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스스로 나간 자와 쫓겨서 나간 자의 차이(差異)
1
천하제일편 이성력이 죽었다는 소식은, 그것도 스물서너 살
밖에 되지 않은 사내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은 금세 강호
전역에 퍼졌다.
그날, 이성력이 정확하게 반으로 쪼개지던 광경을 본 무사들
중의 한 명인 편우(片友)는 평소에도 입이 싸기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아무리 함구령이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입
을 다물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다음날 이가장 근처의 주루(酒樓)에 가서 평소에 친하
게 지내던 한량(閑良)과 건달들에게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했
고, 다시 그 이야기는 그들의 입을 통해서 항주 전체에 퍼졌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말처럼 그 소문은 금세 강호에
퍼졌으며, 호사가(好事家)들의 좋은 안주감이 되어 한동안 끊이
지 않는 얘깃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던 와중에 이성력을 죽인
사내는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이 되어버렸으며, 그는 무정
마검(無情魔劍)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호사가들은 이성력이 죽은 사건도 사건이었지만, 그보다는
그 후의 일에 대하여 더 궁금해 했다.
이성력은 천하의 반을 다스리는 천지회의 외단 총책임자였다.
자신들의 중요 인물이 그렇게 죽은 이상, 천지회에서 가만히 있
을 리가 없었다.
분명 천지회에서는 특별한 조치가 취해질 것이었고, 그 특별
한 조치가 과연 어떤 것인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은 별의별 추
측을 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력이 죽은 지 보름이 지나는 동안, 천지회의 특
별한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의 천지회 인물들이 조문 사절로 이가장을 한
번 방문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것이 천지회의 특별한 조치라면
할말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모든 강호 호사가들의 이목이 항주의 이가장에 집중
되어 있던 시월[十月]이었다.
* * *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들은 관을 열고서 이성력의 시체
를 살피고 있었다.
시체는 이미 부패되기 시작했다.
살해된 그날 바로 시체를 염(殮)한 다음에 도수 높은 술에 담
그는 식으로 제대로 처리했으면, 이렇게 부패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성력이 죽었다는 사실은 수하들의 이성을 마비시키
기에 충분한 일었다. 그들은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시체를
보존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은 것이
다.
키가 작고 뚱뚱한 사내가 손수건으로 코를 막으며 인상을 찡그
렸다.
"이렇게 엉망으로 보관을 하다니, 이래 놓고서 어떻게 부검
(剖檢)을 하라는 건지, 원……"
그러자 키가 작고 뚱뚱한 그 사내 덕분에 더욱 키가 커 보이
고 말라 보이는 여인이 관 뚜껑을 덮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대
꾸했다.
"그래도 대충 알아낼 것은 다 알아냈잖아. 외단총사를 죽인
자의 검법이 희대의 중검(重劍)이라는 것. 뭐 그 정도면 만족할
만하잖아?"
사내는 아직도 손수건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목소리가 영 이상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세상에 중검을 사용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것만으로 흉수를 잡을 수가 있겠어?"
그리 예쁘지도, 밉지도 않게 생긴 여인은 피식 웃으며 사내
의 등을 두드렸다.
"이봐, 수겸(秀兼). 외단총사는 말이지, 두 손을 십자(十字)로
엇갈리며 흉수의 검을 막으려고 했어. 그의 능력으로 미루어보
건대, 상대가 절정의 고수가 아닌 한, 충분히 막을 수가 있었겠
지. 하지만 흉수는 그의 호신강기를 파괴하면서 두 손목을 베고
동시에 정수리부터 쫘악, 이렇게…… 일자(一字)로 그어버린 거
야. 그럴 정도의 중검을 펼칠 수 있는 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
까?"
여인은 직접 본인의 행동으로 흉수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들의 곁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가장 무사들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제야 여인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녀가 있는 이곳은 천하제일편 이성력의 조문을 받기
위하여 만들어진 제단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런 흉악한 범인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키가 작고 뚱뚱하지만, 제법 잘생긴 외모를 지닌 사내는 싱
긋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아마도 한 달 안으로 잡아들일 수 있겠지. 감히 천지회의 인
물을 건드리다니, 결코 천지회는 그를 좌시(坐視)하지 않을 테
니까."
그러자 사람들의 눈빛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천지회의 특사(特使) 자격으로 온 일남일녀(一男一女)는 관이
모셔져 있는 제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일렬로 길게 늘어서 있는
유가족(遺家族)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애도의 인사를 전했다.
이성력의 세 명의 부인과 일곱 명의 첩들은 누런 삼베옷을
입고, 또 역시 누런 삼베로 만든 모자를 쓰고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 앞에는 이성력의 자식들로 보이는 열 명 가량
의 어린아이들이 여인들의 손을 붙잡은 채로 서 있었다.
가장 나이가 든 아이가 열두어 살 정도 되었으며, 가장 어린
아이는 태어난 지 겨우 몇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듯한 갓난아
기였다.
그 아이들은 제법 나이가 든 한두 명만을 제외하고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서
있었다.
그저 자신들의 어머니들이 흐느끼고 있으니까, 자신도 모르
게 슬퍼져서 울먹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 집안을 이끌어 나가던 가장(家長)이 졸지에 살해된 것이
었다. 그리고 어이없게 자신들의 가장을 잃어버린 집안의 사람
들이었다.
