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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스튜어트 James Stewar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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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노스사이드 777》 (1948) | |
본명 | James Maitland Stewart |
출생 | 1908년 5월 2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인디애나 |
사망 | 1997년 7월 2일 (89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베벌리힐스 |
국적 | 미국 |
다른 이름 | Jimmy Stewart |
직업 | 영화 배우, 공군 준장 |
활동 기간 | 1932~1991 |
배우자 | 글로리아 하트릭 맥클린 (1949~1994, 사망) |
수상 |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베니스 영화제 -볼피컵 남우주연상 |
제임스 메이틀랜드 "지미" 스튜어트 (James Maitland Stewart, 1908년 5월 20일 ~ 1997년 7월 2일) 는 미국의 영화 배우이자 군인이다. 그는 앨프리드 히치콕, 프랭크 캐프라, 존 포드 같은 배우와 함께 작업하였으며 미국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미국 공군에 복무하였다.
그는 《필라델피아 스토리》 (1940) 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살인의 해부》 (1959) 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볼피컵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멋진 인생》, 《현기증》,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등에 나왔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가족은 [관광]을 좋아하고 문화 생활을 열심히 했다. 고철과 기름냄새가 진동하면서 늘 음악이 흘렀고 [문학]지와 [미술]지를 구독했으며 관현악과 오페라 관람도 즐겼다. 유년기때 말수가 적었던 제임스 스튜어트는 기계설계도를 그리거나 화학실험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보이스카우트에서 열심히 활동하기도 했다. 전자제품을 만들어 팔기도 하는 기계 공구상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전쟁과 사업차 출장으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고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루머가 있는데 흑인손님은 친절하게 대했지만 흑인 하녀는 박하게 대했고 제임스는 소극적으로 도울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고 칼럼니스트인 동생은 20살 넘게 차이나는 예술가와 결혼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장래희망은 변함없이 파일럿이 었다. 미국해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당시 미국의 서울대쯤 되는 [아이비리그]에 전원 합격 하던 머서스버그 아카데미에 갔다. 10대 부터 모험적이었던 스튜어트는 친구와 만든 광석 라디오를 팔고(잘팔렸다고) 경험 삼아 도로 작업과 [마술]사를 도우면서 고등학교 학비를 벌고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라틴어]는 싫어했다고 한다. 좋던 싫던 잘하든 못하든 결국에는 해냈고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14세에 갑자기 191 cm 까지 자라 꽃미남에 우월한 기럭지까지 갖추게 되어 어딜가든 눈에 띄고 여러 모델 제의를 받곤 했지만 길이만 늘어서 놀림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악기] 연주를 금지 했지만 [음악]에 소질 있어 [10대]가 되기전에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수준급으로 연주 했다. 운동도 잘했다고 한다. 미식축구 학교 대표팀은 광탈했지만 54 kg 급 팀 센터였고 뛰어난 야구와 육상선수였다. 라디오공학(재즈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문학, 합창단, 말이 느려서 불리했지만 토론대회에도 참여하고 편집자로 활동하는 등 적성을 찾고자 교내 모든 클럽에 참여했지만 가끔씩 데이트겸 영화 보러가는 일이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기였던 이 때, 제임스는 연극부에서 연출과 기획도 하면서 개구리 왕자역으로 연기를 처음 해보게 된다. 그러나 병약했던 제임스 스튜어트는 평소에도 한번씩 기숙학교에서 돌아와 안정을 위한 휴식을 취했지만 건강이 더욱 나빠져 성홍열과 합병증 등을 앓으며 체중도 반지반이나 빠지고 외출도 힘들어지게 된다.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가톨릭] 신자가 아님에도 종부성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다행히 건강을 되찾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흘려보낸 시간이 아쉬웠다고 한다. 대학 입학도 한 해 미루게 된다. 발이 묶여있는 것과 다름없었던 회복기간 동안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린드버그에게 더욱 빠져들고 비행사를 꿈꾸게 된다.
