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를 좋아한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비가 오는 날이면 혼자 교외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부슬비도 좋고 소낙비도 좋고 또 여름의 장마비도 좋다. 아련한 슬픔이 그 속에 녹아 든 안식감으로 비는 내 마음을 흥건히 적셔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비를 제재로 한 시가 몇 편 있다. 실은 내가 1949년에 쓴 첫 추천작도 제목부터가 「비 오는 날」이다.
최근에도 비의 시 한편을 썼다. 제목은 「비의 나라」이다.
비가 온다
나는 비의 나라 왕이다
비로 지은 궁정
비 내리는 창 밖에는
저기압의 깃발 바람에 나부끼며
우수(憂愁)의 성으로 쳐들어가는 충용한 군사들
먼 바다에서 모두 전사해 버린다
그들의 패망으로
새로 또 확장되는 나의 패망의 영토
확실한 소유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상실만이 확실하게 남아서
나의 왕권을 강화해 준다
그것은 지도가 필요 없는 나라
있는 것은 없고
없는 것은 있어서
두개골을 뚫고 뇌장에도 비가 오는 그 나라
아침이 되면
밤에서 다시 밤으로 층계를 내려가는
시계 소리 들린다
그리고 밤의 밑바닥에 피어 있는 꽃
보이지 않는 검은 해바라기
방사능처럼 고독하 빛살을 펼쳐서
천지사방에 비가 온다
나는 비의 나라 왕이다
나에게는 허무주의적인 성향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강화되어 가는 그러한 성향은 물론 내 시를 지탱하는 중요한 지주의 하나가 되어 있다. 그 허무주의가 서 있는 기반은 일체의 가치를 부정하는 정신이다. 그러나 부정은 부정 자체로만 그치지 않는다. 부정하기 때문에 새로운 그 무엇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의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허무주의는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시를 탐구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찾는 사람이다'라는 아포리즘을 나는 쓴 일이 있다. 기존의 시를 부정하고 언제나 새로운 시를 찾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바 참다운 시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말의 배후에도 나의 허무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시는 하나의 도달점이자 동시에 거기서 떠나야 할 출발점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앞에 인용한 「비의 나라」도 그러한 허무주의적 의식을 주제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확실한 소유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상실만이 확실하게 남아서/ 나의 왕권을 강화해준다'는 구절은 그러한 주제의 의도적 표현을 시도해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인간의 삶에는 '상실'만이 확실할 뿐 확실한 소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한 줌 흙이 뿌려진다. 그리고 만사는 끝나버린다'고 파스칼은 말한 바 있다. 이러한 허무의 심연에 대한 감각을 갖는 사람의 나라에는 확실한 상실 그것만이 '왕권을 강화해'주는 가장 튼튼한 받침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속적인 가치관에 의하면 그러한 인식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를테면 돈이나 권세 같은 소유가 확실하게 영속되기를 바라는 것이 세속적인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확실한 소유에 대한 기대가 인간을 불행과 타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은 구태여 두말할 나위가 없다.
허무를 바탕으로 내가 새로운 시를 찾는다는 것은 허무 그것이 또한 나를 어떤 구속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준다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긍정한다는 것은 긍정하는 그 대상에 대한 얽매임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일이 그렇게 되는 이유가 스스로 밝혀진다. 끊임없이 시를 찾는다는 것은 내가 자유로운 인간이고자 하는 몸부림에 다름아닌 것이다.
찾으면 무엇인가 얻어지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 얻은 것은 도달점이자 동시에 출발점이라는 양면성을 갖는다고 앞에서도 나는 말한바 있다. 출발은 그 출발점에 이르기까지의 도달의 성과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때는 새롭게 출발해서 얻은 발견도 역시 부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찾는 대상은 시간의 차안이 아니라 피안에 있는 것, 영원히 현존하지 않는 그 무엇이라 할밖에 없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나에게 그처럼 시를 찾게 하는 관념이라기보다도 차라리 감각이다.
그러한 허무주의가 부정의 기능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상과 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충격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충격에 수반되는 것은 물론 긴장이다. 그래서 나는 시의 표현이 긴장감을 지어낼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그것을 위한 기본적인 방법은 이질적인 사물의 폭력적 결합이다. 바꾸어 발하면 서로 멀리 동떨어져 있는 사물을 한자리에 앉힘으로써 인습과 통념을 깨뜨려보려고 하는 것이다. 인용시의 경우에도 그러한 방법이 여러 곳에 시도되고 있다. '있는 것은 없고/ 없는 것은 있어서/ 두개골을 뚫고 뇌장에도 비가 오는 그 나라/ 아침이 되면/ 밤에서 다시 밤으로 층계를 내려가는/ 시계 소리 들린다/ 그리고 밤의 밑바닥에 피어 있는 꽃/ 보이지 않는 해바라기' 같은 표현이 그런 예이다.
보다시피 여기서는 사물의 정상적인 관계가 왜곡되고 있다. 랭보의 말을 빌면 그것은 '감각을 교란'한 사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충격이 빚어내는 긴장감의 조성을 이 시뿐 아니라 다른 시에서도 노리고 있다.
사물은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사물과 관계를 맺는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물의 관계는 영구불변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세계가 또한 언제나 새로운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유동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정의 정신을 기본 속성으로 하는 나의 허무주의는 세계의 이 유동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충격과 긴장감의 조성은 고정될 수 없는 세계를 새로운 모습으로 발견하기 위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