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스 강의 물방앗간]
두 권 합해서 900쪽 정도의 책을 6주나 걸리도록 참 오랫 동안 읽었다.
책을 읽고 싶은 욕구와 책을 읽지 말아야겠다는 이성이 은근하게 대립해서이다.
눈이 건강하지 않고, 뇌를 쓰지 않고 좀 더 단순하게 살아야겠다는 판단이 있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 옆에 책은 늘 두고 있다가, 그 둘의 승자가 이끄는 대로 하다보니 6주나 걸렸다.
내게 화장실은 독서의 유혹을 이기기 쉽지 않은 장소이다. 아마도 결혼 이후 버릇에서 시작되었을 거다. 결혼 후 곧장 아이를 출산했고, 워킹맘으로 시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힘들고 숨막히는 그때, 화장실은 유일한 내 도피처였다. 그곳에서 몰래 책 읽는 것이 숨통을 트이게 하며 현실을 감당할 에너지를 주었다.
몇 십년을 그리하다 보니, 화장실에서는 꼭 책을 읽는다. 저절로 집중이 되고 독서의 즐거움이 배가 되는 데, 오늘 아침은 장장 4시간이나 머물며 이 책의 완독을 끝냈다.
참고로 나의 화장실은 우리 집에서 가장 깨끗하다. 언제나 물 한 방울, 티끌하나 없이 늘 청결하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19세기 영국 여류 소설가 4명을 평가한 것을 보고서 '조지 엘리엇'의 책을 읽고 싶었다.
제인 오스틴(1775~1817), 오만과 편견(1813년 발표)
조지 엘리엇(1819~1880), 미들 마치(1860년 발표)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1860년 발표)
샬롯 브론테(1816~1855), 제인 에어(사후 남편이 발표)
에밀리 브론테(1818~1848), 폭풍의 언덕(1847년 발표)
제인과 브론테 자매의 책은 읽은 적이 있고, 작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는데, 조지 엘리엇은 전혀 모르고 있던 작가여서 무척 궁금했었다.
울프의 평가에 의하면, 제인과 조지는 중산층 수준이어서 책을 쓸 종이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브론테 자매는 너무 가난하여 종이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의 영국은 너무나 불평등하고 가부장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여성들은 집필할 자기만의 방이 없으며, 공동 공간인 거실에서 피아노 악보 밑에 종이를 숨겨 놓고 가족들 몰래 몰래 글을 썼다고 한다. 그나마 종이 살 돈이 있는 제인과 조지는 형편이 나은 편이다.
내가 주로 이용하는 도서관에 미들마치는 없어서 대신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을 빌려 왔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글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작년부터 레 미제라블, 양철북, 부활 등과 같은, 사회 고발을 담으며 사상과 철학을 농후하게 다룬 작품들을 보다가, 개인의 이야기를 다룬 것을 대하니 그리 느껴졌던 것 같다.
묵직함에서는 비록 그들의 작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문학적인 표현, 여성의 섬세함 등 매력적인 부분이 많다.
현재란 화산과 지진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평탄한 들판과도 같다(1권 201쪽) 와 같은 구절은 마음에 와 닿는다.
이 책은 조지 엘리엇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녀가 어린 시절에 느꼈던 애정 결핍과 여성으로서 겪은 사회적 갈등이 이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고 책은 설명한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세인트오거스이며, 이 마을은 인근 지역에서 상업 중심지 역할을 하는 오래된 소읍으로 가부장적인 전통사회에서 산업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 중이며,
시간적 배경은 매기의 어린시절부터 20대 쯤 홍수로 사망할 때까지이다.
매기의 외가 쪽인 도슨가 집안과 친가 쪽 털리버 집안의 풍습과 성격, 가치관을 통해 그 시대의 영국 사회의 중산층 계층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며 어떻게 살아갔는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가부장적인 시대에 여성에게 요구되어지는 성품과 외모를 타고 나지 않은 매기와, 시대가 공짜로 주는 우월에 더 보태어 성품까지도 가부장적인 시대에 딱 맞게 태어난 매기의 오빠인 톰.
똑똑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매기, 똑똑하지는 않지만 현실 감각이 뛰어난 톰.
아버지의 판단 착오로 몰락한 집안-물방앗간을 운영하며 약간의 땅을 경작함-을 밖에서의 일을 통해 다시 일으키려는 톰과, 바느질 거리와 같은 소일과 모든 욕망을 체념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매기.
그 때 그녀에게 찾아 온 사랑, 그러나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는 필립은 그녀 집안을 몰락하게 한 원수의 아들이며, 이를 알게 된 톰은 매기를 몰아부치고, 매기는 집을 떠나 2년여 가정교사 생활을 한다.
파산 한 지 7년여 시간 후에 톰은 다시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자립적이고 지적이고 똑똑한 딸을 사랑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매기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이종사촌 루시의 집에 머물게 된다.
거기에서 스티븐을 만나는데, 스티븐은 그 도시 제일의 재력가의 외동 아들이며, 정식 약혼은 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인 루시의 약혼자이다.