아버지의 모교이자 소규모 프린스턴 대학교을 다녔다. 당시에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도 속해있었다고 한다. 제임스는 대학에서 마천루(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같은)와 거대한 구조물들이 들어서던 시기에 건축을 전공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 프린스턴에는 대학원에만 건축과가 있었고 학부에서는 가업을 위한 집안의 권유로 [전기공학] 전공이었다. 건축과에 진학하기 위한 기계제도 수업에서 모두 [채플]을 설계할때 [미래]적인 [공항]을 설계한 [논문]으로 (데쓰스타 같은거?)동대학 대학원의(동대학 대학원은 뛰어난 면이 있어야 한다고) 건축과 전액 장학생이 되기도 했다. 어느 동네 사람은 학생 제임스가 평소에 여유가 넘치는지 영화속 이미지 보다 느린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과외할동에도 열심이었다. 운동신경은 육상 선수급 이었지만 열심히 논다고 신입생때 부족했던 수학 공부도 해야하고 체중도 늘리지 못해 그만두었는데 그렇게 운동부는 그만두고 치어리더 팀에 들어가서 응원했다. 열심히 응원해서 4학년 때 단장 자리를 꿰찼다고 한다. 연극부에 들고 극장에도 자주 갔다. 후에 영화에서만 보던 스타와 데이트 하게되어 [2D]에서 4D로 차원이 달라졌으니 신기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가 회원이면 자동으로 회원이 되는 가장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사교클럽에서 대학 극단 트라이앵글 클럽 활동과 대담한 조슈아 로건과의 소문만 무성한 관계로 처음에는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다. 조슈아 로건이 회상하기를 제임스는 결코 순진하진 않았고 허약하지만 감수성이 뛰어나 대학의 극단 단원이 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부유하고 결혼은 여러번 했지만 게이였던 로건은 보수적인 프린스턴에서 성향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다녔다. 극단 단원만이 그를 대수롭지 않게 대했고 당시 극단에는 배우 밀드레드 냇윅과 [앤서니 퍼킨스 ]의 아버지 오스굿 퍼킨스도 있었고 사이가 좋았다. 배우 헨리 폰다도 여기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 극단은 소련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자가 많고 개방적 이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조슈아 로건을 따라 연극계 인사를 만나러 소련에 가기도 했다. 연극부와 달리 폐쇄적인 클럽은 [동성애]자가 가입할 수 없었다.[* 1973년까지 미국에서 동성애는 [정신질환]으로 취급되었다.] 클럽 멤버들은 제임스를 게이로 의심하며 냉소적으로 대했지만 제임스는 곧 클럽의 최고 인기남이 된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외모에 피아노와 아코디언 연주로 여대생을 끌어 클럽 멤버들 미래의 신부를 만나게 해주는 은혜로운 님이 되어서였다. 정작 제임스는 자신에게는 너무 수월한 사교에 금방 질려버렸다.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빠져나와 혼자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렇게 알찬(?) 학창 시절을 보내고 졸업 후에는 고향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대공황으로 취업이 어려워졌다. 모교로 돌아가 교수가 되려다 조슈아 로건에게 설득당해 뉴욕 으로 가게된다. 사실 제임스는 조슈아 로건의 연극 공연(제임스가 뮤즈인)에서 일찍이 워너브라더스 캐스팅 감독의 눈에 띄어 명함도 받아 놓은 상태였다. 공연에서 훌륭하지만 항상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것이었다. 뮤지컬 에서 코메디는 아닌데 웃기긴 한데 웃을수는 없는 분위기로 늘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제임스의 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제임스가 문란한 연예계에서의 성공보다는 어리지만 사업수완이 좋아 3대째 내려오는 가업을 직업으로 삼았으면 싶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아버지를 공경하는 효자였지만 결국 진로는 타협하지 않고 해보고 싶은 거 다해보고 살게 된다.
1934년부터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교내 극단활동은 가벼운 과외활동으로 여겼지만, 뉴욕에 가는 마거릿 설리번을 따라 할리우드까지 가게 된다. 설리번은 헨리 폰다와도 결혼 했었는데 제임스를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남편 리랜드 헤이워드와 셋이서 비행도 하고 여행도 다녔다. 젊은 시절 설리번 같은 사람이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대놓고 말해서 우울한 표정의 사진과 편집되어 기사로 실리기도 했다. 할리우드 초기 시절 연기나 표현력은 시선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지만 키가 너무 크고 싱거워 보이는 인상이라 어디에 활용해야 적절할지 캐스팅 디렉터들은 난감해하며 계약을 주저하기 일쑤였다. 그도 처음에는 한두 편이지만 단역과 조연으로 시작했고 펄 벅의 소설대지를 영화화한 작품에서 반나절을 걸려 중국인으로 분장하지만 스크린에서 전혀 중국인으로 보이지 않아 통편집 당하기도 했다. 마거릿 설리번이 영화 제작진들에게 함께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부탁하면서 작은 영화에 주연으로 시작해 점점 큰 영화와 메이저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스튜어트는 마거릿 설리번과 릴랜드 헤이워드 부부의 옆집에 살면서 설리번에게 개인 연기 지도를 받았다. 헤이워드는 무슨 상상을 한 것인지 이런 상황은 그의 신경을 긁었다고 한다. 설리번과 공연한 영화 중에 로맨틱 코미디라 할 수 있는 에른스트 루비치의 모퉁이 상점(1940)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메그 라이언과 톰 행크스의 유브 갓 메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으며 사회 생활 전반에 대한 고찰이 있어 로맨스의 감동만으로도 훌륭하기 그지 없지만 전부가 아니다. 설리번과 스튜어트는 최초의 반 나치 영화인 《치명적인 폭풍》(1940)에서 시대상황을 반영한 비극적인 연인으로 마지막 공연을 했다.
