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군중 속에도 단연 돋보이는 목소리
실제로 구슬 크기만한 옥이 있다면 직접 한번 굴려보고 싶다.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와 유현아씨의 목소리. 어느 쪽이 더 고운지. 뉴욕타임즈로부터 ‘맑고 청아하며 평화롭고 안정된 음색을 가진 가장 인상 깊은 성악가’라는 칭송을 받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정말 그렇게 고운 목소리는 난생 처음이다.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거주하는 소프라노 유현아씨를 만난 곳은 볼티모어 피바디 음대(The Peabody Preparatory)앞 카페 Sascha’s. 그리스 풍의 모던한 실내장식이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다. 하필 런치 타임이어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손에 든 학생들로 붐비지만, 이런 곳에서 인터뷰가 가능할까 하는 걱정 따윈 아예 접어버렸다. 수 많은 웅성거림 속에서도 이 ‘성공한’ 성악가의 목소리는 단연 튀어 오르니까.
이곳 카페에서 현아씨는 스타다. 오가는 사람마다 휘파람을 불며 손을 흔들고, 샐러드가 입에 가득 든 그를 굳이 일으켜 세워 오랫동안 안아주기도 한다. 한마디로, 유현아 너 정말 대단하다, 부럽다였다.
“볼레티 상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렇게 열렬한 축하를 받는거죠?”
“참 고마운 상이에요. 학교를 떠나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음악 초년생들의 든든한 ‘빽’이 돼 주는 상이죠.”
이름 있는 세계 유명 음악대회가 ‘영예’를 위한 거라면, 이 상은 ‘행운’이다. 영국 볼레티-뷰토니 트러스트 재단이 전세계 젊은 음악가를 대상으로 선정하는 이 상은, 타고난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과 장래성, 음악적 완성도 등을 종합해 엄밀한 심사를 거쳐 주어진다. 상을 주는 조건도, 받는 사람 조건도 까다롭기가 여간 아니지만, 일단 뽑고 나면 확실하게 밀어준다. 가능성을 열어 주면 뭔가 이뤄낼 거 같은 신인에게 독창회를 비롯한 각종 음악회를 열어주고, 유럽 각국의 방송 출연, CD제작 등의 레코딩 홍보 등 모든 음악적인 활동을 지원한다. 이를 위해 재단은 앞으로 2년 동안 1만파운드(약 1천8백만원)를 지원한다. 당연히 차세대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행운이다. 그 행운을 유현아라는 이 늦깎이 음악가가 거머쥔 것이다.
피아니스트 조너선 비스, 클라리넷티스트 마틴 프로스트, 첼리스트 솔가 베타 등 9명과 함께 이 상을 받은 현아씨는 “이 상을 수상하도록 도와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우치다 미쓰코(內田光子)에게 감사 드리며 이제 시작이라는 각오로 음악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악하는 사람 치곤 너무 작고 왜소하죠, 나?”
첫인상을 보고 잠시 당황했던 걸 눈치 챈 걸까. 어색한 분위기로 샌드위치만 먹고 있는 필자에게 그가 불쑥 말을 꺼낸다. 사실 그랬다. 목소리와 외모가 너무 틀려서 당황했다. 그는 TV에서 보던 그 넉넉한 체구의 화려한 성악가가 아니었다. 결코 크다고는 할 수 없는 키에 다이어트 식품 모델 같은 깡마른 체구, 화장기 없는 얼굴. 화려한 구석이라곤 찾아보려고 해야 찾을 수 없다. 아무리 뜯어봐도 그 덩치 어디에서 클래식 음악이 나올까 싶다. 거기다 영국의 권위 있는 볼레티-뷰토니 트러스트(Borletti-Buitoni Trust)상 수상자라니!
사랑에 열정적인 그녀, 멋진 남자 만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재능을 꽃피워 온 신동도 아니었고, 그 흔한 음악 꿈나무도 아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한 현아씨는 텍사스 주립대에서 분자생물학과 예의학을 전공한 과학도였다. 실험실에서 밤을 새며 연구 논문을 쓰고, 아이 우유병을 소독하는 평범한 엄마였던 그가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음악을 시작한 것은 남편 때문이었다.
그는 양손에 큼지막한 반지를 끼고 있었다. 언뜻 봐도 결혼반지임에 틀림없다. 왼손에는 자신의 결혼 반지. 오른 손에는 남편의 결혼반지.
“남편 얘기 해도 돼요?”
어렵사리 입을 뗐더니, 남편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표정이 환해진다.
