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년)와 권상연 야고보(權尙然, 1751-1791년)가 1791년 신해박해 때에 처형당한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성당으로 순교지를 보존하고 있는 신앙의 요람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이곳에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柳恒儉, 1756-1801년)와 유관검(柳觀儉, 1768-1801년) 형제가 육시형을, 윤지헌 프란치스코(尹持憲, 1764-1801년), 김유산 토마스(金有山, 1760-1801년), 이우집(李宇集, 1761-1801년) 등이 교수형을 당했다.
전주 중앙 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이었던 전동 성당은 초대 주임은 보두네(Francois Xavier Baudounet, 1859-1915년) 신부가 1908년에 착공해 1914년에 외형공사를 마친 성당이다. 일제가 신작로를 내기 위해 처형지인 풍남문 성벽을 헐자 그 흙과 돌로 성당 주춧돌을 세웠고 벽돌은 당시 공사를 담당한 중국인 기술자들이 직접 구워 낸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서양식 건물로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8호로 지정된 전동 성당은 순교지를 알리는 머릿돌과 순교자 권상연과 윤지충, 유중철 · 이순이 동정 부부를 채색화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눈길을 끈다. 순결을 상징하는 흰 대리석으로 조각된 유항검과 동정 부부 기념상 그리고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의 기념 동상도 볼 수 있다.
전동 성당은 2006년부터 성당 보수사업을 시행했고 이어서 전동 성당 사적공원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적공원화가 이뤄지면 전동 성당은 인근의 풍남문(보물 제308호)과 경기전(사적 제339호)을 비롯해 한옥마을, 오목대와 한벽루, 치명자산 성지까지 연계되는 성지순례와 역사문화 체험의 중심축을 이루게 된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전동 성당 : 순교 1번지에 우뚝 선 신앙의 요람
건축은 '인간을 담을 그릇을 빚는 작업'에 흔히 비유되고 있다.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그 생김새가 서로 달라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건물 공간이 서로 거슬리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에서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전주교구 전동 성당이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1가에 있는 전동 성당은 도심 한가운데 있으면서 녹음이 우거진 정원으로 시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적 제288호로 지정돼 있는 전동 성당은 또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건물로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 곡선미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며 화려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또 주위에 경기전(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셔 놓은 곳, 사적 제339호)과 풍남문을 끼고 있어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외래 건축 양식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전동 성당은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영화인들과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에게 촬영지로 사랑받고 있으며, 음악 공연장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강재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촬영장으로 사용됐고, 많은 관객의 눈물을 자아냈던 영화 ‘약속’의 마지막 장면 중 주인공 박신양과 전도연이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던 곳도 바로 전동 성당이었다.
전동 성당은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들인 윤지충(바오로, 1759~1791), 권상연(야고보, 1751~1791)이 순교한 자리에 세워졌다. 이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참수형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전동 성당에 들어서면 오른편 정원에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라고 새겨진 선돌이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동성당 터는 또한 ‘호남의 사도’로 불린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4~1801)과 김유산(토마스, 1761~1801)이 순교한 곳이자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과 이우집, 윤지충의 아우 윤지헌이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 주교에게 서양의 큰 배를 조선에 몰고 와달라고 요청한 ‘대박청래’ 사건을 일으킨 죄로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전동 본당 초대 주임인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보두네 신부는 20세기 초 전동 성당을 지을 때에 일제 통감부가 전주에 신작로를 닦으며 풍남문 성벽을 헐자 이 성벽 돌과 흙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풍남문 성벽 돌을 가져다 성당 주춧돌로 사용했다. 유항검을 비롯한 전동 성당 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목을 효수했던 성벽의 돌을 성당 주춧돌로 사용함으로써 이곳이 순교지일 뿐 아니라 ‘신앙의 요람’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전동 성당은 서울 명동 대성당 내부 공사를 마무리했던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1908년에 착공됐다. 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는 17년 동안 매입한 5000평의 대지에 교우들이 낸 성당 신축기금과 자신이 절약해 모은 돈, 그리고 안원오(프란치스코) 회장과 김찬일(아우구스티노) 회장이 기부한 돈을 모두 합쳐 5만원이라는 거액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중국인 벽돌공 100여명이 동원돼 전주성을 헐은 흙을 사용해 벽돌을 직접 굽고, 석재는 전북 익산의 황등산에서 캔 화강석을 말 네 필이 끄는 마차로 운반해 왔고, 목재는 오늘의 치명자산을 매입해 벌목하여 사용했다.
공사 기간 동안 전주 시내에 사는 신자들은 물론 진안, 장수, 장성 등지에 사는 교우들이 밥을 지어먹을 솥과 양식을 짊어지고 와 손마디와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고 어깨에 혹이 생기도록 자원 부역을 했다. 신자들의 희생적 노력 끝에 공사를 시작한 지 만 7년 만인 1914년에 전동 성당 외형공사를 모두 마쳤다.
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는 성당 완공을 못보고 1915년 5월 이질에 걸려 57세로 선종했다. 그래서 성당 내부 공사는 제2대 본당 주임인 라크루 신부에게 맡겨졌다. 라크루 신부는 193평에 달하는 성당 내부공사를 1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진행하여 마침내 1931년 6월18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 주례로 성전봉헌식을 거행했다. 이처럼 전동 성당은 착공에서 성전봉헌까지 23년이라는 대역사 끝에 완성된 성당이다.
