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靑瓦臺)
청와대(靑瓦臺)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대한민국 대통령집무실 겸 관저였다.
청와대라 함은 단순히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 공무를 수행하는 '대통령 집무실'과 퇴근 후 기거하는
'대통령 관저' 기능을 가진 '대통령궁(大統領宮)' 건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확장되어
헌법기관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진 및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행정기구 '대통령부(大統領府)'를
의미하고 있었다. 이에 국가기관으로서의 대통령, 또는 대통령비서실을 줄여서 그냥 '청와대'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었다
1948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미군정사령관 관저로 사용되던 구 조선총독 관저를 이양받아 대통령
집무실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로, 조선 시대의 지명에 따라 경무대(景武臺)라고 불렸다.
윤보선 제4대 대통령이 경무대 본관의 청기와 지붕에 착안 청와대란 이름으로 개칭하였으며,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익숙한 현재의 본관을 신축하였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일 뿐만 아니라 국가원수로서 청와대에 근무하는 인원들은
국가원수를 보좌하고 명을 받아 행정부의 장관과 차관을 지휘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청와대에서 파견 근무하고 행정부로 돌아오는 경우에는 청와대 근무자, 정치인들과 친분이
형성되고 또 능력이 있으니까 청와대로 파견간다는 인식도 있어서 청와대 파견 근무 자체가
경력이 되어 복귀 후 행정부 내에서 입지가 강화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이 가장 근무하고 싶어하는 '대한민국 권부(權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다.
2022년 3월 윤석열 제20대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 및 비서실을 서울 용산구로 이전을
천명해서 건물의 용도도 크게 바뀌게 됐다.
청와대의 역사
청와대 터의 기원은 고려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선비기(道詵秘記)'에 이르기를 고려 수도 송악(松岳)은 그 기운을 삼각산(三角山) 즉 한양에게
빼앗긴다고 했고, 고려 숙종 대에 관리 김위제는 국토를 저울로, 지금 서울 당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며 삼각산(三角山)]에 기대어 도읍을 정한다면 온 세상의 신령스러운 물고기들(神魚)이
한강으로 모일 것이라며 역시 '도선비기'를 언급하며 천도를 주장했는데, 점복을 관장하는 일관도
김위제를 지지하자 '남경개창도감 (南京開創都監)'이 설치되었다.
1104년 남경 궁궐이 완성됐고,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했었으나, 이때 남경은 당시 서경처럼
정치적인 중요성이 크지 않아 천도는 논의만 하다가 흐지부지 끝났다.
다만 당시 남경 궁궐은 조성을 했는데, 남경 궁궐터가 바로 훗날 경복궁 후원 자리로 청와대 자리이다.
1382년 2월 우왕 대에 천문과 역술을 관장하던 서운관(書雲觀)에서 또 다시 '도선비기']를 들어 남경
즉 현재 서울로의 천도를 주장했고, 1382년 9월 천도가 이루어져서 우왕도 남경 궁궐에 머물렀으나
1383년 2월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
1387년 우왕은 다시 남경으로 천도를 추진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조선이 들어서자 도읍을 한양으로 천도하고 경복궁을 창건하였다.
경복궁은 원래 남경 궁궐터에 지으려고 했는데, 터가 협소하여 경복궁은 더 남쪽에 자리를 잡고, 남경
궁궐터는 경복궁 후원에 있게 됐다.
조선 초기 군신(君臣)이 동물의 피로서 서약했다는 회맹단은 경복궁과 현재의 청와대 사이에 있었다.
남경 궁궐터 즉 현재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과 북악산 사이에 마치 공터처럼 남겨졌는데, 그래서 아마
일부러 풍수적 이유에서 남겨뒀을 것이니 이곳에 청와대가 들어서면 안된다는 의견과 고려에서부터
이어진 궁궐터로 길지(吉地)라는 의견 등 논란이 있어왔다.
그렇게 현재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 후원에 위치하다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 소실된 후 한동안
방치되었다.
이후 이곳은 고종 대에 이르러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데 바로 경복궁 경무대(景武臺)이다.
