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양경공의 전배위 (前配位) 정경부인 (貞敬夫人) 안동권씨 (安東權氏)는 목은선조에겐 셋째 며느리가 되시는데 참찬문하부사 (參贊門下府事, 정2품)를 지낸 권균 (權鈞) 의 따님이요, 첨의찬성사 (僉議贊成事, 정2품)를 지낸 현복군 (玄福君) 권렴(權廉)의 손녀요,
판전교시사 (判典校寺事, 종1품) 를 지낸 낙안인 (樂安人) 김인관 (金仁琯)의 외손녀입니다. 정경부인 안동권씨는 당대 최고 명문권력가에서 곱게 자란 귀한 따님이셨습니다.
정경부인 안동권씨의 조부되시는 현복군 권렴은 (총 5남6녀를 두었음) 문양공 휘 종덕 배위 정경부인 진주류씨의 외조부 (外祖父) 가 되기도 하는데, 즉 문양공 배위 정경부인 진주류씨의 모친이 양경공 배위 정경부인 안동권씨의 부친 권균과는 남매관계 (男妹關係)였습니다. 즉 목은선조의 세째 사돈 권균의 외조카인 정경부인 진쥬류씨가 목은공의 첫째며느리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첫째댁 정경부인 진주류씨와 세째댁 정경부인 안동권씨는 동서 (同壻) 사이이면서도 고종사촌 지간(姑從四寸之間) 인 것입니다. 이 말인즉슨 진주류씨의 자녀들과 안동권씨의 자녀들은 친가로는 4촌이요 외가로는 6촌이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목은선조는 맏며느리의 고종사촌중에서 참한 규수 한명을 세째 며느리로 맞으셨던 것인데 이러한 배경은 당시 권문세가 (權門勢家) 였던 진주류씨가와 역시 권문세족 (權門勢族) 이었던 안동권씨가 사이에 혼인관계가 잦았던데도 연유한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또 중대광 (重大匡) 화원군 (花原君) 권중달(權仲達) 의 사위가 되신 목은 선조가 장인어른을 중심으로한 자신의 내외사촌회 (內外四寸會) 를 조직-운영하여 평소에 진주류씨뿐 아니라 화원군계 안동권씨 및 북야공계 (僕射公系) 안동권씨 일가하고도 친교가 두터웠던데도 있습니다.
양경공께서 장가드실때 목은 선조는 벌써 환갑에 가깝거나 환갑을 좀 넘겼을 때였는데 이유는 양경공은 목은선조가 41세때에 낳은 늦동이 귀한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은선조의 셋째 사돈이 되시는 권균은 젊은시절 목은선조의 문하생 (門下生) 이기도 하며 사제관계 (師弟關係) 에 있었기도 하셨던 한산이문과는 일찍부터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남편 양경공의 나이 29세때인 1396년에 정경부인은 시아버지 목은선조의 상을 맞습니다. 이때는 시어머니인 정신택주 안동권씨도 맏시형 (媤兄)인 문양공도 둘째시형인 인재공도 이미 세상을 뜬지 여러 해가 지난때였습니다.
남편 양경공은 상주가 되어 부친상을 맞았고 3년을 정성으로 여묘(廬墓) 살이하여 효자 (孝子) 로 일컬어졌으며, 뒤에 나라에서 효자비 (孝子碑) 를 세우고 정문을 내렸습니다.
정경부인의 남형제인 영가군 (永嘉君) 권홍 (權弘)은 성균관 악정 (成均館樂正),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및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인물로 문학에 뛰어나고 전서·예서에 능하여 헌릉(獻陵)·문묘(文廟)·기자사(箕子祠)의 비문을 썼습니다. 나중에 권홍의 딸 한명은 태종의 1 후궁이 된 의빈권씨(懿嬪權氏)로 정혜옹주(貞惠翁主)의 생모가 됩니다.
