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걸 장군
그는 16세기 동북아 최강의 조선 수군을 만든 자이다
충무공에 가려, 이런 훌륭한 장군의 업적이 어필이 안된 것에 대해, 애석하게 생각이 들며,
우리 세대에서는 반드시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
7년 조일전쟁(1592~1598)은 동북아의 주요3국이 모두 전쟁 당사자였던
명실상부한 동북아의 세계대전이었다.
7년 조일전쟁 기간 중, 전장이었던 조선 앞바다의 제해권을 쥐고 최강의 수군으로 군림했던 것은
명나라도 일본도 아닌 우리 조선의 수군이었고, 그 수군의 지휘자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었다.
그의 지휘 아래 조선 수군은 패배를 몰랐다.
왜 조선 수군이 최강이었는가?.
판옥전선이라는 최강의 전선과 천,지,현,황자총통으로 대표되는 최강의 무기체계와
세기를 뛰어넘는 선진적인 전술. 오랜 기간 숙련된 최강의 수군과 뛰어난 수군 장수들을
보유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 수군의 지휘자가 바로 명장인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었다.
16세기 동북아 최강의 수군, 조선수군의 전설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이끄는 전라좌 수군에서
시작되었고, 그 기초를 세운 것은 당시 전라좌수군의 조방장이었던 노장 정걸 제독이었다.
정걸 장군은 1514년 고흥군 포두면에서 출생했으며, 자(字)는 영중(英中), 호는 송정(松亭)이다.
1544년 30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며 출사했고, 훈련원봉사, 선전관을 역임한 후,
1553년 서북면 병마만호, 1555년 을묘왜변 진압때 달량성 전투에서의 전공으로 남도포 만호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1556년 부안현감을 거쳐 1561년엔 북방 함경도의 온성부사,
1568년엔 종성부사로 있으면서 북방을 어지럽히던 여진(女眞), 즉 야인(野人)토벌과
국경수비에 공을 세운 후 1572년과 1578 경상우수사, 1577년 전라좌수사,
1583년 전라병마사, 1584년 창원부사, 1587년 전라우수사를 역임했다.
40년이 넘는 기간을 군직에 있으면서 북방에서부터 남해안 전국의 각 군진에서의
풍부한 근무경험,여진과 왜구와의 풍부한 전투경험. 그리고 판옥전선 개발과 각종 무기류 개발과
제조에 능통한 명실상부 최고의 무기기술자, 군무와 전술전문가였다.
이러한 이유로 은퇴해 있던 그를 충무공 이순신 제독께서 70대 후반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청하여 전라좌수영의 조방장(助防將)으로 임명했다.
정장군의 입장에서 보면, 수군 통제사의 새까만 후배, 나이가 무려 32살이나 차이나는
그런 이순신을 상관으로 깍듯이 모신 다는게, 일반인의 사고로 가능한 일인가?.
1591년 조방장으로 부임한 정걸 제독은 조선 수군의 주력전함인 판옥선 건조와 전력확충,
화전과 철령전 등 무기제조, 기타 군영의 운영과 전술에 대한 자문역으로 활약하게 되고
1592년 4월, 7년 조일전쟁이 발발하자 1592년 5월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사천, 당항포, 당포해전과
7월 한산도대첩, 9월 부산포해전에 이르기까지 참전하여 큰공을 세웠다.
1593년 2월, 충청수사로 행주산성에서의 전투가 치열할때, 조선군의 화살이 거의 바닥이 나,
일부지역은 목책이 뚫여,육박전을 감행하는 그런 찰라에, 정걸 제독의함대가 새까맣게 몰려 왔다.
바다가 전문인 일본 수군의 육지 전쟁에서 남서 해안의 제해권을 쥐고있는 조선수군 때문에,
이들은 배도없었고, 한강을 거슬러 충청 함대가 진격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들은 식량과 군수품 조달하고, 그냥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 한강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강 주변에 진을 치고있는 왜군들을 오는 날의 함포 사격으로 박살을 내 버렸다.
병사들이 주둔 하려면, 식수 때문에 강 주위에 숙영을 하여야 하는데, 한강을 장악하다 보니,
추가 지원군 까지 7만의 병력이 발이 묶기게 된다.
