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千鏡子)는 대한민국의 동양화가, 수필가
前 이름은 천옥자(千玉子)이다.
천경자 그녀가 출생하기도 전에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대한제국 초기 시절, 자신의 딸이었던 어머니 박운아 여사한테 아예 남장을 시켜 서당까지 보냈던 그 시절 사상이 많이 깨어 있었던 외할아버지의 무남독녀였던 어머니 (박운아)와 군서기였던 아버지 천성욱의 1남 2녀 중 장녀로 외할아버지는 큰 손녀를 금지옥엽
으로 예뻐하며 옥자(玉子)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손녀는 밤마다 외할아버지의 무릎에 누워 '심청전' '흥부전' '수호지' '춘향전'을 듣다 잠이 들었고 천자문과 창까지 배우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보통학교 1학년 때 일본인 담임 선생님으로 부터 그림 소질을 발견했고 대청마루 흰 횟가루 벽에 그린 여인상이 외할머니 눈에 띄어 매를 맞기도 했다.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시절 혼담이 오가자 시집가기가 싫어 다듬잇돌 위에 앉아 미친 시늉을 했으며 1940년 17세 때 여수항을 출발해 도쿄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현 여자미술대학)에 입학하던 이 무렵 본명인 옥자(玉子)를 버리고 경자(鏡子)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붙인다. 도쿄에서는 야수파나 입체파 등을 가르치던 서양화과 보다는 곱고 섬세한 일본화 풍이 마음에 들어 일본화과로 가서 모델을 보고 관찰해 섬세하게 사생하는 법을 집중적으로 교육받는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42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고혈압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이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의 모델이 되어준 외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린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祖父)'가 입선과 1943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머니를
그린 수석 입상 작품 '노부(老婦)'가 입선하면서 재능을 인정받는다. 고흥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면서 하이힐에 양장을 차려입었던 천경자의 청년기는 그녀가 평생 간직했던 자부심의 바탕이 됐다.
2차 대전의 여파 등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중퇴 직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아직 표를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던 자신을 도쿄역에서 우연히 만나 표를 건넨 명문대 중퇴생 출신의 이철식과 1944년 결혼을 하고 1945년 첫 딸 이혜선을 낳고 1946년 아들 이남훈을 낳는다. 그리고 1946년 8월 이후 부터
전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지만, 그 해 10월 중순 이철식이 젊어서 장결핵증에 걸려 요절하는 등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길지 못했다.
1950년 전쟁 통에 여동생 천옥희마저 폐병으로 숨진 후 남편 없이 두 아이를 기르던 천경자 화백은 그 당시 아직 두 살바기 딸 이혜선, 아직 첫돌도 아니 된 아들 이남훈 그 둘과 함께 광주를 등지고 잠시 목포에 머무르던 찰나에도 광주와 목포를 소소히 내왕하였는데 그러다 1948년 전라남도 목포 모 신문 전직 사회부 기자 출신이었던 유머 넘치고 건장했던 그에게 푹 빠진 두 번째 남편 김남중을 만난다.
"청춘에 메말라 버린 나는 목 타는 사막에서 감로수를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김남중은 이미 부인이 있는 사람이었고 주변에 항상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자괴감과 그의 변덕스러운 태도 때문에 천경자는 김남중 그가 前 부인과 이혼할 시절까지 그를 기다리면서도 결별을 결심하는 고통의 나날을 이어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기다리는 편이 된 나는 끝없이 두 갈래로 평행선을 이루는 철길을 아득히 바라보다가 그가 다가오는 소리에 가슴 설레고 형용할 수 없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천경자 화백은 자녀 2남 2녀를 낳았다.
첫 남편 이철식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김남중과 사이에 1남 1녀를 둔다. 이 가운데 맏딸이 뉴욕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킨 이혜선이다.
2006년 갤러리현대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
이었던 '모기장 안의 쫑쫑이'에 등장하는 모 서점 대표 김종우는 천경자의 막내이다.
아이들에게는 남미짱(맏딸이혜선), 후닷닷(장남이남훈), 미도파(둘째딸김정희), 쫑쫑이(막내김종우)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아이들을 모델로, 때로는 사랑했던 남자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물론 천경자 화백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여인의 모델은 그 자신이다.
천화백은 아픔을 견디지 못한 자신의 고통을 마비시킬 만큼 무섭도록 끔찍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소재를 택해 화폭을 35마리의 뱀으로 가득 채운다. 1952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 내놓은 그림 '생태(生態)'는 천경자 화백의 작업을 화단이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65년 동경 이도 화랑(畫廊)에서 개인전을 열고,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과장을 역임했다.
1972년 베트남전 당시 문공부에서 베트남전 전쟁 기록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 열 사람을 파견한다는 기별을 받고 김기창, 박영선, 김원, 임직순 등 남자 화가들 틈에서 홍일점 종군화가가 된다. 맹호부대에 종군해 1주일간 종군하면서 M-16소총을 들고 꽃나무 그늘에 잠복하는 병사들, 연분홍 아오자이를 입고 자전거로 거리를 누비는 아가씨들을 많은 스케치와 담채 작품으로 남겼다.
천경자는 당시로선 드물게 해외 여행을 즐겼다. 4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 타히티를 시작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중남미 등 해외 스케치 기행을 12번이나 다니며 '천경자 풍물화' 라는 개성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우수에 젖은 이국적인 여인 그림은 타히티 여행 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후 노란 옷을 입고 꽃이 가득 달린 화려한 모자를 쓴 '길례언니'(1973) 를 시작으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황금의 비'(1982) 등을 그렸다.
천경자는 그림 못지않게 문학적인 재능도 뛰어났다.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등 10권 이상의 저서와 타고난 글재주로 1955년의 '여인소묘' 등 단행본 15건, 수필집 10권, 신문잡지 연재 12건 등으로 대중과도 호흡했다. 2006년에 새로 편집되어 나온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는 쉰둘이던 1976년 잡지 '문학사상'에 연재하기 시작했던 글을 모아 1978년에 내놨던 것이 절판된 후 2006년 갤러리 현대 개인전과 때를 맞춰 새로 나온 것이다.
천경자 화백의 가장 큰 고비는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이었다. 당시 68세였던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화가"라는 수군거림 속에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천 화백은 4개월 후 다시 돌아와 그림에만 몰두하기 위해 카리브해, 자메이카, 멕시코로 스케치 여행을 떠난다. 생애 마지막 전시라고 생각하고 72세 때인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15년 만에 가진 대규모 전시는 8만명이 모여 줄을 서서 볼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다.
1998년 11월 채색화와 스케치 등 자신의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섬유공예를 하는 딸 이혜선을 찾아 뉴욕으로 떠났다가 2003년 7월 2일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만다.
2007년부터 천경자의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군에는 천경자가 기증한 드로잉 55점, 판화 11점 등 총 66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소장품과 아트상품 등이 갖추어져 있는 천경자전시관이 개관되었다. 천경자가 2015년 8월 6일 새벽 5시에 타계했다고 전했다.
환상적인 세계관을 결합시킨 짙은 색채의 채색화로 전통적인 한국화를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으며 덕분에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많은 수의 수필집들도 집필하여 생전부터 대중적 인지도를 얻은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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