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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상, 박상옥, 김흥수의 작품에서 보이는 색점,형태와 구도는 이인성의 것을 그대로 답습, 계승한것으로 이인성적인 한국의 독특한 회화정서를 주축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과 17세의 소년으로 제8회 `선전’(1929년)에첫 입선을 시작으로 `선전’시대의 종막을 내린 마지막 회(1944년)까지 6회에 걸친 연속 특선에 최고상이었던 창덕궁상까지 받았다.
또 1937년 25세에 추천작가가 되어 향후 3년간유일한 추천작가로서의 권위와 영예를 누렸으며 다음 해에는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으니 `선전’ 서양화부는 이인성을 위해 운영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전의 기린아’로 불리어진 이인성은 1930~40년대 한국화단의 핵심적 화가로 향토적인 정경들을독특한 시각으로 형상화했던 한국 근대회화의 천재적 작가로 기억됨에 고향인 대구 시민들은 자긍심을 갖고 있다.
청정(靑汀) 이인성은 1912년 대구 태평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취객으로 무위도식하는 편이고 어머니가 조그만 주점을 경영하며 집안 살림을 꾸려나갔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서당에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던 그는 동네 유지들의 도움으로 11세가 되어 수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또 그재능은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한시와 서예를 권하며 그림 그리는 것을 완강히 막았다. 아버지의 감시를 피해 몰래 집 뒷담을 넘어 산격동에 가서 그곳 풍경을그렸다. 집에 돌아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가 화구를 빼앗아 내 팽개쳐 버렸다. 겁에 질린 이인성은 그림만 가지고 겨우 도망쳤다.
그 그림은 동경에서 열린 `세계아동미술전’에 출품해 특선을 차지했다.
그의 나이 13세인 1925년의 일이다.
3년 뒤인 1928년 10월 `세계아동미술 전람회’의개인 회화부 공모에 수채화 `촌락의 풍경’으로 특선을 하기도 했다. 천재 소년 화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며 그의 예술에 대한 신념은 이를계기로 굳혀졌다.
`선전’에서 두 차례 입선으로 명망을 얻자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북여고)교장이던 백신수길(白神壽吉)의 주선으로 미술수업 차 도일해 태평양미술학교에서 본격적인 회화공부를 했다.
1933년 졸업 후 킹 크레용 회사에 근무하던 중 그곳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던 대구 출신인 김옥순을 만나 사귀게 되었다. 김옥순은 당시 대구에서 가장큰 병원인 남산병원 원장인 김재명의 딸로 부유한가정의 출신이었다.
김재명이 결혼을 맹렬히 반대했으나 이인성의 재질을 아끼고 앞날을 기대하던 유지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어려운 결혼이 성사됐다. 그것은 1936년 함께 귀국한 뒤다.
1940년 아내 김옥순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는 깊은 실의에 빠져 폭음했고 정상적인 생활의 패턴을 잃게 되었다.
이인성과 자주 술을 마신 무영당 백화점 주인인이근무와 음악평론가이자 동화작가인 윤복진은 물심양면으로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44년에 이화여고 미술교사로 있다가 해방을 맞아 이화여대 미술과 강사로 출강했고 1948년에 유화, 수채화 40점으로 서울 동화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정부수립 후 제1회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약칭)이 개최되고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6·25가 발발하던 해에 북아현동에 은거했으나 공산군에 잡혀 연행되기도 했다.
9·28수복 후 아직도 멀리서 포성이 울리고 황폐해진 서울의 11월 4일. 집 근처 술집에서 밤늦게 술을 마시다 순경과 심한 말다툼을 했다.
집까지 뒤따라 왔던 마포 경찰서 교통순경 김성환이 쏜 총탄에 맞아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비명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전쟁이 끝난 1954년 7월 3일. 백문영 등 대구의화우들이 백향다실에서 `이인성화백 유작 전시회및 추도식’을 거행해 대구가 낳은 천재화가의 예술혼을 기렸다.
또한 서울 천일화랑에서는 김중현·구본웅과 함께 `3인 유작전’이 열리기도 했다.
30년대 우리나라의 인상주의는 이인성의 등장으로 비로소 뚜렷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왜냐하면 그간의 일본적 감성에 의해 절충된 인상파의 경향을 벗어나 방법과 모티브의 해석에 있어 인상파의 본질에 그는 더욱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상파 방법의 발전적 극복이 향토적인 소재의 심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서양화의 수용이 단순한 기술적 과정을 넘어서 예술적 차원에 도달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인성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면 초기작품으로는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50년대 전후에는 보나르적인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파란 지붕이 보이는 풍경’(1932년), `니콜라이성당’(1935년 전후), `강변’(1947년 전후) 등은 인상주의의 밝고 풍부한 색채와 터치 그리고 다양한물빛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그의 인상주의적 경향은 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후반까지 10년간 계속되고 있는데 `가을의 어느 날’(1934년)은 모티브나색감, 인물의 대체적인 처리에서 고갱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는 작품이다.
그리고 `풍경’(1935년), `해바라기’(1947년 전후), `들국화’(1947년) 등의 동감이 넘치는 터치와색면을 둘러싼 선들은 고흐를 연상케 한다.
1940년대 이후의 작품들은 `사과’ `목욕’ `가을풍경’, 그 외 자화상, 소녀, 정물 등은 세잔느가 즐겨 다룬 주제였으며, 구도의 질서를 추구한 점에 일치성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제작된 `실내’는 창밖 정원을실내의 일부로 끌어들인 화면 구성으로 밝고 눈부신 외광과 작고 짧은 터치로 화사하고 충만한 색감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보나르의 경향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인성은 인상주의에서 보나르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여러 경향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하는 노력을 보였다.
이인성의 독자성은 주제 선택의 향토성(형태와색감), 해맑은 한국의 대기감을 성공적으로 잡은데서 찾아야 하며, 이러한 그의 독자성으로 `유채화를 통하여 하나의 한국미를 정립’, `한국적 소재를 작가 특유의 감성으로 표현하면서 독특한 자기세계를 형성’한 작가로 평가 받고 있다.
이인성의 작품 중 `가을 어느 날’은 인상주의에서 출발했던 그가 소재와 색감에서 한국적 정서가베인 세계로 옮아가 주목되는 작품이다. 전체적으로는 고갱의 타이티 작품을 연상시키지만 시들한 해바라기와 옥수수가 있는 시골 들판에서 바구니를 든 반나(半裸)의 여인과 어린 소녀는진한 향토색을 느끼게 한다.
화면 중앙에 자리 잡은 해바라기의 유연한 곡선과 독특한 형태로 파악한 여인과 소녀, 붉은 황토색의 들판과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은 한국적 정서를 물씬 풍기게 한다. 이러한 한국적 색감의 세계는 `경주의 산곡에서’의 보다 정리된 화면에서 더욱 강하게 표출된다.
예의 한국 초목과 산야 그리고 한국인의 정확한체위를 가진 인물과 색감은 주제나 조형방법 면에서 서구의 어떤 경향이나 영향이 배제된 순수 한국미의 독자한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다.
<권원순 :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