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귀정 미수 허목 글씨
남명의 시
아계 이산해 시
병와 이형상 시
훈수 정만양 시
지수 정규양 시
식호와(임심재), 완귀정
임심재
식호와
완귀정
경주문화연구교사모임 2019년 9월 21일
道東서당-道昌학교-道南공민학교 현판이 붙어 있다.
도동서당의
도동은 도(유학)가 해동으로 전해짐을 말한다. 김굉필을 제향하는 도동서원도 있다.
동은 '동쪽으로 온다'는
動詞.
도창학교의
도창은 도동과 도동 남쪽의 대창을 합해서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도남공민학교의
도남은 도동과 봉동을 1914년에 행정구역
통합해 붙인행정동명인 도남동이다.
완귀정
김희준
작년 여름이다. 신문에서 내 고향 영천에 있는 완귀정(玩龜亭) 광주(廣州) 안씨 가문의 최근 100년의 역사를 서술한 장편소설, 『도동 사람』이 출판된 소식을 접하고 책을 주문하였다. 632쪽의 두꺼운 책을 배달받은 지 몇 달이 지나서야 제1부 「정자와 과수원」을 우선 읽었다.
올해 이월에는 영천에 다녀왔다.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는 고향 선배가 영천문학자료관 개관식에 참석해달라는 전화를 주었다. 백신애의 생가와 백신애가 공부한 향교와 하근찬이 올랐던 서세루(瑞世樓) 가까이에 있는 자료관에는 백신애, 하근찬의 전집, 백무산, 성희직, 조주환 등의 시집, 내 수필집 등 영천 출신 작가들의 작품들이 거의 소장되어 있었다.
『도동 사람』은 물론이고 작가인 도동재(道東齋) 선생님을 그 자리에서 뵐 수가 있어서 또한 기뻤다. 독일에 유학하여 괴테와 토마스 만을 연구하고, 우리나라 독문학계의 원로 학자이신 선생님은 백신애, 하근찬 전집을 간행하고, 영천의 민중사를 발굴하여 시로 기록하며, 자료관 개관에 헌신한 선배 시인을 상찬하는 축사를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으며 해주셨다. 선생님 옆자리에 앉아서 인사를 드리니 너무나도 겸손하고 공손한 말씨로 무명의 후학을 후대해 주시니, 선생님이 반가의 후예이시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선생님은 『도동 사람』을 참석한 사람들에게 서명을 하여 선물해 주셨다. 그러면서 미군정 시기 영천 지역의 10월 항쟁과 6·25 전후의 국민보도연맹 관련 양민학살 등을 선배 시인이 발굴한 자료를 보지 못하여 소설에서 피상적으로 다루어 아쉽다고 하셨다. 책이 출간되고 나서 친구인 한문학 교수님의 지적으로 소설에 실린 남명(南冥)의 시에 나오는 응강(凝江)이 광주 안씨의 영천 입향조이고 완귀정을 지은 안증(安嶒) 선생의 고향마을인 밀양 금포리(金浦里)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말하는 고유명사임을 알게 되었다며 시 해석을 바로잡아 주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영천의 정체성을 위하여 자료관에 서양 근대에 탄생한 근대문학 자료만 소장하지 말고, 영천 사람들인 포은, 노계 등의 전통 시대의 시문학 자료도 전시되고 소장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하였다.
자료관 현판식을 하고 도동재 선생님은 서울로 돌아가는 차를 기다리며 선배 시인과 함께 서세루로 가시고 나는 포항으로 돌아왔다.
영천의 최남단에 있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철부지 어린 날에 부모님 따라 완행버스를 타고 삼십 리 바깥의 읍내 장에 처음으로 갔다. 처음 타보는 버스는 서 있고 창문 밖으로 전봇대와 가로수가 뒤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큰 장터에서 부모님을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처음 보는 집비둘기가 먹이를 쪼아먹다 떼를 지어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부모님은 입맛이 떨어져 밥을 잘 먹지 못하고 생기가 없는 나를 데리고 병원에서 링게르라고 하는 큰 병에 들은 영양제 주사를 맞게 하였다.