전동 성당은 정면 중앙 종탑부와 양쪽 계단에 비잔틴 풍의 뾰족 돔을 올린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다. 특히 12개의 창이 있는 종탑부와 8각형 창을 낸 좌우 계단의 돔은 전동 성당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대표적 상징물로 꼽히고 있다. 또 페인트칠을 하지 않은 성당 내외벽은 적색과 회색의 벽돌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색채의 조화가 인상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리고 내부 공간도 서울 명동 대성당과 똑같이 공중 회랑과 많은 창으로 만들어 육중한 벽체에 비해 자연 채광으로 상대적으로 내부 공간이 밝도록 꾸며놓았다.
교회 건축물 전문가인 김정신 교수(단국대 건축공학과)는 “전동성당은 전체적으로 종탑부 돔이나 석조 기둥 등 비잔틴 요소를 혼합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외관의 세부 기법, 따뜻한 느낌을 주는 내부 공간 등 여타 유명 성당을 능가하는 건물”이라고 평했다.
전쟁 화재 수난 딛고 시민 휴식처로 자리 오래된 건축물은 그 세월만큼 다양한 흔적을 갖고 있다. 때론 그 흔적이 ‘전설’이 되어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국 천주교회 순교 1번지에 우뚝 서 100여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주 전동 성당도 세월의 흔적만큼 모습을 달리해 왔고, 성당을 찾았던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탄식과 슬픔을 간직해 오고 있다.
프랑스인 마리아 앙리에트가 봉헌한 전동 성당 종은 1915년 8월 24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종탑에 설치됐다. 경향잡지(제9권)는 당시 종 축복식 광경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주교께서는 80여명 교우에게 견진성사를 주시고 이어 성체강복을 하신 후에 종을 달아 삼종을 치니 소리 기묘하고 웅장하야 사람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지라 여러 교우들이 흔히하고 용약하야 일제히 삼종을 외우고 이제부터는 이곳에 귀막힘과 같이 지내던 외교인들도 성교회 소리에 많이 감화하야 천주의 영광이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도 또한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종이 사라질 위기도 있었다. 1942년 일제가 전동성당 종을 공출하려 하자, 당시 보좌였던 오기선 신부가 “만일 적이 공습했을 때 전기나 통신이 끊어지게 되면 성당 종을 쳐서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고, 또 매일 울리던 종이 울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것”이라고 말해 위기를 모면했다. 나바위와 수류 성당을 비롯해 전주 시내 개신교회의 종은 모두 공출당했으나 오 신부의 임기응변으로 전동 성당 종만 공출을 면할 수 있었다. 지금은 매주일 오전 10시 30분 교중미사 때만 전동 성당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1937년 4월 13일 전주 교구가 설립되면서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된 전동 성당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트럭 정비소로 사용하기 위해 제대와 성당 내부를 파괴해 첫 수난을 겪었다. 이후 전동 성당은 1988년 10월에 일단의 괴한에 의해 방화사건이 발생, 성당 동편 2층 회랑이 전소되는 두 번째 수난을 당했다.
이 방화사건은 지금도 미궁에 빠져 있지만 전동 성당은 당시 전북지역 민주화의 성지로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던 곳이어서 지금도 시민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짓이라고 믿고 있다.
전동 성당은 한국전쟁 이후 1955년 공산군에 의해 파괴된 십자가의 길 14처 복구공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러 차례 보수 공사를 해왔다. 1973년에는 성당 마룻바닥을 철거하고 인조석으로 개조를 했으며, 1975년에는 유리창을 개수하기도 했다.
1988년 화재사건 이후 제22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한 김봉희 신부는 1992년부터 대대적 전동 성당 보수공사를 진행했다. 성당 바닥은 대리석으로, 부식된 벽돌은 새 벽돌로 교체됐다. 성당 양측 벽면 18개의 창문은 유리화로 단장했고, 화재로 전소됐던 2층 회랑을 복원했다. 또 지난해에는 담을 허물고 그 자리를 꽃길로 조성해 시민들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전동 성당 양측 벽면 18개 창 가운데 신자석을 감싸고 있는 12개의 색유리창은 전주교구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 창에는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전주 숲정이와 서천교에서 순교한 한원서(베드로), 손선지(베드로), 이명서(베드로),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조화서(베드로), 조윤호(요셉), 정원지(베드로) 7명의 성인과 본당 주보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 1801년 순교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유관검, 그리고 동정부부 순교자인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루갈다), 본당 초대주임 보두네 신부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또 제대 주위에는 예수의 탄생과 수난, 부활, 승천, 성령강림, 성모승천을 보여주는 색유리가 설치돼 있다.
성심여자중고등학교와 접한 성당 왼편 담장 쪽에는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자인 윤지충 · 권상연의 순교 동상이 서 있다. 1993년 3월에 건립된 이 순교상은 윤지충이 십자가를 들고 서 있고, 권상연이 목에 칼을 차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방주 모양의 좌대 위에 설치돼 있다. 이 순교상은 마르코 조각실에서 제작했다.
성당 정문에서 오른쪽 꽃담에는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라고 새겨진 선돌이 있다. 이 순교비에 새겨진 글은 전주교구 가톨릭 미술가회 지도신부인 현유복 신부가 썼다. 또 성당 왼편에 대리석으로 제작된 ‘유항검과 동정부부 순교상’은 황등석재에서 제작한 것이다.
