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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원천동 치암고택 이야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50 15.02.05 19: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원천동 치암고택(遠川洞 恥巖古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안막동 119-1
(원소재지 : 도산면 원천동)
건 축 주 :  이만현(李晩鉉, 1832~1911)
건축시기 :  19세기
이건시기 :  1976년
소 유 자 :  이동수(관리자 : 이동수)
문 화 재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호, 1973년 8월 31일 지정, 1동

건축 이야기
퇴계로 387번지. 퇴계로가 시작되는 시점. 안동시가 와룡면 쪽으로 나가며 북쪽으로 도시 영역을 막 벗어나는 지점에 치암고택이 있다. 앞쪽은 향산고택. 뒤쪽은 치암고택이다. 두 집은 나란히 서 있고, 위 아래로 서 있다.

향산고택의 울타리 옆으로 난 길을 돌아들면 넓은 마당이 나타난다. 치암고택의 바깥마당이다. 상당히 높은 축담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라서, 마당에서는 향산고택이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치암고택의 바깥마당 높은 축대가 향산고택의 뒤 울타리가 되는 셈이다.

건축 배경
“이 집은 치암 선조가 지었어요. 큰집, 칠곡고택을 먼저 지어 드리고, 다음에 이 집을 짓고, 동생 집도 지어 주었지요.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받으셨으니까”라고 이동수(李東秀)가 말하였다.

“원래 집은 육사기념관 자리 바로 앞에 있었지요. 원촌마을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우리집뿐이예요. 치암할아버지는 분가해서 참 어렵게 사셨어요. 후년에 형편이 나아지신 것이지요. 경술국치 후에는 은퇴하고 돌아와 세상을 한탄하다가 병을 얻어서 그 이듬해 돌아가셨어요. 손자 대에 와서 이 집이 완전히 몰락해서 문집, 유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지요. 집도 경매로 넘어갔어요. 선친이 다시 구매해서 오늘에 이른 것이지요.”

건축 구성
바깥마당의 동쪽 끝 부분에는 서향하여 서 있는 새 건물이 있다. 정면 4칸. 고택 체험객을 받기 위해 새로 세운 건물이다. 날렵하고 가벼워 보이지만 현대식 생활이 가능하도록 지은 건물이다.

집 앞에 세워진 안내판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극심한 분노와 실망으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치암 이만현의 집’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세기 후반, 고종시대의 건물이며, 안동댐의 건설로 처음 원촌에 있던 것을 1976년에 이곳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바깥마당에 북면하여 서면 치암고택의 정문이 앞을 막아선다. 멋을 부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멋을 안 부린 것도 아닌, 딱 그만큼만 멋을 부린 현판 글씨가 횡으로 시야를 막고 나선다. 대문의 한쪽에는 용(龍)이라는 한자가, 다른 한쪽에는 봉(鳳)이라는 한자가 큰 글씨로 써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규모이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의 동편으로 붙어서 남향하고 있다. 중문 쪽 3칸은 방이다. 중문 쪽으로 2칸은 각 2쪽 씩의 문이 달렸고, 중문에서 먼 쪽의 1칸은 네 쪽 문이 벽면 전체를 덮고 있다. 앞쪽으로는 반 칸 정도 넓이의 쪽마루가 붙어 있다. 현주손인 이동수는 이 마루를 어른들이 장자마루라고 불렀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사랑채 동편 끝의 1칸은 마루방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 정도 넓이의 마루 칸인데, 앞의 장자마루 보다는 조금 층이 높게 되어 있다. 장자마루와 이 마루 사이에는 낮은 판자로 가로막혀 있기도 하다. 이 마루의 정면과 동쪽 측면 일부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마루의 뒤쪽은 반 칸 정도의 감실이다. 옆의 장자마루 쪽이 앞으로 반 칸 넓이의 마루를 두고 뒤로 폭이 1칸 정도 되는 방을 마련해 놓고 있다면 여기에서는 그 비례가 역전되어 앞으로 1칸 정도 폭의 마루방, 뒤로 반 칸 정도 폭의 감실로 바꾸어지는 것이다.