국민학교 때는 선생님 따라 읍내를 관통하는 금호강변 절벽에 웅장하게 솟아있는 누각의 마당에서 열린 백일장과 사생대회에 참가도 하였다. 금호강 건너편의 작산(鵲山), 채약산(採藥山) 너머로 고향마을에 있는 사룡산(四龍山)의 검은 능선이 하늘 아래 아득히 보여서 신기했다. 사룡산과 이어진 구룡산은 어린날 소풍을 갔지만 어른이 되어 이 산에 있는 수암사 절터에서 바라보니 웅장한 산세의 운문산이 마주 보였다. 누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내가 다섯 살 때 개울가에 미나리밭을 일구다 파상풍균에 감염되어 위독해진 어머니가 한 달 넘게 입원한 평인의원이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산남의진(山南義陳) 의병장, 동엄(東广) 정환직 선생이 일본군에게 지금 포항 내연산수목원에 있었던 화전민 마을인 심양리(潯陽里, 火田-불밭-角田)에서 체포되어 조양각 아래의 금호강변에서 1907년 11월 16일에 총살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발의 노장이 처형되기 전날 밤 영천 감옥에서 지은 절명시가 눈물겹다.
身亡心不變 몸은 망해도 마음은 변치 않으며,
義重死猶輕 의는 무거우나 죽음은 오히려 가볍다.
後事憑誰託 뒷일을 누구에게 맡길까?
無言坐五更 말없이 새벽까지 앉았노라.
家亡身已擒 집안은 망하고 몸은 이미 사로잡힌 처지,
時悔比心存 때론 먹은 마음 견주어보며 뉘우치기도 하네.
今行知不歸 지금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지만,
一念在幼孫 한 가지 걱정은 어린 손자가 있음이네.
***백사 최영성 교수 해석(2022년 12월 12일 카톡으로 문답):
家亡身已擒 집안은 망하고 몸은 이미 사로잡힌 처지
時悔比心存 때론 먹은 마음 견주어보며 뉘우치기도 하네.
자신의 마음이 변했는지, 변하지 않았는지를 스스로 비교하며 후회도 해본다는 말인 듯합니다.
***12월 11일 영천읍 조양각앞 천변에서 왜놈 헌병에 의해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이 때 난데없는 광풍이 불어 조양각 기왓장이 날라 집행수의 머리를 쳐 즉사케 하였으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후일 뜻있는 사람들은 선생과 장군의 충절을 기려 조양각 앞에 기념비를 세웠다.
문화원 옆의 누각은 조양각(朝陽閣)과 서세루라는 편액을 앞뒤의 처마에 달고 있다. 누각은 고려말에 영천군수 이용이 명원루(明遠樓)라는 이름으로 처음 짓고 포은(圃隱) 선생이 시를 지어 고향 친구의 누각 창건을 축하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영천의 의병들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읍성을 수복하며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였고 화공(火攻)으로 누각은 불탔다. 중건된 누각에 걸린 칠십 개의 시판 중에는 고향마을 곁에서 태어나고 의병항쟁에 가담했던 노계(蘆溪) 박인로 선생이나 지인의 조부가 되는 성암(誠庵) 노근용 선생의 시도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상급학교를 다니고부터는 금호강 다리를 건너 읍내 남쪽의 너른 주남(周南) 들판을 지나서 삼거리에서 옹기굴이 열을 지어 있는 고개를 넘어 고향마을로 오갔다. 옹기굴 가까이엔 고향마을에서 약방을 하다가 읍내로 이사 온 안씨가 세운 가마니공장이 있었다. 약방의 안씨 형제는 나와 또래였다. 고개를 넘으면 고향마을에서 흘러내리는 강이 있고, 강 건너편 언덕의 숲속에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정자가 버스의 차창 너머로 보였다. 정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언제 누가 지은 정자인지 늘 궁금했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다. 포은 선생이 태어난 임고에서 형의 친구가 형에게 보내온 편지의 우표 소인에 임고서원 그림이 찍혀 있었다. 포은과 노계 두 분이 영천 사람임을 학교에서 배우기 전부터 그렇게 알았다.