그 광경을 본 두 사람은 그제야 진심으로 가라앉은 표정이
되었다. 그들의 가슴에 한 줄기의 차가운 바람이 훑고 지나갔
다.
그 중 제일 똘망똘망하게 생긴 열두어 살 정도의 소동(小童)
이 그들을 향해 악을 쓰듯이 외쳤다.
"아버님의 원수는 내가 갚을 거예요!"
사내는 나직하게 한숨을 토해내고는 소동의 머리를 쓰다듬으
며 조용히 말했다.
"그 녀석을 잡으면 네 앞으로 데리고 오겠다. 그래서 네가 직
접 그 녀석의 목을 벨 수 있도록 해주마."
소동은 소매춤으로 눈물을 닦더니, 이내 입술을 깨물면서 고
개를 끄떡였다.
사내와 여인은 조용히 무사들 몇 명을 불러 그날 벌어졌던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물었다.
그리고 이성력과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던 애첩, 소홍과 함
께 외진 곳으로 가서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는 그대로 이
가장을 빠져나왔다.
"휴, 정말 정력도 좋지! 마흔 살 먹은 아줌마부터 시작해서
이제 열일곱 살 된 계집에 이르기까지, 열 명이나 되는 부인들
을 거느리다니 말야."
그녀의 말에 사내는 정정을 해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 명의 부인과 일곱 명의 첩이야."
그는 이제 손수건을 입에서 떼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
부패된 시신과 냄새가 떠오르는지 가끔씩 손수건으로 입과 코
를 막는 시늉을 했다.
그의 손수건에서는 달콤한 사과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이가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주루에 앉아
서 술과 몇 가지 요리를 먹고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먹고 마시는 쪽은 주로 여인이었고, 사내는 그저 젓
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만 있었다. 사내는 음식만 봐도 속이
뒤집어진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비위가 엄청나게 약한 듯했
다.
그들은 천지회에서 이번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보낸
인물들이었다.
키가 작고 뚱뚱한 사내는 천지회 내단(內團)의 복호당주(伏虎
堂主)로 추명탈혼(追命奪魂)이라는, 그의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
지 않는 무시무시한 외호를 지닌 조수겸(曺秀兼)이라는 자였다.
그리고 키가 크고 갈대처럼 휘청거리는 몸매를 지닌 여인은
천지외의 순찰영주(巡察領主)라는 직함을 지닌, 독수나찰(毒手羅
刹) 기형수(其衡殊)라는 인물이었다.
복호당은 전문적으로 천지회와 적대 관계를 지닌 인물이나
방파를 견제,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으며, 순찰영주는 대외
적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총괄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천지회 서열 백위 이내의 인물이 살해되는 경우
가 아니라면, 그들이 직접 현장에 나서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들은 주로 그들의 수하들이 가지고 온 보고서들을 종합하
고 정리하여 그 중 필요한 것들만 상부에 보고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천지회의 수뇌부에게까지 충격을 줄 정도
로 큰 사건이었다. 오죽했으면, 천지회를 다스리는 세 명의 수
뇌 중 한 사람이 직접 그들을 불러 부탁을 했겠는가.
-최대한 빨리 그 사건에 대한 모든 자료들을 종합해서 가져
다주 게. 주의할 것은, 이 조사 건에 대해서는 오직 자네들
과 나만 알아야 한다는 것이네. 회(會)의 그 누구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알아서도, 또 알 필요도 없네. 조사는 자네들이, 그리
고 그 결과는 나에게.
알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천지회에서 나온 조문특사(弔門特使)로 가장
하여 이가장에 온 것이었다.
* * *
"이미 멸망한 모용세가의 중검을 쓰는 마지막 후예의 복수
라……"
기형수는 텅 빈 술잔을 손가락 사이로 빙빙 돌리며 말했다.
그녀는 지금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한 손으로는 술잔을 돌리
면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난 말이지, 섬서성의 모용세가는 들은 적이 있어도, 산서의
모용세가는 들은 적이 없어."
결국 끝내 제대로 음식 한 점을 집어먹지 못한 조수겸은 아
직도 아쉬운지 젓가락을 든 채로 중얼거렸다.
사실 섬서성의 모용세가는 남궁세가(南宮勢家)를 비롯한 천
하 오대세가(五大勢家)의 하나로 불릴 만큼 위명이 자자한 세가
였다.
그러나 산서의 모용세가는 무림에 전혀 이름이 나 있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 가문을 세가(勢家)라고 부르는 것조차 우스울 지
경이었다.
"그녀가 좀더 확실히 기억을 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
데……"
조수겸이 아쉬운 듯 말했다.
이성력의 애첩인 소홍은 이성력과 흉수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녀가 너무 겁
에 질려 있었던 나머지, 또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나 작았던 나
머지 그 이야기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그 대화만 정확하게 들었더라면, 그리고 그 내용을 그
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줄 수 있었더라면, 흉수의 내력(來歷)은
보다 쉽게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성력과 흉수가 대결을 벌였던 그날 밤, 그 자리에
있었던 무사들의 증언(證言)만으로도 그들은 상당한 것들을 알
아낼 수가 있었다.
이성력에 의해 몰락한 가문의 후예의 복수.