연기 경력 전반에 걸쳐 염세주의자나 무례한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했지만 악역은 꺼려서 신인 시절 한 번 해본 것이 전부이다. 할리우드 초기에는 가난한 작가나 기자 역할을 가장 많이 했다. 로맨틱 코미디에 많이 나왔는데 친근하고 귀여운 이웃 같지만 막상 찾으면 없는 적당히 애교 있고 할리우드에 흔하지 않은 수수하고 낭만적인 허당으로 나와 가끔 노래도 부르고 사지가 흐느적거리는 춤도 추며 순수 오락을 선사했다. 동성애자가 아닌것을 증명해 주길 바라는 소속사의 은근한 압력을 의식하여 함께 공연했던 진저 로저스, 헤디 라마 조앤 크로퍼 등과 공개적으로 데이트를 하면서 우정을 쌓기도 했다. 진저 로저스와 주연한 vivacious lady는 지금봐도 섹시하면서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이다.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스튜어트의 팬이었는데 아들이 있다면 딱 지미 스튜어트 같았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다. 낙천적이고 유쾌한 프랭크 카프라의 그를 닮은 영화 속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그것을 가질수 없어요(1938)》에서는 너무나도 많이 양산된 젊고 잘생기고 속물스럽지 않은 재벌가의 아들 캐릭터라 였다. 지금보면 통속적인 드라마 내용인데 그것들의 오리지널이(영상 매체에 한해서) 다 이때 나온 것이다. 이 영화가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1년 뒤에 캐프라의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1939)에 주연을 맡게 되고 처음으로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뉴욕 비평가상을 받는다. 이 영화의 몇 분 안되는 허무맹랑한듯한 결말에 집중하지 말고 감상하게되면 정치라는 것이 어떤 대의보다 개인적인 관계와 경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스튜어트는 언젠가 자신이 영화속 캐릭터를 은연중 모방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이 영화에서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못 받아서 다음 해에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로 받았다고 하기도 한다. 1939년도에는 걸작이 쏟아졌던 해인데 많은 좋은 영화들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묻힌 해이기도 하다. 이 무렵에 안소니만과 존 포드와의 작업 보다는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첫 웨스턴 영화 출연작인 사진(沙塵, 1939)을 찍는다. 수정주의보다 훨씬 앞선 수정주의적 서부극으로 언노운 클래식이라 할수 있겠다. 제임스는 능구렁이 같고 허허실실한 영웅인 적역을 맡아 젊을때의 팔팔함을 발산하며 열연하여 그의 서부극 출연의 밝은미래를 예감케 했다. 그의 초기 연기는 약간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었다. 헐리우드 고전기 극영화 연기스타일이 그런 편이긴 하지만. 그러나 코미디 연기만은 늘 적절한 타이밍과 제스처로 센스를 발휘했다. 자신이 멋진 외모로 관객들의 호감을 얻는건 아니라고 생각 했지만 볼품없는 다리는 콤플렉스를 느끼게했다. 감독에게 부탁해서 다리 대역도 썼다. 《필라델피아 스토리》에도 원래 수영복 입는 장면이 있었는데 캐서린 햅번에게 부탁해서 없앴다. 이때 햅번은 박스오피스 포이즌을 만회하기 위해 큰맘 먹고 총대를 메서 거의 제작자였다.(당시 남자친구였던 하워드 휴즈가 판권을 사줬음.) 프랑수아 트뤼포는 이 영화에서의 헵번과 스튜어트를 미국 영화속 최고의 커플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면 커플은 아니지만. 그리고 비슷한 점은 찾기 힘들지만 이 영화가 미국 드라마 가십걸의 모티브가 된 영화라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 <상류사회(1956)>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나온지 7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이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스튜어트 말고 다른 배우들의 연기는 지나치게 저돌적으로 대사를 쏟아내면서 연극연기의 감정표현이라 조금 구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로 분량도 적은 스튜어트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게된다. 당시에는 최연소 수상이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최연소 수상자는 최근에서야 30대의 기록이 깨졌다. 피아니스트의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2013년 지금까지도 유일한 20대 수상자 이다. 제임스는 수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실전에 지원한 최초의 할리우드 스타였다. 나중에는 스튜어트 말고도 많은 스타들이 참전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이 징병제로 전환하자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체중미달로 불합격을 받자 헐리우드 트레이너의 도움으로 증량했다. 스파게티와 밀크셰이크를 잔뜩 먹고 다음 신검이 있기 36시간 전부터 화장실을 한번도 안 갔다고 한다. 62kg까지 늘렸는데 미달이었다. 결국, 군의관에게 사정해서 합격판정을 받는다. 