정경부인 안동권씨의 생몰년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주 젊었을때 요절하여고 양경공과의 사이에는 2남을 두었습니다; 1남은 정랑공 (正郞公) 휘 계주 (季疇) 로 정랑공이신데 일찍 서거하셨고 정랑공의 독자가 되는 분이 사유신 (死六臣) 백옥헌공 (白玉軒公 ) 휘 개 (塏) 입니다.
사육신공이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역모로 몰려 멸문지화 (滅門之禍 )의 화를 입어 정랑공가계 (正郞公家系)는 사실상 절손(絶孫) 되었습니다. 즉 양경공의 장손집안이 멸족되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단종복위사건과 관련된 중차대한 책임을 진 인물들은 본인(本人)뿐만이 아니라 삼족이 연좌죄(連坐制) 에 걸려 벌(罰)받았는데 보통 5촌이내의 가까운 친족이면 화를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非一非再)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500-800명 정도가 목숨을 잃은걸로 알려져 있는데
남자 일가족은 노부 (老父) – 갓난애기할것없이 싹 다 죽임을 당했고 노모 (老母) -부인이나 여식 (女息) 들은 관비 (館 婢)가 되거나 보통 대신들에게 사노비 (私奴婢) 로 나눠졌습니다.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여 역시 대신들에게 하사된 경우가 많았는데 공신들에게는 훈호가 내려지고 관직과 사법상의 특전을 내림은 물론 노비와 토지로 대표되는 엄청난 경제적 보상도 뒤따랐던 것입니다.
백옥헌공이 잡혀와 처형장으로 끌려가지전에 감옥 (監獄) 에서 지었다 하는 시제 추강기사 (秋江記事)란 시 한편이 전해지는데,
“우정중시생역대 (禹鼎重時生亦大) /우정(禹鼎) 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한 소중하지만
홍모경처사유영 (鴻毛輕處死猶榮) /홍모(鴻毛) 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
명발부침출문거 (明發不寢出門去/ 새벽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
현릉송백몽중청 (顯陵松柏夢中靑)/ 현릉(顯陵)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고나!”
역모죄로 잡혀와 옥에 있으며 처형되기 전날밤 여러가지로 맘이 착잡했던 공은 새벽녂까지 이모저모로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가족들 생각을 제일 먼저 또 제일 많이 하지않았겠나 쉽고 공을 계속 괴롭혔을꺼로 여겨집니다. 또 같이 잡혀와 고초받는 친구들과 그 가족들도 머리를 스쳐갔을것 같습니다. 착잡했던 공의 내심을 조금 들여다볼수 있는 시한편인데 공도 사는냐 죽는냐하는 기로에선 여느 사람못지않게 고민이 많았던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절의 (節義)와 불사이군 (不事二君)의 충성심 (忠誠心)으로 부귀영화 (富貴榮 華)와 소중하기만한 자신의 목숨을 마치 하나의 깃털처럼 털털 털어버리며 버리기로 작정하십니니다.
백옥헌공은 당시40세에 불과했는데 공의 인물 됨과 학문을 끔찍히 아끼고 사랑하였던 세조는 잡혀와 형틀에 묶여져 있는 공에게 할 수 있는 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권했다 합니다;
“자고급금(自古及今) 두고 보면 충신열사 자손있나,
왕자비간(王子比干) 이름나도 이름은 전하였으되
자손이 끊어졌고 백이숙제 두고 봐도 수양산 깊은 곳에 채미하고 죽었으니 그 무엇이 쓸대 있나,
이윤같이 어진이도 하사비군(何事非君) 섬겼으며
너는 어이 고집만 하느냐,
단종이 내 조카(足下)인데 삼촌되고 못할 소냐,
사직을 두고 보면 불사이군 하랐으나 족하위(位)를 삼촌이 하니 두 임금이 어이 되며,
한 자손 한 혈육에 분간이 별로 없다.