즉 경무대는 조선시대부터 있던 이름으로 경복궁 후원에 있던 넓은 터의 이름이다.
넓은 터와 함께 몇몇 전각들이 있었다.
이 넓은 터에서 왕의 참석 하에 과거 시험을 치르거나 권농, 연무 등이 행해지기도 했다.
이 "경무대(Kyung Mu Dai)"가 훗날 이승만 정부 시절 경무대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이곳을 전각들과 함께 헐고 공원부지로 만들었으며, 1937년에 이 지역을
조선총독부 조선 총독 관저 부지로 선정하여 오늘날의 청와대 구 본관 자리에 관저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 지붕은 보천교(普天敎) 본당이던 십일전(十一殿의 화려한 청기와를 가져왔다.
그래서 관저 지붕이 푸른색이었다.
1939년 완공 후 6대 총독 미나미 지로가 관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해방이 되면서 미군정 치하에서 미군정 사령관인 미합중국 육군 중장 존 하지 장군의 관저로
쓰이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하지 장군이 물러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관저를 주면서
그렇게 대한민국 대통령의 관저로 쓰이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 이후 과거 경복궁 후원에 있던 넓은 터의 이름인 경무대(景武臺)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에 입주한 첫 대통령이 된 이승만 대통령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망치를 들고 가 모든 일본산 전구와
가로등을 깨 버리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서울이 2차례 함락 당한 6.25 전쟁 당시에는 임시수도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에 임시 관저를 두었는데
이 건물은 경상남도지사 관사를 거쳐 현재 임시수도 기념관이 되었다.
그리고 환도 이후 경무대가 다시 대통령 관저가 되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에 대한 반감의식 때문에 경무대라는 이름은 원성의 대상이 되었고,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후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경무대라는 이름을 바꾸는 것을 두고 논의가 이뤄졌다.
당시 서울시사 편찬위원이던 김영상이 윤대통령에게 불려가 경무대라는 이름을 바꾸지 말 것을 요청
했지만, 윤보선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했고, 김영상은 '화령대'와 '청와대'의 두 가지 안을 제시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백악관(White House)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청와대(Blue House)'를 선택하였다.
대통령경호처 유튜브에서 청와대에 윤보선 대통령이 쓴 '청와대' 바위 각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대통령경호처 청와대 역사
박정희 대통령 당시, 청와대라는 명칭을 황와대로 바꾸자는 의견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청색보다는 황색이 대통령에 걸맞는 의미의 색이라며 논란이 일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이름을 또 바꿀 수는 없다."며 기존 이름을 고수하기로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청와대를 'Blue House'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영부인 육영수가 불쾌감을 표하여 청와대를
한국어의 발음대로, 'Chong Wa Dae'로 표기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대통령 측근을 비롯한 청와대 직원들은 Blue House, 약칭 BH로 불렀다.
대통령의 지시를 'BH의 하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총독부 관저로 지어진 건물이었던 만큼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기에는 협소하고 노후화되어
재건축하자는 의견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이승만이나 윤보선은 청와대 건물에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이후 취임한 박정희는 청와대를 대대적으로 개보수, 증축하였다.
당시 청와대 1층은 집무 공간으로 대통령 집무실과 서재 등이 있었고, 2층은 대통령 가족의 생활공간이었다.
그러나 이후 건물이 노후화되고, 협소하여 외국 정상 방문 시 수행원이 머물 공간조차 없어서 청와대를
재건축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박정희는 재건축 건의는 무시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두환 시절에 청와대 구본관을 다시 리모델링하였고 이후 노태우 시절이 되어서야 본관과 관저,
프레스센터인 춘추관을 신축하여 2년 2개월간의 공사 끝에 1991년 9월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공사는 현대건설이 맡았는데,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을 많이 참고했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외국
유명 호텔들과도 비교해가며 직접 문고리 모양까지 고를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청와대 관저를 신축하는 과정에서 300~400년 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라고 쓰인 표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그 해 10월 구 본관이 전부 철거되었다.
