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등이 아닌 국민학교 시절, 경남 고성군 구만면 구만국민학교 교사 사택(현재 구만면 영회로 1775-24 위치)주변에서의 기억 몇 가지. (아버지가 학교 교사이셨다.)
[네이버 지도: 구만국민학교]
유후, 여름방학이닷! 어약중천(魚躍中天: 물고기가 수면위로 뛰어오름)!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 집으로부터 라면물이 한소끔 끓을 시간 정도 타박타박 걸어가면 국내(川)라는 시내가 나온다. 마을 아이들이 모두 모여 헤엄치고 물장난하는 장소다. 짜다라 속옷이 없던 시절이기에 머서마들끼리 모여 빨개 벗고 놀았다.
‘좆치기’라고 아시는지? 강둑 위에서 몸 전체를 똑바로 일자(一字)로 하여 물속으로 뛰어내리면(그 동작을 ‘사까다치’라 했다. ‘다이빙’의 일본말) 물과의 마찰로 ‘좆’과 불알이 아프기 때문에 손으로 그 부분을 감싸 쥐고 뛰어내리는 까닭으로 붙은 이름이다. 시내 바로 옆에 검은 빛깔의 지점토 지층이 있었다. (미술시간에 흙으로 만드는 공작 활동이 있으면 그곳에서 그 흙을 캐갔다.) ‘좆치기’ 순서. <1> 그 지점토를 까맣게 온 몸에 처바른다. <2> 그 곳으로부터 도움 닿기, 전 속력으로 뛰어서 탄력을 붙여 강둑 쪽으로, <3> 손으로 그 곳 감싸면서, <4> 최대한 높이 점프하면서, <5> 물속으로 전신 자유낙하!
헤엄쳐서 맞은 편 둑으로 나오면 검은 진흙이 깨끗이 씻겨 있었다. 놀다놀다 해가 중천을 비껴가면 배도 고프고 몸이 지쳐 집에 갈 생각을 한다. 시내 둑을 걸어서 못 올라가고 뱃바닥을 둑에 붙여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간다. 집에 가져가려고 고무신 두 짝 안에 잡아 놓았던 피라미, 붕어 새끼들도 물속에 던져 버린다. 너덜너덜.....
귀가. 텅 빈 집. 어머니도 아버지도 동생들도 어디로 마실을 갔나보다. 엄마는 ‘섬 그늘에 굴 따러 가’셨나? 부엌 한가운데 공중에 매달아놓은 보리쌀 바구니를 내려 한웅큼 집어 우적우적 씹어 먹고 찬물 한 사발 들이키고 대청마루에 큰 대짜로 드러누워 낮잠을 청한다. 마룻장 옹이구멍 사이로 바람이 선선, 솔솔 불어온다. 집 앞 개울 건너 밤나무 숲에서 왕성한 매미소리의 떼창이 들려온다. 데시빌이 상당히 높지만 요란한 만큼 오히려 고요하고 적막하다. 스르르.....
바로 집 앞에 작은 시내가 있었다. 이 시내가 국내로 합수한다. 비가 와서 물이 불어날 때면 시냇가 둑에 앉아 호호탕탕 흘러가는 물결을 바라본다. 한참 내려다보면 어느 순간 물결은 정지하고 거꾸로 내 몸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착시, 환시가 생긴다. 즐긴다.
윗마을에 때죽나무가 있었다. 그 열매(‘깨죽’이라 했다)가 독성이 있어 돌에 찧어 물에 풀면 민물고기가 죽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깨죽을 따왔다. 집 앞 개울물 고인 곳에 풀었다. 다라이를 사용해 고기가 모여 살만 한 방죽 쪽으로 시냇물을 퍼질렀다. 이윽고 고기가 흰 배를 드러내며 둥둥 떠나왔다. 무지무지 떠나왔다. 세 가구가 사는 사택의 사모님들, 아이들, 소쿠리, 바케츠, 바가지 등등을 들고 나와 고기를 엄청 잡았다. 그날 어탕 잔치를 했다.
사택 입구에 가지를 거룩하고 멋드러지게 펼친 키 큰 나무 하나가 있었다. 사택의 위치가 이웃 동네로부터 떨어져 있기도 했고, 그 시절 시골 아이들은 선생님과 가족들을 존경 내지는 경외했기 때문에 나 혼자 놀 거리를 발명해야 했다. 나무 둥치를 타고 그 나무 위로 올라간다. 가지가 부드러웠다. 가지들을 한 곳으로 휘어 모아 엮어서 내가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누웠다. 바람은 살랑살랑, 가지 사이로 햇살이 반짝반짝 명멸했다. 일종의 트리 하우스(Tree House) 꾸며 놀기였다. 종종 천막을 둘러치고 흑백영화를 상영하는 유랑 가설극장이 장터에 들어왔다. 들어오는 날이면 석유로 돌리는 모터와 증폭 앰프와 마이크를 사용해 온 동네가 울리도록 홍보 방송을 했다. 나도 그 나무 위에 서서 그 홍보 멘트를 흉내 내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구만 면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저희 한성 유랑극장에서는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하는 ‘맨발의 청춘’, 맨발의 청춘을 가지고 여러분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3박 4일 동안 상영할 예정이오니 바쁘신 와중이시라도 저희 극장을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화 상영 후에는 추첨을 통하여 여러 가지 상품을 드릴 예정이오니 알뜰하게 살림살이도 챙기시기 바랍니다!.”
어느 여름날 한낮, 벼락과 천둥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사방이 트인 마루청에 아버지, 어머니, 나와 두 동생, 가족이 모두 모여앉아 있었다. 번쩍! 우르르쾅쾅! 유식한 아버지가 설명하셨다. “번개는 빛이라서 속도가 빠르고 천둥은 소리라서 속도가 느려. 1초에 340m 밖에 안 돼. 그래서 번개 빛과 천둥소리의 간격이 점점 좁아지면 번개 천둥 구름이 우리에게 가까이 온다는 뜻이지.” 우리는 모두 번개가 치는 순간부터 천둥소리가 나기까지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점점 간격이 좁아져 왔다. 번개가 치고 ‘하나’할까 했는데 천둥소리가 바로 울리며 집 앞의 목화밭 건너 있는 예배당의 종탑에 번개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큰 쇠종이 ‘댕그랑 땡!’하고 우렁찬 소리로 울었다.
유년시절을 이렇게 기꺼이 추억할 수 있는 것은 당근, 부모님의 은혜가 절대적이다. 그 시절의 모두가 겪었던 가난과 소외와 불평등에 상처받지 않도록 나를 온전히 지켜주신 그분들, 이제 두 분 모두 떠나셨다. 아무리 내리사랑이라지만 지난 어버이날은 하루 종일 허전하고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두 분의 명복을 빕니다.
"오, 인생의 모든 여름들이여, 그 짧은 여름의 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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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er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