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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가는 날 아침은 언제나 분주함 반, 설렘 반이지요.
상쾌하고 부드러운 아침공기와 어제 본 개나리의 화사한 기억이 오버랩 되면서
가벼운 옷차림으로 교대를 향했습니다.
택시에 비행기 엔진을 달았나...
출발 20분 전에 도착하는 모범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때면 언제나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 있지요.
터벅터벅 길가 모퉁이에 있는 커피 하우스로 가 원두 한 잔을 주문하고
등받침 있는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몸을 기대 일요일 오전 교대 앞의 분주함을 눈으로 즐깁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짙은 커피향이 주머니에 있는 제 짝을 찾으면
손은 어느새 불을 댕기고 있습니다.
커피의 김은 수직으로 올라가는데 담배 연기는 수평으로 유영하지요.
'하얀 두 기체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어떤 향이 날까?'
실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 때, 저쪽에서 낮익은 얼굴이 다가옵니다.
풍경님이군요.
살갑게 인사를 나누고
똑같은 커피를 마시고 똑같은 담배를 피우면서
똑같이 승합차를 기다립니다.
곧 이어 마린하우스님이 도착하고
미소동수님과 비타민님, 지붕돌님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교대앞에 모이고...
루시님이 오는 중이라 조금 기다리기로 하고...
오늘 떡 담당은 비타민님입니다.
까치발님 : "무슨 떡이예요?"
비타민님 : "호박떡이요."
까치발님 : "......!"
비타민님 : "인상이 왜 그래요?"
까치발님 : "......!"
미소동수님 : "......!"
루시님이 도착하고 드디어 고창으로 출발입니다.
아주 맛있는 호박떡을 먹으면서 드디어 출발입니다.
두툼한 점퍼로 완전무장한 지붕돌님과 루시님은
'북극에 곰 보러 가느냐'는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기발랄하게 밀린 얘기들을 교환하고,
그녀들의 수다는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던 저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깊은 잠을 못자고 연신 고개만 꾸벅거리는데,
"고창터미널 왔습니다."
미소동수님의 말에 잠 end.
터미널에서 2013년 답사회 회장이신 마루님과 합류하며
고창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창
고창은 서쪽으로 70km를 넘는 긴 해안선을 끌며 서해와 닿아 있고
동남쪽은 노령산맥의 서쪽 기슭에 놓인 산지성 지역입니다.
전라남도와 맞닿아 있어서 생활권은 전주보다 광주에 가깝습니다.
고창은 고인돌이 많이 밀집해 있는데 군 단위로는 우리나라 최대의 밀집지입니다.
마한시대에는 54개 소국 가운데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이었으며,
백제 때에는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 또는 모양현(牟陽縣)으로 불렸고
통일신라시대 이래 고창현으로 불렸습니다.
고창 자랑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단연 선운사와 모양성이지요.
선운사는 대웅전, 지장보살좌상, 백파부도비, 동불암 마애불 등 여러 가지 사연을 담은 문화재뿐만 아니라 동백꽃만으로도 이미 이름이 높은 전북의 대표적인 절입니다.
조선 초기에 왜구를 막기 위해 축조된 모양성은 우리나라에서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한 읍성입니다.
모양성 공북루 앞에는 판소리의 중흥조인 동리 신재효의 집 사랑채가 남아 있고,
고창 읍내 여기저기에 동제문화(洞祭文化)의 유적 오거리 당산이 있어서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고창하면 풍천장어와 복분자주(산딸기술)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풍천(風川)은 지명이 아니고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을 이르는 보통명사입니다.
바다에서 물이 들어올 때 육지로 바람을 몰고 오는데 이때 바람과 함께 나타나는 장어를 지칭하여 풍천장어라 하지요. 조석(달과 태양의 중력에 의해 밀물과 썰물이 일어나는 현상)과 조차(밀물과 썰물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수위의 변화)의 영향이 큰 서해안에 인접한 소하천을 대개 풍천이라 하고 그 대표적인 곳이 선운사 아래의 풍천인 셈이지요.
오늘의 첫 답사지로 선운사를 정하고 자! 달려갑니다.
선운사
선운사 가는 길
<선운사 동구> 시비
서정주 시인의 육필 원고를 확대해서 새겨 놓은 시비입니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이곳 질마재 마을 출신 시인의 「선운사 동구」라는 시.
