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에서 에티오피아를 만나다 <순 담>
겨울여행을 즐기려는 사람들 틈에 끼어 상봉역에서 춘천행 전동차를 탔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과 경로 대상자들이 주를 이루고 일반승객들은 물론 단체여행객들과 등산객들로 초만원이다. 영화 오마샤리프 주연의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처럼 열차는 하얀 설원의 강변길을 따라 무궁화호의 전설이 담겨진 북한강 대성리와 강촌을 지나 한 시간 만에 남춘천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는데, 춘천지리를 잘 모르고 동행한 지인과 나는 기왕이면 종착역인 춘천역에서 내리기로 했다.
막상 춘천역에 내리고보니 추운날씨에 미군부대가 떠난 빈자리와 주변이 휑해 보이는 게 을씨년스럽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호반의 도시라는 춘천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길 건너편 언덕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과연 생각했던 대로 얼어붙은 호수가 펼쳐있고 내린 눈이 겹겹으로 쌓인 채 뻗어있는 곳은 춘천의 명소 ‘공지천’둑길이었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싶다.
얼어붙은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다가 지나가는 중년의 여자 두 분을 만나 “이 쪽으로 계속가면 어디로 가고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었다. 춘천에서 40년 넘게 산다는 분이 춘천 자랑을 하면서 “보트선착장까지 4키로 정도이고, 큰길가를 따라 시장으로 가면 춘천의 명물 닭갈비와 막국수집이 많습니다”라고 했다. 눈길을 걸어서인지 시장기가 들어 식당이 있을 만한 곳을 향해 걷다가 멀리 전쟁기념탑처럼 보이는 조형물에 시선이 꽂혔다.
펄럭이는 깃발을 바라보면서 길을 건너려다 바로 옆에 있는 담갈색의 원추형 구조물이 있는 곳으로 갔다. 태극기와 에티오피아 국기가 게양된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기념관>이다. 지인에게 “오늘 춘천을 찾은 보람이 공지천 둑길을 걸은 것과 바로 이곳인 것 같습니다”라면서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린 시절 빨치산들이 준동하는 지역에서 6․25전쟁을 겪었다. 아버지가 공무원인 탓으로 가족까지 반동분자로 숙청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났다. 후일 나는 육군 장교로 베트남전에 파병되어 공산월맹-베트콩과 싸웠다. 지금은 목회를 하면서 한국전에 참전해준 16개국에 대한 보답으로 전적지를 답사하며 글을 쓰고 있는데, 오늘은 뜻 밖에 횡재를 한 기분이다.
에티오피아는 한국전 당시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지상군 3개 대대를 파병해 춘천 근교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많은 희생을 치렀다. 에티오피아가 파병한 캭뉴(kagnew)대대는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히거나 궤멸시킨다”라는 의미로 황제 근위대가 포함된 최정예의 전투부대였다. 1951년 5월6일 참전하여 1965년 3월1일 개선 귀국할 때까지 연인원 6,037명이 춘천을 중심으로 중동부 전선의 양구 화천 철원 금화 등지에서 총 253회의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에 123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 외에는 실종자와 포로가 전혀 없는 유일한 부대로 춘천의 경계병이 되 주었다.
우리정부는 에티오피아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1968년 5월, 춘천에 에티오피아군 참전 기념탑을 세우고 셀라시에 황제를 국빈으로 초청하였다. 70년대 들어 아프리카에 가뭄이 심할 때, 멩기스투가 1974년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를 살해했다. 정권을 찬탈한 군부는 북한과 가까워지면서 살벌한 공포정치를 펴 자본주의자들과 지도층 지식인들을 죽이고 한국전참전용사들을 박해했다. 더욱이 수천 년을 이어온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문을 닫게 한 이후 경제가 파탄 나 아사자가 속출하는 지구촌 최빈국으로 추락했다.
독재자 멩기스투가 1991년 실각 되고 민주주의가 회복되었지만 아직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다. 춘천시는 2004년 5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시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춘천시는 생존해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방문 초청하면서 2007년 3월 근화동 공지천 변에 한국전 참전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기념관에는 캭뉴부대의 전황과 에티오피아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가 있어 참전국 기념관 중 으뜸으로 여겨진다.
추운 날씨 탓이기도 하지만 몰려드는 관광객들에 비해 무심할 정도로 방문객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북한을 잘 모르면서 안보를 소홀히 했던 좌편향의 정치와 교육의 결과인 것 같아 찹찹한 기분으로 1층 전시실을 나섰다. 에티오피아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2층으로 올라가 전시실로 들어서는 순간, 진하고 고소한 커피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아프리카의 스위스로 불리는 에티오피아는 고원지대가 많아 야생 커피나무가 자생하는 원산지다. 연간 26만 톤을 생산하여 절 반 가량을 자국에서 소모하며 집에는 가족이 마실 커피나무가 서너 그루씩 있는 게 보통이다.
관람을 끝내고 거리에 나와 늦게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데 창밖에 그쳤던 눈이 또 내리고 있다. 눈을 맞으며 길을 걷다가 따끈하게 구미를 당기는 붕어빵을 사들고 오늘의 춘천 여행을 접으려고 남춘천역으로 향했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흠뻑 뒤집어쓴 열차가 강변을 휘어져 달리다가 터널 속으로 들어갈 때의 정경이 동화의 나라로 들어가는 기분이어서 사르르 눈이 감기면서 에티오피아로 가는 꿈속에 빠져들었다. <2011년1월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