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w Life, 행복한 귀향, 인생 선구자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일제 강점기 때 발표된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우리 가곡 ‘선구자’ 그 노랫말 1절 2절 3절 전문이다.
조국의 해방을 꿈꾸며 만주 벌판에서 말달리던 우리 독립군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내 그 노래를 숱하게 불렀었다.
부를 때마다 가슴 뭉클해지는 감동이 늘 함께 했었다.
그런데 내 그 노래로 빚어진 특별한 사연들이 있다.
셋 모두, 나로 하여금 쪽팔리게 했던 사연들이었다.
첫 번째 사연은, 그 곡 각 절의 마지막 소절 마지막 대목인 ‘깊었나’에서, 특별히 치솟는 고음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서 꼭 마른기침으로 마무리하고는 했던 것이 그랬고, 두 번째 사연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중학교 동기동창 친구들이 어울린 어느 자리에서 내 그 노래를 나서서 불렀을 때의 일로, 나로서는 당연히 우리 독립군의 기상을 높이는 곡인 줄로 알고 목청 터져라하고 불렀는데, 그 뒤 끝에 가까이 지낸 친구 하나가 그 곡은 우리 독립군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일본이 강점해서 세운 만주 괴뢰정권을 칭송하기 위해서 작곡된 것이라고 뜬금없는 힐난을 한 것으로 그랬고, 세 번째 사연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 강점기 때 우리 고향땅 문경에서 국민학교 교사를 지낸 이력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문경읍내 기념관인 ‘청운각’(靑雲閣)에서 15년 전에 겪었던 일로, 청운각 그 마당에서 ‘선구자’ 그 노래를 고성방가로 부르다가 내 또래 나이로 보이는 그곳 관리인에게 쫓겨난 것으로 그랬다.
그 셋의 사연 중에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안 잊히면서 내 얼굴을 뜨겁게 하는 쪽팔림은, 바로 마지막 그 사연으로 인한 것이다.
하도 억울해서였다.
고성방가로 부른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 가슴에 품은 뜻은 달랐다.
괜한 고성방가가 아니었다.
나름의 뜻이 있었다.
박 대통령 그 분이 평소 그 노래를 즐겨 부르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그 분의 기상을 기리고 싶었던 것이, 바로 내 나름의 뜻이었던 것이다.
관리인은 그런 내 뜻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저 내 노래를 소음으로만 치부해버리고는, 관리사무소에서 쫓아 나오면서 내게 고함을 질러, 나를 청운각 그곳에서 내쫓아버렸던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잣대에만 맞춘 그 권위적 소행이, 그때의 나를 참 억울하게 했었고, 똑 쪽팔리게 했었다.
‘선구자’ 그 노래를 또 불렀다.
2022년 8월 217일 수요일인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환영하네. 그 기념으로 오늘 우리 문경새재 과거길 좀 오르세, 계속 비가 와서 계곡 물도 철철 넘칠 같으니 말일세.”
아침 느지막하게 내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꼬드기는 친구가 있었다.
내 국민 학교 중학교 동기동창인 안휘덕 친구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러잖아도 마누라하고 둘이 가볼까 했었어.”
내 그렇게 뜻을 같이 했다.
그 통화를 끝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만촌 내 친구가 부부동반으로 문경읍내 우리 집까지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렇게 해서 고향땅 문경으로의 영구귀향을 한 이후, 처음으로 문경새재 과거길을 오르게 된 것이다.
아직은 녹음 짙은 초입의 단풍나무 숲길을 들어섰다.
마치 터널처럼 뚫린 그 숲길에서 시원한 바람이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요란한 매미 울음소리와 계곡의 물소리 또한 시원했다.
어언 가을인가 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가을을 느끼며 숲길을 걸었고, 영남대로 제 1관 주흘관을 지나고, 내 중학교 동기동창인 박희구 친구가 엿장수에게 5,000원을 주고 사서 몇날며칠을 갈고 닦아서 세워놓은 ‘홀로영 현감 철비’ 앞을 지나고, 드라마 ‘태조 왕건’을 촬영했던 세트장을 지나고, 옛 선비들이 하룻밤 묵어가던 조령원이 있던 그 터를 지나고, 길손들의 목을 축여주던 주막도 지나고, 등 굽은 소나무가 긴긴 세월 버텨온 교귀정(交龜亭)도 지나고, 지나가는 여인들을 꼬드긴 꾸구리가 산다는 몇 아름드리 큰 바위가 있는 용추(龍楸)도 지나고, ‘산불됴심’이라고 붉게 새긴 표지석도 지나고, 방앗간 없이 그냥 돌아가는 물레방아도 지나고, 몇 구비로 떨어지는 조곡폭포도 지나고, 그리고 영남대로 제 2관인 조곡관을 넘어갔다.
초입에서 10리길의 거리였다.
그곳 쉼터가 이날 우리들 행보의 끝이었다.
주위 풍경이 가관이었다.
특히 우뚝한 금강송이 장관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얼굴이었다.
‘일송정 푸른 솔은’
그렇게 우리 가곡 ‘선구자’의 노래를 부르는 박 전 대통령의 얼굴을 떠올렸다.
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안휘덕 내 친구의 얼굴이었다.
일찌감치 깨우침이 있어서 귀향을 했고, 그리고 호남 순천 출신의 아내인 유미순 여사의 헌신적 도움을 받아 지금의 ‘만촌농원’을 일구어낸 친구의 그 선각을 생각한 것이다.
그 친구 덕분에, 나도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고향땅 문경읍의 한 귀퉁이에 텃밭을 장만해서 귀향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친구의 그 선각이 고마웠다.
아무래도 노래 한 곡 불러야 했다.
인생 선구자 같은 친구의 그 선각을 기리고 싶었다.
이 눈치 저 눈치 안 봤다.
그냥 불렀다.
그 부른 노래가 바로 ‘선구자’ 그 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