현재는 '청와대 구 본관 터'라는 표식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북악산의 정기가 이어지는 능선을 끊기 위해 해당 건물이 지어졌다는 풍수적 해석에 따라,
벽돌과 기와는 기존 능선의 복원에 사용하고 가구와 집기는 보존하는 한편, 샹들리에와 승강기는 대통령이
사용하던 물건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도록 분해 후 재사용을 전제로 경매에 내놨다.( 당시 KBS보도)
김영삼 대통령은 철통같이 막힌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PC통신 하이텔에
'청와대 큰마당'을 개설했고, 1995년에는 CI를 도입하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열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시도
참여정부 시절 행정수도계획은 종국적으로는 대통령 집무실을 세종시로 이전하는 계획까지 포함이었다.
그러나, 행정수도 반대파가 제기한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 이전 위헌결정으로 인해 이전이 불가능한
관계로 세종시에 제2집무실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세종시에는 비록 건물은 지어지지 못했으나 청와대 제2집무실 부지와 국회의사당 분원 부지는
남겨놓은 상태다.
혹시 나중에 개헌해서 서울시에 있는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을 철거한 뒤 수도를 세종시로 옮기고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을 세종시에 새로 짓기로 결정할지 모르니까.
2015년 10월 29일 박근혜정부당시 열린 국회 운영위 예산 심사 과정에서
"청와대 내부 소통을 강화하기위해 건물 재배치 추진예산을 주겠다" 라는 안이 청와대 예산신청만 하면
서로 반대만 하던 여야 양측의 이례적인 합의하에 통과 됐는데 청와대측의 "소통에는 문제가 없다"라는
이재만 총무비서관의 답변으로 거부되었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유력 후보들도 이구동성으로 당선되면 집무실부터 정부서울청사 등
보다 소통이 원활한 장소로 옮기고, 장기적으로는 대통령 관저 자체를 이전하고 청와대는 박물관 등의
공간으로 변경하겠다고 공약했다.
2017년 5월 10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문재인은 공약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정부서울청사로 이전하고 청와대 지하벙커, 영빈관 등은 대통령
시설로 사용하되 본관, 관저, 녹지원 등은 대통령박물관, 시민공원 등으로 변경하겠다고 공약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인수위 기간 없이 투표 다음날부터 대통령 업무를 시작하게 되면서 우선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 등 참모들이 업무를 보는 비서동인 여민관 집무실에서 일상 업무를 보게 되었다.
여민1관 3층에 대통령 집무실이 마련되었다.
참모들과 함께 비서동으로 출근하는 문재인 대통령 이후 청와대 집무실 이전이 시설, 부지, 경호 등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장기적인 과제로 검토됨에 따라 임기말까지 여민1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게 되었다.
건축가 승효상은 청와대를 정부서울청사가 아닌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또는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개조하여 새 청와대로 만들자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개인의 의견일 뿐이라고 밝혔다.
2019년 정부세종청사 2청사와 민간건물 임대로 이전이 완료되었다.
정부서울청사로 대통령 집무실이 이전시 대통령 관저문제도 불거지는데 당장은 관저는 그대로 이용하고
집무실만 정부서울청사로 이전하자는 안과 옮길거면 다 옮겨야 하기에 국무총리는 세종시에 제2공관이
마련된 관계로 삼청동 공관을 대통령 공관으로 바꾸자는 안이 나왔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공약은 청와대를 국민에게 개방할 예정이므로 대통령의 거주지인 관저도 함께
이전해야 하는데, 역시 예상대로 삼청동 국무총리공관을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는 방안이 가장 유력했었다.
이럴경우, 국무총리공관은 세종시에 제2공관이 이미 만들어져있기 때문에 세종시로 이사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2019년 1월 4일, 유홍준 '광화문 대통령 시대' 자문위원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가진 브리핑을 통해,
시설, 부지 등의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대통령 집무실 정부서울청사 이전과 청와대 개방은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이 끝난 후에 장기적인 과제로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윤석열 정부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
제20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윤석열 당선인은 이전 문재인 정부 초의 계획처럼 청와대는 공원, 박물관 등
국민을 위한 공간으로 전환하고,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를 개수해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로, 삼청동 총리
공관이나 한남동 3군참모총장 공관, 정부 소유 안전가옥 등 기타 장소를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겠다는
계획안을 발표했다.
