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0년 전, 3월이었다.
2007년 3월2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김연아(당시 17세)가 자신의 쇼트 프로그램 ‘록산느의 탱고’ 연기를 마쳤다.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 함께 점수를 기다리던 김연아, 앳된 소녀 티가 물씬 나는 이 선수는 전광판의 점수를 보고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았다. 잔뜩 놀라 커진 눈과 함께 자막으로 뜬 점수는 71.95점. 여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 세계신기록이었다.
금요일 저녁에 전해진 이 소식은 한국에선 그야말로 ‘충격’과 ‘경악’으로 받아들여졌다.
김연아는 2006년 3월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적이 있다. 2006년 12월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우승했다. 그러나 김연아가 시니어 데뷔 첫해에 나선 가장 큰 대회, 세계선수권에서 이런 수준의 연기를 보여줄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2007년 세계선수권대회는 시차가 없는 일본에서 열렸다. 한국 팬들이 프라임 타임 저녁시간대에 생중계로 김연아의 연기를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충격파는 더 생생했다.
<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까>
당시 ISU 세계선수권의 독점중계권을 갖고 있던 SBS는 당초 2007년 피겨 세계선수권 프리 프로그램 결승전은 밤에 녹화 중계를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김연아가 쇼트 프로그램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폭발적인 화제로 떠오르자 주말 드라마 방영시간을 뒤로 미루면서 프리 프로그램을 생중계했다.
김연아는 당시 허리 부상과 꼬리뼈 부상으로 체력이 떨어진 상태였고, 프리 프로그램에서 점프 때 착지 실수를 여러 번 하면서 최종 순위 3위로 대회를 마쳤다. 프리 프로그램 생중계 시청률은 18.9%를 기록했다.
당시 일본 도쿄에 취재진을 보낸 한국 매체는 거의 없었다. 그만큼 한국 미디어는 피겨를 잘 몰랐고, 김연아가 어떤 수준에 이르러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2007년 세계선수권 불과 1~2년 전, 주니어 시절 김연아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보면 ‘트리플 악셀은 언제쯤 성공할 것 같나’라는 질문과 ‘아사다 마오를 꺾기 위해서는 트리플 악셀이 필수다’라는 설명이 나온다.
2007년 세계선수권에서 김연아는 우승 후보 중 한 명이었지만, ‘설마 한국 선수가...’ 라는 게 당시 기자들의 솔직한 마음에 가까웠다. 더구나 당시 김연아는 각종 부상에 시달리고 있었고, 김연아가 주니어 때 뛰어난 성적을 거둔 건 사실이지만 여자 피겨 선수들은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무너지는 경우도 흔했다.
김연아는 시니어 데뷔 이후 손에 다 꼽기 힘들 만큼 엄청난 기록들을 남겼다. 그러나 올림픽 금메달, 세계선수권 우승, 합계 세계신기록 작성 같은 역사적인 순간 이상으로 2007년 세계선수권 ‘록산느의 탱고’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이 프로그램이 뭔가 특별한 감정을 끌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기술과 예술, 빈틈 없는 프로그램>
김연아가 연기한 ‘록산느의 탱고’는 충격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스피디하고 파워 넘치는 점프와 세련된 스텝, 진보라색 긴 장갑을 끼고 더 또렷하게 드러낸 손동작은 베테랑의 연기처럼 노련했다.
특히나 스파이럴 시퀀스에서 관중석을 ‘잡아먹을 듯’ 강렬한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씨익 미소를 짓는 표정연기는 열 일곱 소녀라고 하기엔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
‘록산느의 탱고’는 김연아가 주니어 마지막 시즌인 2005-2006 시즌에도 쇼트 프로그램으로 선택한 음악이다. 하지만 이때와 시니어 시즌 때의 그것은 완전히 다른 프로그램처럼 보인다.
주니어 때의 ‘록산느의 탱고’도 기술적으로는 고난도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주니어 김연아가 표정 변화가 거의 없고, 음악과 하나가 된다는 느낌이 적은 반면 시니어 김연아의 연기는 1년 만에 완전히 농익어 있다. 보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혹’의 차원이 다르다.
<‘은퇴 고민’ 후 6개월 만의 사건>
도쿄 세계선수권이 열리기 단 6개월 전, 김연아는 진지하게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가 처음 공개된 건 2006년 11월이었다.
김연아가 성인 무대 그랑프리 시리즈(에릭 봉파르)에서 최초로 우승한 후 귀국 인터뷰에서 김연아의 어머니 박미희씨가 이런 내용을 털어놓았다.
이후 언론 보도에서는 ‘김연아가 스케이트화 때문에 은퇴할 뻔했다’는 단순한 이야기로 많이 알려졌다.
당시 김연아는 디스크 판정을 받는 등 허리 통증이 심했고, 설상가상으로 스케이트화는 매번 한 달 만에 무너져 내리면서 망가지는데, 도저히 꼭 맞는 스케이트화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 스케이트화 때문에 발 통증이 더해지고 원하는 점프가 나오지 않아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김연아와 어머니 박씨의 감정 싸움도 심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정황을 종합해 보면, 김연아는 ‘부상’ + ‘경제적인 어려움’ + ‘훈련 여건의 열악함’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폭발 직전까지 갔고, 이게 스케이트화 문제를 계기로 끓어오른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연아와 가족들은 은퇴라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전 김연아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주니어 시절 김연아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모 스포츠용품업체에 스폰서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한 적도 있다. 피겨에 상품성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후 김연아가 ‘국민 스타’가 되자 해당 회사가 땅을 쳤고, 담당자가 문책을 당했다는 건 스포츠계에서 유명한 비하인드 스토리다)
2006년 취재를 하면서 들었던 스포츠마케팅 관계자의 말이 기억난다. 이 관계자는 “보통 스포츠 선수 후원을 할 때 유니폼에 해당 회사 이름을 크게 노출시킨다. 하지만 피겨는 경기복에 아무 것도 붙일 수가 없어서 관심을 갖는 회사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피겨는 한국에서 낯선 종목이었다.