성당 마당 안쪽에는 1977년에 봉헌된 루르드 성모 동굴 성모상이 있으며, 성당 뒷편에는 미리내 천주성삼 성직수도회에서 제작한 ‘피에타상’이 안치돼 있다. 또 1992년에 지하 103m에서 끌어올린 지하수로 만든 급수대는 신자들로부터 ‘치명생수’라고 불리면서 사랑받고 있다.
전동 성당 사적공원화 사업 전동 성당과 사제관(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8호)을 중심으로 한 성당 부지 1만 1544㎡가 사적공원으로 거듭난다. 2006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성당 보수사업의 후속 사업으로 이뤄지고 있는 전동 성당 사적공원화 사업은 문화재인 성당과 사제관을 제외한 부대시설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형태로 추진된다.
주요 문화재인 성당의 훼손 방지 및 보존을 위해 시작된 보수사업은 성당 벽돌의 부식 원인이 되는 주변 시설 정비 및 도로와 경계를 이루는 성당 담장 정비에 역점을 두었다. 이와 함께 성당 유리창 색유리화를 전면 보수하는 작업도 병행해 현재 색유리화 보수 작업은 완료된 상태다. 이병호 주교가 제안한 성경말씀 등을 토대로 마르크 수사(떼제 공동체)와 김겸순 수녀(노틀담 수녀회)가 작업했다.
전동 성당 사적공원 조성 사업의 핵심은 사제관을 보수하고 주변 부대시설을 공원화에 맞춰 대폭 정비하는 일이다. 전동성당 축성식 때 함께 완공된 사제관은 성당을 짓는 데 사용한 것과 같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인데 갈수록 부식이 심화되고 있다. 사제관 옆 교육관 및 유치원으로 사용되는 건물을 비롯한 부대시설들이 채광 및 통풍(通風)을 막고 있어서 생기는 현상이다. 교육관과 유치원 건물을 철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신 사제관 뒷편에 다목적 교육관으로 사용할 순교자기념관을 신축하게 된다. 순교자기념관은 1927㎡(583평)으로 사제관과 같은 양식의 2층으로 지어진다.
또 교육관 및 유치원이 이전하고 기존 건물들이 헐리면 사제관에 대한 보수작업도 시작되며 보수가 끝나면 사제관은 순교자들의 유물 전시관으로 변모하게 된다. 대신 새 사제관이 성당 뒷쪽에 신축된다. 이와 함께 현재 성당 구내에 들어가는 문이 좀 더 왼쪽으로 옮겨지고 기존의 화장실과 사무실, 성물판매소와 경비실까지 재정비되며, 성당 왼편에 있는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외부 방문자들이 머물 수 있는 쉼터가 조성된다.
이를 위해 전동 본당은 전라북도 및 전주시 관계자들과 협의를 거쳐 국비 및 시비 · 도비 등 모두 36억 원의 예산(시도국비 80%, 성당 부담 20%)을 확보했으며, 전라북도와 전주교구간 사적공원추진협약식 체결과 함께 순교기념관 신축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적공원화가 이뤄지면 전동 성당은 인근 풍남문(보물 제308호)과 성당 맞은편 경기전(사적 제339호)을 비롯해 한옥마을, 오목대와 한벽루, 치명자산 성지까지 연계돼 성지순례와 역사문화 체험이 어우러지는 중심축을 이루게 된다.
전동성당의 사적공원화 사업은 특히 현재 교황청에서 심사 중인 중인 윤지충을 비롯한 124위에 대한 시복시성이 확정될 경우, 전동 성당과 치명자산 성지가 그 상징성으로 보아 세계적 성지들로 부각될 것으로 예상돼 이를 미리 대비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출처 : 평화신문, 2003년 6월 22일, 29일 리길재 기자 & 2009년 7월 5일 이창훈 기자의 기사 일부 수정 편집]
전주시에 자리잡고 있는 전동 성당은 세 가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박해 후 전주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된 보두네 신부가 1889년부터 대승리(완주군 소양면)를 중심으로 사목을 하다가 1891년에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옴으로써 '전주 본당'(지금의 전동 본당)이 시작된 곳이다. 다음으로 이 자리에는 1914년에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식 성당이 건립되었으며, 이 성당은 1981년에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면서 그 보존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일대는 1791년의 신해박해 때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순교 터가 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대승리에는 '전동 본당 발상지'라는 기념석이 세워져 있다.