시를 쓸 때의 시점이 딱 지금쯤이지 싶습니다.
미당(未堂)이 말당(末堂)이 되고 국화축제도 이제 그 빛을 잃었지만
시가 주는 서정성만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선운사 일주문
선운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축물입니다.
도솔산 선운사
일주문의 현판입니다.
일중 김충현의 조전비서풍(曹全碑書風)의 예서(隸書)가 멋드러지게
이곳이 선운사임을 알려주지요.
선운사 천왕문
2층 맞배집인데,
아래층은 사천왕을 배치한 천왕문이고
2층 누마루에는 범종루를 배치한 독창적인 구조입니다.
맑은 하늘과 고색이 묻어나는 천왕문, 담장 너머로 보이는 동백숲이 조화롭지요.
할매의 시선
동방을 지키는 지국천왕의 발 아래 과거의 악업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할매의 저 시선은......
"이것들아! 니들도 별 수 있간디!"
원망 섞인 눈꼬리와 꽉 움켜쥔 주먹이 왠지 우리들을 보고 있는 듯......!
선운사 전경
한 가운데 만세루가 보입니다.
천왕문 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누각이지요.
정면 9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입니다.
덩치가 크면서도 낮은 형태의 강당 건물입니다.
세련된 구석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지만
한번 정한 길은 누가 뭐래도 가고야 말 것 같은 뚝심을 느끼게 하지요.
다른 건물을 짓다 남은 목재로 지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통나무를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기둥과 들보로 삼은 모습이 눈에 띕니다.
대웅보전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집입니다.
기둥 사이 간격이 넓고 견실해서 안정된 느낌을 주는 조선 중기의 건축이지요.
섬세하고 장식적인 다포의 구성과 꽃살 분합문이 화려합니다.
단청 벽화는 매우 뛰어나서 다포의 사이사이에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축대 앞에 괘불을 걸었던 지주가 세 쌍이 있어서 특이하군요.
한 쌍이 소실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곳에 괘불을 걸고 야외법회를 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바로 앞에 9칸 건물인 만세루가 있어서 아주 추운 겨울만 아니라면
사철 어느 때고 야외법회가 가능했으리라고 봅니다.
육층석탑(?)
전무후무한 육층석탑입니다.
탑의 층수는 홀수로 올라간다는 것이 전통이자 상식인데......
육층이라니???
한 층이 보태졌거나 유실됐다고 보기에는 전체적으로 비례가 너무 잘 맞고...
거 참!!
몸돌을 받치고 있는 기단부 면석에 새겨진 X자 형태의 기하학적 문양은
화순의 운주사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하고......
무언가 수상한 이 탑을 어찌 하오리까^^
선운사 동백숲
4월의 동백꽃은 선운사의 절경으로 꼽힙니다.
선운사 입구 비탈에서 절 뒤쪽까지 약 30m 너비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3천여 그루의 동백꽃.
수령은 500년 가량이며 동백나무 군락으로는 최북단에 위치하지요.
10월 말에는 단풍이 또한 아름답습니다.
절 입구에서 만세루까지 500여m를 타오르듯 물들이는 단풍은 선운사의 또 다른 절경입니다.
봄이면 봄대로 가을이면 가을대로 청아하고 생생한 색감을 자랑하는 이곳 선운사....
이곳 관음전 안에 모셔져 있던 금동보살좌상이 보이지 않아 종무소에 물어봅니다.
"성보박물관에 있어요."
"예, 고맙습니다."
"그런데요...!"
"왜요?"
"지금 성보박물관 공사중인데요."
"......!!!!"
'정와'라는 현판이 보이지 않아 실례를 무릅쓰고 스님들 처소로 가는데,
마침 지나가던 스님이 있어서 묻습니다.
"스님, '정와'라는 건물이나 현판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뇨, 그게 뭔가요?"
"......"
어쩌면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느 가을을 기약하고 맙니다.
산길을 올라가면 도솔암이 있고
그곳에 유홍준 선생이 '경기고 나온 반듯한 보살'로 표현한 지장보살좌상이 있습니다.
그 곁 칠송대에는 석불비결의 전설이 담긴 마애불이 있어 난세에 핀 민중의 염원을 돌아보게 합니다.