캡틴 아메리카라면 약물로 몸을 만들었겠지만 현실은 시궁창 그는 신체검사소를 나오면서 소리쳤다. “나 붙었어. 난 붙었어!(I'm in! I'm in!)" 1941년 3월 육군 항공대(공군이 생기기 전임)의 조종 특기 사병으로 전시 군 복무를 시작했는데, 이는 지난 1935년 개인 항공 자격증을 취득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미 전용기도 가지고 있는 숙련된 조종사였다. 이후 그는 비행 훈련을 마치고 1942년 1월 장교로 임관,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는 스타 영화배우라 하여 후방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하거나 위문공연을 하지 않고, 실제로 몇 번이나 폭격작전에 참가하여 공적을 쌓았다. 2차 대전 때 4년 만에 대령으로 진급했다.(전시라서 가능했던 듯.) 공군 양성 기관 설립에 많은 자금을 댔는데 이것이 진급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그리고 처음에는 전투기 조종사를 지망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폭격기 조종사가 되었다. 요즘이라고 생각하면 머리 좋고 훤칠한 미남 할리우드 스타가 아카데미를 받고 곧장 까방권을 획득하고 B-2를 조종하는 격일려나...원래는 진급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그의 아래 장교가 위관에서 영관으로 올라가는 걸 보고 그때서야 진급을 받아들였다. 1941년 3월 22일, 스튜어트는 미 육군 이병으로 들어가 군번 0433210을 받았다. 입영지는 캘리포니아 포트 맥아더였는데, 카메라맨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속옷 입고 있는 사진을 찍어 신문에 냈다. 군에서는 그의 입대를 그렇게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훈련소의 한 늙은 하사관은 그에게 “너 참 불쌍한 새끼구만.”이라고 말했다. 스튜어트의 영화사 주급은 당시 1만2천불이었는데...결국 주급은 21달러로 떨어졌다. 스튜어트는 그중 10%인 2달러 10센트를 그의 소속사에 매달 보냈다. 스튜어트가 기초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캘리포니아 모펫 필드로 갈 때, 정문엔 그를 잠깐이라도 보고픈 소녀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결국 훈련 소장은 스튜어트가 훈련을 끝낼 때까지 소녀들을 모두 쫓아냈다. 언론에서는 그의 군사복무를 카메라로 찍고 법석을 떨었지만 정작 스튜어트는 묵묵히 훈련에 임했고, 결국 미 육군항공으로 들어가 장교가 된 후 훈련을 계속 받았다. 그리고 비행자격을 얻었고 마서 필드에서 큐티스 AT-9로 비행자격을 받고, 이후 커클랜드 필드로 6개월 간 폭격기학교에 들어간다. 1942년 12월, 스튜어트는 4-엔진 비행학교를 자원해 수료했고, 결국 [솔트레이크시티]의 미 제2공군으로 전출간다. 잠시 행정일을 보다가 그는 다시 [오하이오]의 제29폭격단으로 가서 [B-17] 훈련교관이 된다. 그 시기에 그의 룸메이트가 사고로 죽었다. 나머지 3명의 훈련생도 불운을 겪었다. 당시 스튜어트 밑의 훈련생이었던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스튜어트는 모든 비행기가 돌아올 때까지 [관제탑]에 눌러앉아 있는 걸로 알려져 있었다. 모든 교관들이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어느 날 밤, 비행기에 훈련생이 앉고 부조종석에 교관인 스튜어트가 앉아서 새로운 신형 항법장비를 점검하며 날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1번 엔진이 폭발했다. 파편이 조종석으로 날아왔고 조종사가 의식을 잃었으며 엔진에는 불이 났다. 그러자 스튜어트는 조종석의 훈련비행사를 끌어내고 그 자리에 앉아 소화기를 작동시키고 엔진 세 개로 착륙에 성공했다. 1943년 3월, 그는 445폭격단 703전대 작전장교가 되었고, 3주 후에는 전대장이 된다. B-24로 20회 출격을 하고 나서, 1945년 초 스튜어트는 버킹햄셔로 가서 453폭격단의 작전장교로 발령받았다. 453폭격단은 B-17이 주력이었고, 이때 그는 주로 관제탑에서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이 일에 심드렁해진 스튜어트는 [직권남용]을 한다. 그는 453폭격단의 선도 B-17 '페이퍼 돌'의 부조종석을 자신의 것으로 영원히 지정한 것이다. 페이퍼돌의 부조종석은 가끔 고위장성이 앉기도 했고 스튜어트가 타고 작전에 나가기도 했다. 그 폭격기 기총수 댄 브로디는 이렇게 말했다. “스튜어트는 자신이 우수한 조종사임을 보이고 싶어했다. 특히나 위험한 작전에서." 445폭격단과 마찬가지로 스튜어트는 폭격단 사람들의 무한한 신뢰를 받았다. 그는 지프차를 몰다가 착륙한 후 막사로 걸어가는 대원들을 보면 항상 차를 세워 태워주었다. 원래 최선임 [참모]장교는 매 5회 폭격마다 교대된다. 5회째 되는 작전에는 그도 작전에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스튜어트는 작전장교 보직을 하면서 총 11회나 출격했다. 그는 B-17을 몰게 되었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리버레이터]를 그리워했다. 그는 나중에 B-24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전투에서 B-17은 25,000피트 상공 대열폭격에 잘 어울리지 않았다. B-17은 12,000-18,000 피트에 더 잘 어울렸다." 한번은 부하들이 훔친 맥주통을 막사에 숨겨놨는데, 결국 맥주통을 찾아내고는 같이 맥주가 떨어질 때까지 마셨다고 한다. 돈을 지급하지 않는 재정장교를 윽박질러 부하들의 떼인 돈도 받아줬다. 2차 대전 때 모발이 회색으로 변했고 종전 후 부터 탈모가 진행 되었다.