일월같은 너의 충성 나도 역시 아는 바라, 충신 이름 일반이니 부디 한번 항복하라.”
공은 세조에게 대답하면서 오히려 호령하듯 하는 말이 일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합니다.
“자고로 두고 보면 삼촌으로 조카를 죽여 그 위(位)를 뺏는 임금 누구를 보았느냐, 이윤이 섬긴 임금 골육 상쟁 임금이냐,
형의 뒤를 어이 끊고 네 욕심을 생각하면 금수와 같을 지라,
더러운 말 다시 말고 사속히 죽여 다오.”
이때 공은 작고 약한 몸집에 파리한 용모여서 지켜보는 자들이 얼마 못 견디리라 짐작하였지만 작형(灼刑 =단근질.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일)을 당하면서도 태연하여 모두들 놀랐다고 합니다.
백옥헌공 경우에는 사육신 여섯중에서도 가장 저항이 심했고 세조의 마음을 괴롭게 했으므로 그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하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은 세조가 백옥헌공의 아드님 휘 공회(公澮)도 역시 처형하도록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공은 꿋꿋하게 고문과 학대를 견디며 세조를 죽을때까지, “나리”라 부를지언정 결단코 “전하”라 호칭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거열형 (車裂刑 : 두 팔다리및 머리를 각각 매단 수레를 달리게하여 신체를 찢는형별. 환형, 轘刑, 이라고도 함)으로 공은 장렬한 최후를 마칩니다. 이때 죽은 자들의 효수 (梟首)한 머리를 3일동안 저잣거리에 높게 메달아 백성들이 보게하여 경각심 (警覺心) 을 고조시켰다 합니다.
단종복위사건을 전후로 한 공의 모친 공인 (恭人) 삼척진씨 (三陟陳氏)의 행방은 알려져있지 않고 공의 아내 정부인 (貞夫人) 전주이씨 (全州李氏; 보통 가지,加知,라고 알려져 있음)는 전주이씨 사대부집안에서 곱게 자란 분으로 한산이문으로 출가한후 남편이 출세함에 따라 정부인지위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노비가 되어 우참찬 (右參贊) 강맹경 (姜孟卿)에게 노비로 분배됩니다. 정부인의 운명은 불분명하나 노비신세로 떨어졌을 딸 셋이 나중에 양가집안에 출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걸로 보아 딸셋은 노비신분에서 나중에 풀려난듯 합니다.
그리고 백옥헌공이 한산땅에 소유했던 막대한 토지는 몰수되어 홍윤성 (洪允成)이 차지하게 되는데 홍윤성은 평소에 포악하고 안아무인격인 행실로 악명이 높았으나 세조에게 사랑을 받았던 자라 합니다. 또한 공의 충주-임피(臨陂)의 전지도 몰수되어 분배되는데 바로 다름아닌 공의 숙부 휘 계전 (季甸) 문열공 (文烈公)에게 분배되었다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백옥헌공의 출가한 누이 두 명, 즉 문열공의 질녀(姪女) 두 분 또한 노비의 신세가 되는데 바로 숙부인 문열공에게 분배됩니다. 보통 출가외인 (出嫁外人)들은 연좌죄에서 면해주는게 보통인데 세조가 이 당시에 얼마나 단단이 화가 나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백옥헌공의 누이들 또한 곧 노비신세에서 풀려나 신원이 복권된듯 보여집니다. 백옥헌공의 누이및 막대한 토지가 숙부인 문열공에게 분배되었다는것은 배후에서 백옥헌공의 살아남은 가족들및 그 재산의 일부를 지키기 위한 모종의 복권운동이 성공한것이라고 보아야 옳습니다. 사실 백옥헌공가계뿐만아니라 시집간 딸들이 사육신일로 화를 입자 이들을 살리기위한 결사적인 정치적 노력이 유력한 친정집들에서 벌어졌던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복권운동에 성공하면 화를 받았던 딸이나 외손녀들은 보통 가까운 친척집으로 일단 들어온 다음에 나중에 양인으로 신분상승이 되었던것입니다.
