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나 온천 등지에서 향토 음식으로 유명한 식당에 가보면 다들 자기네가 원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음식도 그 기원(起源)과 뿌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레지오 단원들도 당연히 자기가 속한 단체의 뿌리인 기원을 알고 있어야 한다.
교본 본문은 레지오 마리애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가 지금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시작은 아주 소박하였다. 이 군대는 치밀한 계획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겨났다. 규율을 비롯하여 활동이나 운영 방법 등도 미리 생각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단순한 제안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저녁, 정해진 시간에 몇 안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앉았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이 지극한 사랑의 섭리에 쓰일 연장이 되리라고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교본 23-24쪽).
레지오 마리애의 기원은 교본 본문뿐만 아니라 창설자가 저술한 「레지오의 놀라운 기적」(프랭크 더프 지음, 푸른 군대 한국본부 옮김, 크리스찬출판사, 1984, 141-155쪽 참조)에도 잘 나타나 있다.
프랭크 더프는 1917년에 빈첸시오회의 새로운 지부장이 되어, 주로 극빈자들과 환자들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가 지은 「거룩한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 개론」(이후 「참된 성모 신심」으로 호칭)을 공부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로부터 4년 후에 레지오 마리애의 첫 회합을 갖게 되었다. 첫 회합은 1921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 전야인 9월 7일 저녁 8시에 아일랜드 더블린 시 프란시스 거리에 위치한 마이러 하우스(Myra House)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그 건물은 빈첸시오회관과 예수 성심 단주회 회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921년 8월 어느 주일에 빈첸시오회 회원들과 예수 성심 단주회 회원들이 함께 모인 평의회에서 활동보고가 있었다. 빈첸시오회 회원인 매트 머레이(Matt Murray) 차례가 되자 그는 바로 그날 아침에 형제 한 사람과 유니언(Union) 병원의 여성 병동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그 당시 병원 사도직은 남성 회원들이 맡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두 형제가 여성 병동에서 암환자들을 위해 펼친 영웅적인 활동에 감동했다. 회합 후 다과 시간에 여성 회원들이 앞으로 여성 병동 방문활동은 여성이 담당할 것을 제안하여 받아들여졌다. 그러한 활동을 위해 별도로 여성회원들을 모집하여 9월 첫 수요일 저녁 8시에 모이기로 결의하였다.
마침내 그날 그 시간에 영적 지도자 미카엘 토허(Michael Toher) 신부와 프랭크 더프 외에 13명의 여성이 마이러 하우스에 모였다. 그들 대부분은 20대의 젊은 층이었다. 그런데 회관에 들어섰을 때 프랭크 더프는 흰 보가 깔린 탁자 위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성상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그 성모상은 그가 예수 성심 단주회원인 조 가벳(Joe Gabbett)으로부터 1916년에 선물로 받아 빈첸시오회관에 보관해둔 것이었다. 성모상 양쪽에는 꽃이 꽂힌 두 개의 꽃병이 놓여 있고 성모상 앞쪽에는 불을 켠 두 개의 촛대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몹시 기뻐하였다.
오늘날 어느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서나 그와 같은 제대차림을 볼 수 있다. 최초의 제대차림이 전 세계로 통일되어 전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누가 그렇게 차렸는지 몰랐으나, 후에 수녀회에 입회하여 캐나다에서 선종한 앨리스 키오프(Alice Keogh)의 영감에 의해 꾸며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제대차림은 레지오 마리애가 표상하는 모든 것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레지오의 제대 위에 놓여진 마리아 성상은 마치 단원들이 모이기도 전에 먼저 오신 성모님이 단원들을 환영하기 위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 같았다. 이처럼 레지오 마리애는 마리아적인 분위기에서 조촐하고 자연스럽게 창설되었다.
첫 회합에서 단원들이 취한 행위에 대해 교본 본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들이 맨 처음 취한 단체 행동은 무릎을 꿇는 일이었다. 신앙심 깊은 이 젊은이들은 머리를 숙여 성령께 기도를 바친 다음, 낮 동안 고달프게 일한 손에 묵주를 들고 가장 소박한 이 신심 기도를 바쳤다. 기도가 끝났을 때 그들은 자리에 앉아서 마리아 상으로 나타나 계신 성모님의 주관 아래,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모습의 레지오 마리애가 태어난 배경이다(교본 24-25쪽).
첫 회합에서 결의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매주 회합을 갖는다. 프랭크 더프 외에 남성은 입회시키지 않는다. 물질적인 활동을 하는 빈첸시오회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영적인 활동을 한다. 이 단체의 이름을 자비로운 성모회라고 정한다. 회합의 원활한 진행과 통솔을 위해 회장과 서기를 둔다. 초대 회장으로 뉴질랜드 출신이며 최고령자인 엘리사벳 커완(Elizabeth Kirwan)이 선출되었다. 주회합 때마다 영적 지도자로부터 훈화를 듣도록 한다. 영적 지도자 토허 신부가 첫 훈화를 하였는데 최후의 심판 내용이 담긴 마태오 복음 25장을 봉독한 후, 불우 이웃을 돕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돕는 것이라는 취지로 그리스도 신비체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최초의 활동 종목과 활동 대상은 더블린 유니언 병원의 여성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을 방문하는 것이다. 활동은 2인 1조로 편성하여 실시하며 반드시 구두로 활동보고를 하도록 한다.」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주회합의 원형이 되었다.
단원들은 첫 모임 날짜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가 여러 해가 흐른 뒤에 서류에 기재할 필요가 있어 회의록에서 날짜를 찾고 보니 9월 7일이었다. 성모 성탄 축일인 9월 8일에 날짜를 맞추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이내 생각이 달라졌다. 만일 9월 8일 저녁 8시에 모임을 가졌더라면 축일이 끝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들이 모인 시각에 교회에서는 축일 전야 저녁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그러니 레지오 마리애는 성모 성탄 축일의 첫 향기 속에 탄생한 셈이다. 교본 본문대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의 끝 부분보다는 처음 순간(전야)이 이 조직의 탄생에 더욱 잘 어울렸던 것이다(교본 25쪽). 이처럼 레지오 마리애가 탄생하던 순간에 성모님의 손길이 함께하셨음을 알 수 있다.
후에 프랭크 더프는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참된 성모 신심」을 공부하는 모임 덕분에 레지오 마리애가 창설되었음을 회고했다. 이 성인은 레지오 마리애 창설에 대한 그의 예언이 실현될 때까지 무려 210년이나 기다렸다. 1712년에 저술한 「참된 성모 신심」은 프랑스 혁명 기간에 어두운 궤짝 속에 처박혀 있다가 1842년에 발견되어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 그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성난 짐승 같은 무리들이 미칠 듯이 달려와서 그 사나운 이빨로 이 작은 책과 성령께서 이 책을 쓰도록 하신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 책을 궤짝의 암흑과 침묵 속에 묻어버려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리라는 것을 뚜렷이 내다본다. 그 무리들은 심지어 이 책을 읽고 실천하는 사람들까지 공격하고 박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오히려 더 좋은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용기가 솟아나고, 더욱더 크나큰 성공을 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 다가올 가장 위태로운 시대에 마귀와 세속과 부패와 싸울 막강한 군단, 즉 예수님과 성모님의 용감무쌍한 남녀 병사들로 이루어진 대군단이 나타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참된 성모 신심」114항, 교본 제24장 3항, 212쪽).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마태 24,15).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12).
첫댓글 이들이 맨 처음 취한 단체 행동은 무릎을 꿇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