이후 영화배우 활동을 하면서도 군사 재판을 맡거나 미 공군 항공우주 시스템을 선전하는 등 군을 떠나지 않았다. <전략 공군 사령부, 1955> 같은 공군 홍보영화도 찍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린든 존슨 임기 때 상원의원과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마 권유를 받았지만, 공군 직위를 고집하며 거절했다. 1959년 7월 23일 미 예비공군(AFRC)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는 아직까지 할리우드 스타들 중 가장 높은 군 계급이다. 또한 그의 의붓아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했다. 이는 매파의 상징인 존 웨인이 징집을 피해 전쟁 영화 출연으로 때운 것하고 비교된다.
군 경력은 베트남전까지 이어져, B-52 스트라토포트리스 폭격기에 옵저버로 탑승하여 베트남 전선에 참가했다. 2차 대전의 베테랑이자 장군인 인기 영화배우였지만 항상 소박하고 자상한 태도를 보인 그의 인기는 군부대에서도 일반 사회를 방불케 했다고 전해진다. 스튜어트는 과묵하고 느긋한 성격으로 뭐든 천천히 했다. 말도 느리고 밥도 느리게 먹고 걸음도 느렸다. 그러나 군대 체질인지 부대 안에서는 빠릿빠릿했다. 상사로서 뭘 시키는 일이 없고 알아서 신속 정확하게 기계처럼 움직였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위험한 작전을 수행한 후 이런 말도 했다. "공포는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공포는 우리의 판단을 왜곡시키고 반사운동을 잠재운다. 그렇게 실수를 하게 되는것. 더욱 나쁜 것은 그게 전염된다는 것. 내가 공포를 느낄 때 난 그걸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전염시킨다." 군인으로서는 좋은 마인드라 할 수 있겠다.
1968년까지 복무했고 퇴직금은 공군 사관학교에 기부했다.
스튜어트는 전쟁을 겪으며 쇼 비즈니스계에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전후에는 은퇴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연기자도 좋지만 군인이나 파일럿이 그에게는 더욱 의미 있었다. 전쟁 후 첫 출연작은 아마도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프랭크 캐프라 감독의 멋진 인생이다. 적어도 다수의 미국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각인되어있다. 캐프라 감독은 스튜어트를 인민주의 표상으로 활용하여 스타덤에 오르게 한 장본인이며 긴 공백기를 가지고 방황하고 있을 때도 주저없이 출연 제의를 하며 할리우드에 남을 수 있게 해주었다. 스튜어트는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소감에서 캐프라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영화 《멋진 인생》은 단편 한편 분량을 영화화 한 단조로운 이야기이며 공익광고에나 나올 듯한 평면적인 인물들이 나오지만 로저 이버트 같은 평론가들은 볼 때마다 새롭게 감동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영화라며 격찬하기도 한다. 개봉 당시에는 밋밋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흥행성적도 저조했지만 저작권이 만료되고 TV로 방영되면서 점점 인기를 얻어 미국의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영화중 하나가 되어 수도 없이 방영되어 왔다. 스튜어트는 이 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로모노소프 모스크바 국립 대학과 협력하여 러시아어 번역본을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에 가장 먼저 파급된 미국 TV 매체가 되었다. 1940년대에는 공산주의를 미화시킨다고 FBI의 검열을 받았던 영화였는데 말이다. 