답사 일정상 도솔암과 마애불은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어 아쉽습니다.
천왕문 앞에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천왕문 앞에서 기념촬영 차~알 칵^^
셔터를 누른 이는 초로의 어느 카메라맨...
덕분에 전체 세트로 한 컷 했습니다.
옛 성이나 관공서의 앞에 수령을 지냈던 이들의 공덕비가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절집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앞시대 수행자들의 부도가 절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지요.
부도밭.
부도밭의 규모가 절집의 이력을 살필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부도밭은 규모가 큰 부도밭이 아닙니다.
규모가 큰 것에서는 외려 권력의 냄새가 묻어나기 때문이지요.
규모가 아니라 선인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그래서 주변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고아함이 묻어나는 곳.
그런 곳이 우리를 눈 뜨게 하고 회복하게 하고 치유하게 합니다.
아마도 미황사의 부도밭과 선운사의 부도밭이 그런 부도밭일 것입니다.
전나무 숲이 우거진 선운사의 부도밭.
비록 지금은 둘러쳐진 담장에 문까지 만들어 예전의 자연스런 맛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마음이 가는 곳입니다.
전나무 숲길
삼덤벙 발길^^
부도밭
바위 암반을 기단부로 해서 삼층석탑이 천연덕스럽게 서 있고
그 앞으로 여러 부도가 올망졸망하게 앉아 있습니다.
예전에는 부도가 저리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진 않았습니다.
편안하게 길 없는 길을 가는 수행자처럼 줄 없는 줄을 지어 앉아 있었지요.
크고 작고 조금씩 다른 모습의 부도와 비석들이
처지지도 않고 튀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묵은 가람의 화음을 들려주던......!
청담선사 부도
백파율사비 바로 옆에 있는 석종형 부도에 '청담당'이라는 글이 뚜렷합니다.
청담스님은 사리 8과를 남기지요.
만년에 머물렀던 서울 도선사와 고성 옥천사, 고성 문수암, 고창 선운사에 각각 봉안되어 있습니다.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
추사가 해서체로 또박또박 쓴 순정한 필력이 묻어납니다.
까만 대리석이 아니라 남포오석에 글을 새긴 것이지요.
그러나 현재 이곳에 있는 백파율사비는 모조품입니다.
진품은 현재 수리공사 중이라는 선운사 성보박물관에 있지요.
훼손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옮겨간 것 같은데...!
그러면 피사의 사탑도 박물관으로 옮겨야 하나요?
황매산 영암사터의 쌍사자석등을 박물관으로 옮기지 않은 문화재청장은
유물훼손 방조죄를 물어야 하나요?
참으로 편의주의적인 발상이라 안타깝습니다.
유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그 빛을 발하는 법인데......!
비의 뒷면에 있는 비문
백파선사 비문을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율사(律師)로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 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 율사라고 적은 것이다.
대기대용(大機大用).
이것은 백파가 팔십 평생 가장 힘들인 곳인데,
혹자는 기용(機用)과 살활(殺活)을 지루하고 억지스럽다고 하지만 이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무릇 보통 사람들은 대치함에 어느 것이나 살활과 기용 아닌 곳이 없으니,
비록 팔만대장경이라고는 하나 어느 것 하나 살활과 기용에서 벗어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뜻을 모르고 허망 되게 살활과 기용을 갖고 백파가 고집했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하루살이가 느티나무를 흔들려는 격인 것이다.
이래서야 어찌 백파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내가 백파와 더불어 여러 번 왕복서한으로 변증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헛되이 의논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다.
비록 만 가지 방법으로 입이 쓰도록 사람을 설득하려해도 모두 깨닫지 못하니 어찌하여 백파를 다시 일으켜 서로 마주보고 한번 웃어볼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백파의 비문을 지으면서 만약 대기대용,
이 한 구절을 크고 뚜렷하게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백파비로서는 부족하다 할 것이다.
설두, 백암 등 문도들에게 이것을 써주면서 과로(果老)는 다음과 같이 부기하노라.