역사교사가 되어 포항에서 30여 년 살아오면서 포항 사람들이 10여 년 전부터 포은 선생이 영천의 외가에서 태어나고 오천의 친가에서 성장하였다며 사실을 왜곡하는 일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인터넷으로 포은의 생장지 관련 자료들을 모두 수집하여 읽어보았다.
조선왕조실록과 도암(陶庵) 이재가 지은 포은 묘지명부터 모든 자료에 포은은 영천 우항리에서 탄생하고 성장하였음을 기록하고, 임고서원 가까이에 있는 포은의 부모 묘소에 있는 묘비에는 포은의 조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본관인 오천의 청림동에서 우항리로 이주하여 포은 형제가 태어난 사실을 새기고 있었다.
포은의 순절지는 선죽교가 아니라 포은의 저택이 있는 태묘동(太廟洞) 동구임을 용비어천가와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세종 때 간행된 삼강행실도에는 이성계의 사위인 이제와 이화, 이방과가 이방원의 포은 살해를 허락하고, 조영규, 고여, 이부 등이 칼로 포은을 죽이는 생생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 실려 있었다. 백이와 숙제의 고죽국(孤竹國)이 황해도에 있었다고 비정하고 그 충절의 상징이 된 선죽교(善竹橋) 순절설은 조선 중기 이후에야 나타났고, 정조 때 간행된 오륜행실도에는 선죽교와 철퇴가 등장하는 김홍도의 그림이 실려 있었다. 권근, 변계량의 문하생으로 포은의 손제자가 되는 태재 유방선은 포은이 순절한 지 19년이 지난 24세에 영천으로 유배와서 화창한 봄날에 포은이 살던 옛집을 방문하여 포은이 손수 심은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어루만지며 포은을 추모하였다. 그는 영천에서 경산에 유배된 쌍계리 사람 이안유(李安柔)와 단종의 포신(逋臣)이 된 조상치(曺尙治)와 교유하고, 순흥부사로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가 순절한 대전(大田) 이보흠 등을 제자로 길렀다.
포은 자료를 검색하며 병와(甁窩) 이형상 선생의 「입압유산록(立巖遊山錄)」을 읽었다. 병와의 조카사위가 공재(恭齋) 윤두서이고, 공재의 손자사위가 다산(茶山)의 아버지, 정재원이다. 정재원은 처진외조(妻眞外祖)인 병와에게 경학을, 공재는 예학을, 다산은 아버지에게 경사를 배웠다. 병와는 통유(通儒)였다. 다산 경학의 뿌리는 병와에게 닿고, 공재의 화가로서의 재능도 병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병와의 자화상과 그림, 전각(篆刻), 거문고가 지금도 전해온다.
강직한 성품의 병와가 진한 교체기의 위만조선 시대에 경주로 남하한 진(秦)나라 사람들이 만든 정전(井田)의 유적을 보존하는 문제로 관찰사와 뜻이 어긋나서 경주부윤에서 파직되어 금호강 언덕 위에 호연정(浩然亭)을 짓고 살았다. 남인의 땅인 영천에 머문 것은 완귀정 사람인 성재(省齋) 안후정(安后靜)과 교유하며 결정된 것이리라.