복수와 원한이 꼬리를 이어 돌고 도는 무림에 몸을 담고 살
아가는 이상, 아무리 성인군자라고 할지라도 복수와 원한의 그
물을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물며 이성력은 자신의 손에 피가 적셔지지 않는 날이 없던
무인(武人)이었다. 그런 그에 의해 멸망한, 그리고 몰락한 가문
이 어디 한두 곳이겠는가.
그리고 복수의 칼을 갈면서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는 후
예들 또한 어디 한두 명이겠는가.
또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 원한을 갚는 일은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벌여진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적어도 그 당
사자들과 혈연관계가 있지 않는 한, 모른 척하는 것이 바로 강
호의 관습이었다.
하지만……
"우선 산서로 가봐야겠어. 그곳에 몰락한 모용세가라는 가문
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 몰락하게 되었는지 알아봐야
겠어."
기형수는 여전히 술잔을 돌리며 말했다.
손 씀씀이가 잔인하고 독랄하여 독수(毒手)라 불리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을 정도로 냉정하고 정(情)이 없어서 나
찰(羅刹)이라고 불리는 그녀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했지만, 꽤 오래 전부터
그녀와 함께 자주 일을 했던 조수겸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사소한 흔적까지 놓치지 않는 그녀와 함
께 일하는 것을 좋아할 정도였다.
"그럼 나는 이곳에서 녀석의 행적을 알아보다가 천지회로 돌
아가 보고를 하겠네. 그리고 나서 산서로 가지. 아무래도 자네
혼자 보내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조수겸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들이 갓 천지회에 입회(入會)한 십오 년 전부터 그들은 함
께 일했으며, 함께 진급을 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만약 불알친
구라는 말이 남녀 관계에도 성립이 된다면, 바로 그들이 불알친
구였다.
기형수는 들고 있던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조수
겸이 얼른 술을 따라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형수의 얼굴에도 오랜만에 미소가 번
졌다.
"환영하겠어. 아무래도 너같이 마음에 드는 조수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니까."
2
사검명은 그날 당장 집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는 자신의 부
모에게 작별을 고(告)하러 달려갔다. 마침 그들의 부모는 저녁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사 부인은 한 입 가득 베어물었던 닭고기를 토해냈으며, 사
백도는 잠시 끄응, 하면서 말을 잊어야만 했다. 그러나 사검명
의 눈빛은 진지하기만 했다.
"다시 한 번 말해보거라. 설마 내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
사 부인은 냉수를 한 잔 들이켜고 나서야 겨우 진정된 듯,
하지만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사검명은 어깨를 펴고 당당히 말했다.
"소자의 나이 벌써 스물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까지 강호로 나서지 않았던 것은 미천한 소자의 무공이 황룡장
의 이름을 더럽히게 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어
느 정도 자신이 생겼으니, 소자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예전에 그
러셨던 것처럼 강호에 나가서 황룡장의 이름을 드높일까 합니
다."
그의 어법(語法)은 일반적으로 처음 집을 나서서 강호로 떠
나는 무인의 자식이 말하는 그 어법에 충실했다. 하다못해 평소
에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던 소자(小子)라는 말까지 말이다.
사 부인은 한 손으로 이마를 만졌다.
골치가 아파왔다. 그녀의 어린 아기가 언제고 이렇게 말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온갖 방해를 해왔던 그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강호로 나서겠다는 선언을 하
고야 만 것이었다.
그녀에 비해 사백도는 침착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제 너의 실력이 본장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정도
가 되었다는 말이냐?"
사검명은 웃으며 말했다.
"감히 소자가 그럴 실력이 되겠습니까? 단지 이제는 소자의
한 목숨을 지킬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아버님과 어머
님께서 맨 처음 강호에 발을 들여놓으셨을 때에도 소자와 같았
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미천한 실력이지만, 강호를 돌아다니면
서 스스로 경험을 쌓고 실력을 키우다 보면 언제고 '그래도 호
부(虎父) 밑에 견자(犬子)가 없다더니' 하는 강호인들의 이야기
를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백도는 자식의 논리정연한 말에 내심 흐뭇하여 고개를 끄
떡였다.
'아직 철부지로 알았건만……'
그러나 사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것은 절대로 안 된다!"
사검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어머님……"
"무슨 소리를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야!"
사 부인은 완강했다.
사검명의 논리정연한 말도, 애끓는 호기(豪氣)도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휴, 결국 어쩔 수 없이 야반도주를 해야 하는가?'
그렇게 사검명이 중얼거릴 때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강호에 나섰을 때가 열여섯이었군
그래.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애송이였지."
사백도는 옛일을 회상하듯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뭔가 불길한 예감을 읽은 듯, 사 부인의 눈초리가 매
서워졌다.
"당신……"
하지만 그녀의 말은 사백도의 다음 말에 의해 뒷부분이 잘려
나갔다.
"당신도 강호초출(江湖初出)했던 때가 열일곱이라고 하지 않
았소?"
사 부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볼이 부운
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때는……"
"사실 그때 우리의 실력이 지금 검명의 실력보다 뛰어나다고
는 볼 수가 없지 않겠소?"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역시 수많은 생사(生死)의 간극(間隙)을 경험했기 때문
에 이런 위치에 도달할 수 있었소. 생각해보오. 당신과 내가 어
떻게 만났던가를……"
남편의 그 말에 일흔이 넘은 사 부인의 뺨에 붉은 홍조가 짙
어졌다.