스티븐은 매기의 매력에 빠지게 되고 매기 또한 스티븐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지만, 둘은 양심과 명예 때문에 이를 악물며 감정을 절제하며, 매기는 고모네로 피신을 한다. 하지만 스티븐은 매기에 대한 사랑을 이기지 못하고 고모네까지 찾아와서 청혼을 하고, 매기는 거절한다.
그러나 운명은 그들을 놔두지 않는다.
루시는 매기와 필립을 이어주려고 계략을 꾸미는데, 이것이 오히려 스티븐이 매기를 데리고 도피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세인트오그스를 떠나 이웃 도시에서 스티븐은 매기에게 끈질기게 구애와 청혼을 하지만, 매기는 양심과 신념으로 그를 거절하고 5일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톰이 앞장서서 매기를 비난하고, 마을 사람들은 진실과 상관없이 그녀를 비난한다.
매기는 묵묵히 그 비난을 참고 견디며 일자리도 잃게 된 그 때 스티븐의 청혼 편지가 또 오고 매기는 흔들리는데,
잠을 못 이루는 그 밤에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급기야 집이 침수되고, 간신히 보트로 피난하고 톰을 구한다.
그 순간 톰은 전광석화와도 같이 매기를 이해하고 화해하지만, 그 둘은 급류에 휘말리고 만다.
그들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이 책 읽기가 6주나 걸릴 정도로 몰입도가 없었는데, 오늘 아침 4시간을 꼼짝 않고 읽게 만든 건, 스티븐의 사랑과 청혼을 거절하는 매기에게 동화되어서이다.
우중충한 현실에서 잘 생기고 돈 많은 스티븐이 양심과 명예를 다 버리고 청혼을 하는데 이를 끝내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매기에게 매료되고, 불편부당한 비난(여자가 꼬리쳤다. 남에게 해악을 주는 심성이 있다 등등)을 무방비로 감내해야 하는 매기가 안쓰러워서이다.
교구 목사인 켄 박사의 생각을 옮겨 본다.
"아가씨에 대한 증명되지 않은 나쁜 소문을 믿지 않아요. 나도 역시 실수할 수 인간이라 잘못할 수도 있고, 또 열심히 노력해도 잘 안 될 수 있어요. 당신의 경우는 나보다 더 어려웠어요. 당신이 받은 유혹이 더 컸으니까요. 우리 서로 도와서 더 이상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도록 합시다."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용기와 깊은 동정심과 자기 성찰 그리고 관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또한 남을 씹으면서 통쾌함을 느끼지도 않고, 남을 단죄하면서 의기양양해 하지도 않으며, 우리가 사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들 개개인에 대한 사랑 없이도 도덕적 생활과 지고한 종교가 가능하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 그런 정신이 필요하다....
세인트오거스의 부인들이 유달리 선호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회라는 개념이다. 그 개념 덕택에 그녀들은 매기 털리버에 대해 최악을 말하고, 또한 그녀에게 등을 돌리는 것과 같은 자신들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는 일을 하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물론 세인트오거스에 따뜻한 마음과 양심을 가진 여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분명 그곳에도 당시 여느 작은 상업 도시 못지않게 착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착한 남자들이 모두 훌륭하지 않은 경우, 착한 여자들은 대체로 소심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이 사회의 주류적 여론과 다를 경우에는 그 판단의 정확성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2권 400~401쪽)
매기 털리버는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20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사이의 일은 별반 다르지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지금도 정확하지 않은 사실을 기정사실화시켜서 악플이 넘쳐나고, 선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사회라는 개념을 장착한 세인트오거스의 부인들처럼 사고하고 생활하는 것이 주류의 대열에 있으면서 편리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반면 착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목청에서 기어나오지를 못하는 것이 실로 안타깝다.
나는 어떤 스텐스로 살아왔으며 또한 어떤 스텐스로 살아갈 것인가?
마지막 결론이다.
조지 엘리엇은 답을 못 찾은 것이었을까?
결국, 매기의 죽음으로 급하게 마무리를 해버릴 수 밖에 없었을까?
영국 빅토리아 시대,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 스스로도 순종적이길 자처했으며, 자립적이고 진취적인 여성들을 비난했던 시대에서, 조지 엘리엇은 자신만의 답을 찾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비난이 두려워 표현하지 않았던 걸까?
온 마을의 비난 속에서 그래도 그 안에서 매기를 이해하고 격려해 주는 여성은 진정으로 없었던 걸까?
또한 불편부당한 비난을 뚫고 일어서서 꿋꿋이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는 매기를 만들 수는 없었을까?
홍수에서 죽음을 앞두고 톰은 매기를 이해했다는 한마디로 그 오랜세월의 갈등을 화해했다는 걸로 끝내버리는데, 이 부분에서도 어떤 논리와 설명을 찾을 수 없어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소설의 흐름상 그랬던 걸까?
그 시대의 공기와 호흡으로 살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급하게 매기의 죽음으로 마무리를 한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걸까!
마지막 마무리가 개인적으로는 다소 아쉽지만 참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에는 긍정이다.