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자리도 없었으나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하도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였으니
그 가풍은 정말로 진실하도다
속세의 이름은 긍선이나
그 나머지는 말해 무엇하리오
완당학사 김정희가 찬하고 또 쓰다
숭정기원후사 무오 오월 일립
백파선사는 생전에 추사와 사이가 좋았다고 볼 순 없습니다.
백파는 해남의 일지암에 있던 초의선사와 선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을 하고 있었고,
초의선사와 친했던 추사가 끼어들어 <백파망증15조>라는 편지로 백파선사를 비난했습니다.
지금 읽어보아도 추사의 논리는 막가파식 논리였지요.
터무니 없는 인신공격으로 일관한 이 편지를 접한 백파선사의 한 마디.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 드는구나."
그리고는 무시해버렸답니다.
역시 수행자 중에 고수가 많은가 봅니다.
그런데 어찌 추사가 백파의 비문을 썼는가?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추사가 인간이 된 겄이지요.
추사는 요즘 말로 하면 정이 안 가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십년 가까운 제주 유배생활이 인간을 사색하게 했나 봅니다.
유배를 돌아와서 유배 전에 행했던 스스로의 무도함에 나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요.
원교 이광사의 현판 이야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지요.
이 비문은 백파선사 입적 후 추사가 쓴 것인데,
비는 추사가 죽은 뒤 그 다음 해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완당학사~일립'까지는 추사가 글씨가 아닌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추사의 글씨가 아닌 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이가 있었습니다.
1999년에 작고한 청명 임창순 선생이지요.
평생 한학과 서예, 금석학에 몰두하셨고
남양주에 지곡서당을 열어 마지막까지 후학을 양성하셨던 분입니다.
비문 중 추사의 글씨가 아닌 부분을 임창순 선생께서 유홍준 선생에게 가르쳐주었다고 합니다.
비문의 맨 마지막 줄에 있는 문장이 그것이지요.
빈무탁추(貧無卓錐) 기압수미(氣壓須彌)
사친여사불(事親如事佛) 가풍최진실(家風最眞實)
궐명혜긍선(厥名兮亘璇) 불가설전전(不可說轉轉)
아마도 비문을 보관하던 이의 실수로 물에 젖거나 심하게 구겨져서
그 부분 만을 글 꽤나 쓴다는 양반이 추사를 흉내내서 쓴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봅니다.
백파선사 비문 앞에서
마루님은 너무 추운가 봅니다.
비타민님은 호기심 발동!
집중
마지막 부분의 해석,
다른 부분의 서체와의 차이점에 대해......
다들 너무 춥습니다.
산 밑이라 더 그렇겠지요.
아침에 '북극 가냐'고 놀려대던 사람들은 입이 쏙 들어가고
아침에 '북극 가던'사람들은 추위를 즐기고 있습니다.
쩝~쩌업!
선운사를 나오는 길
점심 먹으러 간다는 생각에 추위를 약간은 잊은 듯 마냥 즐겁습니다.
꾸숑들의 행진 같기도 한데......
맨 앞의 꾸숑이 제일 신났습니다.
송악
송악은 두릅나무과의 늘푸른 덩굴나무입니다.
남부 지방의 산기슭에 주로 있으며, 나무나 바위를 감고 올라가는 특성이 있지요.
담장을 탄다하여 '담장나무', 늘 푸른 등나무 같다 하여 '상춘등'이라고도 불립니다.
송악이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에 있는 것이 이 송악인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월산리 앞바다
옛날에 이곳에는 소금을 만드는 벌막이 있었다지요.
산쪽 보다는 바다쪽이 조금 따뜻하군요.
볕이 발라서 그런가....?
풍천
바람 풍, 내 천.
바람이 불어오는 내.
바닷가 쪽에서 바람이 몰려올 때 장어를 몰고 와 이곳 냇가에서 자라면
고놈이 풍천장어지요.
전국에 풍천이 어찌 여기 밖에 없겠습니까만
그 대표가 이곳 선운사 아래에 있는 풍천이라는 말씀^^
금단 양만에서
용기마을이 복분자와 풍천장어의 메카라는 얘길 듣고
무작정 용기마을 쪽으로 발길을 옮기고...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금단 양만'이라는 장어집입니다.
백제 위덕왕 24년(577) 검단 선사가 선운사를 세울 당시
이 지역에 들끓던 도적들을 교화하여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 생계를 꾸리게 했다지요.