지금의 전동 성당 터에서는 1791년 11월 13일(양력 12월 8일)에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물론 이보다 앞서 1785년의 명례방 사건으로 이벽(요한)이 집안의 박해를 받은 후에 병으로 사망하였고, 김범우(토마스)가 형조의 아전들에게 체포되어 유배를 당한 뒤 배소에서 사망하였지만, 자료 부족으로 아직까지는 이들의 순교를 증명할 수가 없다. 특히 윤지충과 권상연은 초기의 신자로서는 드물게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뒤 혈세(血洗)를 받았으니, 전주교구에서 이들을 하느님의 종으로 선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윤지충은 진산 장고치(현 금산군 벌곡면 도산리)에서 태어나 막현리(현 진산면 막현리)로 이주해 살던 남인 계열의 유명한 집안 출신으로, 조선 시대의 국문학 대가로 알려진 윤선도가 바로 그의 6대 조부이다. 그리고 권상연은 윤지충의 이종 사촌으로 공주 탄방(현 대전시 탄방동)에 살다가 막현리로 이주해 온 집안 출신이었으며, 경기도 양근의 유명한 신자였던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정약용(요한) 형제는 윤지충의 고종 사촌 형이었다. 윤지충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정씨 형제들과의 학문 교류 덕택이었고, 권상연이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윤지충 덕택이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787-1788년 무렵에 세례를 받은 후 그 동안 배워 오던 학문 대신에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상 제사 금지령을 하달하자 신주를 폐하였고, 다음해 윤지충의 모친(권상연의 고모)이 선종하였을 때는 전통 상례(喪禮)를 폐지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당시는 이처럼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전통 상례나 제사를 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때였다. 그러므로 집안 사람들은 물론 이웃과 친지들은 이러한 행위를 묵과하지 않고 널리 알렸으며, 마침내는 지방의 관장과 조정에서가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신해년의 '진산 사건'이었다.
사건이 확대되면서 윤지충과 권상연은 잠시 몸을 피하였으나, 윤지충의 숙부가 체포되자 도리없이 피신처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윤지충 일기"에 따르면 그들은 일단 진산에서 문초를 받은 후 10월 29일에 전주로 압송되어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어 11월 8일 조정에서는 윤리강상죄(倫理綱常罪)를 적용하여 그들에게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내렸으며, 11월 13일에는 오가는 행인들이 많은 전주 남문(풍남문) 밖에서 형을 집행하였다.
저들은 천주만 있는 줄 알고 임금과 어버이가 있는 줄을 모르며, 신주는 평일에도 부모와 조부모가 살아 계신 것처럼 섬기기 위한 것인데, 신주는 한 조각 쓸모 없는 나무토막이라고 불태워 없애고도 조금도 후회함이 없습니다. 제사를 폐한 일도 그러하거니와 매를 치며 자백을 받을 때에도 유혈이 낭자하였지만 신음 소리 한마디 없이 언제나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여 임금의 명령이나 부모의 명령은 어길지라도 천주의 가르침만은 비록 극형을 당한다 할지라도 결코 배반할 수 없다'고 하면서 칼날 아래 주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이만채 편, "벽위편" 및 "정조실록" 참조).
윤지충과 권상연이 전주 감영에서 형벌을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순교를 각오하고 대답한 말이다. 훗날 이러한 순교 의지에 대한 표현은 순교자들에게 하나의 표어처럼 되어 버렸다. 순교한 뒤 그들의 시신은 막현리 인근에 묻혔고, 그들이 남긴 유물은 신자들에게 치유의 은사를 이루는 기적의 도구처럼 여겨져 여러 사람이 지니고 다녔다 한다. 또 이로부터 4년 뒤인 1795년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전라도 땅으로 내려가다가 이곳을 지나면서 "성교를 공부하여 성인품에 이르게 된다면, 마땅히 두 사람의 무덤 위에 천주당을 세워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까지 그 무덤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120여 년 뒤 그들의 순교 터인 전주 남문 밖에 아름다운 성당이 들어서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뿐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11월호]
윤지충(尹持忠) 바오로(1759-1791년)
윤지충 바오로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우용’이고,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은 그의 아우이다.
본래 총명한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또 이 무렵에 고종 사촌 정약용(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다음 해부터는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3년 동안 교리를 공부한 그는 1787년 인척인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후 바오로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 이종 사촌 권상연(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자주 왕래하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바오로는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어머니(즉 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윤지충 바오로가 신주를 불사르고, 전통 예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얼마 안 되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그곳을 온통 소란스럽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들은 바오로는 충청도 광천으로,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바오로와 권상연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우선 전라 감사는 그들로부터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얻어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특히 바오로는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하였고, 이에 화가 난 감사는 그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바오로와 권상연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님을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그들로부터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내 조정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게 되었다. 결국 임금은 이러한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의 처형을 윤허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즉시 바오로와 권상연을 옥에서 끌어내 전주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이때 바오로는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을 하였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바오로와 권상연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의 피에 적셨으며, 그중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죽어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권상연(權尙然) 야고보(1751-1791년)
권상연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 사촌 윤지충(바오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이후 야고보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고모(즉 윤지충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에는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신주와 같은 나뭇조각을 공경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무익한 일이며, 이를 금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어기기보다는 차라리 형벌과 죽음을 택하겠다.”
야고보와 윤지충이 신주를 불사르고 전통 예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친척을 통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그러한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그곳을 온통 소란스럽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그들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들은 야고보는 충청도 한산으로,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각각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 감영에 도착한 야고보와 윤지충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님을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그들로부터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내 조정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고, ‘권상연과 윤지충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게 되었다. 결국 임금은 이러한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의 처형을 윤허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즉시 야고보와 윤지충을 옥에서 끌어내 형장으로 정해진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야고보는 이때 초죽음이 된 상태였으면서도 이따금씩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형장에 이르자, 윤지충이 먼저 칼날을 받았다. 이어 야고보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때는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야고보와 윤지충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의 피에 적셨으며, 그중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죽어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1756-1801년)
1756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다음해에 순교한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며느리, 유중성(마태오)은 그의 조카이다.