산화선자 연리향(連理香)의 나이 스물이었을 때, 그녀는 일단
의 산적을 토벌하다가 오히려 그들에 의해 죽을 고비를 맞게
되었다.
산적의 두목이었던 수라도(修羅刀) 탁괘(卓罫)의 실력이 예상
외로 뛰어났던 것이었다.
결국 그에게 일격을 맞고 엄중한 부상을 입게 된 그녀는 산적
들의 협공에 의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홀연히
나타난 영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지금의 남편인 황룡소협 사
백도였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그는 백마를 타고 나타난 왕자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등장을
하더니 수라도 탁괘를 비롯한 산적의 무리들을 단숨에 쫓아버
렸다.
산화선자 연리향은 그런 그의 뛰어난 무공과 잘생긴 외모에
그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으며, 황룡소협 사백도 역시 그
녀의 의기(義氣)와 미모에 홀라당 빠져버린 것이었다.
그 후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강호를 종횡하였으며, 함
께 협객행(俠客行)을 펼쳐나갔다.
입을 놀리기 좋아하는 무림의 호사가들은 그들의 별호에서
한 글자씩을 따고, 그들이 사용하는 검을 가리켜서 화룡쌍검(花
龍雙劍)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사람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서 혼인을 하게 되었
으며, 그들의 사랑이 일구어진 곳이 바로 이곳 황룡장이었던 것
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결실이 바로 사검명이었다.
그렇게 사 부인이 어울리지 않게 수줍음을 타고 있을 때, 사
백도의 음성이 담담하게 들려왔다.
"사실 그 인연으로 인해 검명이 태어나게 되었으니, 수라도
탁괘가 바로 검명의 은인이라고까지 말하면 너무 과장이 심할
까?"
"설마?"
사 부인의 부드러운 음성에는 왠지 모르게 비음(鼻音)이 담
겨 있는 듯했다.
사백도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쨌든 우리가 그랬듯이 검명도 무사히 생사의 간극을 넘어
서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오. 혹시 또 모르지, 녀석
이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협(女俠)을 데리고 나타날는지……"
"아이, 당신도 참……"
그녀가 백발의 머리를 남편에게 기댈 때, 그녀의 남편은 자
식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리고는 좀더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떠나도록 하거라. 그리고 매사
모든 일에 조심하고, 언제 어디서나 너는 황룡 사가(史家)의 자
식이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사검명은 기쁜 어조로 대답하고는 부리나케 방을 빠져나갔다.
어머니가 잠시 옛날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얼른 이곳을 빠
져나가야 했다. 설마 아무리 완고한 모친이라 해도 한 번 결정
된 사항을 번복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부친이 힘겹게 만들어준 기회를 놓쳐버려서는 안 되
는 것이었다.
그는 방문을 열다가 고개를 돌렸다.
사 부인을 품에 안다시피 한 사백도가 그를 보며 슬쩍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는 허리를 숙여서 사려 깊은 부친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사백도는 아내 모르게 손을 흔들었다.
빨리 나가라는 뜻이었다.
문이 닫혔다.
그때까지 사 부인, 아니 산화선자 연리향은 그녀의 나이 스
무 살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남편의 가슴에 기대어 어리광을
피우고 있었다.
* * *
다음날 아침.
남편의 교활한(?) 술수에 말려 엉겁결에 자식의 강호행(江湖
行)을 허락하고 만 사 부인은, 하직인사를 드리러 온 자식의 앞
에서 눈물을 쏟고 있었다.
어느 정도 격한 감정이 지워지자, 이번에는 잠시 틈도 보이
지 않고 강호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 백스물네 가지를 한꺼번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항상 마주 오는 사람의 손을 살피면서 지나가야 할 것이며,
꽃을 든 여인은 조심해야 할 것이며, 이유없이 친절한 사람은
경계해야 할 것이며, 음식은 먼저 은(銀)으로 만든 수저로 검사
를 해야 할 것이며……"
그 주의사항들은 그녀가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것들이
라 하나같이 마음에 새길 만한 사항들이었지만, 당장이라도 강
호로 나서고 싶은 혈기왕성한 사검명의 귀에는 그저 지루한 잡
담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사 부인의 주의사항이 끝났다.
그녀는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아직도 어려보이기만 한 자식
을 끌어안았다.
"좀더 나이를 먹고, 실력을 쌓은 다음에 나가도 될 것을……
아니, 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부터 제대로 된 검법을 배우게 할
것을……"
그녀의 중얼거림에 사검명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제대로 된 검법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사 부인은 황망중에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니다, 아무것도. 참, 강호에 나가면 돈이 꼭 필요할 것이
다. 그러니 이 전표(錢票)들을 가지고 가거라."
그녀는 화초장(花草欌) 속에서 한 다발의 전표를 꺼내어 그
에게 건네주었다.
사검명은 전표다발을 훑어보았다. 황금 천 냥짜리 전표부터
시작하여 은자 백 냥짜리 전표까지 무려 백여 장이 넘는 전표
였다.
사검명이 편히 사용할 수 있도록 조그만 액수의 전표까지 일
일이 맞춰놓았다.
그는 새삼 어머니의 세심한 배려가 가슴에 와닿았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어머니의 얼굴에 주름이 가득
했다.
'어느새 이렇게 늙으셨을까. 어제 저녁 아버지와 함께 옛 추
억을 회상하실 때만 하더라도 아직 어린 소녀 같기만 하던 당
신이셨는데……'
그는 목이 메이는 듯한 음성으로 조용히, 늙은 어머니를 불
러보았다.