그들이 소금을 구우며 살던 마을을 '검단리'라 불렀는데,
해마다 봄 가을에 선운사로 소금을 보내며 은혜에 보답한다 하여 '보은염'이라 했답니다.
해방 전까지는 이 일대 염전에서 선운사로 소금을 보냈다고......
그런데 상호가 '금단'이라니?
뭔가 신발 짝이 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추위와 허기진 배를 구원하는 것은 개념이 아니라 음식이지요.
굽고 양념칠하고 자르고...
생강에 곁들여서...
더불어 복분자술이라...
목구멍이 포도청이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좋은 벗들이 함께 하니
무릉이 꼭 복숭아정원이겠습니까!
뽕밭이어도 무에 상관하리오!!
무릉상전이라...ㅋㅋ
풍천장어
복분자술과 함께 한 풍천장어!
변기가 걱정되는 뷰리풀 런치^^
벽화와 사람들
바닷가를 따라 쭈욱 조성돤 방파제에 검단 소금을 만드는 전 과정이 벽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벌막을 만드는 과정을 보며 신기해하는 덤벙님들!
얼굴에는 복분자의 흔적이 완연하고...
모양성을 산책하면 붉은 끼가 가라앉을라나^^
고창읍성이라고도 불리는 모양성을 향해 출발^^
가는 길에 용기마을 길가 구멍가게에 들러 복분자 원액을 몇 병 사서 시음도 하고...
그런데 정말 맛있습니다.
감탄..감탄...감탄....!
모양성(고창읍성)
전국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성곽입니다.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이 성곽은 단종 1년(1453)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지요.
모양성 산책
성의 높이는 4~6m,
둘레는 1,680m.
동문, 서문, 북문의 세 문과 여섯 군데의 치,
두 군데의 수구문과 옹성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안과 성밖
성벽을 기어오르는 재주를 갖춘 이들과 아무 재주도 없는 이들로 나뉜 덤벙님들.
한쪽은 성벽 위를 거닐고 한쪽은 해자가 있었을 자리를 거닐었지요.
성벽 쪽은 소나무가 싱그럽고
해자 쪽은 물오른 영산홍 가지가 붉습니다.
성벽 위 궁사들
성벽 잘 타는 군사가 활도 잘 쏜다?
빨래 잘 하는 여인이 청소도 잘 한다?
가위 바위 보?
화해의 손짓인가요?
동서화합... 제발^^
서문의 세 여인
엉거주춤하지만 다들 행복해 보입니다.
따스한 성곽길이 잘 어울리네여^^
모양성 서문
혹시 열렸을라나?
들어가 보지만 성문은 굳게 닫히고...
모양성은 성벽을 기어오를 능력이 있는 군사들만 출입가능한 성인 듯^^
답성(성밟기)놀이상
북문인 공북루 앞에 있는 답성놀이상입니다.
성밟기는 윤달이 있는 해, 윤삼월에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밟는 풍습입니다.
성을 밟고 난 뒤 돌은 성 입구에 쌓아두었다고......
이는 겨우내 얼어있던 성을 다지고, 유사시에 대비하려는 지혜가 번득이는 풍습입니다.
여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으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에 간답니다.
여섯 수가 든 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니
어느 윤년 윤삼월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에는 꼭 이곳에 올 일입니다.
꼭!
여인들^^
요즘은 성밟기 놀이를 저승문과는 무관한 음력 9월 9일 모양성제 때 한대요!
어찌 보면 이미 덤벙님들은 오늘 돌을 이고 답성을 완료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칭 덤벙의 대표 미녀들
모양성을 한 바퀴 돌고 복분자 기운을 약간 털어내고.....
동리 신재효 고택
판소리의 중흥조로 불리는 동리 신재효(1812~1884)의 집터입니다.
신재효는 이곳에서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판소리 여섯 마당의 가사를 정리하고 이론을 세웁니다.
도리화가, 성조가, 광대가 등의 작품을 남기는데,
도리화가는 제자이자 애인이었던 진채선을 향한 그리운 정을 읊은 노래이지요.
진채선이 고종 4년에 경회루에서 열린 경복궁 완공 축하잔치에 갔다가
흥선대원군의 인정을 받아 운현궁의 '대령기생'이 되어 돌라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완전 생이별을 당한 마음이 애닯게 그려졌지요.