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었다. 그는 권일신의 집에서 주요 교리를 배우는 동안 이를 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이제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다.
1786년 봄에 이승훈을 비롯하여 지도층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임의로 성직자를 임명하였을 때, 아우구스티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지도층 신자들은 이때부터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데 몰두하였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789년 말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북경에 파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헌납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아우구스티노는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이종사촌 윤지충(바오로)이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된 후, 일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는 석방되었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아우구스티노는 아우 유관검을 신부에게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하였다. 그때 마침 조정에서 신부 체포령을 내리자, 주 신부는 이를 피해 지방 순회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주 아우구스티노의 집을 방문하여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이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아우구스티노가 앞장서서 이 계획을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오랫동안 결실을 맺지 못하였고, 그러던 차에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에 앞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장남 유중철과 이윤하(마태오)의 딸 이순이가 동정 부부 서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며,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박해자들은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의 주동자로 아우구스티노를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그는 결코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결국 아우구스티노로부터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처형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아우구스티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성 다블뤼(St. 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훗날 그가 배교한 것 같다는 추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유항검이 배교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부정되므로, 그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순교자들의 팔마가지를 받으리라 믿는다.”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1764-1801년)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1764년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과 논산군 지역)에서 학문으로 이름이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바오로)은 그의 형이다.
프란치스코는 1789년에 형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에 앞서 윤지충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인척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고 오랫동안 그 내용을 탐독한 끝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1787년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윤지충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아우 프란치스코와 함께 열심히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갔다.
1791년에 형이 순교하자 프란치스코는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진산을 떠나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런 다음 교회 서적을 베껴 읽으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자신의 이름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키곤 하였다. 또 1795년에는 저구리를 방문한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았으며, 이후에는 교회의 밀사 황심(토마스)을 북경에 파견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교회 활동이 관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혔으며,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이미 드러난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다음과 같이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천주교 교리를 끊지 못하였고, 고질병처럼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오로지 만 번 죽겠다는 말씀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 천당 지옥의 이치를 굳게 믿은 탓에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시 박해자들은 교회 밀사가 북경을 왕래한 이유를 알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조정의 명에 따라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포도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의금부에서 마지막 문초를 받은 후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으며,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에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고산에 갇혀 있던 아내와 가족들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출처 : 이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추진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2003년]
유관검(柳觀儉, ?-1802년)
전라도 전주 출신, 유항검(柳恒儉)의 동생, 1790년 청주에서 사는 민도(閔燾)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처음 대하였고, 이로 인해 윤지충(尹持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 관헌에게 잡혀 여러 차례 고문을 받는 동안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였다. 그로 인해 많은 교인이 잡히게 되었으나 그는 방면되지 않고 오히려 반역죄로 1801년 9월 11일 사형언도를 받아 10월 24일 참수되었다. 한편 그의 아내 이육희(李六喜)는 남편과는 반대로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여 혹독한 형벌도 달게 받고 1802년 1월 31일 참수되었다.
