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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족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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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스크랩 만취당 및 안동김씨종택(晩翠堂 및 安東金氏宗宅)..의성.
홍왕식 추천 0 조회 25 13.02.21 13: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만취당 및 안동김씨종택(晩翠堂 및 安東金氏宗宅)..의성..

만취당 전경

만취당 대문1

안동김씨종택 사랑채 대문

만취당 대문2

만취당 안내판

문중 이야기
- 사촌의 안동 김씨

사촌리는 안동 김씨 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가 600여 년 동안 세거한 곳이다. 1392년에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자 고려조의 함길도 감목관(監牧官)이던 도평의공 김구정(金九鼎)의 아들인 김자첨이 안동 회곡(檜谷)을 떠나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사촌에 입향한 안동 김씨 중에 가장 크게 이름을 낸 사람은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이다.

김광수는 성균진사에 입격하였으나 연산군의 정변이 있을 것을 예감하고 사촌으로 내려왔다.

이때 집 앞에 심은 한 그루의 만년송[사촌리 향나무, 경상북도기념물 제107호]을 벗 삼고 시부(詩賦)로 세월을 보냈다.

만년송은 뒷날 많은 묵객들에게 시상의 대상이 되었다.

만취당 마루에 걸려있는 편액[萬年松亭韻 二首]에서도 당시의 심사를 느낄 수 있다.

묻노니 조래산(俎來山) 떠나온 지 몇 해인가
만년송(萬年松) 푸른 그루 고이고이 심었노라
맑은 향(香) 은은하게 시축(詩軸)에 풍겨오고
송화(松花)가루 날아서 벼루에 떨어진다
푸른 잎 무성하니 새 소리 한가롭고
늙은 줄기 이끼끼니 인갑(鱗甲)인양 아롱진다
은사(隱士)의 동산(東山)에 우뚝히 서 있으니
심상(尋常)한 저 속사(俗士)야 몰라준들 어떠리

김광수의 증손인 삼형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활동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만취당 김사원은 의병을 모집하여 전과를 올렸고, 많은 사재(私財)로 난민을 구휼하였다.

독수헌(獨秀軒) 김사형(金士亨)과

후송재(後松齋) 김사정(金士貞)은 곽재우를 따라 창녕 화왕산성에서 전과를 거두어 공적이「창의록」에 남아 있다.

이 삼형제로부터 사촌리에는

만취당파와

후송재파 후손들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
사촌의 안동김씨 중에 문명으로 이름을 드러낸 자는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이다.

김종덕은 대산 이상정선생에게 사사하여 퇴계학의 정통을 계승하고,

이름난 문장가를 많이 배출하였다.

사후에 부조위(不?位)로 모셔지고 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성에서도 의병을 일으켰다.

사촌리 문중에서는 의병대장에 운산(云山) 김상종(金象鍾)과 소모장 김수욱(金壽旭) 등 여러 명이 가담하여 향리 의병들과 함께 격렬히 싸우다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사촌 문중은 영남 일대에서 사촌김씨로 통하는 벌족(閥族)인 만큼 강력한 조직체를 갖추고 있다.

문중의 대소사는 전통적 관례에 따라 대문회(大門會)에서 결의되지만,

마을의 양쪽 지파(支派)에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화수회와 동약계(同約契, 만취당파) 및 친목계[후송재파] 등이 구성되어 있어 년 1차의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족친간에 돈독함을 도모하고 있다.

문중 소유인 마을의 광대한 임야는 문중 산하 조직체인 공목계(共睦?)가 담당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임을 통해 꾸준히 문중 규약을 이어가고 있다.

의성 > 북동권 > 사촌리

- 안동 김씨. 안동 권씨. 풍산 유씨의 집성촌

사촌리는 충열공 김방경(金方慶)의 후예인 김자첨(金子瞻)이 안동 회곡에서 이주하여 1392년에 중국의 사진리(沙眞里)를 본떠 마을 이름을 정하였다. 신라시대 나천업(羅千業: 고운 최치원의 빙부)이 살았다는 전설과 자하산 중턱에 나정승의 묘라고 전해지는 고총(古塚)이 있어 마을의 역사가 천여 년이 넘은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서쪽에 길게 놓인 숲은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허한 기운을 막기 위해 조성한 방풍림이다.

나무는 수령이 400~600년이고, 수종은 상수리나무?느티나무 등 10여종이 넘는다.

천연기념물 제405호로 지정되어 있고, 경관이 아름답고 전통 마을 이미지와 어우러져 꾸준히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뒷산에서 시작해 마을 서쪽을 흐르는 물길의 둑에 우거진 이 숲은 들판을 ‘가로질러’ 있어 ‘가로숲’이라 하며 서쪽에 있다 하여

서림(西林)으로도 불린다.
사촌의 지세는 풍수지리상 금반형(金盤形)으로 지칭된다.

마을의 지면이 뒤집어 놓은 쟁반이나 솥뚜껑처럼

중심 부분이 높이 솟아있다.

북으로는 기령산(奇靈山)과 자하산이 뻗어 있고,

동으로 멀리 황학산이 보인다.

이곳은 전체적으로 산, 들판, 강물이 골고루 잘 갖추어져 전형적인 명당의 지세를 이루고 있는 길지로, 의성에서는 ‘第一沙村’이라고 일컬어진다.

또한 마을에 내려오는 도참설에 의하면 마을이 배 모양으로 생겨 구멍을 뚫으면 가라앉는다고 한다.

실제로 마을에는 우물이 한 개 뿐이다.

이 우물은 임난 전부터 있어왔고,

물이 좋아 큰 인물이 셋이 난다고 전해진다.

신라시대 정승 나천업과 조선시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등 두 인물은 이미 나왔다.

그러나 큰 인물 한 사람이 남았다며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1542년 이곳에서 태어난 두 번째 정승 서애 유성룡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마을터는 ‘외손이 잘되는 터’ 라고 하여 딸들이 해산하러 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만삭의 유성룡 어머니도 친정으로 미처 들어오지 못하고 ‘가로숲’에서 해산했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사촌은 예로부터 안동 김문의 집성촌이었으나 안동 권씨와 풍산 유씨가 들어와 혼성대촌이 되었다.

사촌의 안동 김씨는 만취당파와 후송재공파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으며, 문과 11명, 무과 1명, 40여명의 생원?진사가 배출되었다.

이곳은 영남지방의 와해(瓦海)라고 불릴 정도로 기와집들이 즐비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을미의병활약에 대한 보복으로 의병대장마을이라고 하여 집집마다 불을 질러 옛 집과 많은 서책 및 유물들이 불타버렸다.

사촌에서는 이 일이 1896년에 일어났기에 병신난(丙申亂)이라고 말한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지당(池塘) 부근에 잠복 중이던 인민군이 미국 대위를 사살하여, 미군들이 보복으로 마을에 불을 질러 백여 호가 소실되었다.

현재는 사촌 가로숲은 물론 만취당?사촌리 향나무?영귀정(詠歸亭)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사료전시관>이 설립되어 전통 문화마을로서 위상이 높다.

만취당

만취당은 서애 유성룡(1542∼1607)의 외종질인

김사원의 호를 따서 지은 당이다.
창건 이후 줄곧 안동김씨 종가의 대청 겸 문중 집회소로 이용하다가 1727년(영조 3) 거실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 뒤편 서쪽에 1칸, 동쪽에 2칸의 방을 연결하여 지었다.

가장 오래된 사가(私家)의 목조건물로 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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