사랑채
지금은 사랑채만 남았습니다.
동리가비
시내 위에 정자 짓고
정자 곁에 포도시렁
포도시렁 곁에 연못이라......
아마 이 집은 동리가의 표현처럼 풍류와 멋이 잔뜩 배인 집이었을 것입니다.
옛 연못 자리는 메워져 고창경찰서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했고,
다른 여러 채의 건물들은 다 사라지고 사랑채만 남았지요.
사랑채 앞의 우물에서
무장토성
무장면 성안마을.
지붕 낮은 집들과 어설픈 가겟집들 늘어선 모양이
낮잠에 빠져 정신 없는 아이를 보다가 같이 졸음을 느끼는 아빠처럼
그저 고즈넉합니다.
꾸벅 꾸벅.....
무장 남문(진무루) 앞
갑오농민전쟁의 제1차 기병의 현장입니다.
진무루
조선 태종 17년(1417)에 병마사 김저래가 고을의 승려와 장정 2만 명을 동원하여 넉 달 동안 공사하여 세운 것이라 합니다.
이곳 주변에는 삼국시대 이래 각 시대의 토성과 석성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성곽도 태종 때 새로 쌓은 것은 아니고 이전부터 내려오던 성의 유적을 개축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읍성의 둘레가 658보라 하였지요.
예전에 이 성 안에 무장초등학교가 있었지요.
이 진무루는 아이들의 통학길이자
누마루는 짝지와 숙제도 하고 공기놀이도 하고 낮잠도 자던 놀이공간이었지요.
무장객사
조선시대 객사는 주관과 좌우 익헌으로 이루어지며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위엄을 가진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무장객사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입지요.
연꽃과 화병
객사를 오르는 계단 양 옆의 축대 돌에 연꽃과 꽃병에 꽃이 담긴 모습이 새겨져 있어 이채롭습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행복을 만났다고 할까요^^
함께 한 덤벙님들
마루님
이젠 작가 포스가 나요^^
마린하우스님
점점 여유로운 미소가 살아나는 바다소년^^
루시님
손톱색 선글라스가 이뻐요!!
미소동수님
슬슬 연륜이 묻어나는 우리의 항해사^^
풍경소리님
이번에는 잡혔군...^^
까치발님
차에서 졸지 않는 날이 언제 오려나!!
지붕돌님
성벽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비타민님
덤벙의 대표모델이쥬....^^
답사하는 자세도 굿!!
동백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겨울이 아직 그 생살을 드러내고 있었던 답사였습니다.
먼 길을 돌아와야한다는 강박감에
단추 덜 채운 채 출근길을 나서는 셀러리맨 모양으로
허겁지겁 내려오기 바빴던 답사였습니다.
그나마 선운사에 아직 백파의 향기가 서리고
모양성의 따스한 흙길이 정겨웠던 답사였습니다.
무장객사 계단에 핀 꽃이 봄을 대신하고
복분자술이 하루를 풍성하게 했던 이 길.
좋은 기억으로 남아 다시 와 보고 싶은 길이었길 바랍니다.
함께 한 벗들에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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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까치발님은 늘 새로운 영감을 주는군요^^ 나를 위한 쉼표를 찍게 만드는...
맛깔나는 글 잘 읽고 갑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인 핏빛 동백을 선운사에서 보고 싶었는데....
아쉬워야 더 그리운 법^^
약속없는 다음을 기약할 뿐.....
비타민님은 이쁜 사진이 넘 많아 여러장 골라 두었는데 어디 가뿐노^^
얼릉 찾아 올리겠슴돠~~ 죄송!!!!
Who are you?
감은 있지만
실례를 무릅쓸 배짱이 없어....!
ㅋㅋ^^ 구. 지붕돌임돠.
조용히 살고 싶어서..................
멋진 고창답사~ 굿~~임돠~~
날잡아 선운사 단풍보러갑시다요----->풍경임미다요 ^.^
멋진 글 잘 읽고 갑니다.
그린미님도 잘 지내시죠?!
다음 답사는 영천이라 함께 할 수 있겠군요^^
건강 잘 챙기시고ㅡ
다음 달에 뵙겠슴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