김유산(金有山) 토마스(1760-1801년)
순교자. 세례명 토마스. 충남 보령(寶齡)의 역촌(驛村)에서 천민으로 출생. 한때 승려(僧侶)생활을 하였으나 이존창(李存昌)의 권면으로 입교, 그 후로는 역졸(驛卒)의 명색으로 유력교우들 사이에 소식을 전해 주었고 조선 교회와 중국 교회와의 연락을 위해 1798년과 1799년 두 번에 걸쳐 북경(北京)을 왕래하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전주(全州)에서 유항검(柳恒儉), 윤지헌(尹持憲), 이우집(李宇集)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감영, 포청, 형조에서 차례로 신문을 받은 후 10월 18일 의금부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0월 24일 전주에서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과 함께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이우집(李宇集, 1761-1801년)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전라도 영광(靈光) 출신으로 사돈인 유관검(柳關儉)의 권유로 입교,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양선박청래사건’(西洋船舶請來事件)에 관련되어 3월에 체포되었고 전주감영(全州監營), 포청, 형조를 거쳐 의금부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이해 10월 24일(음 9월 17일) 김유산(金有山, 토마스)과 함께 전주에서 참수되었다. [참조 : 이상 한국가톨릭대사전]
조상 제사문제는 인류 구원의 보편적 성사인 가톨릭 교회가 유교문화권의 동양인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어떻게 왜곡됨이 없이 전하며 또 그리스도교 신앙과 유교문화와의 조화를 이룰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창립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함에 있어 한편으로는 복음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각 민족의 고유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여 그리스도교를 그 민족 안에 토착화해야 하는 이중적인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이 선교의 양면성은 시대나 환경에 따라 어느 일면이 강조되기도 하나 근본적으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상호 조화를 통해서만 교회는 본연의 사명을 원만히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천주교가 전래되던 당시 중국과 한국은 생활 전반에 걸쳐 유교사상과 문화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효(孝)의 종교라고 일컬어질 만큼 효를 중시하는 유고에서 부모 생시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제사를 통해 효도를 계속하며, 또한 공자에 대해서도 만세의 스승으로 받들어 존경의 의식과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 선교에 임한 서양 선교사들은 이 이질적인 유교식 조상제사와 공자 공경의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또 그리스도교 신앙과 병행할 수 있느냐는 난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이 문제에 대해 1세기간이나 논쟁을 벌였다. 마침내 로마 교황청에서 이 의례들을 미신적인 행위라고 판단하여 금지 명령을 내리게 되며 이로써 한국, 중국, 일본 등 유교문화권의 극동지방 선교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교황청이 이런 금령을 내린 데는 여러 요인이 있었으나 선교정책에 있어 토착화보다는 신앙의 통일성을 중시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 후 약 200년간 이 금령은 엄격히 준수되어 오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시대의 변천과 교황의 선교정책의 변화에 따라 상당히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조상제사문제는 앞으로 극동지방 선교와 토착화를 위해 더욱 연구되고 해결되어야 할 중대한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2. 유교 조상제사의 근본 의미
인(仁)을 핵심으로 하는 유교는 효를 통해 인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아 효를 무엇보다 강조하며, 또한 모든 덕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이 효에 의해 그 사람됨을 평가하며 효도하지 않는 자는 자식이라 할 수도 없고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유교의 효의 정신은 가장 귀중한 생명과 지극한 사랑과 은혜를 조건 없이 주신 생명의 근원인 부모와 선조께 감사의 보답을 드리는 데 있다. 보본(報本)과 보은(報恩)의 마음에서 연유한 이 효는 구체적으로 3가지 효도(孝道)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즉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잘 보전하고 후손을 통해 지속시키며, 부모를 지성(至誠)으로 봉양하며, 부모의 뜻을 받들어 도(道)를 닦아 떳떳한 사람이 됨으로써 후세에 이름을 빛내고 부모에게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효도는 부모 생시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계속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이 섬기듯이 함”[事死如事生](中庸 19章)으로 이어가며 특히 제사를 통해 실천된다. 제사는 생명의 근본에 보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돌아가신 부모와 선조를 생시와 같이 공경하여 효를 이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유교 조상제사의 근본 의미는 복을 구하기 위함이나 기타 다른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녀로서 자기 생명의 근본인 부모와 선조에게 보본과 보은의 효를 계속 실천하는 데 있다.
이러한 조상제사는 다음과 같은 예절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죽은 이의 신상(神像)인 신주(神主)에게 인사를 드리는 참신(參神), 향을 피우고 술을 부음으로 혼(魂)과 백(魄)을 불러들여 임재(臨在)하도록 하는 강신(降神), 정성의 재물을 올리는 초헌(初獻)과 아헌(亞獻) 및 종헌(終獻), 사모의 정을 표하면서 제물의 흠향을 간절히 청하는 축(祝), 제물을 흠향하도록 잠시 문을 닫고[闔門] 시간적 여유를 주는 유식(侑食), 차나 숭늉을 드리는 헌다(獻茶), 작별 인사를 올리는 사신(辭神), 제물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죽은 이와 일체(一體)를 이루고 친족 간의 일치와 유대를 도모하는 음복(飮福) 등이다. 이 모든 예절은 죽은 이를 생시와 같이 정성껏 섬기려는 효도의 상징적 표현이요, 또한 “선조에게 제사 지낼 때는 여실히 임재(臨在)해 계신 듯이”(論語 八佾 12) 하는 성경(誠敬)의 실천인 것이다.