"어머님……"
사 부인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
다.
"부디 몸조심하고, 길이 험한 곳은 가지 말 것이며, 싸움이
벌어지는 곳은 멀리 돌아서 피해갈 것이며……"
'어이쿠!'
그녀의 말이 다시 길어질 것 같자, 그는 황급히 인사를 하고
빠져나왔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사검명은 절을 했다.
사백도는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절을 받았다. 그리고 사검명
이 자세를 갖추어 자리에 앉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집에 들려서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
거라. 네 어미가 그리 걱정하니 안심을 시켜드려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럼 잘 다녀오너라."
부친의 주의사항은 매우 짧아서, 약간은 아쉬움을 느낄 정도
였다. 하지만 그 아쉬움보다는 강호에 대한 기대감이 넘치는 사
검명이었다.
그는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부친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
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사백도의 눈에 잔파랑이 일었다.
"녀석……"
한 마디 탄식과 더불어, 그 동안 평정을 유지하던 그의 얼굴
이 무너져 내렸다.
아무리 그가 담대한 척하더라도, 결국 그는 하나뿐인 자식을
낯선 길로 떠나보내는 부친이었다.
어느 부모의 마음이 아프지 않고, 또 불안하지 않겠는가. 단
지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마음 속의 진실을 감출 줄
알았을 뿐이며, 또 그렇게 냉정을 유지한 채로 자식을 떠나보내
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사검명은 힘찬 걸음으로 황룡장을 벗어났다. 황룡장의 문을
지키던 무사들이 그에게 인사를 했지만, 그는 건성으로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길가로 나섰다.
약간의 두려움과 약간의 불안감. 하지만 그보다 훨씬 큰 설
렘과 호기심, 그리고 기대가 그의 가슴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가슴을 활짝 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똑같이 음침하면서도 찌푸린 하늘이었지만 그래도 오
늘은 왠지 다르게만 느껴졌다.
아니나다를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다른 곳보다 날씨가 찬 유주 지방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예년보다는 좀 빠르게 내리는 첫눈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눈을 받았다. 손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에
의해 그 눈은 금방 녹아내렸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첫눈이라 이거지?"
그는 출발이 좋다고 생각했다.
강호 출도의 첫날 내리는 첫눈이라……
그것보다 길조(吉兆)가 어디 있겠느냐는 생각을 한 그는 뒤
도 돌아보지 않고 힘차게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자신의 미래와
야망과 사랑과 포부가 있는 그곳을 향하여.
그래서 그는 보지 못했다.
삼층 전각의 꼭대기 층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전송하고
있는 어머니를.
그리고 그보다 높은, 삼층 전각의 지붕에 올라가 표연히 바
람을 맞으며 뒷짐을 지고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부친을
그는 볼 수 없었다.
시월 중순이 지나던 어느 날 아침의 일이었다.
3
한편 바로 그날, 또 한 사람이 사검명처럼 강호를 향해 발걸
음을 옮기고 있었다.
비록 사검명처럼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사내
가 아닌 계집이었지만 말이다.
* * *
장백노조(長白老祖)는 천하구검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검법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선별을 해서 제자를 거두었으며, 그래서 그
의 검법을 전수받은 제자는 불과 네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검법이 유출되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에 자신의
검보(劍譜)를 따로 만들지 않았으며, 오로지 제자들에게만 모든
것을 전수하였다.
그가 고희(古稀)가 되던 십육 년 전, 그는 손에서 검을 놓았
으며, 그때부터 그의 대제자(大弟子)인 장백신검(長白神劍) 노의
량(魯義亮)이 장백검파의 장문인 노릇을 수행하게 되었다.
노의량은 장백노조의 모든 검법을 이어받아 제자들 중에서는
가장 실력이 뛰어났으며, 또 인격이 출중하고 마음 씀씀이가 대
범해서 장백검파의 위세를 더욱 드높이고 있었다.
장백노조의 둘째 제자는 장백흑추(長白黑醜) 구여풍(邱汝楓)
이라는 오십대 노처녀였다.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피부가 석탄처럼 새까맸으며, 그녀를
본 사람들로 하여금 구역질을 하게끔 추하게 생겼다. 그래서인
지는 몰라도 그녀는 예쁜 여인만 보면 드러내놓고 적의(敵意)를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매약란을 맡긴 것은 노의량이 장문 대행을 맡
으면서 한 일 중에서 유일한 실수였다.
사실 십 년 전 매약란이 장백의 검법을 배우고자 이곳에 왔
을 때, 그녀를 맡을 만한 사람은 구여풍뿐이었다.
장백노조의 셋째 제자인 장백수사(長白秀士) 여균(呂均)과 넷
째 제자이자, 여균의 아내인 장백검봉(長白劍鳳) 만수연(萬樹燕)
은 장백을 떠나 강호를 유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노의량이 맡기에는 자신의 제자가 벌써 다섯 명이
나 있었으며, 또 문중(門中)의 일이 상당했기 때문에 적절하지
가 않았다.