단종복위운동사건에 연루된 한산이문의 인물은 백옥헌공뿐이 아니라 여러 더 있는데 대표적인 다른 한 분은 바로 문양공댁 백옥헌공의 6촌동생되는 휘 유기(裕基) 도총진무공(都摠鎭撫公) 으로 사육신등과 함께 거열당하고 멸문지화의 벌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사육신등은 역사속에서 200여년동안 역신으로 여겨져 오다가 중종 때 가서야 복권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현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이 사육신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으며 숙종 때인 1679년에야 비로소 사육신에 대한 완전한 사면과 복권이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영조, 정조 때에 관작이 복구되고 증직과 시호가 내려졌다 합니다.
그러다가 고종때에 목은선조의 18대손이 되는 찬정학부대신 (贊政學部大臣) 휘 용직 (容稙) 감앙공 (剛庵公)이 임금께 정랑공의 셋째동생 휘 계전 (季甸) 문열공 (文烈公) 의 종손 (宗孫) 두복의 2남을 봉사손 (奉祀孫) 으로 윤허받아 절손된 백옥헌공의 대를 잇게했습니다.
정경부인의 2남은 공무공 (恭武公) 휘 계린 (季疄)으로 태종의 장녀인 정순공주 (貞順公主)의 사위가 되니 즉 태종의 외손서 (外孫婿) 가 됩니다.
첫댓글 양경공 배위에 관련된 얘기는 방대하여서 1, 2편으로 나눠서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작업을 하시는 주원님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님~ 재밌게 읽어주시는것 같아 힘이납니다요~~ ^^ 좀전에 저희 누나 한명이 저보고 너 이 목은집은 어데서 났고 지금 뭐하는 짓이니, 그래서 사는데 도움이되니, 이러데유. ㅎㅎ 여자들은 시집가면 다 저런가요? 언제는 한산이씨네가 제일 좋은줄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ㅎㅎ 음..역설적으론 이래서 출가외인되어 한산이가네 시집오신 우리 할머니들이 더욱 소중한가 봅니다; 우리편됬으니까유, 맞죠? ㅎㅎ
잘읽었습니다,,,역사의현장을 눈앞에서보는듯합니다,,,,이개 선조님의 처형이 마음이아픕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셨을까 매번 사육신에 관한 얘기를 접할때마다 의문이 드네요. 절의를 지킨다는것이 생각하는것보다 쉽지가 않았던것 같네요.
정경부인의 생몰년이 미상인데 제가 다른자료와 혼돈을 빚었습니다. 편집되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몇번 읽어 봐야 줄거리를 파아 하겠습니다 읽고 또 일고 하옵니다
자료롤 연결-정리하면서 사돈의 8촌까지도 따지는것 같이 보이긴 하지만요. ^^ 친가쪽 배경으로만은 이해할수없는 적잖은 외가쪽의 영향이 확실히 존재하는 연유이니 넓게 양지해 주세요~~ 목은선조 아래 몇세대는 외가쪽으로도 복잡 (?)하게 아니 가깝게 얽혀져 있네요. 그러면서 저도 어느땐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수긍을 합니다. ^^
혹, 자료의 출처를 알 수 있을가요?
참, 이 올린 글의 출처도 여러군데서 찾았습니다. 우선 족보를 참조했고요, 그 다음에 사육신에 관계된 내용의 글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점검하고 정리하여 올렸습니다...
사육신에 관한 기록은 아시겠지만 세종-세조 실록등의 인물전에 실려있고요..정랑공에 대한 것은 제가 나름대로 추측을 한 것입니다. 정랑공에 대한 기록이 나중에 누락된듯 보이고 한 까닭에 처형당하지 않으셨을까 하고 말입니다. 휘 유기 도총진무공의 아드님 휘 은산 선조는 혹 어느 사이트들에선 처형당했다고 했으나 살아나신게 확실합니다. 가끔가다 인터넷 사이트들에 자료가 오류로 실린것을 발견하기는 합니다만요...