윤 당선인은 취임 전에 모든 작업을 마무리해 기존 청와대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대통령실 이전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는 주변 빌딩들이 많아 보안 문제가 있고 유사시 사용할 지하벙커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대안으로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는 것도 검토하였다.
2022년 3월 16일 용산구 국방부 신청사로 이전이 확정되었다는 서울경제 단독기사가 나왔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고 외부와의 차단이 용이하며 지하 벙커가 존재해 유사시 경호문제가 없기때문에
선정되었다고 했다.
이후 중앙일보의 단독 기사로 윤석열 당선인이 이전을 승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은혜 당선인 대변인은 아직 확정된 것이 없다고 밝혔으나 3월 20일, 윤석열 당선인의 기자회견을 통해
국방부 신청사로 이전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1394년 조선의 한양 천도 이후 일부 기간을 제외하고는620여년간 줄곧 서울 4대문 안에 있던
국가원수의 정식 집무 공간이 처음으로 사대문 밖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건물
청와대는 당연히 국방부 국가중요시설 지정 및 방호 훈령에 따른 "가"급 국가중요시설이며 그련 이유로
인해 상세하게 서술하지는 못하며 국내 포털사이트에서 검색 가능한 언론에 보도된 정도로만 서술 가능하다.
물론 경복궁 바로 뒤쪽에 있었기 때문에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기도 했고, 구글 어스 등 해외 지도에서는
선명하게 잘 나와 있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거의 다 공개했고, 박근혜 정부 당시 세월호 7시간 및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청와대의 구조가 많이 공개되었다.
본관
1991년 9월 4일 새로 지어진 건물로, 의외로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1층에는 영부인의 집무실과 접견실, 무궁화실, 인왕실이 있고, 1층 별채에는 충무실, 세종실이 있으며,
2층에는 대통령의 집무실과 접견실, 백악실, 집현실이 있다.
본관 앞에는 엄청나게 넓은 잔디마당이 있는데, 대통령이 참석하는 야외행사에 주로 사용되었다.
국빈 환영식이 대부분 여기서 진행된다.
본관이 완공된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집무실이 위치한 본관과 비서실이 위치한 여민관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대통령과 비서관 사이의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새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청와대 본관을 리모델링 해서 대통령 비서관들을 입주시키거나, 본관 옆에
비서동을 새로 만들자는 안이 제출되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전직 대통령 비서관들의 말에 따르면 여민관에서 본관으로 가는데 차로 5분, 걸어서 최소 10분이
걸렸다고 하며, 같은 청와대 경내임에도 불구하고 검색대를 따로 통과해야 했다고 한다.
같은 건물 안에서 대통령 비서관들이 수시로 만날 수 있는 백악관과는 천양지차.
결국 본관 집무실은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며 여민관 간이 집무실이 주 집무실이 되면서 국무회의 및
귀빈 방문 시에만 사용하는 보조 집무실이 되고 말았다.
대통령 집무실
상당히 넓은데, 넓이가 약 100m²가 넘는다고. 출입구부터 의자까지 15미터에 달할 정도로 넓은데,
백악관의 경우 그 거리가 8~ 10m 정도에 불과하다. 천장 높이도 3m가 된다.
너무 넓어서 장관이 보고를 마치고 뒷걸음으로 나오다 뒤로 넘어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전임 대통령들도 대부분 문제 인식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처음 집무실을 둘러본 뒤 "운동을 해도 되겠다"라고 했을 정도.
김영삼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아예 정부서울청사로 옮기고 싶어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비서관들과 소통하기 위해 비서동에 집무실을 설치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도
가끔 여민관 집무실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집무실과 관저를 번갈아 가며 사용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나 귀빈 방문 시에만 본관에서 업무를 보고 그 외의 평시에는 여민관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사실상 본관 집무실은 행사용으로만 쓰게 되었다.
