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계시록!(17) : 하늘이 고요할 때에도!”
+ 본 문 : 요한계시록 8장 1절 - 13절 (신약 406쪽)
1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간쯤 고요하더니
2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6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9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10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 샘에 떨어지니
11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
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아멘!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말 저런 말 참으로 많은 말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말 저런 말 참으로 많은 말들을 들으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그 말들로 인하여 사는 게 행복해 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많은 말들로 인하여서, 깊은 상처를 가슴에 안기도 하고, 죽고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살아가다 보면, 말로 어찌할 수 없는 일로, 침묵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내 가까이 있기는 하는데, 나와 그 사이에 아무 말이 없는 대상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침묵 때문에 어떤 때는 큰 용기를 얻기도 하고,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말 없는 침묵 때문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두려운 마음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의 침묵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침묵도 아닌 하나님의 침묵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침묵 앞에 우리는 여러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그럴 수 있느냐고 항의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믿음이 있으신 분들은 하나님의 침묵에도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믿고 기다리기도 합니다.
일본의 작가인 엔도 슈사꾸라는 사람이 지은 “침묵” 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어떤 젊은 신부가 스승인 신부가 일본에 선교 활동을 하다가, 배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스승이 배교하였다는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 젊은 신부가 몰래 일본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발각이 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그렇게 체포되어 심문 받는 가운데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분노하면서 스승에게 퍼부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왜 배교하셨습니까?”
그때에 나이가 많은 스승 신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끓은 기름 가마 속에서 성도들의 비명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이들을 구하기 위하여서, 나는 성도들과 밤이 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와주시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그래서 나는 죄 없는 성도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배교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을 들은 젊은 신부도 스승과 같이 배교를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배교하는 의식은, 예수님의 초상화가 그려진 성화를 발로 밟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젊은 신부는 눈물을 머금고 예수님의 초상화를 발로 밟고 지나갑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늘 밟혀왔다.” - 그 주님의 음성에 젊은 신부가 소리칩니다.
“주님! 어찌하여 우리의 고통에 침묵하셨습니까? 성도들이 끓는 기름 가마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주님은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하면서 그 젊은 신부가 절규하며 하나님께 항변하는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삶을 살아오면서,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을 하지 않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였습니까? 나를 모함하는 사람은 승승장구하는데, 아무런 잘못이 없는 나는 언제나 패배하고,
잘 믿어보려고 애를 쓰는 나는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는데, 대충 믿는 사람들은 아무 일 없이 잘 살고,
그런 그들이 비웃듯 조롱합니다. “왜 그렇게 광신자처럼 믿느냐? 그런 너보다 내가 더 잘 되지 않느냐?”
그렇게 고통당하고 힘든 삶의 길을 걸어왔을 때,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으셨습니까?
세속적인 방법으로, 불의한 방법으로, 잘못된 방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잘도 성공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실까?” - 저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실까?” 라는 질문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 분이신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 라는 불신앙의 단계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하박국 1장 13절에 보면, 하박국 선지자가 우리 대신 하나님을 향하여 이런 항변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이 항변이 오늘 우리의 항변 아닙니까? 때로 우리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아도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을 보면서도 그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목회하는 저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원치 않는 일들을 보면서 그렇게 절규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영적으로, 문화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렇게 탄식할 때가 많습니다.
저 이북에 들어선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정권과, 지하교회 성도들과 순교자들을 보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심정으로 갈등하고 고민하고 절망하고 있는 하박국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환난 속에 죽으라고,
가만히 계시고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절망하다가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그래서 불신앙으로 가라고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고,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8장 말씀의 배경은, 로마 교회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로마의 핍박 때문에 문이 다 닫혀버렸습니다. 찬송소리도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많은 성도들이 원형극장에 끌려가 사자의 밥이 되고 있습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순교했습니다.
성도들이 어찌 할 수 없어서 지하의 무덤인 카타콤에 들어가서 거기서 숨어 지내며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그렇게 생활합니다. 시체들과 함께 생활하는 비참한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런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로마의 권력은 점점 더 승승장구하고, “팍스 로마! - 모든 평회는 로마로부터!” 라는 슬로건을 걸고,
로마는 전인하게 더 많은 식민지를, 점점 더 확장해 가면서, 로마는 더 큰 제국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탄압은 더 심해져 성도들은 순교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은 지하무덤으로 숨어들어 갑니다.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왜 침묵하시는 것입니까? 왜 가만히 계시고 왜 침묵하십니까?
