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숨결 삼랑진 작원관
임진왜란 당시 지역 민
관군이 왜병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직한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 작원관 이 일대는 천태산 낙동강변의 낭떠러지로 무성한 대나무 숲속에 임진왜란의 아픈 흔적을 담은 ‘작원관문기지’라는 비석만 초라하게 남아 세인들의 기억속에 잊혀져 있었다.
작원관은 경남 양산과 밀양의 경계지점에 있던 요새였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고려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산이 높아 날짐승만 넘나들 수 있다 하여 까치 작(鵲)자를 따오고, 관원이 쉬어가던 역원(驛院)이 있어 원(院)자를 취했으며, 관문의 기능을 갖추었던 곳이라 이 일대 권역이 작원관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또 호국영령을 기리는 위령탑도 세워 그들의 숭고한 애국 정신을 배우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토록 했다.
동국여지승람과 밀주승람 등의 기록에 의하면 작원의 관문은 한남문과 공운루로 남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왜적을 방어한다는 국방 결의가 내포돼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기위해 선혈을 뿌렸던 곳이 어디 작원관 뿐이랴. 그런데도 밀양 작원관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는 이 곳이 부산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 때문.
1592년 임진년 4월. 동래산성을 함락시킨 소서행장의 왜병 제1군 1만8천7백명이 부장 마쯔우라의 지휘로 한양으로 향하는 주 진격로를 확보하기 위해 조총을 앞세워 작원관을 공격해 왔다.
당시 이 곳을 방어하던 밀양부사 박진을 비롯한 군관 이대수, 김효우 등이 민병과 함께 분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300여명이 목숨을 잃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밀양인의 정절을 대표하는 전설속의 인물인 아랑(阿郞)의 제일이 음력 4월 16일인 것과 작원관 전투에서 전사한 장졸들의 기일이 같아 앞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한 연구도 깊이 있게 다뤄볼만 한 것 같다.
시가 작원관을 복원한데는 박수를 보내지만 복원된 한남문과 공운루의 편액을 관문과 역원을 비롯한 나루터 전체 권역을 뜻하는 작원관으로 잘못 편액해 놓은 것은 빠른 시일내 시정돼야 할 것이다.
또 일제가 철도를 부설하면서 관문을 파괴한 자리를 확인할 수 있도록 세운 작원관문기지 석비(높이 104㎝, 가로 46㎝, 폭 17㎝)를 복원한 작원관안으로 옮기는 바람에 관문의 본래 위치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만큼 안내도라도 설치하면 이해를 돕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삼랑진에서 양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안태마을에서 작원관으로 진입하는 도로도 시급히 정비돼야 한다. 4㎞ 전방인 삼랑진읍내에만 표시돼 있는 이정표는 양수발전소 입구 안태마을에도 세워 관광객의 편의를 돕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작원관 복원이 마무리된 만큼 밀양시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이곳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 호연지기를 키울 수 있는 장으로 십분 활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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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람?찬 하루....알뜰살뜰..즐겁게 보냈그만요.....만수산장과 음식들이......쩌~~ㅂ...^^
함께하지못해 죄송합니다.
미안슴다ㅜ.ㅜ
같이 못가서 ㅜ.ㅜ
하루종일 집에 있었는데 ㅜㅜ; 이렇게 즐거운 하루를... 문수 계획 잡는거나 시루봉 가는거나 비슷할거 같은데 겨울에 시루봉 한번 더 가야 겠네요...^^;
등반에 한창 물 올라있는 마깡 후배님들 뫼시고 갔다가 날이 추워 등반 안되면 엄청나게 실망할까봐 점조직으로 움직였다..이젠 한겨울에도 등반되는걸 확인했으니 담엔 소문내고 가꾸마..^^
처음가본 시루봉 정말 경치한번 죽입니다. 열시미 줄 걸어준 정희 선배님. 언제나 날렵한 몸매 희정 선배님. 역시 마깡21기 정일씨. 즐거운 하루였고 모처럼 오신 손님들을 대접이 소홀해서 영 ...마음이....
흐미...만수산장 사장님~소홀했다니요? 말도 안됩니다...얼마나 잘 묵고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