영빈관
1978년 12월 준공된 청와대 경내의 현대식 건물 중 제일 오래된 건물로, 대규모 회의와 외국의
국빈들을 맞이했던 장소다.
민속공연이나 만찬, 연회, 회의 등을 하는 곳. 석조 양식으로 건축된 건물이다.
이곳이 준공되기 이전까지 소규모 국빈 접객은 청와대 본관에서 이루어졌으며, 대규모 접객은
서울신라호텔의 영빈관에서 이루어졌다.
1970년 이후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국빈들은 증가하였지만 청와대 내에 만찬이나 연회 등
행사를 치를 공간이 마땅치 않아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또 국가 위상과도 걸맞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대규모 회의도 자주 열리게 되었는데 당시 청와대에는 마땅
한 공간이 없었다. 따라서 청와대 내에 대규모 행사장을 갖춘 지금의 영빈관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영빈관에 국빈이 묵을 숙소가 없어 국빈은 환영행사 후 시내 호텔로 이동했다.
겉모습은 경복궁 경회루를 닮았다.
정작 내부는 프랑스 루이 14세 때의 건축 양식을 따라 부조화라는 지적이 존재한다.
1층은 대접견실로 외국 국빈의 접견행사를 치르는 곳이다.
만찬행사시에는 공연이 행해지기도 하며, 국빈행사 외에 대규모 회의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내부 정면벽 중앙의 원형 속에 새겨져 있는 봉황 문양은 태평성대와 대통령을 상징하고, 천장의
원형은 대화합을 상징한다.
2층은 대규모 오찬 및 만찬 행사를 하기 위한 장소로서,내부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와 월계수
등으로 장식하였다.
여민관(與民館)
국민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곳
대통령비서실이 위치한 건물로, 대통령 관련 업무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곳.
이 건물은 볼거리가 별로 없고, 흔히 볼 수 있는 콘크리트 건물이다.
대통령비서실 행정을 위한 건물로 3개 동이 있다.
1관은 2004년, 2관은 1969년, 3관은 1972년에 지었다.
1관에는 대통령 간이집무실과 대통령비서실장실이 있다.
2008년 9월 당시 이명박은 국민을 위한다는 뜻으로 '위민관(爲民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2017년 5월 12일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여민관(與民館)'으로 다시 바뀌었다.
대통령 여민관 집무실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비서관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여민1관' 3층에 설치한 간이 집무실이다.
본관 집무실의 절반 정도 크기인 87m²이다.
처음 노무현 정부 때는 어두운 고동색으로 내장을 꾸몄고 창문을 가릴 수 있는 발을 설치했다.
이명박 정부 때에는 본관 집무실과 비슷한 밝은 인테리어로 변경되었다.
매주금요일마다 조찬을 겸한 수석비서관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잘 쓰이지 않았다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문재인 대통령 본인 민정수석 시절
쓰던 10인용 원형탁자를 찾아내 배치하고, '일자리상황판'을 집무실에 설치했다.
또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 여민관 집무실에 있던 태극기는 없어졌다.
관저
1990년 10월 25일 완공된 전통 한옥 양식의 건물. 대통령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생활공간인 본채(내실), 접견공간인 별채(외실), 전통양식의 뜰과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전에는 구 본관 2층을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였다.
박근혜 정부 시절, 내실은 침실, 서재, 피트니스 룸, 소식당, 한실, 파우더 룸으로 구성되었으며
외실에는 경호실, 조리실, 대식당, 접견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 관저 뒤편에는 통일신라 불상이 있는데, 흔히 '청와대 불상', '미남 불상', '미남 석불' 등의
별칭으로 불린다. 비교적 최근인 2018년 4월 20일에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란 정식명칭으로
대한민국의 보물 제1977호에 지정되었다.
경주에 있던 불상이 청와대에 있는 이유는 일제가 약탈해서 조선총독부 총독관저에 둔 것을 광복 이후
그대로 있었던 것이고 경주로 돌려줘야 한다는 운동이 꾸준히 있다.
원래 위치는 경주 이거사라는 절이라고 한다.