서세루 서쪽에 있는 호연정에서 병와는 청풍당(淸風堂) 박영손과 노계의 후손으로 우항리에 사는 석연(石淵) 박성세(朴聖世), 완귀정의 성재와 어울려 몇 번이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초나라와 조나라가 합종한 일로 토론을 하였다. 병와는 여헌집(旅軒集)을 읽고 꿈속에서도 입암을 찾아갔다. 토론 모임을 하던 세 사람은 마침내 여헌 선생이 명명한 입암의 28경을 찾아서 1700년 음력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4박 5일간의 여행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우항리에서 포은 생전에 영천군수 정유가 세운 효자비를 보고 임고서원에서 충신의 표상이자 조선시대 유학의 연원인 포은 선생의 영정에 배알하고 퇴계(退溪) 선생이 기증한 책과 글씨를 보았다.
공민왕의 왕비 노국대장공주를 모시고 고려에 온 양기(楊起)가 나의 외가인 청주 양씨(楊氏)의 시조이고, 그의 증손인 귀암(歸庵) 양배(楊培)는 세종 때 동래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효자정려비가 내려졌다. 고향마을에 외가의 선조인 귀암공의 묘소와 효자정려비가 있다. 귀암공의 따님은 회재(晦齋) 이언적 선생의 증조모이다. 귀암 선생은 포은의 효자 정려문과 정려비가 있는 우항리에서 태어나 포은의 충효에 감화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여헌 장현광 선생은 영남에 학파를 형성한 사람으로 임진왜란을 피하여 인동에서 청송으로 갔다가 영천의 선비들이 초청하여 입암에 머물렀고 만년에 입암에서 은둔하다가 그곳에서 세상과 작별하였다. 입암서원에는 그의 제자 학사(鶴沙) 김응조가 화공을 보내어 그리게 한 여헌의 화상(畫像)이 모셔져 있다.
병와는 경주부윤으로 임명되어 가며 금호강변의 영천땅인 청담(淸潭)에서 환영 나온 성재와 처음 만났다. 병와가 금호강의 동경도(東京渡)를 건너 경주로 부임한 이후에도 또 호연정에 머물 때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새로 나아간 성재와 병와는 열흘이 멀다 하고 만났다. 입암의 욕학담(浴鶴潭)에서 술을 마셨고, 완귀정 옆의 금호강 요도(蓼島)에서 함께 낚시하였다. 병와가 제주목사로 떠날 때는 성재가 열 몇 동이의 술을 들고 호연정에 찾아와 전별연을 하였고, 병와는 제주에서 성재의 부음을 듣고 제문을 보내어 마흔넷의 나이에 죽은 벗을 애도하였다.
완귀정은 이렇게 하여 나에게 다시 다가왔다. 「입암유산록」을 역주하며 혼자서 완귀정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완귀정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향나무 고목만 옛터를 지키고 있었다. 골목에서 만난 할머니는 우리 안씨도 다 떠나고 이제 몇 집 남지도 않았다며 푸념하였다. 완귀정 남쪽에는 담장을 치고 대문이 있고 마당이 넓은 기와집 건물이 있는데, 도동서당, 도창학교, 도남공민학교로 쓰던 건물이었다. 완귀정 앞의 공터에는 광복군 소령 안경수(安慶洙)의 사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입암유산록」을 역주한 나는 2011년에는 어린 날 백일장과 사생대회에 참가하며 갔던 서세루 옆 문화원에서 입암유산록의 내용을 고향 사람들에게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며 강의도 하였다. 2019년 9월에는 경주의 교사들이 영천의 문화유산 답사 안내를 부탁했다. 완귀정에서 시작하여 호연정, 서세루를 거쳐서 시총(詩塚)이 있는 하천(夏泉)을 지나 입암서원까지 병와, 성재, 석연 세 사람의 입암 여행 코스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호연정을 지키는 병와의 후손을 통해 완귀정 문중 어른께 연락하였다. 