잔잔한 줄거리로 그 시대의 생각과 생활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으며, 여러 유형의 캐릭터를 만날 수 있으며(요즘 유행하는 MBTI가 소개되는 듯하다), 또한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를 분석하며 그 행동의 동기를 논리적으로 충분히 설명하는 데에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엇보다 문학적인 참신한 표현들이 참 좋다.
PS, 작품에서 '약속, 명예' 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오늘날 이익 앞에서 헌신짝 버리듯 하는 이 단어가 다시 한번 가슴에 와 닿는다.
첫댓글 이전에도 그랬는데
오랜만의 흔적에서 또
고운 기억 속의 '여원'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아요.
첫 댓글 감사합니다.
맛깔나게 글을 쓰시는 초롱한님의 글이 그립습니다.
안녕하시지요~
낮에 바쁠 때 급히 보았고 이제 돌아와 다시 보네요.
'여원'이를 얘기 했는데 무반응이신 거 보니
다른 사람인가 봅니다.
저에게 글을 주문 하시는 거 보니 그동안 단사리님.
게시판에서 떠나 계시다가 오신 게 맞는 것
같아요. ㅎㅎ ......
(그래도 단사리님께서 활발해지셔서 저도 동화되어지면
자동 반응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양심과 신념이 있는 매기에게 매료 되신 성향은
저랑 동급이시고요. 매기 얘기 하려니 한 3절쯩
나오려 하는걸 에효~ 생략할게요 ㅡ ㅡ;;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단사리님.
적절한 타이밍에 딱 잘 등장하신 것 같아요.
마음 가는 만큼 활발해지시기를 바라는 마음
놓고 가요.^^
약속=신의
명예=신망
이렇게 에둘러 해석을 하면
모든게 믿음 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반가운 닉네임
"단사리"님의 글을 보며
나는
법정스님의 말씀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미련 없이 비워 버린다”는...
욕심은 낼수록 영혼과 육체는 무겁게 짓눌리니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가지는 것이 좋다는 뜻이겠지요?
한갑자의 세월을 살아냈으니
이제는 단사리를 실천하면서
좀더 밝고 즐겁게
경쾌한 삶을 살고 싶어집니다....ㅎㅎ
정성스런 댓글, 감사합니다.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미련 없이 비워 버린다”는...
참 좋은 글귀입니다.
실천해 보려 쬐끔은 애써 볼듯요.
한갑자 세월 잘 살아내신 것에 존경의 박수를 드리며, 저도 살아내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처럼 글도 써 보면서요 ㅎㅎ
갑자기 젊었을 때 읽은 D.H.로렌스가 쓴 무지개가 생각나네요 참 읽기어려운 책이었는데 그때 자기자신의 자아를 찾는다는 게 낯서럽고 어려웠는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어려운 듯
댓글 감사합니다.
로렌스를 애초에 모르다가 방금 검색해 봤습니다.
그때는 읽기 어려웠어도 지금쯤은 괜찮지 않을까요
저도 그래서 고전 다시읽기를 취미 삼아 하고 있답니다.
은근 재미 있어요.
@단사리 요즘은 고전보다도 젊었을 때 시간이 없어 못 읽은 책을 꺼내 읽거나 중고 책방에 가 좋은 책을 찾아 읽고 있습니다 요즘은 몇달전에 1000원 주고 산 책을 읽고 있습니다 주말 시골에서아침일찍 일어나 새소리를 들으며 읽으면 책속에 빠진느낌…
생각하니 못 읽은 책중에 고전이 많네요
참말로 이성적이시네요?
<두 권 합해서 900쪽 정도의 책을 6주나 걸리도록 참 오랫 동안 읽었다.
책을 읽고 싶은 욕구와 책을 읽지 말아야겠다는 이성이 은근하게 대립해서이다.>
첨 들어가다가 엄청 웃었습니다,
책을 읽자는 욕심이고 읽지말자는 이성적 판단이라니
직접 읽은 것처럼 전달이 잘 됐어요.
마지막 화두 사회에 대한 애기도 좋네요
사회에서 친한 사람끼리 친하고 다른사람에겐 왕따주는
학연 지연과 친소 관계로 몰려다니며
시스템과 올바른 판단을 망가트리는,
패밀리즘이라든가요 그런 걸 - 잘 봤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웃음 포인트가 다 다르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그 부분이 웃음포인트라니.. 저도 웃음이 나네요.
아까님의 안나 카레니나 글을 읽고서 톨스토이를 다시 들여다 보고, 그제서야 아까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포인트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답니다.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반가운 단사리님~~
단사리님 글이 그리웠어요.
불쑥 선물처럼 올리셨네요.
제 하루들이 이성의 힘을 빌려야 하는지라
감성으로 댓글을 못쓰니
참 속상하네요.
잘 읽고
감사하며
늘 기다린답니다.
방장님, 댓글 감사합니다.
방장님께서 늘 방을 지켜주시니,
이렇듯 마음 내켜서 불쑥 글 올렸답니다.
어느 날엔 감성 충만한 글빨 되는 날도 있겠지요.
잘 지내시다가 어느 날 무시로 볼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