수명은 점점 더 줄어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수명을 제한하십니다. 창 6 :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에덴, 천국에서 쫓겨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영생도 떠났습니다.
우리가 흔히 ‘심령천국’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설령 우리가 천국에 있다 해도 그 마음이 시기 질투 불평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천국이 되기 전에 먼저 우리 마음이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천국이 되려면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아담처럼 생령이 된다면 우리는 천국에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죄인에게 들어오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씻어야 합니다. 어떻게 죄를 씻습니까? 렘 2 : 22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우리의 힘으로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요1서 1 :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어디 가서 얻을 수 있습니까? 이 ‘피’가 피가 아니지요. 요 15 :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여집니다.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고 채워지면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깨끗해진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옵니다. 비로소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천국이지요. 눅 17 : 20 - 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먼저 내 안에 있고 나아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히 8 : 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그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도 않겠다고 하십니다. 12절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천국에서 영생을 누립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멸망시키려 하는 마귀가 가만두고 보고 있지 않습니다. 벧전 5 : 8 - 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1 : 12) 그래서 마귀가 에덴에도 침노하였고 예수님도 미혹하려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보통 신자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고 룰루랄라 할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고 다시 침륜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딤전 6 :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그런 유혹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언제라도 그리고 누구라도 빠질 수 있습니다. 괜찮다고 스스로 자만하면 마귀의 밥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도 가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다, 구원 받았다, 하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병들던지 죽든지 할 것입니다. 이제 겨우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서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목적지는 한참 멀었습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았다고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한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싸워서 쟁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믿기에 담대하게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선다면 광야에서 끝장날 것입니다. 민 14 : 28 - 30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것은 구약시대의 사건이지만 바로 우리 시대의 거울입니다. 누가 당한 징벌입니까? 세상 이야기가 아니지요. 바로 애굽에서 나온 하나님 백성이 당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똑같은 처지로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가만 앉아 있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광야를 지나가게 하고 원수와 대적하게 하십니다. 힘든 일, 어려운 일, 괴롭고 아픈 일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로 성장하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천국의 혼인잔치입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신랑이 되어 신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되려면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결혼을 하려면 결혼할 만큼 우선은 자라야 합니다. 젖먹이를 시집보내지는 않습니다. 혼인을 할 만큼 장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부들이 그만큼 준비가 되었는지 사뭇 걱정됩니다. 히 5 : 13 - 14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우리의 양식이 두 가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곧 젖과 단단한 식물입니다. 우리의 양식은 물론 성경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말씀에 두 가지가 있다니 무슨 뜻입니까?
젖을 먹는 어린아이가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결혼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지요. 그러므로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자라기를, 그래서 장성한 자가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언제까지 젖을 먹고 있겠습니까?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리 길어도 4살까지 젖을 먹으면 그만입니다. 5살, 10살, 20살까지 젖을 먹겠다고 하면 부모는 걱정합니다. 예, 처음에는 걱정하고 다음에는 불안해합니다. 타이르고 그 다음에는 때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이제는 병원에 보낼 것입니다. 잘못된 거죠. 병입니다. 정상이 아니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5년 10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거기서 거깁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그게 다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다, 나는 구원받았다. 천국 들어가는 일 염려 없다. 그렇습니까? 이런 어린아이를 예수님이 신부로 맞이하실라나 모르겠습니다. 저라도 거절할 것입니다. 차라리 애를 키우는 것이 낫지 어떻게 결혼생활을 합니까? 그게 전부라면 성경은 뭐하려 주셨답니까? 자그만치 1,600년이라는 긴긴 세월에 걸쳐 기록하신 성경입니다. 그 오랜 수고를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천국이 어떻게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가 보겠습니다. 마 13 : 19 - 23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다시 말하지만 천국은 우리 심령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심령이 4 가지가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 심령에 들어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꾸면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그 가장 확실한 견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예수님은 곧 천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천국을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소위 ‘쇠귀에 경 읽기’가 됩니다. 그 즉시 마귀가 채갑니다. 19절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런 덕도 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닫기를 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엡 1 :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까, 믿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지요. 마치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요 1 : 1)을 알려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거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11 :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그 분을 찾아야 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찾을 것이고 계시의 정신을 받은 자가 찾을 것입니다.
돌밭 같은 심령도 있습니다. 21절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받으면 반드시 마귀의 훼방이 따릅니다. 그 말씀을 인해서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납니다. 자기가 여태 알고 있던 말씀과 다르다고 아우성입니다. 배우지 못하게 하고 밖에 다니지도 못하게 막습니다. 그런가보다 하고 지레 겁먹고 말씀 배우기를 포기하지요. 그런가 하면 복잡한 심령도 있습니다. 22절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말씀이 맞기는 맞는 것 같은데 마음은 항상 콩밭에 가 있습니다. 먹고살 일이 바쁘고 재물에 대한 욕심에 말씀을 담을 그릇이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이 있게 마련이지요. 23절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비록 하나가 뿌려지지만 결과는 30, 60, 100 배입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하나님 나라는 작게 시작되어도 크게 자라는 것입니다. 욥 8 :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말씀은 개업하는 사업장에 붙이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보다 자세히 보겠습니다. 겨자 씨 하나가 큰 나무가 됩니다. 마 13 : 31 - 32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천국이 겨자씨 한 알 같답니다. 그런데 자라갑니다. 나무가 됩니다.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자라갑니다. 결국 우리는 나무가 됩니다. 그 때에 새들이 옵니다. 말씀이 들어왔는데 가만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마귀가 와서 채갑니다. 일단 들어와도 말씀이 뿌리내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기왕의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과 경험과도 싸워야 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근심거리나 욕망과도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이겨야 결실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때에 새들이 옵니다. 성령이 오시는 겁니다. 천국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천국에 가겠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때를 분별하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사는 때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유대인들은 그냥 율법 따라 신앙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자 상황은 바뀝니다. 더 이상 율법만 붙잡고 있으면 천국과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셨습니다.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어찌됐든 이제부터는 예수님께로 가야 아버지 계신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싫다면 버림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짖어도 소용없습니다. 마 7 :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곧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제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초림 때의 일이 오늘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고전 10 : 11) 우리가 지금 어느 때를 살며 신앙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미 복음은 세계를 돌았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인정하기 싫은 옛날 바리새인 같은 목자들,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자기 밭에 매여 있는 자들은 그 밭에서 묶여 불살라지고 맙니다.(마 13 : 30) 예수님이 찾으시는 곡식이라면 추수되어 곡간으로 옮길 것입니다. 그러니 곡식으로 자랄 때까지 인내로 기다리며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밭에 남아있는 가라지들이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지막 때 이루어진답니다.(마 13 : 24 - 30) 그러므로 그 때까지 우리는 말씀으로 신부 수업을 받으며 부지런히 자라야 합니다. 모두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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