결국 매약란은 구여풍의 제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구여풍은 당시, 내심 짝사랑을 하고 있었던 자신의
사제 여균을 얼굴만 곱상하고 여우 같기만 한 막내 사매(師妹)
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예쁜 여자에 대한 혐오감
이 짙을 대로 짙어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얼굴이 예쁘장하고 귀엽게 생긴 열 살
짜리 꼬마 계집은 막내 사매에 대한 분풀이 대상에 지나지 않
았다.
그녀는 모질게 매약란을 대했으며, 그녀의 세 명의 제자 중
에서도 가장 혹독하게 수련을 시켰다.
물론 이유는 충분했다.
다른 두 제자에 비해 입문(入門)이 늦은 만큼 그만한 노력이
없이는 다른 제자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 그녀가 매약란
을 닦달하는 이유였으며, 그것은 결국 노의량도 그녀를 제지할
수 없는 까닭이 되었다.
구여풍의 심술은 해가 갈수록 늘어났다.
그것은 매약란이 그녀의 혹독한 수련을 아무런 불만 없이 견
뎠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또 그녀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뒤늦게
입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그녀가 그렇게 매약란을 혹독하게 수련을 시키지 않았
더라면, 그녀의 재질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언정, 그렇게 급
속도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직 그녀의 수련 방식을 매약란이 제대로 소화해내고 그녀가
가르치는 것을 묵묵히 익혀나갔기 때문에 그런 성장을 하게 된
것인데, 그녀는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매약란을 미워
하기만 했다.
마침내는 그녀만 보면 아예 고개를 돌리는 지경에까지 이르
렀다.
그렇게 눈의 가시였던 매약란을 쫓아낼 기회가 생긴 것은,
정말이지 구여풍에게 있어서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할 만했다.
매약란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자, 여느 때처럼 자신의 사부
에게 가서 인사를 했다.
사부, 구여풍은 인상을 찡그리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구여풍의 얼굴에는 수십 줄기의 상처가 얼기설기 나 있었다.
그 상처들은 마치 맹수의 발톱 같기도 하였고, 또 예리한 검이
나 칼로 마구 그은 듯하기도 했다.
꽤 오래 전에 난 상처들이었는지 거의 대부분 아물었지만,
그 상처들로 인해서 그녀의 얼굴은 괴물처럼 변해 있었다.
구여풍의 얼굴은 아마도 그 상처가 나기 전에는 그래도 괜찮
게 봐줄 만한 얼굴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꿈에서 볼까 두려운 흉안(兇顔)에 불과했다.
"그래, 사 대협은 안녕하시더냐?"
황룡대협 사백도는 장백노조와 같이 천하구검에 드는 고수였
다. 그런 고수가 저 밉살맞게 생긴 계집의 이모부라는 사실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자를 고르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장백노조가 군말없이 매
약란을 허락한 것도, 모두 그 잘나빠진 후광(後光) 때문이 아니
던가.
하지만 예의라는 것은 하기 싫은 말도 억지로 하게끔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물론 매약란은 공손히 대답했다.
"잘 계십니다. 그리고 이모님께서 사부님께 안부를 전해달라
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이모라면 그 옛날 실력보다는 미모로 한몫 보던 산화
선자 연리향을 말하는 것이리라.
구여풍의 추한 얼굴이 더욱 추해졌다.
'벌써 일흔이 넘었으면서도, 아직 피부는 스무 살 계집보다
팽팽하다고 했지, 아마? 흥, 검법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미모를 가꾸는 데에만 신경을 썼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언제나 그렇듯이 구여풍은 속이 메스꺼웠다. 자고로 무공을
익힌 여자는 이미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여자가
아닌 이상, 또 외모에는 신경을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녀
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언제나 봉두난발(蓬頭亂髮)을 하고 있
었으며, 절대로 화장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검에 목숨을 건 사람들은
그녀가 지닌 구도(求道)의 정신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물론 그녀가 맨 처음 화장을 한 후 거울을 보다가, 스스로
그 괴상망측한 얼굴에 놀라서 화장을 지우고는 그 이후로 화장
을 하지 않았다, 라는 식의 옛날 이야기는 아무도 몰랐지만 말
이다.
어쨌든 그렇게 그녀의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막내
제자였다.
"그래. 그럼 나가보거라."
그녀는 손을 저었다.
매약란은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무뚝뚝하고 냉정한 사부의
모습을 보아왔는지라, 별다른 생각 없이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 구여풍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참, 내가 제자들에게 보라고 준 천하검류해를 네가 가지고
나갔더냐?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더구나."
순간 매약란의 몸이 미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곧 몸을 돌려
공손하게 말했다.
"제자가 여행을 하면서 심심할까 봐 가지고 나갔었습니다."
구여풍의 얼굴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그래, 이 사부가 직접 저술한 책을 심심풀이로 생각했다는
말이지?'
마누라가 미우면 처갓집 말뚝도 미워 보인다고 했던가.
별 생각 없이 말한 그녀의 말을 그렇게 오해한 구여풍은 손
을 내밀며 더욱 무뚝뚝한 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런 쓸모없는 책이나마 너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다
행이구나. 그럼 여행이 끝났으니까, 이제 돌려줘야지?"
매약란은 망설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제자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구나. 설마 누군가에게 도적질을 당한 것은
아닐 테고……"
구여풍의 말에 그녀는 자신의 사촌 오라버니에게 주었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일순, 구여풍의 검은 안색이 더욱 까맣게 변했다. 그녀는 자
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년! 네가 지금 본문의 절기를 다른 문파의 사내에게 건네
주었다는 것이냐?"