어린 날 완행버스 차창 너머로 처음 보았던 완귀정 정자에 오십 년 세월이 지나서 처음으로 올랐다. 정자 난간에 기대어 암벽 아래의 물을 굽어보고, 마루에 서서 고개를 들어 옛사람들의 시판들과 상량문을 우러러보았다. 내 고향마을의 사룡산과 구룡산(九龍山)에서 발원하여 흘러오는 응강의 물은 산업화를 겪으며 탁해져 있고, 한문을 배우지 못하고 전통과 단절된 우리는 현판을 읽을 수 없는 청맹과니였다.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眉叟) 허목의 독특한 전서체와 누군가의 해서체 완귀정 편액이 걸려 있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산림처사인 남명(南冥) 선생이 을사사화의 조짐이 일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영천에 은둔한 완귀 선생에게 준 시와 29세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선위사가 된 아계(鵝溪) 이산해가 남명의 시를 칭송하며 지리산 아래에 머무는 남명을 그리워하는 시, 남명과 아계의 시를 차운한 병와, 영천의 형제 학자인 훈지양선생(壎篪兩先生), 남명의 시에 차운한 동사강목으로 유명한 순암(順庵) 안정복, 경주의 선비 활산(活山) 남용만, 포은의 방손인 함계(涵溪) 정석달, 매산(梅山) 정중기, 명고(鳴皐) 정간의 시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정자를 중건한 성재의 완귀정 12경 시, 상량문이 걸려 있었다. 성재의 완귀정 12경에는 『도동 사람』에 등장하는 동강포(桐江浦)가 있었고, 매산의 완귀정 시는 영천 7경의 하나로 읊은 것이었다.
현판을 모두 촬영하고 답사에서 돌아와 현판의 시들과 완귀정 옆의 임심재(臨深齋), 식호와(式好窩), 완귀정 종사(宗史) 관련 자료까지 찾아서 며칠 동안 읽고 번역하여 모임의 사이버 카페에 답사 자료 삼아 올렸다. 하지만, 완귀정 안씨 문중의 최근 100년의 역사는 알 수 없었다.
영천문학자료관 개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나는 도동재 선생님께 휴대폰 문자와 이메일을 보냈다. 완귀정에 걸린 남명의 시에 나오는 응강이 완귀정 아래로 흐르는 호계천(虎溪川)의 다른 이름이고 운문(雲門)이 청도의 운문산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내가 큰 발견을 하였다며 놀라워하며 완귀공이 고향 밀양의 응강에서 취하여 명명한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도동 사람』을 며칠 동안 완독하고, 독후감을 편지로 써서 내 수필집 『눈 내리던 밤』과 함께 낙산(駱山) 아래의 도동재로 부쳤다.
그 뒤로 선생님의 저서인 『괴테, 토마스 만 그리고 이청준』, 『한국 교양인을 위한 새 독일문학사』를 사서 읽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책방에서 사서 읽었던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괴로움』이나 토마스 만의 『브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독일 역사의 맥락에서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었다.