훈련 환경도 열악했다. 김연아는 대표팀 선수라서 태릉선수촌에서 훈련을 했지만, 김연아가 국제대회에서 본격적으로 성적을 내기 전까지만 해도 피겨 대표팀의 훈련 시간은 새벽 시간이었다고 한다. 곽민정 KBS 해설위원은 “훈련 시간대가 너무 안 좋다는 말을 하면 ‘너희(피겨 대표)도 메달 따 와’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승부욕이 대단한 김연아는 주니어 시절까지 훈련량이 굉장히 많았다. 이후 캐나다에서 훈련을 시작한 후 캐나다 코치들이 김연아의 훈련량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김연아는 대표팀 훈련시간으로 배정된 시간 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고, 추가 훈련을 하기 위해 롯데월드 빙상장을 대관해서 밤 시간에 훈련해야 했다.
<껍질을 깬 순간>
김연아가 2006년 9월 대한빙상연맹에 은퇴를 통보한 후 이치상 당시 사무국장이 김연아의 집을 직접 찾아가 설득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때 빙상연맹은 김연아에 대한 지원을 늘릴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김연아가 벼랑 끝에서 다시 스케이트를 신을 결심을 한 건, 결국 경제적인 문제가 조금씩 풀리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연아는 2006년 국민은행 등 몇몇 기업과 스폰서 계약을 했다. 그리고 2007년 봄 매니지먼트사를 바꾸면서 소속사의 추가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이 해 말 코치 교체로 인한 여러가지 잡음 끝에 2007년 1월부터는 주 훈련지를 캐나다로 옮겨 브라이언 오서 코치,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과 함께 훈련을 시작했다.
속을 썩였던 스케이트화는 잘 맞는 이탈리아 제품을 찾으면서 해결됐고, 허리 부상은 병원의 후원을 받으면서 지속적인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이 시점이 김연아의 피겨 인생에서 분수령이 됐다. 김연아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조기 은퇴한 불운한 천재’냐 ‘전설의 피겨 여왕’이냐의 아찔한 경계를 이렇게 넘겼다. 그 모든 것들이 ‘스폰서’와 ‘훈련 환경’이 갖춰지면서 한방에 해결되어 버린 셈이었다.
김연아의 표현력이 갑자기 좋아진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이후 많은 이들이 데이비드 윌슨의 지도가 큰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돌아보면, 김연아가 훈련장 안팎의 문제로 인한 각종 방황과 짜증, 마음의 짐 등을 벗어 던지고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완성되면서 자연스럽게 표현력과 정신력이 한 단계 더 도약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제아무리 김연아가 ‘멘탈갑’이고 ‘대인배 김슨생’이라고 해도 모든 게 꽉 막혀 있는 듯한 2006년 초반의 상황이 계속됐다면 오늘의 김연아가 나오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록산느의 탱고, 당신의 탱고
김연아는 ‘록산느의 탱고’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줬다. 그는 이미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후인 2012년 여름 아이스쇼에서 ‘록산느의 탱고’를 한 번 더 선보였다.
당시 김연아 측은 “록산느의 탱고를 사랑해주시는 팬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소치올림픽 도전을 선언하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시니어 데뷔 프로그램인 록산느의 탱고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2012년 아이스 쇼에서 선보인 ‘록산느의 탱고’는 그야말로 무르익은 연기가 돋보인다. 김연아가 탱고 리듬을 갖고 놀 듯 유연한 안무를 선보이며, 탱고의 힘이 있으면서도 처연한 느낌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김연아는 주니어 마지막 시즌에도 ‘록산느의 탱고’를, 시니어 첫 시즌에도 ‘록산느의 탱고’를 선택했다. 밴쿠버올림픽 금메달 이후 공백기를 가졌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아이스 쇼에서 선보인 것도 ‘록산느의 탱고’였다. 그리고 은퇴 무대인 2014 소치올림픽의 마지막을 장식한 프리 프로그램 음악으로 역시 탱고 음악인 ‘아디오스 노니노’를 선택했다. 시작도, 끝도 ‘탱고’로 장식한 일종의 수미쌍관 작별인사였다.
누구나 그동안 죽도록 노력해온 일들이 나 아닌 외부 환경으로 인해 꽉 막혀서 안 풀리고 답답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진심을 다 해 노력했다면, 어느 순간 그게 봇물 터지듯 풀리는 어떤 ‘순간’이 있을지 모른다. 17세 소녀의 매혹적인 탱고가 보는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록산느의 탱고’는 그래서 참 특별하게 느껴진다. 김연아의 첫 세계신기록을 만든 프로그램이고, 그 자체로 전설의 시작이자 10대의 소녀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그 모든 짐을 벗어내고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 상징적인 몸짓이었기 때문이다.
2007년 그 ‘록산느의 탱고’에는 소녀와 여왕의 모습이 동시에 존재했고, 17세 김연아는 풋풋하면서도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런 김연아가 자신의 점수를 보며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장면은 꼭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우 강렬하게 남아있다.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그럴 것 같다.
링크
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544&aid=0000000006
첫댓글 내 영원한 여왕님 동시간대에 김연아선수 경기 볼수있었던건 영광이야
진짜 윗댓처럼 김연아가 현직피겨스케이팅선수였을때 같은 날 같은 시대에 숨을 쉬었다는게 너무 자랑스러워
연느너무자랑스럽
짝짝짝짝짝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