"사부님…… 그게 아니라."
매약란은 갑작스런 사부의 호된 질책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 위로 까마귀의 울부짖음 같은 고함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래, 그 사검명이라는 아이가 잘생겼나 보지? 그래서 그 녀
석과 어찌해 볼 생각으로 알랑방귀를 꼈다는 말이지, 사문의 절
기를 갖다바치면서 말야!"
매약란은 얼굴이 붉어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게……"
"그런 게 아니라면, 왜 그 녀석에게 천하검류해를 갖다바쳤단
말이냐! 설마 천하의 사 대협의 외아들이 우리 문파에 들어오겠
다고 했을 리는 만무하고…… 흥, 뻔하지! 원래 예쁜 계집일수
록 사내 마음을 후리기 위해서 안달이 나 있으니까 말야!"
구여풍은 팔짱을 낀 채로 매약란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이미 매약란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사제를 빼앗아간 사매가 지금 그녀의 눈 앞에 서 있었다.
갑자기 방 안이 시끄러워지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달려왔다.
하지만 제자들은 구여풍의 침실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밖에서 초조한 기색을 하고 서 있었다.
노의량과 여군, 그리고 여수연(註:시집을 가면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당시의 관례임)이 나타난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
다.
노의량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꾸중을 듣던 매
약란을 볼 수 있었다.
평소에도 유난히 그녀에게 혹독하게 대하는 자신의 사매였는
지라, 이번에도 그러한 일이라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기에 약란을 이렇게 꾸중하는 거냐?"
구여풍은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흥, 사형이 저 계집을 편애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이
번에는 사형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노의량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아마도 몇 년 있지 않아 정식으로 장백검파의 장문인이
될 몸이었다. 그런 그가 한 제자만을 편애한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냐니까?"
"흥, 저 계집에게 물어봐요! 사내의 품이 그리워서 얼굴에 철판
을 깔고서 비 오는 한밤중에 어리광을 피울 것같이 생긴 저 계집
에게요!"
그러자 이번에는 여수연과 여균의 낯이 붉어졌다.
여수연은 자신의 마귀 할망구 같은 사저(師姐)를 노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저 성질만 괴팍한 늙은 계집이 그날 일을 전부 보았던 게로
구나!'
그녀가 처음으로 여균의 품에 안긴 그날 저녁, 밤비가 오고
있었다. 구여풍이 그때의 광경을 보지 못했더라면 결코 저런 말
을 할 리가 없었다.
그녀의 상념은 거기에서 멈췄다.
난처해진 여균이 얼른 나서서 울고 있는 매약란을 달래며 말
을 했던 것이었다.
"자, 속 시원히 말해보거라. 도대체 무슨 잘못을 범했기에 네
사부가 저리도 노발대발하는 것이냐?"
매약란은 울먹이면서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노의량과 여균, 그리고 여수연은 할말
을 잃고 한숨만을 내쉬었다.
천하검류해는 그들도 한 번씩 읽어본 책이었다. 사실, 그녀가
호들갑을 떨 정도로 그리 특별하거나 대단한 내용이 담긴 책은
아니었다.
단지, 단지 책자의 맨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장백검법의
한 초식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노의량은 한숨을 쉬며 오돌오돌 떨고 있는 매약란을 바라보
았다.
구여풍의 말대로 노의량이 그녀를 편애한다는 것은 사실이었
다.
십 년 전, 자신의 순간의 실수로 사부를 잘못 만나게 해주는
바람에 매약란이 온갖 고통을 당하고 참기 힘든 수모를 겪게
만들었다는, 그런 자책감 때문에 그는 언제나 매약란을 귀여워
했다.
'하지만 어쩌자고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게냐? 이번만은 노부
도 너를 보호해줄 수 없을 것 같구나……'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약란아."
매약란이 얼른 울음을 닦고 무릎을 꿇은 후, 대답했다.
"네, 사백부님."
노의량은 아직 공식적인 장문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문인이
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장문인과 다름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과, 또 그
의 말이 곧 장문인의 말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사실
이었다.
노의량은 공손히 조아리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가 멈추었다. 여기에서 그가 그녀를 편애한다는 사실이 알려지
기라도 한다면 더욱 난처해지는 것은 바로 그녀였다.
노의량의 나이 벌써 예순이 넘었다.
오로지 검도 일로(劍道一路)에만 매달려 정진을 하느라고 가
족도 이루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매약란은 깜찍한 손녀
딸과 같았다.
하지만……
노의량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께서 이곳에 은거하시고 난 후, 사람들이 우리 일문
(一門)을 가리켜 장백검파라 하였다. 그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삼십 년 동안 본문에는 별다른 문규(門規)가 존재하지 않았
다. 그것은 처음 제자를 거두어 들일 때, 그 어느 곳보다도 신
중하게 제자 될 아이의 자질과, 인격, 그리고 품성을 살폈기 때
문이다."
그의 말에 좌중은 어느덧 쥐죽은 듯이 조용해져 있었다. 계
속해서 흥, 흥, 거리고 있던 구여풍도 입을 닫고 그의 말에 귀
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 역시 천산노조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지 않았
던가.
사십여 년 전, 늑대 떼들에 둘러싸여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
면서 상처를 입지 않았던들, 지금 이렇게 삐딱한 성격을 지니게
되지 않았을지 몰랐다.