중문에도 한자 글씨가 나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한쪽은 계민생(啓民生)이고, 다른 쪽은 봉천리(奉天理)이다.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사람들을 일깨운다는 의미인 모양이다. 중문으로 들어서면 口자형 집의 안채이다. 안채는 4칸 규모. 중앙에 2칸의 마루를 두고 양쪽으로 방이 벌려 서 있다. 마루는 양쪽으로 내려 붙은 방 부분에서는 좁은 쪽마루로 바뀐다. 구렛나루처럼 내려서는 양쪽의 쪽마루와 안채의 마루가 만나는 부분은 사선으로 마루 쪽을 더 붙여서 각진 부분을 없앴다. 마루의 위쪽 선반 위에는 반짇고리 여러 개가 줄을 서고 있다.

현판
치암고택(恥巖古宅)
치암은 이만현의 호이다. 대문 위에 붙어 있는 현판이다.
치암구려(恥巖舊廬)
징분질욕(懲忿窒慾)
징분질욕이라는 것은 분노를 참고 욕심을 억누른다는 <역경>의 구절로서 노여움을 참고 허망한 욕망을 억눌러 자신의 심성을 수양한다는 뜻이다. 퇴계선생의 글씨이다.
성경(誠敬)
성(誠)이란 성인의 마음과 같이 순수하고 성실한 것을 의미하고, 경(敬)이란 경건하게 자신의 생각을 바로잡고 흔들림 없이 이끌어 가서 성인의 마음자리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를 뜻한다.
지극한 공부에 대한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문중 이야기
- 원촌에 뿌리를 내리다
치암 4형제의 부친은 이휘면. 통덕랑이고, 자는 정노(正老)이다. 1807년(순조 7)에 출생하여 1858년(철종 9)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진주강씨이다.

이 계열은 이극철(李克哲)의 둘째 아들인 이구(李?)에게로 연결된다. 이휘면의 5대조가 이구인 것이다. 이구는 진성이씨 12대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통정대부 이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며, 자는 대방(大方), 호는 원대(遠臺)이다. 진성이씨 일문 중 원촌에 처음 기지를 정해 살기 시작한 사람이다. 1681년(숙종 7)에 탄생하여 1761년(영조 37)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인동장씨이다. 이구의 가계는 이극철, 이영도를 거쳐 이황에게로 이어진다.

이극철의 첫째 아들은 단사에 자리를 잡았고, 둘째 아들은 원촌에 뿌리를 내렸다. 이극철은 이영도의 장자 이기(李岐)의 둘째 아들이며, 이영도(李詠道)는 이황(李滉)의 장자 이준(李寯)의 셋째 아들인 것이다. 이황의 후손들은 상계에서 흘러나와 하계에 정착하고, 하계에서 또 원촌으로 나아가 살게 되는데, 치암 이만현(李晩鉉)은 그 원촌 계열의 한 갈래인 것이다.

이 계열의 삶이 치암고택에 담겨지기 위해서는 이만현의 시대를 거친 다음에나 가능해지는 것이지만, 그 가계는 이미 도산 주변의 산과 물 사이 여기저기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쳐 여러 가지 양상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하나의 흐름이 치암고택에 담겨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관련문집
- 진성이씨족보(眞城李氏族譜)
1600년에 발간된 경자년 족보로 현존하는 우리 나라 족보류 중에서 해주오씨 족보와 문화유씨 가정보에 이어 3번째로 오래된 것으로 3책으로 된 목활자본이다.

