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無錫)에서 타이저우(泰州)를 거쳐 쑤저우(蘇州)로 가는 길 위에는 중국 강남지방의 전형적인 농촌 풍경들이 펼쳐져 있다. 물이 풍부해서 대부분의 가옥들이 수로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맞붙어 있는 강남지방은 대도시의 빽빽한 아파트 숲과 지루한 평원이 계속되는 북방지역 농촌의 단조로운 풍경들과 달리, 마치 아름다운 정원을 산책하는 듯한 ‘우아한’ 정감을 주는 곳이다. 그러나 우아한 풍경 한편으로 이곳은 또 하나의 숨은 절경을 품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무서운 속도로 세계 굴지의 외자기업들을 흡수하고 있는 이곳은 중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하이테크 생산단지로 부상한 창장 삼각주라는 황금알을 낳는 ‘경제절경’을 품고 있다.
집체기업을 미련 없이 버리고
중국 경제를 이고 있는 ‘용의 머리’ 상하이를 중심으로 동쪽 창장 줄기로는 난징과 우시, 쑤저우가 그리고 창장 남쪽으로는 중국 사영 기업가들의 ‘천당’이라 일컫는 저장성의 항저우와 닝보가 자리잡은 강남지방은 일명 ‘창장 삼각주’라고 하는 중국 3대 경제권 가운데 하나다. 철도·항만·도로 등 완벽한 물류 시스템의 구축과 풍부한 노동력, 정부의 집중 지원에 힘입어 현재 중국 내에서 외자투자 및 1인당 평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소비성장률 등이 1위를 달리고 있는 곳이다. 중국 <인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중국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한 35개 도시 중 10곳이 창장 삼각주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최근에 선정된 종합경쟁력 10대 도시 중 4곳이 역시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또 현재 창장 삼각주 지역은 전국의 18%에 달하는 GDP를 창출하고 있으며, 지난해 이 지역의 중국 재정수입 기여도가 4분의 1을 초과했다.
사진/ 중국 최대의 외자 집중 투자지역인 쑤저우. 창장 삼각주 경제의 새로운 ‘진주’로 떠오르고 있다.
상하이 푸동을 정점으로 90년대 이후 중국 경제발전 신화를 상징하고 있는 이곳은 80년대까지만 해도 쑤저우, 우시, 창저우를 중심으로 한 향진집체기업 발전모델의 대명사로 불린 ‘소남모델’로 유명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시장경제의 가속화와 이로 인한 향진집체기업의 비효율성 등으로 중국 경제발전의 한 장을 장식했던 소남모델이 퇴조하고 이른바 사영기업, 개체경제로 대변되는 ‘온주모델’이 각광받는 시대가 되었다. 향진집체기업의 퇴조, 즉 소남모델의 몰락과 쑤저우의 대규모 하이테크 공업원 건설로 상징된 ‘쑤저우 혁명’은 상하이의 부상과 더불어 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경제의 최대 빅뉴스였다. 중국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일컬어 중국 경제의 ‘고요한 혁명’이라고도 했다.
현 국가주석 후진타오의 고향이기도 한 장쑤성 타이저우를 출발한 버스가 장인(江陰)에 도착할 무렵, 차창 밖으로 거대한 창장 물줄기가 펼쳐지면서 눈앞에 ‘장인 창장대교’라는 굵은 글씨가 들어왔다. 장쑤지방에서 가장 부유하기로 소문난 장인지방으로 연결되는 이 대교는 90년대 이후 중국 장쑤성의 발전을 나타내는 다리이기도 하다. 99년 건설된 장인 창장대교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크고 중국 내에서는 가장 큰 다리다.
대교를 건너자마자 네모 반듯하게 무리지어 있는 별장식 가옥들과 현대식 아파트들은 중국 강남지역 농촌의 ‘부’를 그대로 펼쳐보인다. 그것은 또한 장쑤성 최대의 부자마을들을 가지고 있는 장인지방의 경제혁명을 나타낸다.
장쑤지방을 중심으로 한 강남지방의 농촌들은 더 이상 농촌이 아닌 작은 소도시를 형성하면서 중국 농촌발전 모델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이 중에서도 중국 농촌발전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스타마을’ 화시춘이 있는 장인지역은 소남모델의 퇴조와 중국 농촌경제의 변화를 대변하는 ‘고요한 혁명’의 근원지다.
닭을 빌려 달걀을 낳는…
쑤저우, 우시, 창저우를 중심으로 한 향진집체기업의 발전은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장쑤성 경제발전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었으나 90년대 중반으로 넘어오면서 향진집체기업은 사영기업과 개체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저장성의 경제발전 속도에 밀리면서 중대한 도전을 맞는다. 촌이나 향 정부가 기업의 ‘사장’ 역할을 하고 마을 전체가 기업의 집단 소유권을 갖는 향진집체기업 발전은 그 재산권과 소유권의 모호함, 정경분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기업경영의 비효율성, 지방정부의 과도한 간섭과 정치형 기업가들의 비전문성으로 인해 차츰 시대의 흐름에서 도태됐다.