대통령 관저에 있던 한옥 '침류각'이 효명세자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상춘재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곳에 20여 평 규모의 "매화실"이라는 이름의 조선총독부 별관 건물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상춘실"로 이름만 바꿔 사용하다가 1977년 12월에 철거되었다.
1978년 3월 양식 목조건물이 들어섰으나 다시 철거되고, 규모를 크게 키워 1983년 4월 5일
전통 한옥양식으로 다시 지어 청와대 최초의 전통 한옥이 되었다.
외빈 접견이나 비공식회의 장소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여야 당대표를 초대하거나 기업인을 불러 호프미팅을 하기도 했다.
녹지원
이곳도 특별한 날(특히 어린이날)이면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녹지 공간.
큰 소나무가 있는 잔디를 깐 야외 행사장이다.
본관 앞 대정원이 국가적인 귀빈을 맞는 행사 등에 쓰인다면 이 녹지원은 좀 더 대중적인 행사에
주로 쓰인다. 어린이나 어르신, 장애인 초청 행사 등 국민을 초청하는 행사는 대부분 여기서 치러진다.
1995년에는 이곳에서 열린음악회가 열리기도 했다.
춘추관
내부는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건물. 청와대 프레스센터로 각 언론사의 기자들이 이곳에 출입했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기자회견장도 여기에 있다.
비공식적인 쓰임새가 또 있는데 바로 극장이다.
2000년대 이전만 해도 대통령이 일반 극장에 방문한다는 인식은 생소해서 쉽게 방문하기 어려웠다.
한 번 극장에 갈 때마다 경호원들이 따라붙어야 하고 극장에서도 경호 문제로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일반 관람객들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컸다.
그래서 대통령과 그의 가족, 그리고 청와대 상주 직원들이 영화를 보려 할 때 이 춘추관을 이용했다고.
수궁(守宮)터 (구 본관 터)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후원이었던 곳.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여기를 허물고 총독 관사를 지었다.
이 총독 관사를 그대로 대통령 집무실 및 관저로 사용한 것이 청와대의 시작이다.
새 본관과 관저가 완공된 뒤, 구 본관은 1993년 철거되었고 그 터를 옛 지형대로 복원하여
수궁터로 부르고 있다.
서별관
본관 서쪽에 위치한 건물로, 1997년 거시정책협의회가 이곳에서 열리며 알려졌다.
청와대에서도 중요한 비공개회의를 자주 하는 곳으로 알려졌다.
서별관 회의는 김영삼 정부 이후 20여 년간 각종 경제 정책의 지휘부 역할을 했던 비공개회의로
경제부총리, 경제수석, 한국은행장, 금융위원장을 비롯한 최고위급 인사들이 참석한다.
비공식회의이기 때문에 어떠한 회의록이나 기록물이 남지 않아 밀실회의라는 비판이 있었다.
2016년 6월 이래로 잘 열리지 않다 2018년 12월에 한 번 열렸다 계속해서 열리지 않았다.
시화문
시화문(時和門)은 경호실 업무를 위한 건물이다.
연풍문
연풍문(年豊門)은 외부인이 공무수행을 위해 출입 절차를 밟는 건물이다.
외부인이 이용할 수 있는 복지시설이 있으며 각종 국정홍보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2009년 2월, 기존에 있던 북악안내실을 헐고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준공되었다.
시화문과 짝을 이뤄 "시화연풍"(時和年豊ㆍ나라가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을 뜻한다.
이명박 정부 당시 정책이었던 "저탄소 녹색성장"에 걸맞는 태양광 발전, 독도 수호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독도 CCTV 영상 중계시설(KBS 제공) 등이 있다.
민원인에게는 첫 대외적 공간 역할을 하므로 각 대통령의 정책을 홍보하는 건물 역할도 한다.
2009년과 2012년,
2016년엔 이곳에서 열린 비공개회의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청와대 사랑채
대통령비서실장 공관이 있던 자리로, 1996년 2월 청와대 앞길 개방과 함께 대통령이 해외에서
받은 각종 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개장하였다.
대통령이 해외, 그리고 외교 사절로부터 받은 각종 선물은 국민을 대신해서 받은 것으로 개인
소유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