《멋진 인생》의 주인공 조지 베일리는 할리우드에 오지 않았다면 건축학을 전공하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비행장을 건설하고, 미래도시를 설계하는 모험가의 삶을 꿈꾸지만 가업을 물려받아 평생 작은 마을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평범한 미국 남자인 스튜어트가 오버랩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스튜어트의 가장 보편적인 별명이 보통 사람의 영웅인데 이 영화 캐릭터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종전 후 배우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총 80편에 가까운 출연작 중 1/3은 참전하기 전까지 5~6년 동안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다작을 한 결과이다. 물론 1930~1940년대 할리우드는 2주에 한편씩 영화를 찍어내기도 하는 꿈의 공장이 되어 수많은 명작을 만들어내던 황금기였다. 스튜어트는 매일 일을 할 수 있었던 스튜디오 시스템을 결코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에이전트 리랜드 헤이워드에 의해 할리우드에서 처음으로 러닝개런티를 받은 배우가 된다. 라디오 쇼를 들어보면 1940년대에 프리랜서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독립영화 출연료를 고정적으로 받지 않았고 영화가 흥행하면서 최고수입 스타가 된다. 물론 《현기증》 같이 본전만 건진 영화도 있다. 스튜어트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에도 출연하길 원했지만, 앨프리드 히치콕은 그의 늙어 보이는 외모 때문에 현기증이 흥행에 실패 했다고 생각해서, 캐리 그랜트를 캐스팅했다. 《현기증》은 스튜어트의 마지막 히치콕 영화 출연작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히치콕과 스튜어트는 계속 친하게 지낸 듯하다. 스튜어트는 히치콕 홈 파티에도 자주 갔다. 전쟁 전에는 주로 캐프라 감독의 영화에서 순진한 이상주의자를 맡았지만, 전후에는 앤서니 맨이나 히치콕 등과 작업하면서 연기의 폭을 넓혔다. 결혼 하고 중년이 지나면서 심사가 꼬이고 거친 역도 잘 어울리는 외모로 변했다. 참전 경험의 트라우마가 캐릭터 변화에 영향을 줬을거라 추측하기도 한다.
첫 히치콕 영화 출연작은 실험적인 《로프(1948)》였다. 레오폴드와 로브사건을 모티브로 한 연극이 원작이다. 몇 명의 캐스팅이 무산된 뒤 전후 전환점을 맞은 스튜어트가 캐스팅된 것이다. 두 남자가(동성애자라는 암시가 있긴 하다.) 하버드 우등생을 살해하고 시체를 넣은 관이 있는 곳에 피해자의 부모와 약혼녀를 초대하고는 스릴을 즐긴다는 내용인데 나치즘이 연상 되기도 한다. 스튜어트는 사건을 주도하는, 자신이 초인이라고 생각하는 머저리 같은 제자가 신봉하는 은사역이었는데 촬영하는 동안 잠을 설칠 정도로 불편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히치콕은 항상 자신의 영상언어 실험에 평범한 듯한 스튜어트를 투입하여 딜레마에 빠뜨렸다. 다음 히치콕 영화에 출연하기 까지 텀이 좀 긴데 《로프》에서의 생소하고 난해한 촬영법 과 현장 분위기 를 떠올리며 이창에 출연하는 것을 망설였다고 한다. 그러나 곧 출연료를 조절 하면서 까지 히치콕 영화의 출연을 원하게 되었다. 히치콕 영화에서의 스튜어트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감상적이어서는 안되지." 영화 현기증에서 그의 대사이다. 로프에서 목조르는 날과 살인의 날 주기에 대해 떠들때는 유례없이 냉혹해 보인다. 원작자는 스튜어트가 동성애 코드를 가미하여 좀 더 멜로우한 인물을 연기해주었으면 하면서 실망을 했다는데 아무리 영화여도 냉혈한들을 대할때 더 냉혹한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과연 사건이 마무리 될수 있었을까 싶다. 스튜어트는 로프 뿐만 아니라 《너무 많이 아는 사람, 1956》을 제외하고는 히치콕 영화에서 직업에 관계없이 늘 [수사]하는 사람이다. 관음증과 편집증을 동반하고 이성이나 금전적인 유혹에 아무런 자극을 받지 못하는 뻣뻣하고 감정이 없는 사람같다.
양산형 전기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는데 전부 준수한 편이다. 특히 칼빈 소총을 만든 칼빈 윌리엄스의 전기 영화에서 히치콕은 스튜어트를 눈여겨보게 되기도 한다. 코미디 영화 《하비》로 다시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스튜어트는 《하비》에서의 연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출연작중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고 하비 연극에서도 같은 역을 맡았고 TV판에도 출연했다.