그때의 그 사건은 또 노의량이 어렸을 적에 저질렀던 실수로
벌어진 일이었으며, 그로 인해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사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노의량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어느덧 그의 몸에서
는 한 파(派)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기개가
담담히 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특별한 문규가 없는 우리 문파에서도 금기처럼 여기
는 일이 딱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본문의 검법(劍法)을 다
른 사람들에게 유출시키는 행동이다."
순간 매약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노의량은 그런 그녀를 애써 외면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것은 사부님께서 직접 명하신 것이라 그 누구도 제외될
수가 없는 일이다. 약란, 너는 그 금기를 어긴 것이다."
그때, 여균이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약란이 건네준 천하검류해에는 우리 문파의 가장 기
초적인 검법이……"
노의량은 손을 저었다.
"가장 기초적인 검법 속에 그 문파의 모든 정화가 담겨 있는
법이다. 또 검법이 유출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삼류인가 이류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그 아이는 자신의 사촌 오라버니에게 그 책을 주었다고 했
어요. 그렇다면 꼭 외부인만은 아닌 것 아닌가요?"
이번에는 여수연이 매약란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노의량은 고개를 저었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돈의 팔촌에게까지 검법을
전수해도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법. 아무리 자네들이 반
론을 제기해도 그녀가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지울 수는 없네."
그는 잠시 입을 닫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서
아주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노의량은 폐관 중인 사부님을 대신해서 이대제자(二代弟
子) 매약란의 파문을 결정한다!"
파문(破門)!
순간, 매약란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여균과 여수연이 고함을 질렀다.
"사형!"
"그건 너무 심한 벌이 아닌가요?"
구여풍마저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꼿꼿
이 서서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
노의량은 안색이 변한 채로 중얼거리듯, 그러나 매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원래 모든 법이란, 그 법을 어겼을 때의 결과가 가혹하지 않
다면 지켜지지 않는 것이야. 이번 약란의 파문으로 인해서 다른
제자들의 좋은 귀감이 되겠지."
그리고 그는 매약란을 힐끗 바라보고는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방을 빠져나갔다.
"사형!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여균이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라나갔다.
여수연은 오만한 자세로 얼굴을 들고 서 있는 구여풍을 노려
보며 외쳤다.
"그래, 사저는 고소하시겠어요! 그토록 약란을 못살게 굴더니
이제는 아예 쫓아내시게 되어서 말이에요! 좋아요, 사저가 언제
까지 그런 편협한 마음을 가지고 잘 살지 지켜보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매약란을 바라보고는 울
먹이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차라리 잘되었어. 이제 너는 고약한 추괴(醜怪)의 심술
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니까 말야. 어쩌면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구나."
그녀는 다시 구여풍을 노려본 다음, 빠른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갔다.
노의량을 만나 다시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방 안은 조용해졌다.
오로지 매약란이 흐느끼고 있는 소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추스른 듯,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구여풍을 향해 구배(九拜)를 하기 시작했다.
구여풍은 계속해서 그녀를 외면한 채로 서 있었다.
마침내 구배가 끝나고 매약란은 그 자리에 엎드린 채로 흐느
끼며 말하기 시작했다.
"제자를 키워주신 사부님의 은혜는 하해(河海)와 같아서 제
자가 감당하기 너무나 어렵습니다. 제자는 그 은혜를 한 번도
갚지 못하고 이렇게 물러나게 되어, 그저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
다."
구여풍은 조용히 그녀의 흐느끼는 음성을 듣고만 있었다. 그
녀의 고개가 창 쪽으로 돌려져 있어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
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고 사부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부
디 만수무강하소서."
매약란은 말을 마치고는 다시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구여풍의 몸이 잠깐 흔들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매약란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중간에서 멈춰서 더 이상 뻗어지지 않았
다. 잠시 그녀가 그렇게 머뭇거리는 동안, 매약란은 방을 빠져
나갔다.
"후……"
구여풍은 메마른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것처럼
싸늘한 한숨을 뿜어냈다.
그러나 다시 그녀의 얼굴은 평소처럼 냉랭하고 차가운 기색
으로 되돌아왔다.
* * *
그렇게 해서 매약란은 그 동안 정들었던 장백산을 떠나 하산
하기 시작했다.
한 달 전, 그녀가 가벼운 마음으로 사검명에게 천하검류해를
주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
다.
그 사소하게 생각했던 일이 이렇게 커다란 사건을 야기하게
된 것이다.
무림에서 가장 외면을 당하는 부류(部類)가 바로 사문(師門)
을 배신하거나, 파문을 당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제대로 고개조
차 들지 못하고 숨어서 살았다.
매약란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산에서 내려왔지만, 이제 갈 곳이 없었다.
사천성의 그녀의 집?
아마도 그녀의 부모는 파문당한 자식을 볼 생각조차 하지 않
을 것이다. 가문의 수치라며 몽둥이를 들고 쫓아내지 않는 것이
다행이리라.
유주의 이모부 집?
무슨 염치로 그곳을 찾아가랴. 설마 내쫓지야 않겠지만, 그
따가운 눈초리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파문을 당한 자는 원래 갈 곳이 없는 법이다.
천지는 넓은데 그녀를 받아줄 곳이 없었다.
그녀는 장백산 산자락에 서서 마침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
기 시작했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
잼납니다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