세조가 죽을때쯤에 임해서 사육신화때 연루되어 노비로 가있던 대신들의 가족들중 일부 수백명을 풀어준일이 있는데 아마 이때 백옥헌공의 가족들과 도총진무공등의 가족들이 풀려나지 않았을까 합니다...
참고: 백옥헌공 아드님 휘 공회에겐 아들이 없었습니다; 제가 다른 자료와 혼돈하여 잘못된 정보를 올렸네요. 편집되었습니다.
휘 계주 정랑공께선 사육신사건이 나기 훨씬 전에 돌아가신걸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죄솧합니다. 예전에는 알고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지나 잊어버리고 글쓸때 확인을 제대로 안했군요. 안유재님의 출처에 관한 질문덕분에 잘못된 것이 두개나 편집되어 고쳐졌습니다. ^^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신경쓰도록 하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백옥헌 할아버지의 봉사손 종석입니다 글을 쓰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부탁말씀 올리겠습니다
(1)대종회에서 발행한 "사육신 이개선생 유고집" 내용되로 통일을 했으면 합니다
(2)시문 세번째줄 "明發不寢出門去"인데 "明發未寢出門去"로 쓰셨습니다
(3)詩 제목은 臨命作<見 秋江記事> 죽으러 갈 때 읊은 詩 입니다
(4)대부 께서 쓰신데로 일치되나 사육신 선생들중 한산 이문에 백옥헌 선생만 사당이 없는것이 매우 안탑깝습니다 대종회에서 사당을 짖기로 하였으나 진행이 않되고 있습니다 많은 협조 부탁드림니다
(5) 사육신 이개선생 유고집은 대종회에서 발행하여 무료로 각지파에 발송했습니다
종석님께서 지적하여 올려주신 내용대로 정정하였습니다. 본인의 자료가 미미한 탓에 처음 작업할때 대종회의 내용과 일치하지 못한 내용을 올린 점 양해구합니다.
사육신공의 사당이 없다는 것은 본인도 유감스런 일이군요. 봉사손으로 결국엔 대를 이었다하나 절손되어 수백년되어 내려왔던 탓에 아무래도 관심있는 후손들이 적겠고 그런 연유에 기인하지 않나 하는군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니 포기하지 않고 시일을 좀 더 두고 계속 프로젝트를 추진하면 결국엔 꼭 좋은 결과가 생기리라 생각되어 집니다. 정말 노고가 많으십니다~~
(6)세종 26년 갑자(1444)에 군수 인천(仁川) 이달(李達) 이 단양에 부임하여와서 쓰러져 가던 누각을 헐어버리고 새로 누각을 짖고 백옥헌 할아버지께 사찰을 보내어 "이르기을 누각이 완성되었으니 그대는 어찌 나를 위하여 누각의 이름을 짖고 기문을 써주어 오래 전하도록 하여 주지 않겠는가"하였다
내가 생각컨데 이 고을은 나의 외조모(外祖母)의 고향이니 고려조의 충신 우탁(禹倬)이 그 선조이다 그래서 사양할수 없어 이요(二樂)라 명명하고 안평대군에게 앙청하여 이요루(二樂樓)라는 세 글자를 쓴 현판을 걸게 되었다(二樂樓期<見 丹陽誌)
結論 "祖母가 아니고 外祖母 입니다 사육신 이개선생 유고집에 二樂樓 記文에 수록되 있음
안녕하세요 노고가 많으십니다~~
검토후에 요청하신데로 정정을 하여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수개월간 개인적인 사정으로 카페를 잠시 떠나 있어서 업데이트가 못된 점 양해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