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의 황망한 죽음, 어느덧 50년
역도산이 샤프 형제를 일본으로 불러들여 일본 최초의 국제 프로레슬링 경기를 개최한 것은 1954년 2월 19일이었다. 역도산은 ‘일본 유도의 귀신’으로 불리던 기무라 마사히코와 태그매치 조를 이뤄 샤프 형제를 상대했다. 역도산이 주특기인 가라테 촙으로 2m 가까운 거구의 백인 형제를 압도하는 모습에 일본인들의 입에서는 환호와 탄성이 터져나왔다.유도와 스모의 승자를 가리는 대결도 승리해당시 일본은 TV 본방송이 시작된 지 6개월밖에 안 된 때여서 사람들은 길거리 전파상에 설치된 220여 대의 TV를 보며 역도산을 응원했다. 신바시역 앞에 설치된 TV 앞에는 2만여 명이 운집했다. 그들은 길거리 TV를 보며 때로는 탄식하고 때로는 환호하며 역도산을 응원했다. 일본의 TV 보급은 프로레슬링의 인기에 힘입어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김일은 도쿄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요코하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강제송환을 기다리던 중 “제자가 되고 싶다”고 역도산에게 편지를 썼다. 주소를 몰라 겉봉에 ‘도쿄 역도산’이라고 썼는데도 편지는 역도산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역도산은 일본에서 천황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김일은 수감 4개월만인 1957년 2월 석방되었다. 역도산이 손을 쓴 덕분이었다.김일은 역도산 도장 문하생 제1기 제자로 입문을 했다. 1년 뒤 10살 아래 안토니오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도 역도산의 제자가 되었다. 훈련은 온몸이 매일 상처투성이가 될 정도로 힘들었다. 몸에 난 상처 때문에 병원에서 상처 부위를 꿰메고 돌아오면 역도산은 그 상처 부위를 다시 때려서 피가 터지도록 만들곤 했다. 일본의 전설적인 장사의 이름에서 딴 김일의 일본식 이름 오키 긴타로도 역도산이 지어준 이름이었다.역도산은 북한에서도 영웅역도산의 마지막 목표는 세계 최강 루테즈였다. 수차례의 도전에도 번번이 졌던 역도산은 1958년 8월 미국 LA에서 당시 NWA(전미레슬링협회) 챔피언인 루테즈를 마침내 쓰러뜨려 NWA 인터내셔널 선수권을 차지했다.1963년 1월 역도산은 전격적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북한도 방문을 요청하고 있어 북한을 고향으로 둔 그로서는 민감한 방한이었다. 역도산은 판문점에서 외투와 셔츠를 벗어버리고 "형님" 하고 울부짖었다.사실 역도산은 고향을 떠난 후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 1942년 6월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스모선수 위문단의 일원으로 만주를 방문할 때 고향에 들른 적이 있고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어머니를 뵙기 위해 방문했다. 1942년 고향을 방문했을 때는 부부의 연을 맺어 이듬해 딸(김영숙)이 태어났다. 딸의 남편이 북한의 전 체육상 박명철이다. 박명철은 장성택의 최측근으로 꼽혀 앞으로 북한에 ‘피 바람’이 불면 희생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역도산은 1961년 11월에도 일본과 북한을 오가는 북송선을 타고 일본에 온 딸과 배에서 상봉했다.역도산은 북한에서도 영웅이었다. 김일성은 역도산에 대해 3번이나 교시를 내릴 정도로 역도산에 관심이 많았다. 역도산이 죽고 8년이 지난 1971년 3월에는 열사증을 딸에게 수여했다. 열사증은 고인이 된 조국의 영웅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역도산은 1962년 김일성의 생일 선물로 벤츠를 선물했다.수술 잘못이 부른 39살의 허망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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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