한편 유교 제사에 있어 중심이 되는 신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사람의 죽음이란 혼과 백의 갈림인데 백을 떠난 혼이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게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겨 혼이 의지하도록 마련해 준 의빙처(依憑處)요, 둘째는 인간의 본성적 조건에서 볼 때 돌아간 이를 계속 사모하고 섬기기 위해 볼 수 있는 상(像)이 필요한데, 신주는 바로 즉은 이의 신상인 것이다. 사진도, 초상화도 없던 아주 옛날에는 제사 때 죽은 이와 혈육이 같은 손자 중 하나를 뽑아 신상으로 삼아 제사상에 올려놓고 지냈는데 이를 시(尸) 또는 시동(尸童)이라 한다. 시동에게는 죽은 이의 웃옷을 입혔으니 이는 돌아간 이를 잘 연상하여 극진한 정성을 드리기 위함이다. 후대에 와서는 시동 대신 신주를 세웠으며 또 지자(支子)가 제사를 지낼 때는 지방(紙榜)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신주의 유래나 또 제사 후 지방을 태워 없애는 것은 신주 또는 위패(位牌)는 의빙처보다는 신상의 의미가 더 강하며 더구나 현대에 와서 의빙처의 의미는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3. 중국 의례논쟁(儀禮論爭)과 교황청의 금령
중국에서의 소위 의례논쟁이란 그리스도교의 신(神, 라틴말의 Deus)에 해당하는 중국말 용어가 무엇이며 선조와 공자에게 드리는 유교식 제사와 존경의식을 허용할 것이냐는 문제에 대해 약 100년간 벌였던 쟁론을 말한다. 16세기 말엽 중국 선교에 임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와 그의 동료 예수회원들은 주로 지식층을 상대로 전교를 하였고 높은 수준의 유교문화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배치되지 않는 한 받아들이고 조화하려는 문화적 적응주의(適應主義)내지 보유론적(補儒論的) 입장을 취하였다. 그래서 선조와 공자에게 드리는 제사나 존경의식에 대해서도 그 본래 의미를 파악하여 자녀나 제자가 부모와 스승에게 드리는 효도와 존경의 표현이라고 해석, 허용하였다. 그러나 예수회보다 반세기 늦게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 방침을 비난하면서 조상제사와 공자 공경의식을 미신적 행위라고 반대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된 데는 선교 방침의 차이도 있었지만 이들이 접촉한 사람들이 예수회와는 달리 주로 시골의 서민층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시골사람들이 거행하던 조상숭배 제사나 공자 공경의식에는 민간신앙의 영향으로 미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의례논쟁의 발단은 1643년 도미니코회원 모랄레스(Morales)가 예수회의 선교 방침에 반대하여 17개항의 문제를 교황청에 제기함으로써 일어난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1645년 모랄레스가 제기한 행위들을 금하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당황한 예수회는 마르티니(Martini)를 로마에 파견하여 자기들의 입장을 설명하였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검토 끝에 1656년 예수회의 선교 방침을 허용하는 훈령을 내렸다. 이어서 1659년 포교성성은 모든 선교사를 위한 훈시를 통해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선교지의 문화 전통을 존중할 것이요, 혹시라도 그것을 바꾸었으면 하는 생각은 하지 말 것이며 비록 비난을 받아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관습에 도전함에 있어서도 말로써가 아니라 자제와 침묵으로써 하고 좋은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시달하였다. 이러한 교황청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도미니코회는 다시 이의를 제기하게 되며, 이에 교황청은 1669년 먼저의 훈령이 나중의 관용훈령에 의해 무효화된 것이 아니라 둘 다 각각 제시된 문제점과 환경에 따라 지켜져야 한다고 신축성 있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런데 파리 외방전교회의 입국은 다시 문제를 재연시켰으니 파리 외방전교회 중국 책임자이며 복건성(福建省)의 주교인 메그로(Charles Maigrot)는 1693년 자기 관할구역에 있는 사제들에게 공자와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금하는 명령을 내리고 이 문제에 대한 명백한 결정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이에 오랜 연구와 검토 끝에 교황 글레멘스 11세는 1715년 3월 19일 칙서 를 통해 제기된 의례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즉 그리스도교의 신의 명칭으로는 천주(天主) 이외에 천(天)이나 상제(上帝) 등의 다른 용어를 사용할 수 없으며, 조상숭배 제사와 공장 공경의식을 금하며, 또한 조상의 위패도 금하나 다만 신위(神位)라는 글자 없이 이름만 써서 모시는 것은 허용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1742년 7월 11일 칙서 를 통해 글레멘스 11세의 칙서를 재천명하면서 모든 선교사에게 칙서 준수를 서약하도록 명하고 이에 불복하는 자는 엄한 벌과 함께 중국에서 추방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이 문제에 대한 일체의 논란을 금함으로써 파란만장했던 1세기간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의례문제에 대한 교황청의 판단기준은 그 근본의미가 무엇이냐는 관점에서보다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병행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으며, 금지령을 내린 이유는 당시 중국인의 종교 심성으로 볼 때 이 의식들이 미신과 혼합되어 있어서 미신적 요소를 분리해 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처의 이면에는 교황청의 선교정책에 있어서 토착화보다는 신앙의 순수성과 통일성의 중시, 유럽화된 그리스도교와 보편적 그리스도교 신앙과의 혼동 및 언어의 장벽 등 많은 요인들이 작용했던 것이다.
4. 한국에 있어 제사 금령과 그 영향
외국 선교사의 입국 전교 없이 스스로 천주교에 대해 학문으로 연구한 끝에 신앙으로 신봉하고 또 전파한 초기 조선 학자들은 천주교 교리와 유교의 가르침을 조화시키려는 보유론적 입장을 취했으며, 이런 태도는 당시 지식층을 이론적으로 설복, 입교시키는데 주효하였다. 그런데 유교와 천주교의 충돌, 참혹한 피의 참사를 불러일으킨 사건이 발생하니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버린 소위 폐제분주사건(廢祭焚主事件)이다. 물론 이전에도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론적인 논란이 있었으며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과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 일어났으나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었다.
1790년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을 통해 조선에 전해진 북경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명령에 따라 전라도 진산(珍山)에 살던 선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그의 외종형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은 조상의 제사를 폐하고 그 신주를 불태워 버렸다. 또한 1791년 5월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權氏)가 별세하자 이들은 정성으로 장례를 치렀으나 위패는 만들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시 조상숭배를 신앙과 같이 지켜 오던 전통 유교사회에서는 마치 ‘모든 계층의 눈동자를 찌른 격’이었으며 그 충격과 파문은 엄청났던 것이다. 당시의 임금 정조(正祖)는 평소 학자들을 아끼고 천주교도들에 대해 호의적이어서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온 조정이 들끓고 상소가 빗발치듯 할 뿐만 아니라 국시(國是)를 어긴 자들을 그대로 둘 수 없어 이들을 사형에 처하고 천주교도들을 문초했으며 더 나아가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禁敎令)과 함께 전국의 모든 서학서(西學書)를 불태워 버리도록 명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신해박해이다.