“나, 우리 남편 얘기 하는 거 너무 좋아해요’
공부하는 재미에 실험실에서의 밤샘 작업이 힘든 줄 모르던 스무 살 때, 스물 일곱의 청년 유영호씨를 만났다. 남편은 같은 대학에서 컴퓨터 사이언스 박사과정을 하는 유학생이었고 훤칠한 외모에 마음이 너무 착해 더 없이 좋았던, 편안한 남자였다. 젊은 그들, 정말 열심히 사랑했다. 당장 결혼하고 싶었지만 졸업은 하고 결혼하라는 부모님의 만류에 부딪혀 그 때부터 줄곧 현아씨의 졸업만을 기다렸고, 스물 셋이 되던 해, 졸업과 동시에 그의 아내가 되었다. 햇병아리 주부 솜씨로 저녁 상도 차리고, 예쁘게 집도 꾸몄다. 다음 해 가을 아들 다니엘을 낳았을 때는 가슴이 너무 벅차 남편과 함께 손을 잡고 울었다. 총명한 아내, 마음 좋은 남편, 하루가 다르게 재주가 늘어가는 아들. 세상 행복은 다 가진 같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불행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치듯 현아씨 앞에 떨어져 내렸다.
악몽 같은 그 날 아침. 꿈에서 조차 지우고 싶은 순간. 지금도 간절히 소망한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그 아침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몇 발의 총성, 가슴을 움켜쥔 남편, 아 그날!
1993년 2월 14일. 필라델피아. 일요일 아침 교회 주차장. 몹시도 추운 날이었고 하필 밸런타인데이였다. 현아씨가 성가대 연습을 하는 동안 남편 영호씨는 5개월 된 아들 다니엘을 좀 더 재우기 위해 차에 있었다. 젊은 아빠는 아이가 답답해하지 않도록 차 안의 온도를 맞추고 있었거나, 혹은 눈을 감고 성가대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피아노 반주를 감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 때 흑인 십대 두 명이 영호씨에게로 다가왔다.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리고 이어지는 총성.
타앙- 탕. 몇 발의 총성이 교회 주차장을 울릴 때 남편은 가슴을 쥐고 쓰러졌다. 심장 관통. 남편 이영호 즉사.
흑인 십대들은 차를 탈취해서 달아났다. 5개월 된 다니엘을 실은 채로. 남편의 시신을 끓어 안고 통곡할 새도 없이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다니엘마저 보낼 수는 없다. 아기를 찾기 위해 필라델피아 경찰이 총 동원됐다. 피말리는 몇 시간이 지난 뒤, 다니엘은 필라델피아 어두운 흑인 뒷골목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됐다. 엄마를 닮았는지 목청이 워낙 커 TV를 보던 흑인 할머니가 다니엘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한다. 미국의 흑인 뒷골목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아는 사람들은 다들 ‘기적’이라 말한다. 더구나 그 추운 날씨에. 극적으로 아들을 찾았지만, 남편에게선 기적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이 죽은 뒤 이틀 동안 현아씨도 같이 죽어 있었다. 어떻게 사랑한 사람인데. 스무 살 때 만난 첫사랑이 그였고, 알콩달콩 평생 같이 살고 싶은 이도 그 뿐이다. 좀 있으면 다니엘 예방 접종도 가야하고 아이를 위해서 같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혼자 남아 살아갈 수 없어 그녀는 세상 빛을 보기를 거부했다. 눈을 뜨면 실신해버렸고 의사들이 깨워 놓으면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살 수가 없었고 살고 싶지 않았다.
그 즈음 밤마다 꿈에서 남편을 만났다.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현아야, 우리 현아야”하며 가여운 아내를 안아주고, 외로움에 지쳐가는 상처를 어루만져 주던 남편. 그럴 때면 현아씨는 화들짝 놀라서 남편을 붙잡고 흔들었다.
“Honey, can you believe it? I thought you died.”(여보, 믿어야 한단 말야? 당신 죽었다는 걸 말야.)
그러다 꿈이 깨면, 다시 현실이다. 온 몸의 숨구멍이 다 틀어 막힌 듯 숨막히는 시간. 꿈이 현실 같고 현실이 꿈만 같던 날들.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하루 종일 외롭고, 하루 종일 그리웠다. 가슴이 닳아 없어질 만큼 슬펐다.
시련 속의 재기, 간절한 노래, 희망의 찬가
그렇게 두 달이 지났을까? 산 송장 같은 동생을 보다 못한 피아니스트인 언니 현숙씨가 그에게 말했다.
“현아야, 노래를 해라.”
애닯은 동생을 위로하기 위해 건넨 언니의 한마디였다. 그 때 동생은 “응. 언니”라고 건조하게 대답했지만, 그 뒤 10년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
현아씨는 정말 노래를 시작했다. 그 해 5월 피바디 음대 오디션에 합격했고, 슬픔을 잊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학교를 다니면서 외로운 시간을 버텨낼 수도 있었다. 남편을 처음 만났던 스무 살 때처럼 다시 대학 새내기가 되었지만 이번에는 남편 대신 음악을 향해 모든 사랑을 쏟아 부었다.