 

관련인물
- 이만현의 가계
현 주손인 이동수는 1950년생이다. 안동 청년유도회 일을 보고 있다.
이동수의 선친은 이원봉(李源琫). 자가 성옥(聲玉)이고, 1922년생이다. 치암의 증손이다.
이원봉의 부친은 이규호(李赳鎬). 자는 경무(景武)이고, 1892년(고종 29)에 출생하여 1946년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풍산김씨이다.

이규호의 부친은 이중길(李中吉)이다. 통덕랑이고, 자는 주윤(周尹)이다. 1872년(고종 9)에 출생하여 1926년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의성김씨이다.

이중길은 이만현(李晩鉉)의 양자이다. 생부는 이만근(李晩瑾)이다. 이만현은 자가 영옥(英玉)이고, 호가 치암이다. 1832년(순조 32)에 출생하여 1911년에 타계하였다. 문과 출신으로 교리를 제수 받았고, 통정대부로 승차하였다. 배위는 광산김씨이다. 치암 이만현은 4형제 중 셋째이다. 맏형은 이만황(李晩璜)인데, 자는 군망(君望)이다. 1827년(순조 27)에 태어나서 1851년(철종 2)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남양홍씨이다.

둘째 형은 이만박(李晩璞)인데, 자는 탁여(琢汝)로, 1831년(순조 31)에 출생하여 1906년(광무 10)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전주이씨이다. 동생은 이만근(李晩瑾)인데, 통덕랑으로, 자가 문옥(文玉)이며, 1846년(헌종 12)에 출생하여 1905년(광무 9)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선성김씨이며, 장자인 이중길(李中吉)을 치암에게 양자로 보냈다.

 

안동 > 시내권 > 안막동
- 고개로 둘러싸여 은거하기에 알맞았던 마을
안막동은 안동부의 서부 지역으로, 안동부성으로 들어오는 북문 가까이에 있는 자연적 장벽인 고개로 둘러싸인 마을이었다. 마을 부근에 농지가 없었으므로 안동부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소외 계층이 주로 살았다고 보여진다.

약 150년 전 안동권씨(安東權氏) 판관공(判官公)의 후예인 권동규(權東奎)라는 선비가 은거지로 정하고, 자신의 호(號)로 몽은서당(蒙隱書堂)을 열어 대성(大成)한 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안동권씨의 재실이 있으며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고려 공민왕 때, 현재의 길원여고(吉原女高) 자리에 순흥(順興) 안효자(安孝子)의 대묘막(大墓幕)이 있었기 때문에 안막골이라 불렸고, 1914년 며질리(?質里)와 병합하여 안막동이 되었다. 과거의 안막동은 현재의 명륜동, 신안동, 상아동을 다 포함한다.

길원여고 아래쪽에는 모양이 얼금얼금하다고 해서 얼근방우라 불리는 바위가 있었다. 그 아래로 약수가 솟아 폭포를 이루어 쿵쿵 킁킁 소리를 낸다고 해서 쿵쿵바우라고도 불렸으나 지금은 아파트 공사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바위를 돌아 조금 아래쪽의 현대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곳에는 7세기 것으로 보이는 횡혈식(橫穴式) 석실 고분이 있었는데 지금은 안동대학교로 옮겨져 있다.

안동에서 예안 방면으로 가는 고개 아래의 안막동은, 이 고개를 중심으로 그 너머가 견훤군과 왕건군이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전장인 병산이었다. 따라서 안막동 골짜기는 그때의 전투와 관련된 명칭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홍건적을 피해 온 고려 공민왕과 관련된 이름도 있다. 머지리·며질리·원지(遠地)라 불리는 마을이 그곳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은거하기 알맞은 피난지로, ‘그저 먼 곳에 있다’는 뜻으로 원지·원촌·머질이라 하였다고 한다.

안동시는 1960년대부터 안막동 고개로 오르는 곳에서부터 도산서원에 이르는 국도를 ‘퇴계로’로 명명하였다. 고개 중턱에는 안동댐 수몰로 이건해 온 향산고택과 치암고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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