조선에 있어 천주교에 대한 100여 년간의 탄압은 사상적 갈등, 당쟁, 경제적 피폐, 민족적 위기의식 등 여러 배경에서 기인했으나, 이 폐제분주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피의 참사를 정당화하는데 충분한 이유를 제공해 주었다. 천주교도들은 부모도 모르는 불효자, 인륜(人倫)을 저버린 짐승의 무리로 낙인이 찍히고, 사회 ·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기존 윤리질서와 사회체제에 대한 부정과 파괴를 자행하는 불온세력 내지 비국민(非國民)으로 인식되었다. 이로써 천주교 선교는 큰 타격을 입었고 신앙의 토착화를 막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나, 다른 측면에서는 지식층의 입교를 극난케 함으로써 천주교가 점차 서민층으로 확산되어 서민층이 주류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조선에서 이렇듯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폐제분주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윤지충과 정하상(丁夏祥)은 공술(供述)과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다음과 같이 상세히 진술하고 있다. 첫째, 물질적 음식물은 혼의 양식이 될 수 없고, 잠자는 사람에게 음식물을 드리지 않듯이 영원히 잠든 이에게 제물을 차려 봉헌하는 것은 허세요 가식이며, 둘째 신주는 목수가 만든 나무 조각이므로 나의 골육이나 생명과 아무 관계가 없어 부모라 부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어떤 물질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그들의 독자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런 이유들은 당시 조상숭배가 국교와도 같이 준행되던 유교사회에서는 상상치도 못한 일이요, 이들 역시 천주교회에서 금하는 까닭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상제사에 대한 윤유일과 구베아 주교의 대하는 당시 유학자들과 천주교회간의 인식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유일(有一)이 ‘제사를 드리는 것은 돌아간 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기 위함[事死如事生]인데, 천주교를 믿으면서는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면 이는 매우 곤란한 일이온데 무슨 방도가 없겠습니까?’ 하고 묻자, 주교가 대답하기를 ‘천주교는 반드시 성실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사람이 죽은 후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크게 성실한 도리[誠實之道]에 어긋난다’고 하였다”(≪邪學懲義≫ 移還送秩 權儉供草).
5. 시대 변천과 허용 조치
약 200연간 엄격한 규제 하에 금지되었던 조상제사와 공자 존경의식이 20세기 전반서부터 해빙기를 맞게 되었다. 교황청이 이 문제에 대해 정책 변화를 하도록 작용한 요인으로는, ① 역사 연구의 발전으로 인한 토착화에 대한 재인식, ② 엄격한 단죄 신학에 반대하여 비 그리스도교 민족 안에 내재해 있는 영적 요소들과 그리스도교 은총을 조화시키려는 신학사조의 대두, ③ 동양에서 민족주의의 등장에 세계 정치무대에서 이들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동방 민족들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서구인들의 보다 깊은 이해와 통찰, ④ 서양 문물과 사상의 영향으로 동양인의 종교 심성에서 미신적 요소의 감소, ⑤ 국법에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고 국가에서 명하는 공경의식은 그 본래 기원이나 의미가 어떠하든지 간에 이제 와서는 단지 사회적 국민의식에 불과하다는 정부 당국의 발표 등을 들 수 있다.
20세기에 와서 이 문제에 대한 첫 도전은 1932년 일본의 팽창주의에 의해 세워진 만주국에서 강력하게 일어났다. 이 신생 만주국은 국민의 단결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공자숭배를 국민에게 의무화했으며 이로 인해 천주교도들은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당황한 교회 당국은 공자숭배의 성격을 정부에 질의했으며 만주정부는 이 의식이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사회적 국민적 예식일 따름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교황 비오 11세는 1935년 공자 존경의식을 허용하였다. 또한 1년 후인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참배(神社參拜)를 허용하면서 지금까지 금지되었던 혼인, 장례, 그 밖의 사회 풍습 등에 대해서도 폭 넓은 허용조치를 취함으로써 적응주의원칙이 교회의 확고한 선교정책임을 드러냈다. 더 나아가 비오 12세는 1939년 12월 8일 <중국 예식에 관한 훈령>을 통해 공자 존경의식을 행할 수 있다고 전면적으로 허용했으며, 선조 공경의식에 있어서는 “시체나 죽은 이의 상 또는 단순히 이름이 기록된 위패 앞에 머리를 숙임과 기타 민간적 예모를 표시함이 가하고 타당한 일이다”라고 함으로써 비록 전면적인 허용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관용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취한 이유는 시대 변천에 따라 풍속도 변하고 사람들의 정신도 변해서 과거에는 미신적이던 예식이 현재에 와서는 다만 존경과 효성을 표하기 위한 민간적 예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훈령에 준하여 한국 주교단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관한 보다 상세한 지침을 정하였는데 허용 사항으로는, 시체나 무덤, 죽은 이의 사진이나 이름만 적힌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며 음식을 진설하는 행위 등이며, 금지 예식은 제사에서 축과 합문(闔門)[혼령이 제물을 흠향하도록 잠시 문을 닫는 예식], 장례에 있어 고복(皐復)[죽은 이의 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예식], 사자(使者)밥[죽은 이의 혼을 고이 모시고 저승으로 가라는 뜻으로 밥과 신발을 상에 차려 놓는 것] 및 반함(飯含)[죽은 이의 입에 쌀, 조가비, 구슬 등을 넣는 예식] 등이다. 그리고 위패는 신위라는 글자 없이 다만 이름만 써서 모시는 경우 허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완화조치에도 불구하고 이 조상제사문제는 아직도 그리스도교 선교에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극동지방의 복음화를 위해 깊이 연구되고 재고되어야 할 과제이다. 또한 앞으로의 선교와 토착화를 위해 거울로 삼아야 할 역사적 교훈인 것이다. (崔基福)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