“사람들이 물어요. 남편 죽은 지 겨우 두 달 뒤인데 노래가 나오더냐고. 이상하죠? 너무 잘 나오던데요. 가슴이 아프고 말할 수 없이 슬픈데, 내 아픔과 상처, 노래가 뒤범벅이 되어 목을 타고 올라오더군요.”
산 사람은 살아야하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숨구멍은 만들어 놓는다더니, 그렇게 소리를 질러 내서, 그나마 살 수 있었던 걸까.
얼마나 독하게 공부 했던지, 음대 4년 과정을 3년 만에, 석사과정을 1년만에 마쳤다. 당시 만 스물 다섯살. 한국 나이로 스물 일곱살이었다. 뒤늦은 나이에 시작한 만큼 어려움도 많았지만, 성악이어서 가능했다. 성악은 다른 분야와 달리 몸이 악기다. 몸이 성숙하고 성대가 익어야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에겐 결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더구나 남편과 맞바꾼 음악이 아닌가. 주저할 것도 망설일 것도 없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공연을 마치고 어떤 금발의 중년 백인 신사가 그를 찾아와서 대뜸 눈물을 흘렸다. 이유를 물었더니, 얼마 전 부인이 갑자기 죽어서 너무 슬펐는데,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 죽은 부인이 다가와서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가는 걸 느꼈단다.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난다는 백인 신사를 보면서 현아씨는 마음 깊이 전율을 느꼈다.
“내 목에서 노래가 나올 수 있었던 게 바로 이걸 위해서였구나, 싶더군요. 시작은 내 슬픔을 이기기 위한 거였지만, 이제는 내가 노래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생겼어요.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에 상처가 있어요. 차마 꺼내 놓지 못하는 그 깊은 슬픔들을 내 노래로 끌어 안을 수 있었으면 해요. 내가 음악을 통해서 받은 치유와 감사의 마음을 희망이란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요.”
가슴 속엔 여전히 남편과의 추억이 가득
2003년인 올해는 남편 유영호씨가 세상을 떠난 지 10주기 되는 해이다.
이제 현아씨는 남편 꿈을 꾸지 않는다. 남편에 대한 기억을 잊을까봐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그 다정했던 남편이 죽었다는 건 여전히 슬픈 일이지만, 카페에 앉아 남편 얘기를 들려주며 크게 웃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단단해 졌다. 자라면서 점점 아빠를 닮아가는 다니엘이 있어서 이기도 하다. 이제는 제법 어른 티를 내며 엄마 스케줄에 간섭도 하고, 무대에 서는 엄마를 자랑스러워 할 줄도 안다.
“3월 말에 영국에 가요. 2주 동안 머물면서 오디션도 보고 볼레티 재단과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계획도 세울 겁니다. 유럽에서 오페라를 한 다음에 솔로 독주도 계획하고 있는데,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요. 고국무대요? 한국 무대는 좀 더 조심스럽게 서고 싶어요. 한 2년 후엔 고국무대에 데뷔할 것 같아요.”
한 때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소름 끼칠 때가 있었는데, 이제 그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좋은 사람도 만나셔야죠, 10년이 어디 보통세월입니까?”했더니, 카페가 떠나가도록 웃기 시작한다. 목젖이 다 보이도록 한참을 웃더니 남편의 결혼 반지를 내려다보는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다. 2년 동안 같이 산 남편을 10년 동안 간직하고도 아직도 부족한 게 남은 건지.
“털어버릴 건 털어버리고 간직할 건 간직하려구요. 그런데 남편에 대해선 털어버려야 할 건 눈꼽 만큼도 없고 간직할 것만 가슴 가득 남아 있어요. 남편을 잊고 안 잊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남편의 마지막 밸런타인데이 선물인 음악과 함께 남은 평생을 살아갈 거니까요.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 마다 사람들이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어요. 노래를 통해 제가 받은 사랑을 조금이나마 돌려드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해요.”
음악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세계 성악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는 현아씨는 “오는 3월4일 주미 싱가포르대사관 공연, 6월13일 링컨센터 공연, 6월 말 말보르 뮤직페스티벌 참가 등 올해와 내년까지 일정이 잡혀 있다”고 말했다. 늦깎이 나이에 음악을 시작해 차세대 음악계를 이끌어 갈 최고의 뮤지션으로 주목 받고 있는 소프라노 유현아씨. 아픔을 딛고 일어 선 시작인만큼, 그의 아름답고 새로운 미래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