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분명 그때도 이런저런 자원봉사를 했을 터인데 학교에서 주어진 활동을 하다 보니 별다른 인상이 남지 않았던 것 같다. 중학교 때 외국 생활을 하면서 한인회 바자에서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구두닦기 코너를 운영했다. 스스로 결정해서 실행에 옮긴 경험을 통해 자원활동이 보람차고 가슴 벅찰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고등학교 때는 마음의 여유가 별로 없었다. 요즘처럼 모두가 일정 시간의 자원봉사활동을 해야 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봉사라기보다는 기부에 가까울 수 있는데 선명하게 기억나는 한 사건이 있다. 학교 운동장에서 전교생 아침 조회가 있었는데 사회 보던 선생님이 한 학생이 입원해있고 혈소판인지 백혈구인지 수혈이 급하게 필요하니 당장 병원 가서 헌혈할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거의 자동으로 뛰어 나가 다른 두 학생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헌혈 경험이 몇 번 있었기에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약간의 용기, 약간의 공감, 그리고 약간의 익숙함이 자연스러운 자원봉사를 가능하게 했던 것 같다.
대학 1, 2학년 때는 이런저런 자원활동을 해볼 수 있었다. 고3 때 애용했던 동네 마을금고에서 운영하는 독서실에서 학생들의 공부를 돕는 활동을 했다. 성당 주일학교에서 초등부 교사를 하면서 매주 주말뿐만 아니라 방학 중 캠프를 준비하기도 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만남, 이런저런 갈등들, 그리고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딜레마와 한계들, 자원활동은 사람과 사회를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학생회 활동은 봉사활동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측면이 있다. 학생 자치나 복지와 관련된 활동을 제외하고는 사회참여활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대가 없는 사회적 기여라는 측면에서 보면 봉사활동이다. 앞으로 이처럼 많은 노력과 시간, 열정을 가지고 대가 없이 헌신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또 볼 수 있을까. 왜 그때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을 충분히 알고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조금 지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이다.
삶 혹은 활동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자원활동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은 지금 몸담은 ‘공감’에 들어오고 나서다. 법을 통한 사회적 약자의 보호, 사회적 변화를 꾀하는 비영리법인인 공감은 초기부터 자원활동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적어도 수백 명이 이 프로그램을 거쳐 갔고 이들은 법조, 언론, 학계 등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내부적으로 여러 차례 심각한 논의를 했다. 자유 형식이던 신청서는 이름, 연락처 등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요구하는 인권 친화적 신청서로 대체됐다. 그 핵심이 업무지원인가 교육인가, 소위 ‘열정페이’와 무엇이 다른가를 논의했고 단순한 행정적 업무보조 활동을 배제했다. 자원활동을 위한 엄격한 선발과정은 정당한가를 놓고 격론을 벌여 서류심사-면접으로 이어졌던 선발과정을 추첨제로 바꿨다. 자원봉사활동이 자발적인 사회적 가치의 창출 활동을 통한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 고민해야 할 것들은 여전히 많다.
자원활동을 하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꾸준히 연락을 받는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종종 국경을 넘는다. 자원봉사를 하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을 온전히 잘 담아내는 것도 사회가 반드시 해야 할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스스로 자원봉사활동을 했던 순간들, 수많은 사람의 자원활동을 통해 도움을 받았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잊지 못할 그 순간들의 열정과 용기에서 희망과 내일을 본다.
황필규, 가브리엘,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