사진/ 장쑤성 최대의 부자마을. 별장식 가옥들과 현대식 아파트들은 중국 강남지역의 상징이다.
이 와중에 장인지방은 과감한 ‘혁명’을 시작했다. 마을 집체소유 기업들을 민영기업이나 주식 합작제 기업으로 전환하면서 현대식 기업체제로 바꿔갔다. 이러한 변화는 소남모델의 원산지인 우시, 쑤저우, 창저우 등으로 확산됐고 90년대 중반 이후 대부분의 전통적인 소남모델 대신 민영기업과 주식합작제, 외자기업을 중심으로 한 ‘신소남모델’의 시대를 열었다. 장자강(張家港), 창수(常熟), 타이창(太倉) 등과 더불어 창장 삼각주의 ‘네 마리 용’으로도 불리는 장인지역에는 현재 13개의 상장기업이 있는데 이는 중국 현급 도시 중에서 가장 많은 수다.
“실질적으로는 99%가 이미 향진집체기업 방식을 포기하고 민영기업이나 주식합작제, 외자기업과의 합자로 전환했다. 이곳에서 향진집체기업은 더 이상 얘깃거리가 안 된다”고 말하는 우시 노동부의 한 관리는 현재 장쑤성 경제는 전통적인 향진집체기업과 노동집약형 산업 대신 하이테크를 중심으로 산업 구조조정을 하고 있으며, 우수한 인재 유치를 위해 중국 내에서 최초로 호구제도(농촌인구의 도시유입을 금지할 목적으로 만든 인구관리제도)를 폐지하는 혁신을 단행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소남모델의 변화와 조정은 현재 장인지방을 비롯하여 인접한 쑤저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90년대 중·후반 이후 쑤저우는 상하이에 이어 중국 최대의 외자기업 집중 투자지역이 되면서 ‘쑤저우 혁명’이라는 말과 함께 상하이-항저우-닝보로 연결되는 창장 삼각주 경제의 새로운 ‘진주’로 떠올랐다. 향진집체기업 중심이었던 소남모델은 이제 쑤저우 혁명으로 대표되는 외자기업의 새로운 기회의 땅이 되면서 바야흐로 새로운 소남모델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중국 경제학계에서는 외자기업이 발전의 중심이 된 신소남모델을 ‘닭을 빌려 달걀을 낳는’ 식의 경제발전 모델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저장성의 항저우와 더불어 가장 각광받는 관광지로 이름난 쑤저우는 중국 강남지방의 아름다운 정원과 수상가옥들이 어우러져 ‘동양의 베니스’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낭만적인 수상도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관광도시 쑤저우의 명성은 상하이를 위협하고 있는 창장 삼각주 내의 ‘떠오르는 태양’으로 더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상하이도 위협받는다
쑤저우 옛 시가지에서 20여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쑤저우 공업원은 전체 면적이 6800만평 정도로 한국의 삼성전자 수원단지의 약 150배에 해당하는 초대형 하이테크 생산단지다. 쑤저우 공업원은 크게 94년 싱가포르 정부와 합작하여 만든 ‘싱가포르 원구’와 쑤저우 시정부가 투자하여 만든 ‘쑤저우 신구’로 나뉘는데, 그 안에는 미국·일본·대만·유럽 등의 세계적 외자기업이 500개 이상 들어서 있다. 또 공업원 안에는 공업원 내 직원을 위한 아파트와 학교, 병원, 오락시설 등 각종 편의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한국 기업으로는 삼성전자가 처음으로 95년에 쑤저우 공업원에 합자기업을 세웠다.
불과 1시간 거리에는 상하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있고 육로와 해로 등 모든 교통시설이 편리한데다 상하이의 절반밖에 안 되는 낮은 토지가격과 외자기업에 유리한 개발구 세수정책, 저렴하고 우수한 노동력 등으로 인해 최근 들어 선전, 광저우 등 주장 삼각주 지역에 있던 많은 외자기업들이 이곳 창장 삼각주 내 쑤저우 공업원으로 ‘북상’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대만의 정보통신 업체들이 최근 몇년 사이 대거 쑤저우 공업원으로 몰리고 있는 현상은 쑤저우의 경쟁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때문에 외자기업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는 인접도시 상하이가 최근 급부상하는 쑤저우에 강한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러한 위기는 얼마 전 실제 현실로 나타났다. 지난 5월 말, 상하이시가 무려 1년 동안 투자유치를 진행해온 세계 6위의 반도체 회사인 인피니온테크놀로지스의 유치계획을 쑤저우 공업원에 뺏기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