그는 팔순의 나이로 1595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고흥으로 하향하여,
1597년 82세의 일기로 영면하였으며..정걸 제독의 아들 영광군수 정연과 손자 정흥록 또한
정유재란때 왜군을 토벌하는 전투에서 전사하여 3대가 나라에 충성을 하는 모범을 보였다.
정걸 제독의 업적( 판옥전선 개발).
고려 말부터 대 왜구전쟁을 통해 성장하기 시작한 고려의 수군은 조선 초기에서도 역시
동일한 목적으로 전함개발 및 수군전력 확충이 이루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정지 제독의 관음포 대첩,고려 말 박위, 조선 초 세종원년에 류정현, 이종무,
최윤덕 등이 이끄는 수군을 동원하여 쓰시마(對馬島) 정벌이란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조선 초의 우리 수군 주력전함은 대,중,소 맹선(猛船)으로 조운선을 겸하여
몸집이 우둔하고, 기동력이 떨어져 군선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어왔고,
실제로 중종때의 삼포왜란때,부터 명종때의 사량진왜변(1544년), 을묘왜변(1555년)을 거치며
왜구와의 전투에서 한계를 노출하여 새로운 전선개발과 전선개량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왜구의 전함이 더 빠르고 기동력도 좋은데다가..왜의 전선도 규모가 커지면서 위력이
더해진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정걸 제독은 을묘왜변때 도순찰사 이준경(李俊慶)의 휘하에서 종군하여, 달량성(達梁城,전남 영암)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군공으로 정걸 제독은 남도포 만호와 부안현감 등을 거쳤는데,
을묘왜변때 왜구 토벌과정에서의 전투경험을 반영하여 새로운 전함을 창제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판옥전선(板屋戰船)이다.
판옥전선의 장점은 이와 같다.
7년 조일전쟁 당시 왜군의 주력전함인 아다케부네(安宅船)과 비교하여 말하자면,
판옥선은 배의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 왜선은 뾰족한 첨저선(尖底船)이다.
복잡한 해안지형과 섬이 많고, 암초가 많은 좁은 물목이 있는 그리고 조수간만의 차가 큰
우리나라의 남서해안에서판옥선은 물론 왜의 전선보다 속도는 처지지만 거의 모든 해역에서
전투수행과 기동이 가능하고 전장 선택에서 판옥선이 강점을 가진다.
또한, 판옥선의 주재료는 소나무, 왜선의 주재료는 삼나무..강도가 다르다.
그리고 못을 사용하지 않고, 참나무 못이나, 대나무 못을 사용하여, 쇠못으로 사용하는
일본 배는 세월이 지나면 파손되나 나무못은 오히려 더 단단해 진다.
판옥선과 안택선이 정면 충돌했을시 깨지는 것은 안택선이다.
판옥선은 나무못으로 건조하고 왜선은 쇠못을 이용하는데, 왜선은 이로인해 충돌에 약하고
쇠못이 소금물에 삭기 때문에 내구성에도 문제가 생긴다.
판옥선은 내구성과 강도가 강하기 때문에 화포장착과 발포를 해도 배가 견뎌내지만
안택선은 내구성과 강도가 약하여 우리의 화포장착을 하면 배 자체의 파손 위험이 있어
많은 화포를 실을 수 없고, 파손을 피하기 위해 배 정면에 줄로 묶어 2문정도만 가능한 정도이고
정확하게 배에 거치할 수 없어 포격전에서의 정확도도 크게 떨어진다.
판옥선은 선체가 크다. 왜의 안택선이나 명의 호선(虎船) 보다 큰 규모를 자랑한다.
판옥선의 선체가 높고, 대형화된 것은 백병전에 능한 왜군의 주요 전술인 도선을 저지하기 위함이며,
우리의 주력무기인 활로 위에서 아래를 보고 사격함에 정확성과 위력을 더하기 위함이다.
뿐만아니라 판옥선에는 판옥으로 된 장대에 지휘관이 위치하여 전투를 지휘하고, 윗층에는 활과 총포로
무장한 전투병력이 위치하고 아래층에 배를 젓는 격군이 위치하여 기존 배와는 달리
전투원과 격군의 위치를 분리함으로써 전투수행 및 배의 항행을 위한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뿐만아니라 안택선이나 명의 전함과는 달리 판옥선은..제자리에서 선회가 가능하다.
