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는 말벗이 있어야 하고, 세상살이에는 인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운수가 좋은 날엔 옆 좌석에 헤어지기 아쉬운 말벗을 만날 수 있다.
여느 대중교통을 이용했을 적에도 그렇지만 고불고불한 시골길 완행버스를 탔을 때는 더욱 그렇다.
대화의 주제는 뭐든 좋다.
세상 이야기나 구수한 농담이 오가면 인정도 오가서 차(車) 안은 활력이 넘친다. 파도처럼
넘실대는 초록의 보리밭과 저녁 짓는 연기가 자욱한 시골 마을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속살이 포슬포슬해지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상대는 남녀노소 가릴 것이 없다. 입담 좋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좋다.
구수하고 은은한 이야기 속에서 인생 풍상(風霜)이 담겨져 배울 것이 많을뿐더러, 가다가
한바탕 너털웃음을 짓는 얼굴에는 사람 냄새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농을 척척 받아 넘길 줄 아는 넉살 좋은 사람이 좋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남자보다는 여자가 좋다. 좌석이 몇 군데 비어 있을 경우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예쁜 여자 옆에 앉는 게 본색이다.
사내놈은 모두 도적놈이라고 내가 뭐 손이라도 만져보려는 야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땀
냄새 나는 사내들보다 화장 냄새가 좋아도 좋고, 대화하는 데 조근해서 좋다. 대체로 여자는
무디고 거만한 사람이 흔치 않다. 무딘 여자보다는 말끝마다 톡톡 쏘는 사람이 좋다.
가장 피해야 할 사람은 자연의 운치도 감상할 줄 모르고 거만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옆자리에 앉아 있으면 그날 여행은 망친다.
그러기에 여행을 하려면 일수(一手)가 좋아야 한다. 여자라도 대화하기에 중년은 넘어야 이야기가 술술 풀린다.
너무 젊은 여자는 나같이 쉰 살이 넘은 사람은 아예 상대를 해 주지 않을뿐더러 늙은 주제에
성희롱이니 뭐니 하면 웃음거리가 될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한다.
여자가 중년이 되면 체내의 호르몬 분비가 많아서 성격이 둥글둥글해진다.
그래서 여자가 중년이 되면 못 할 말이 없게 되고 낯선 남자에게도 예사로 붙임성 있게 주고받을 수 있어 좋다.
남자의 경우는 소주 몇 잔정도 대작할 수 있으면 좋다. 술이 몇 순배 돌면 금방 친구가 된다.
호기로운 웃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차중 정담(情談)은 최고이다.
그래서 나는 ‘술(酒)이 종합예술’란 표현을 한다.
남자나 여자나 무뚝뚝하면 재미가 없다. 이쪽에서 말을 건네면 대답 한마디로 끝내버리는
위인은 정나미 떨어진다. 이야기 중엔 간혹 유머와 위트가 있어야 재미있고 정을 느낄 수 있다.
몇 해 전, 석류 알 터지는 소리가 유난히 탐스러운 어느 날이었다.
문화유산답사를 위해 전남 강진 가는 버스를 탄 적이 있다. 옆 좌석에는 품위 있고 단아한 할머니 한 분이 앉았다.
나는 말을 건네기를 주저하다가 농을 넌지시 던져보기로 했다.
“할머니, 올해 춘추가 어찌 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일흔이 넘었어요.”라며 살포시 웃었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제법 큰 소리로 손뼉을 치면서 옳지 되었다 싶어 할머니께 한마디 던졌다.
“할머니 저희 집에 비슷한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중매를 서겠어요.” 이에 할머니는 싫지 않은 양 허허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할망구가 간밤에 꿈이 좋다 했더니 오늘 혼인길 열렸구나.” 하시며 연하의 남자가 좋으니까 젊은 아빠가 장가들라고 했다.
아이고! 내가 밑졌다는 생각을 하며 “네, 할머니 그러지요.” 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내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내가 조금 당황해하자 할머니는 한술 더 떠 “할망구에게 돈 보고 장가들어서는 안 된다.”며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이에 질세라 “누님 같은 마누라 찾고 있었다.”라고 하자 차중은 여행객들의 웃음으로 차 안이 들썩했다.
이래서 악의 없는 농담으로 일상에 지친 여행객들의 청량제가 되었다
. 할머니와 나는 잠깐 동안 부부의 연을 맺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가 오갔다. 대화는 할수록 재미있고 재치 있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먼저 내리면서 ‘인생은 여행’이라고 건넨 인사 한 마디가 노을처럼 아름다운 여운으로 남는다.
그렇다.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세월의 풍차를 타고 있는 것이다.
그 길 외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꽃이 피고 지고 간 인생의 뒤안길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보려고 하지만 이미 지난 것들은 말 한마디 없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세월의 풍차 속에서 영혼이 곱게 물든 할머니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멋진 추억을 남긴 여행이었다.
첫댓글 재미있게 읽어보고...^^
주말 잘보내셔요~~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주신글...
세월의 풍차를 타고
감사히 봅니다.
계절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여유로운 휴일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어너지 충만한 하루되시기를
그래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언변이 뛰어난 사람들 보면
부러울 때가 많지요
나도 말이 없는편이라서...
올려주신 좋은 글에
머물다가 갑니다
행복한 휴일이 되세요~^^
감사합니다.
언변이 뛰어난 사람보다
오히려 다소 어늘한 사람이
좋은 것이죠.
언변이 뛰어나면
중후함이 없지 않을까요?
한번 만나보고 싶은 할머니의 입담......인생은 여행이라고요?ㅎㅎ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인생은 세월의 풍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