굉장히 미국적인 배우이지만 연기평은 유럽에서도 좋은 편이다. 베를린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 수상경력도 있다. 《살인의 해부》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볼피컵을 받았는데 이 영화는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법정영화이며 지금까지도 미국 사법제도를 날카롭고 통렬하고 재치 있게 분석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프리미어 지가 선정한 최고의 영화 포스터로 유명하고 음악은 듀크 엘링턴이 담당했다. 판사역은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어버린 실제 사법계의 거물 조지프 웰치가 연기했다. 그러나 스튜어트의 아버지는 이 영화가 나쁜 영화라며 지역신문에 광고도 내고 아들이 시사회에 참여하는 것도 반대했다.
서부극에도 많이 출연했는데 영화 출연 수입의 대부분일 정도로 서부 영화의 흥행성적이 가장 좋았다. 안소니 만의 심리 웨스턴이 대표적이다. 이 서부극들은 개척시대 배경일 뿐 필름 느와르 영향 아래 있었다. 제임스는 브로드웨이에서 알게 된 안소니 만을 연출가로 추천하고 8편의 영화를 함께한다. 이중 다섯 편은 서부극이고 The Naked Spur(1953)의 흥행성적은 그럭저럭이었지만 나머지 네 편의 서부극은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한다. 안소니 만은 스튜어트와의 파트너십을 끝내고 나서 평론가들에게 새로운 스타를 원한것이 아니었다는 평과 함께 내리막길을 걸었다. 게리 쿠퍼 주연의 Man of the West는 걸작이지만. 만과의 첫 작품인 <윈체스터 73>의 시사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제임스 스튜어트의 이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키득거리며 웃었다고 한다. 로맨틱 코미디에나 어울리는 유순한 남자가 웨스턴의 주인공이라는 게 잘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앤서니 만과의 파트너십의 시작을 알린 이 영화에서 만의 회상에 따르면, [승마]에는 이미 능숙했던 스튜어트는[* 변호사 삼촌이 부업으로 경마장을 운영해서 자연스럽게 승마를 익힐수 있었다.] [사격]연습에 매진하며 배역에 몰두했다고 한다. 스튜어트는 서부극에 출연할 때 파이라는 똑같은 말만 타고 똑같은 모자를 쓰고 서부극 통틀어 옷도 몇벌 안 갈아입는다. 존 포드의 요구로 딱 한번 다른 모자를 썼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도 많이 출연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서부극에 작별을 고하는 영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이다. 존 포드는 꽤 오랫동안 제임스가 동부에서 온 말만 잘하는 사람일거라는 선입견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여기서 가짜명성으로 무법자의 세계를 종결짓는 법률인, 정치가로 나온다. [존 웨인]의 부탁으로 그의 유작인 <마지막 총잡이>에서 존 웨인의 시한부를 알리는 의사로 출연하기도 한다. 스튜어트는 존 웨인이에 대해 그보다 뛰어난 연기자들은 많이 있지만 존 웨인은 비슷한 서부 영화 배역만 수도 없이 반복함으로써 신뢰감이 생기고 디테일이 훌륭한 연기를 하게되었다고 립서비스 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가족영화, 코메디 영화에 주로 출연했고 그외의 영화는 중국의 산악지대와 사막같은 터프한 로케이션을 선호한듯 하다.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사막의 기적(1965)이라는 제목대로 배경이 사막인 재난영화가 있는데 [휴 로리] 주연으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고 [아라비아의 로렌스]처럼 여성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1970년대에 반 은퇴를 해서 주로 단역이나 우정 출연을 했고 TV에 많이 출연했다. 버라이어티 쇼나 코미디 쇼, 연속극 등 여러 쇼에 출연했는데 TV에서도 그는 출연료를 가장 많이 받을수 있었다. 죽기 전에 봐야할 영화 1001편(6번째 개정판) 중 14편에 출연했다.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 가장 많다. 작품을 잘 고르는건지 운이 좋은건지 정말 많은 걸작에 출연했다. 다작하는 편인데 망작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관객은 고객이 아니라 파트너라 여겼고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연기 커리어를 늦게 시작 하고 연극 무대에 많이 서지 못한점을 후회 했다. 영화인들과 평론가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일하는것 같지않다."인데 하는듯 안하는듯 자연스럽다는 본인 연기평에 영화 연기는 태생적으로 부자연스러울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로널드 레이건이 한 때 민주당원이였다는 이유로 지지하지 않을 만큼 철저한 공화당 지지자 였지만 1968년 상원의원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민주당 지지자들과 총포 규제 법안에 찬성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고 민주당 정책을 지지하는 등 사안별로 다양한 의사를 표했다. 민주당 선거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영화배우 이력과 사생활이 모범적이고 군 경력도 흠잡을 데가 없어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았다. 로널드 레이건이 대권에 대한 야망까지 내비추기 시작했을 무렵 영화사 [워너브라더스]의 직설적인 잭 워너는 한 인터뷰에서 지미 스튜어트같은 사람은 왜 대통령 생각이 없는건지 의문스럽다고 했는데 많은 미국인들이 공감하기도 했다.
