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습진 / 권오훈
“사모님, 이것 좀 보세요. 습진 맞지요?”
“그러게, 어쩌다 젊은 남자 손이 그렇게 됐어요?”
“우리 장 선생 밥해 먹이고 설거지하고 빨래하다보니 습진이 생겼나 봐요”
옆집의 새신랑이 아내에게 자기 손을 보여주며 하소연했다. 이웃사촌인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다. ‘칠칠맞은 사람 같으니라고 남자 망신은 다 시키고 있어. 부모님이 보시면 얼마나 혀를 차실까?’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옆집에 세든 신혼부부와 친해졌다. 왕래하고 술도 한 잔씩 하는 사이가 되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색시는 학교에서 똑 부러지는 모범교사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어려운 전산업무를 능수능란하게 처리해주어 신망이 높았다. 집안일에는 영 잼병이었다. 빈 그릇이 자주 문밖에 나 앉아 어제저녁 그들이 주문 배달해 먹은 메뉴를 고자질하듯 일러바쳤다. 신랑은 열 살 연상의 잘 생기고 붙임성 있고 성격 싹싹한 개인 사업가였다. 어린 색시의 마음을 얻으려는 일념에 고생시키지 않겠다던 감언이설의 죗값을 받아 싸다고 놀렸다. 주부습진을 외조한 훈장으로 여긴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내는 저런 사윗감 얻었으면 좋겠다며 새댁을 부러워했다.
아내도 예전에 주부습진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 물집 같은 게 생겼다가 터지더니 피부까지 벗겨지길 몇 차례, 손가락 끝 살갗이 얇아져서 조금만 스쳐도 터져서 피가 났다. 아예 반창고를 두 겹 세 겹으로 칭칭 동여매었다.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을 먹고 연고도 발랐다. 까다로운 식구들의 입 때문에 매끼마다 즉석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도 해야 했다. 손빨래를 해야 할 옷도 있어 손에 물마를 날이 없으니 좀체 낫지 않았다. 그런 아내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걱정만 했다. 가끔씩 지나가는 말로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정작 근본원인인 물일을 대신해 준다는 생각은 못했다. 우선은 실적에 목을 매야하는 직장에서의 업무스트레스가 더 큰 고통이었다. 피로누적으로 찌든 내 심신의 안정이 급선무였다.
그녀는 요즘 재택근무를 한다. 일정한 수입은 아니지만 어떤 달은 계약직으로 재취업해서 얄팍해진 나의 월급을 능가할 때도 있나보다. 그래선지 하늘같은 남편을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생겼다. 출근시간이 여유가 있지 않느냐면서 내게 집안일과 친해 보라고 성화다. 아침시간이 바쁘고 중요하니 도와달란다. ‘어쭈구리, 남편이 이제 끈 떨어졌다고 부엌일을 슬슬 시키려 들어.’ 안 그래도 옛날의 호기로움이 한풀 꺾여 우울하고 재미없어지려는 판에 마누라까지 걸고넘어진다. ‘어림없지 여기서 내가 넘어가면 앞으로 남은 생이 얼마나 고달플꼬? 강하게 버텨야한다.’ 들은 체 만 체, 오불관언, 아침 먹고 나서도 이미 봤던 신문을 속속들이 읽고 인터넷 서핑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출근했다. 퇴근해서도 취미생활과 각종 모임을 찾아 이런저런 일을 도모하여 밖으로 돌았다.
우리가 이사 온 지 한참 만에 신랑의 전화를 받았다. 특유의 통통 튀던 목소리가 아닌 착 갈아 앉은 목소리였다. “장 선생이 하늘나라로 갔어요. 제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우리 장 선생이…….” 학교 일이 무척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여린 마음이라 거절을 못하는 그녀에게 모든 잡무가 집중되었다. 집에까지 일거리를 싸들고 왔다. 그날도 건넌방 서재에서 마저 일을 끝내고 자겠다고 했단다. 아침이 되어도 안 일어나 깨우러 가니 급성심장마비로 밤새 생을 달리하고 말았더란다. 주부습진까지 걸려가며 부엌일을 했던 것이 오히려 원인을 제공한 것 같다며 오열했다.
남자도 나이 들면 부엌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말을 퇴직 선배들로부터 많이 들었다. 직장 일에 진저리가 나고 힘이 들 때가 있었다. 하루빨리 이 짓 그만두고 개운한 머리로 좀 쉬면 행복하리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아내인들 평생을 해 온 부엌일이 귀찮고 싫증나지 않았을까? 자기 밥 해먹기도 귀찮다며 점심이나 내가 바깥모임이 있는 날의 저녁식사는 건너뛰거나 식은 밥 한 덩이와 김치쪼가리 하나로 때우는 일이 잦다. 설거지를 거든다든지 간단한 요리는 직접 해 본다든지 하면서 부엌일 노역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면 얼마나 행복해할까.
그래도 그렇지 아내는 맹랑하다. 밥상 차릴 때 수저 좀 놓아주면 안 될까요?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들 좀 꺼내놔 주면 안 될까요? 이왕 꺼냈으니 반찬통 뚜껑 좀 열어 주세요. 이 일 저 일을 은근슬쩍 시키려든다. 이 정도는 좀 해주지 뭐. 배알은 꼴리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부탁하는 가벼운 일들은 해준다. 주말에는 한 술 더 뜬다. “오늘 설거지당번 당신 아니었나요?” 정한 적도 없는 당번제까지 들먹인다. “계란 후라이 하는 거 참 쉬운데…….” 심지어는 요리강습까지 시키려든다. 그러다보니 어리숙한 남편 축에 드는 나는 부엌일의 구렁텅이로 한 발짝 한 발짝씩 빠져들어 가는 중이다. 이러다 나도 주부습진 걸리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습진이 대수일까? 남의 일을 도맡을 만큼 마음 여리지 않은 아내인지라 과로로 쓰러질 염려는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