이는 화포를 가장 많이 배치할 수 있는 양측면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며
화포운용의 효율성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께서 원군으로 온 명 수군제독 진린의 환심을 사고자 선물했던 것이
바로 조선의 주력함인 판옥선 2척이었고, 이 전선은 명 수군제독 진린의 기함이 되고
또 부총병 등자룡이 승선하였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판옥전선이 일본 안택선은 물론 당시 명 수군의 주력전함보다 우월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돌격함인 귀선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최초의 귀선(龜船)은 태종대왕대에 이미 있었다한다.
그러나 귀선을 전투선, 돌격함으로 태어나도록 한 것은 전라좌수군 소속 군관 나대용(羅大用)의 공헌이었다.
귀선의 모태인 판옥선의 개발자인 정걸 제독이 또한 1591년부터 전라좌수영에 조방장으로 있었다고 한다면..
귀선의 개발, 개량과 건조에는 정걸 제독 또한 관여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한 것이다.
1591년 전라좌수영에 조방장으로 부임해 온, 78세의 노장..정걸 제독.
충무공 이순신 제독보다 나이로는 31세, 군직에 입문한 것은 32년이 앞섰고. 전라좌수영의 선임 수사이면서
전라우수영과 경상우수영, 전라병마사까지 역임한 대선배이다.
그럼에도 그는 초임 수사로 부임해온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특별한 청으로 조방장으로 부임했고,
그 직분에 충실했다.
(참으로 대단 한 분이시다)
조방장(助防將)이란 직책은 뜻을 풀어보면 말 그대로 주장(主將)을 도와 방어하는 장수이다.
때때로 전선에 나서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첨사(僉使)나 만호(萬戶)처럼 직속으로 배속된 병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주장에 대해 작전 등 군의 운용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서 자문에 응하고 조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책무라 할 수 있다.
거의 50년에 달하는 풍부한 군경력과 풍부한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수군의 기본인 전함과 병기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정확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정걸 제독이었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전라좌수사로 임명되기 10년전에 전라좌수영 소속 발포만호로 있었으며, 전라좌수사 임명전, 진도군수와 가리포첨사에 임명되기는 하였지만 실제 부임하지는 못하였고
그외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군 경력은 중앙과 북방 함경도지역에서 있어 수군 지휘와 전투경험이 일천했기에 충무공 이순신 제독에게 있어 정걸 제독의 존재는 그만큼 중요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7년 조일전쟁 당시..경상우수사 원균의 경우..물론 충무공 이순신 제독보다 나이도 많고, 군경력도 빠르지만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상관이 되고 난 이후에도 불평, 불만을 일삼고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인 것과는 상당히 비교가 되는 항목이다.
만약에 정걸 제독이 1595년 은퇴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더라면..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파직되어 한성으로 끌려간 상황에서도 흔들리는 조선 수군을 다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원균이라도 정걸 제독이란 존재는 항상 의식해야 할 것이고, 그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그토록 처참하게 무너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16세기 말, 동북아 최강의 수군은 조선 수군이었다.
최강의 전함과 최고의 지휘관, 세기를 앞서가는 선진적인 전술체계, 숙련되고 투지넘치는 조선 수군 한명, 한명의 존재.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군의 생명은 전선이고, 그 주력전함인 판옥선을 설계하고 그 운용전술과 무기제작에 까지 관여하여 체계를 세운 사람이 바로 정걸 제독이니 그를 최강 조선 수군의 설계자, 조선 수군의
아버지라고 평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무패신화의 뒤엔 그의 존재가 있었다.
그런데..안타까운 것은 최강 조선 수군의 뼈대를 세우고,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여 군공도 높았으며, 그의 아들과 손자 또한 7년 조일전쟁에 참전하고 희생되었음에도.그는 그의 공헌에 대해 당대에도 그렇고 후대에도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나라에 오랜 기간 충성을 하고 공헌이 높은 신하에게는 의례..시호가 주어진다.
그 시호가 정걸 제독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대단히 불공정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다행스럽게도 몇해전부터 조금씩 정걸 제독의 존재가 알려지고 재평가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우리는 정걸 제독을 단순히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함께한 수군 장수가 아니라.16세기 말 동북아 최강의 조선 수군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독보적인 위치의 장수로서, 평생을 나라를 위해 싸우고 아들과 손자도 나라에 바친 진정한 군인으로서, 정걸 제독.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방랑가족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