1976년에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을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벌였고 1968년과 1972년 선거에서는 리처드 닉슨을 위한 선거운동을 했다.
민주당원이며 사생활도 난잡했던 헨리 폰다와는 평생지기였는데, 어떻게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닌 폰다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냐는 질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 "젊은 시절 헨리와 정치논쟁을 벌이다 싸움이 났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맞았지. 싸움이 끝난 후 폰다가 '우리 앞으로 정치얘기는 절대 하지 말자'고 했고, 나도 그의 말에 찬성했네." 이건 40년대 일이고 그 뒤 1950년대에도 헨리 폰다는 아들라이 스티븐슨 2세를, 제임스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지지해서 논쟁을 벌이다 서로 냉대한적이 있다.
허스트 그룹 경영진의 딸이고 모델은 취미로 하는 금발미녀 글로리아와 결혼했다. 둘은 게리 쿠퍼의 저녁 식사 초대에서 처음 만났고 제임스는 자신의 생일날 청혼했다. 제임스의 집안은 처음에 결혼을 반대했었다. 그녀는 가정주부도 아니고 요리도 못하고 애연가이며 교회도 안 다녔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제임스는 초혼이지만 글로리아는 재혼이었다. 글로리아의 아버지는 딸의 불행을 알아서 이혼 절차가 남아 있었지만 둘의 결혼을 승낙했다. 안타깝게 결혼식 후 한달이 지나서 장례를 치뤄야 했지만. 그녀의 전남편은 에블린 월시 맥린(광산왕의 외동딸로 금융재벌 네드 맥린과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호프 다이아몬드 소유자였다.)의 아들로 알콜 중독에 가정사는 뒷전이고 바람둥이였지만 이혼 후 여러번 결혼하고 어머니 쪽에서 상속 받은 돈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 제임스는 자비로 지은 교회에서 글로리아와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 여행은 하와이로 갔는데 그때 추억을 위해 아예 여행지의 일부를 사버렸다. 제임스도 결혼전 플레이보이로 유명했기 때문에 글로리아는 결혼생활에 큰 기대는 없었다고 한다. 속사정은 당연히 알수없고 언론에 공개된 부부생활은 화목했다. 가정을 이룬 옛 연인들 부부들과 자주 만나고 친분을 유지했다. 그레이스 켈리는 제임스가 가장 좋아하는 동료 중 한명이었고 글로리아는 모나코에 있는 켈리를 초대하곤 했다. 제임스와 글로리아는 끊임없이 세계여행을 다녔다. 자연과 동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부부는 아프리카 여행을 매우 즐겼다. 나중에는 자녀들까지 온가족이 아프리카 여행을 즐기게 되었다. 자녀들이 아프리카와 캐나다와 스위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프리카에서 사업파트너를 만난 글로리아는 미국 서부의 각종 동물단체와 동물원, 자연사 박물관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밖에 의료센터와 각종 비영리단체에도 많은 기부를 했다. 제임스는 동부의 의료시설과 재활프로그램, 빈곤층, 프린스턴 대학 등에 정기적으로 기부했다. 주기적으로 낙후된 지역에 찾아가 봉사도 했다. 프린스턴 대학 이사회에서 활동할때 쯤 각종 사회활동으로 인해 절정으로 바쁠때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미리 양해를 구해놓고 촬영 스케줄 중에 제트기를 직접 몰고 왔다갔다해야 했다고 한다. 제트기를 가지기 전 1940년대에는 주로 P-51 머스탱이나 비치크래프트 보난자를 타고다녔다. 글로리아는 전남편과의 아들 두 명을 데려왔는데 한명은 베트남에서 전사하고 한명은 반전주의자에 진보성향이라 제임스와 잠시 멀어진 적이 있었다. 제임스와의 딸은 두 명으로 한명은 은행가와 결혼 후 이혼했고 한명은 캠브리지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 후 함께 교수가 되었다. 제임스와 글로리아는 하와이의 목장에서 노후를 보낼 계획이었는데 하와이에 가기 직전에 글로리아가 폐암으로 사망한다. 글로리아가 사망하자마자 목장과 하와이 땅은 다 팔아버렸다. 그리고 제임스는 매우 절망하고 은둔 생활을 하다가 3년 뒤에 사망한다. "이제 글로리아와 함께 할 겁니다."가 유언이었다.
2009년 Empire Forum에서 선정한 역대 영화배우 100인 중 1위, 1999년 AFI에서 선정한 20세기 미국 영화배우 50인 중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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