오늘 본문 1절에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간쯤 고요하더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반시간 쯤” 이라는 말씀은, 30분을 말한다기보다는 매우 짧은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하나님의 큰 심판이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그 순간은 바로 하늘이 고요해 지는 시간입니다. 그 짧은 시간이 바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씀을 계속해서 보면, 일곱 나팔 재앙이 이 땅에 임재하여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이,
이미 앞으로 계획이 되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나팔을 불어서 큰 심판이 이루어지는 상황과,
여섯째 인이 다 떼어지고 마침내 일곱째 인을 떼는 그 순간, 그 짧은 시간 하나님은 고요히 계십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하늘이 고요해졌다. 하나님이 침묵 하셨다.” 라는 말씀으로 연결되어져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시간 동안을 고요히 계셨을까요? 왜 저 핍박하는 로마의 세력들을 부셔 버리는,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악의 무리 앞에 잠잠하셨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걸 아십시오. 하나님께서 고요하게 계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환난과 핍박 가운데 무너져 하나님 믿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사랑하셨습니다만,
오늘 본문의 반시간쯤의 고요는 그냥 고요함이 아닙니다. 홍해를 가르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의 역사로,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는 시간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으시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멘! -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일곱째 인을 떼시고, 바로 일곱째 나팔을 불어버리면 이 땅은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이에 조용한 시간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시간입니다.
마치 둘째 아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말없이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데 무엇을 기다리는 시간입니까?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 2절입니다.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아멘!
여기 일곱 나팔을 받았다는 말씀은, 이미 일곱 나팔의 엄청난 재앙이 일어나기 직전이라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일곱 나팔을 불면 더 이상 자비와 긍휼과 사랑의 시간이 없습니다. 끝장입니다.
그 때까지 사랑과 은혜의 기회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 때까지 우리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해야 됩니다. 구원받아야 합니다. 축복받아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기쁘고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적극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시간입니다.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주의 이름을 증거 하여 천국백성이 되게 하는 시간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회개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가룟 유다와 똑같은 멸망의 운명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하여 구원받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만약에 회개했다면, 베드로처럼 용서받고 주님이 쓰시는 귀한 일꾼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하여 용서받고 일꾼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를 바라보면 반시간쯤의 고요한 시간입니다. 개인의 삶에 고요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하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안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구원의 복음, 예수님을 믿어 멸망하지 않고 영생 얻는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이 고요한 시간에,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시간인 줄 알고,
회개하고, 그리고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데, 이때에 빠뜨리지 않아야 될 덕목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을 다시 한 번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아멘!
이 일곱 나팔을 불기 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고요한 시간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기도가 성소에서 향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처럼, 하나님이 받으시는 일입니다.
로마 정부의 엄청난 박해를 받으면서도 성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교회 문은 닫히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지하무덤 카타콤에서 울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밧모 섬에 유배를 간 요한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걸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일 것입니다.
하나는 그 기도가 자기 정욕에 쓰려고, 욕심으로 구하는 잘못된 기도를 드렸기 때문일 경우이거나,
또 하나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바른 기도라면,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내 대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를 이어 2대, 3대를 거쳐서라도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고요하게 계신 때에라도, 하나님이 반시간쯤 침묵하실 때에라도,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로마교회 교인들처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기도 드려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드려야 됩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두 사람이란 말씀은 물론 두 사람 이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교회 공동체의 합심기도, 중보기도, 통성기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며 고요하게 계실 때에라도,
핍박과 환난의 비바람이 몰아 칠 때도,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빨리 응답되어질 수도 있고, 늦게 응답 되어질 수 있다는 시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기도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교회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와 말씀입니다.
우리가 파괴되어지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은, 예배와 기도와 말씀회복에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는 이것이 중심이 되는 목회아어야 하고, 성도들은 이것에 더 열심을 다 해야 됩니다.
우리교회와 성도들이 다른 것을 다 못해도 좋습니다. 예배와 기도와 말씀의 열심으로 회복되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와 기도와 말씀이 회복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면,
영혼이 잘 되고,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형통하고, 육신도 치유받고 회복되어 강건하여지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영혼이 잘 된 성도들은 나아가 영혼구원을 위해 전도하게 되고, 교회는 부흥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가 살아나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시간 성령의 임재와 성령 충만이 있어 뜨거워져야 합니다.
기도가 뜨겁게 살아나야 합니다. 기도한 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도하면 귀신이 나가야 합니다.
기도하면 치유가 일어나야 합니다. 기도하면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이 살아나야 합니다. 성경속의 기적과 축복과 기적이 일어나고, 우리 삶 속에 역사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5절 말씀에 보면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우리 성도들의 신음과 눈물과 고통과 아픔 때문에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이 다 들으시고, 그 기도의 결과로 악한 자들을 심판으로 벌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대로 핍박받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로마를 심판하사 멸망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핍박하는 로마는 기독교 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세계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도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더 큰 능력으로 역사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영적인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시므로, 소망 중에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얼마나 힘들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배를 받고 계십니다. 기도응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잘 드리는 예배 성공자로 살아가시고, 기도응답이 될 때까지 끝까지 기도하시고,
깊은 기도를 드림으로 기도응답의 기적과 축복으로 살고, 말씀의 능력으로 복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영생 얻는 생명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시기를,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