토마스 만의 가문 소설인 『부덴부로크 가의 사람들』의 배경이 된 저택 사진이 표지에 들어가 있지만 『도동 사람』은 완귀정 안씨 가문의 3대 백 년의 역사가 민족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치밀한 구성과 문장으로 묘사되어 있다. ‘자꾸 번지는 산불을 끄듯’ 끝없이 밀려오는 일들을 감당하고,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인생이 꿈결같다’고 하는 대목은 주인공 동민이 얼마나 치열하게 인생을 살았는지 보여주었다. ‘생광(生光)스럽다’, ‘설분(雪憤)’ 같은 말은 내가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어서 또한 친숙했다. 동민의 할아버지인 ‘직천(直川) 어른’이나 직천댁, 직천의 다른 이름인 정동(貞洞)이 친정인 정동댁에겐 친근감을 느꼈다. 어린 날 광주 이씨 시조 묘소를 지나서 외할아버지가 소달구지를 끌고 자인(慈仁) 장터를 왕래했다는 나(蘿)고개를 넘어 큰 못이 있는 직천으로 소풍을 갔기 때문이다. 영지산(靈芝山) 아래의 직천에는 단종의 충신인 부제학 정재(靜齋) 조상치, 지산(芝山) 조호익 선생의 무덤이 있는 창녕 조씨(曺氏)의 선산이 있었다. 국제 학술대회에서 불교 유식학과 원효(元曉)와 쇼펜하우어와 괴테를 순식간에 꿰뚫어내는 동민의 지성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유가(儒家)의 후예로서 성의정심(誠意正心)과 공의(公義)로 일관하며 역사에 참여한 ‘도동 사람’, 동민의 일생은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말한 ‘희망의 예조(豫兆 Vor-Shein)’를 우리시대에 보여주었다. 나에게 선생님은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소설을 남긴 이미륵과 비교되었다. 평론가는 ‘귀신 소설’, ‘학자 소설’이라고 하지만 나는 겨레와 가문의 역사와 주인공의 학자로서의 일생과 동서고금을 융관(融貫)하는 지성이 소설이라는 용광로에 녹아 있는 ‘인문학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수필집을 다 읽으시고 우리의 인연이 전생부터 이어지는 것 같다며 여름에 다시 영천에 가면 만나서 소설의 무대가 된 완귀정을 함께 거닐며 많은 대화를 하고 싶다는 선생님의 은혜로운 답장 편지를 받았다. 그 뒤에도 남명시 해석 문제를 두고 선생님과 여러 번 의견을 나누었다. 선생님은 ‘옛사람의 아득한 뜻을 헤아릴 길이 없다’며 나에게 남명의 시를 해석해보기를 권유하셨다. 삼십여 년 전에 역사교사로 부임하여 읽은 점필재(佔畢齋)의 시, 「가흥참(可興站)」에서 영감을 받고, 남명집에 실린 「제삼족당(題三足堂)」, 「선무랑호조좌랑김공묘갈(宣務郞戶曹佐郞金公墓碣)」 등의 자료들을 해석의 근거로 제시하며 고민 끝에 영천에 다녀온 지 한 달 만에 아계가 ‘봉황음(鳳凰吟)’이라고 하였던 시를 해석하였다. 완귀공의 아버지 태만(苔巒) 안구(安覯) 선생은 점필재의 제자이고, 남명은 완귀공이나 탁영(濯纓) 김일손의 조카인 삼족당 김대유와 교유하였다. 선생님은 정자 주변의 자연과 정치 현실을 연결하는 나의 해석이 독특하다며 칭찬하고, 남명시 이해에 큰 도움을 받았다며 감사해하셨다.
題玩龜亭 완귀정에 붙임
在永川佐郞安嶒江亭 영천에 있는데 좌랑 안증의 강가 정자이다
金馬何嫌上策遲
금마문에서 대책 늦게 올린 것 어찌 싫어하리오,
此江無主亦非宜
이 강에 주인 없다면 또한 마땅치 않네.
玩龜自是觀頤事
여기서 영귀(靈龜)를 사랑하고 이괘(頤卦)의 일을 살피며,
飮酒方知得意時
은둔하여 음주하며 사는 것이 득의(得意)의 때임을 바야흐로 알리라.
東畔野延河畔遂(逐)(완귀정 현판에 ‘遂一作逐’이라 했음)
동쪽에 펼쳐진 들판(사림 세력)은 강변(草野, 학문)으로 쫓아가고(逐),
北邊山走日邊馳
북쪽에 이어진 산(외척 세력)은 해 주변(국왕, 권력)으로 치달리네.
潺湲一帶凝江水
잔잔히 흐르는 한 줄기 응강(凝江; 완귀 안증)의 물은,
不及雲門萬丈奇
만 길로 솟은 운문산(雲門山; 삼족당 김대유)의 기장(奇壯)함도 미치지 못할 것이네.
*김희준: 《포항문학》(1997)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수필시대》(2014) 신인상을 받았으며, 수필집 『눈 내리던 밤』(북랜드, 2017)이 있다. sunya91@hanmail.net
-<<작가정신>>(대구경북작가회의, 2022년) 원고 追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